[eBook]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그래디 헨드릭스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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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차마 밤에 읽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읽는 무서운 이야기라. 중반쯤 읽고 이후의 이야기(조금은 짐작되지만)가 궁금해 아침에 눈뜨자마자 펼쳤다. 그리고 방금 끝. 뱀파이어. 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 문득 뱀파이어의 기원이 더 궁금해졌고 어째서 세상에는 이렇게 뱀파이어 이야기가 넘쳐나는가,를 생각한다. 자주 보게 되면 으레 그것이 존재하리라 믿게 된다. 사실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게 이 세상 아닌가. 그래서인가보다. 끊임없이 뱀파이어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는 것은. 소설의 결말이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대략의 줄거리조차 소개하지 않겠다. 자고로 이런 소설은 내용을 이야기해버리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는 짚어야 하는데, 스포일러 역할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중반의 빈 시간이 이해되지 않는다. 퍼트리샤는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또 안일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신경을 끄는 게 가능한 일인지.(방도 안전한 공간이 아닌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긴,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면 대처할 방법을 모르고 헤매는 게 사람이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믿을 만한 상황과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친구도 외면한다는 또다른 진실 앞에서, 주장하는 자가 증거까지 갖다바쳐야 하는 뭣같은 상황이 뻔히 일어나는 현실, 증거가 있어도 피해를 입은 자의 취약한 위치 때문에 믿어주지 않는 현실이 겹쳐진다. 멀쩡한 아내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남편(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집에서 밥하고 빨래나 하는 존재(존재라고 인식하는지조차 모르겠지만)로 취급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이 외에도 많은 부분이 현실을 반영한다.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젠더 차별, 차별, 차별, 차별들과 보이지 않는 노동들. 만약 주인공이 '그린 부인'이었다면, 소설은 어떻게 될까? 흑인여성한부모인 그린 부인은(이름도 벌써 그린 부인이야) 그의 자리에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일어난 사건조차 무마시키는 경찰의 힘을 믿을 수도, 연대를 형성해 단체행동을 할 수도 없을 텐데. '미스 메리'를 돌보고 보호하려 했던 사람도 그린 부인이고 아이들을 지키고자 자료를 모은 것도 그린 부인이고 최소한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려고 피신시킨 것도 그린 부인이고 결정적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는 실마리를 쥔 인물도 그린 부인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백인중산층여성들의 북클럽' 이야기지만, 알고 보면 그린 부인의 이야기? 그렇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으나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할란다. 독자의 권리.^^ (흑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아마 안 읽을 거 같다.ㅠㅠ 이야기 속 죽는 아이들을 보면 거의 다 흑인아이들이고 '주요' 백인아이들은 어쨌거나 살아남는다... 성인 중 죽는 사람의 다수가 여성이다... 어찌 보면 '백인여성의 모성애 쩌는 생존서사'로도 읽힐 듯...) 


책의 말미에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다. 책들의 목록은 물론이고 부록처럼 실린 편지도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살인사건 뒷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그리고 독서토론을 위한 질문들도 있다. 맨 마지막, 뱀파이어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치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고 보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결말이 상쾌통쾌유쾌하기는커녕 찝찝하고 괴로웠다. 소설 곳곳에서 불편했다. 작가가 이것을 노렸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 너무 좋아요 기대 이상이에요 팔을 치켜들고 환호를 보낼 수는 없다. 그럼 뭘 어쩌라고? 그건 뱀파이어 소설을 쓸 작가들에게 달렸지롱.


이 책이 주는 표면적 교훈이라면? 북클럽을 만들어라. 어느 한 분야를 파라.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면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있으리니. 북클럽 멤버는 신중하게 결정하라. 남자는... 안 된다.(남자들은 '말이 너무 많고' '쉽게 돈의 권력에 넘어가며' '가정에서도 이중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쓰면 또 일반화한다고 뭇매를 맞을라나. 소설이 말하는 바가 그렇습니다... 


이 지점에서 묻는다. 과연 이것은 뱀파이어 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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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06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 뱀파이어란 존재가 너무 기분나쁘고 불쾌했어요. 정체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좀 더 비중있게 그린부인의 시각과 활약편이 나오면 좋겠어요. ~

난티나무 2022-01-07 01:04   좋아요 1 | URL
제가 글에 덧붙이려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만 안 쓰고 올려버렸네요. 책 속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가 지금 전세계에 너무 많습니다. 피만 안 빨지 사람을 족족 빨아먹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ㅠㅠ 하아….
저도 그린 부인 주인공 원츄합니다.^^

라로 2022-01-06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으려고 샀는데 무섭군요! 절대 밤에 안 읽는 것으로,,ㅠㅠ

난티나무 2022-01-07 01:05   좋아요 1 | URL
아 뭐 그렇게 무섭…지 않다고 하기엔 좀 무섭고… ㅎㅎㅎ 암튼 저는 밤에 보면 악몽 꿀까 봐 되도록 안 봐요.^^;;
 
여성과 광기
필리스 체슬러 지음, 임옥희 옮김 / 위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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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모든 것이 '성적 기준'에 의해 재단되는 세상,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는 그러한 기준이 여성의 정신질환과 의료기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낱낱이 까발린다. 모든 것이 '성적 기준'에 의해 재단된다는 말은, 여성인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또는 하지 않든, '그것은 당신이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항상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기처럼 사회에 퍼져있는 편견에 따라 조금이라도 그 '여성적인 잣대'에서 벗어나면 마땅히! 비난이 따라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가, 정신질환이 없다 하더라도 이런 꼬리표 지나치게 친근하지 않은가. 목소리를 높이면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일, 말해 뭐하나. 

(사족 : 네이버에서 '미치다'를 검색하면 사전의 예문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전쟁 통에 어린 자식을 잃고는 끝내 미치고 말았다." 미치는 사람이 여성이다. 미치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더하여 모성을 극대화했다. '그는 전쟁 통에 어린 자식을 잃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는 문장은 예로 들 만큼 흔하지 않고 예문보다 확실히 '덜 일반적'이다. 남편들은 속을 알 수 없는 묵묵함을 지키며 그저 옆에 있거나 혹은 아예 없다. 이런 예문도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모성 신화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나? 우리가 '미친년'이라는 단어에 곧장 '귀 옆에 꽃을 꽂은 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낱말 풀이를 볼 때마다 찜찜하다. 언어는 무서운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정신질환'이라는 것에 대해(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다시 생각했다. 옛날에도 존재했던 증상들을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규정짓고 틀을 만들어 집어넣게 된 것, 거의 모든 의/과학 연구가 그렇듯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이나 조사/연구는 없다시피 했으며 늘 기본값은 남성이었다는 것. 거기에 더해 병원에서의 심리치료 역시 가부장적 존재인 남성의사/치료사에 의해 여성환자들을 성적 대상화한다는 사실에 대해. 나랑 성관계 하면 니 증상이 낫는다? 이런 개소리를(개야 미안) 늘어놓는 자들이 의사라고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릴 적 살던 도시의 한 병원을 떠올린다. 병원 앞에 가본 적 없고 정확히 주소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거기 어디쯤, 도시의 상징물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정신병원'. 실체 없이 느끼던 두려움. 흐릿한 기억에 엄마가 거기 다녀왔다는 말을 스쳐들었던 것 같다. 가야 겠다고 한 건지 다녀왔다고 한 건지 알 수는 없다. 연기 자욱한 기억 속에서 엄마와 '정신병원'은 그렇게 가늘고 희미하지만 긴 끈으로 이어져있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엄마가 병원에 갔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고도 남을 상황 속에서 그래도 '정신병원'은 무서웠다. '미친 사람들'이 가는 곳이고 '위험한' 곳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미쳤을까. 나도 미쳤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치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우리는 정말, '미치지' 않은 걸까? 


억울한 여자들, 감옥과도 같은 곳에 갇혀서 연명하다가 죽은 여자들, 난도질당하고 짓밟힌 여자들, 집에서, 거리에서, 병원에서, 알 수 없는 곳에서, 넘어지고 다치고 죽는 여자들. 심각한 사태를 정확히 보자. 정확히 보게 만들자. 치우치고 숨겨지고 뻔뻔한 모든 기준들을 다시 보게 만들자. 한 명이 말하고 백 명이 말하고 천 명이 말하고 천만 명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더디더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ㅠㅠ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이 많은 밑줄들을 어떻게 다 옮길 것인가 생각하다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 문장 한 문장 다 읽는 수밖에 없다. 그냥 읽으세요. 


+ 지금 나의 여기에서 방향을 잡을 몇 문장들 :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가부장제의 혐오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계'를 유지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528) "여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여성들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연민을 느껴야 한다. 여성은 세계를 '구하기'에 앞서, 남편과 아들을 '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과 딸을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528) 


옳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집착을 버릴 것. 그리고 나는 우선 내 자신부터 구한다. 남편과 아들들은 저희가 알아서 구해지든 말든 할 것이다. 나는 나를 먼저 구하고,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내 딸이나 다름없을 조카들과 주변의 여자아이들을 구하기에 나선다. 그것을 목표로 한다. 



(* 또 사족 : 이번 달 시작도 가장 먼저, 완독도 가장 먼저, 거기에 <미괴오똑>까지 더해 읽었음에도 그럴 듯한(?) 리뷰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순간메모를 하지 않았으며 전체 내용정리를 하지 않았으며 <미괴오똑>을 읽으면서 그만 생각이 얽혀버렸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어본다. 어쨌든 그러니까 결국은 내 능력 부족이라는 말이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으나 그것을 요래요래 잘 엮고 짜는 능력이... 이 글에서 가장 핵심인 부분은 "그냥 읽으세요"가 되겠다. 이 말을 그저 두서없이 길게 늘여 쓴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러나 뭐라도 쓰긴 써야 겠고 그래서 일단 쓰기는 썼다. 항상 말일 전에 에라 모르겠다 모드가 된다. 와, 변명 쩔어.




"우리 시대 여성들은 '자유로운' 노예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굴종을 선택한다.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너무나 쉽게 '홀딱 빠져들도록' 배워왔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손 치더라도 분명하게 생각할 수 없다. 하데스(또는 제우스나 디오니소스)는 딸이자 처녀인 페르세포네를 그녀의 어머니인 데메테르 여신으로부터 빼앗아왔다. 수 세기 동안 가족들은 이와 같은 작별을 해왔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여성들도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그 길을 따라 허둥지둥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간다." (135) 


"개별적으로 치료를 받고 공개적으로 입원을 한,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대다수 20세기 여성들은 미친 것이 아니다. 플라스, 웨스트, 피츠제럴드, 패커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단히 불행하고 자기파괴적이며 경제적으로 무력하고 성적으로 불능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간주되지 않았던가. 우리 문화에서 정말로 미친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그와 같은 경험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제거해버린다. 광기는 차단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며 잔혹하게 취급당하고 부정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남성들과 정치하고가 과학 - 그 자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본보기 - 은 비이성적인 것, 즉 무의식적인 사건이나 집단적인 역사의 의미에 다가가거나 접촉하려고 하지 않는다." (139) 


"대부분의 임상의들은 여성의 성적 자기규정에 필요한 사회정치적(심리적) 조건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남성들이 생산과 재생산의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결코 성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또는 성적 쾌락을 위한 그들의 능력)을 경제적인 생존 및 모성과 맞바꾸어왔다. 익히 알다시피 여성의 불감증은 그와 같은 맞교환이 없어져야만 없어질 것이다. 매춘, 강간, 가부장적인 결혼이 혼외 임신, 강요된 모성, 비모성적인 부성, 나이 든 여성의 성적 박탈과 같은 개념(관행)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 한, 여성들은 '성적'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의 불감증은, 여자아이들이 불감증을 겪지 않고 있는 여자 어른에게 돌봄을 받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랄 때 없어지게 될 것이다." (168) 


"'광기'라는 것은, 남자에게 나타나든 여자에게 나타나든 간에, 과소평가된 여성 역할을 수행하거나 혹은 개인에게 부과된 상투적인 성역할을 총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조건화된 여성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하는 여성들은 임상적으로 '신경증적'이거나 '정신병적'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들이 입원당하는 것은 우울증, 자살 시도, 불안신경증, 편집증, 식이장애, 자해 또는 난잡한 성교 등과 같은, 대체로 여성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거나 혹은 이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성은 자신뿐 아니라 사회를 경악하게 하는 만큼, 그들에 대한 추방과 자기파괴는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다. 이런 여성들은 또한 '정신질환적'이라고 분류된다. 이들이 만약 입원을 한다면 정신분열증, 동성애, 난잡한 성교 등과 같이 비교적 덜 여성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불감증과 마찬가지로 난잡한 성교는 '여성적인' 동시에 '비여성적인' 특징이다. 단지 한쪽은 '여성성'으로 도피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여성성'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82) 


"우리 문화의 정신건강 윤리는 남성적이다. 이와 같이 성별에 따라 정신건강에 관해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탓에 인간의 정신건강에 관해서는 오로지 남성적 기준만이 존재하고, 이는 사회와 의사 모두에 의해 강화된다. ... 남자아이들의 '공격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이유는 가부장제가 그들이 좀 더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성성'을 실천하도록 원하기 떄문이다." (199) 


"중요한 것은 학문(예술)을 하는 남자들은 찰나적이고 낭만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여성 주체와 자신을 강력하게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제정신은 두 다리 사이에 단단히 정박해 있기 때문이다." (210) 


"심리치료와 결혼 제도는 서로를 되비추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를 지탱한다." (253) 


"전통적으로 심리치료사는 여성 억압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해왔다. 여성 환자는 아직까지 남편이나 치료사와 '진정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는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255~256) 


"여성은 스스로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당한다. 여성의 순종적이고 타협적이며 동정적이고 유혹적인 행동의 대부분은 강간의 책임이나 강간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강간은 근대 산업자본주의 시대 훨씬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것은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의 직접적인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모멸을 통해서야 비로소 쾌락이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위(또는 사회 체계)에 대한 적절한 은유로 보인다. 아는 이성에 의한 강간과 임신이라는 생물학적인 사실과 의미가 가부장제 가족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었다고 믿는다. 남성들이 자신의 유전적 불멸성을 증명하려는 욕구 또한 주요 요인이었다. 이러한 욕구가 너무 강렬해서 남성들은 자녀가 자신의 정자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당연히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고 여성의 자유를 제한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516) 


"의식이 기적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여성이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 가부장제를 물리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악조건에서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자유롭고 도덕적인 선택에 따라 폭력 행사를 거부하기 이전에 폭력이나 자기방어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517) 


"여성이 전혀 다른 더 나은 과학과 언어를 발견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이런 제도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공공 및 사회 제도를 점진적이고 근본적으로 장악해야 한다. 여기서 '장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남성들처럼 공공제도에서 우위를 점해본 경험이 없는 여성들로서는 '평등'이나 '개별성'만으로는 여성의 억압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26) 


"여성은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 많은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어떻게든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아 초점을 그처럼 급격하게 옮긴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모든 '여성적인' 신경과 감정이 날카롭게 자극되면서 심각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어떤 여성은 그처럼 급격하게 초점을 이동시킬 때 '미쳐'버린다."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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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30 08: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언급하신 528 인용은 저도 밑줄 그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필리스 체슬러가 말해줘서 너무 좋았어요!

난티나무 2021-12-30 14:58   좋아요 2 | URL
저도요. 이런 말 계속 해주는 사람 있어야 해요, 진짜. 자꾸 까먹을 수 있음! ^^;;;;;;

미미 2021-12-30 08: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미괴오똑 저도 그냥 읽을께요!!ㅋㅋ네이버 검색결과에 놀라서 다음에 검색해보니 네이버 왜이런거죠? 예문을 들어도 하필! 이 책을 읽으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을 볼 때 어쩐지 더 짠하고 애틋하더라고요.난티나무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난티나무 2021-12-30 15:03   좋아요 2 | URL
미미님 요즘 저도 여성들 볼 때의 심정이 그래요… 마음이 아파… 흑. 너무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다음에서 보니 속담이 또 가관이네요. 허허…. 아 진짜… (미친 녀편네 떡 퍼 돌리듯,이라는 속담…)
🙏🙏🙏

거리의화가 2021-12-30 0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crazy는 왜 유독 여성들에게 붙여지는가 항상 늘 불만이었는데 이 책 읽으면서 분노하기도 하고 일정 부분 해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밑줄이 너무 많아서 어느 순간 정리가 더 어려운 느낌이더라구요.
여성들이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말은 백번 천번 옳은 말입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먹고 일하고 싸우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난티나무 2021-12-30 15:09   좋아요 2 | URL
분노의 책이죠. 쓴 사람도 읽는 우리도! 저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여성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게 다른 사람을 위하고 먼저 생각하는 습성을 버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너무 몸에 배어버려서…ㅠㅠ 나를 위해 먹고 일하고 싸우고!!!! 👏👏👏

수이 2021-12-30 10: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괴오똑은 읽으신 분들 평이 다 좋더라구요. 저는 알 수 없는 거리감에 좀 이따 읽어야지 했는데 아무래도 여기저기 말씀을 하시니 읽어봐야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2022년에도 내내 함께 읽으면서 더 많은 생각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난티나무 2021-12-30 15:12   좋아요 3 | URL
미괴오똑 페이퍼라도 쓰고 싶은데 잘 될 지 모르겠어요. ㅎㅎ 생각이 많아져서…
함께 하는 2022년!! 😍😍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vita님~~~^^

수이 2021-12-30 15:17   좋아요 2 | URL
언니 요새 애교가 는 거 같아 ㅋㅋㅋㅋㅋㅋ 😘

난티나무 2021-12-30 15:30   좋아요 2 | URL
아니 제가요?@@ 그라믄 안 되는데…ㅋㅋㅋ 아아 사랑이 막 넘쳐흐르는가….. 좀 주워담아야 하겠다아… 쓰읍 😝😝😝

수이 2021-12-30 15:3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12-31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기 전에 <미괴오똑> 시작해서 아직 그 책은 조금 남아있는데 같이 읽기 잘한 것 같아요.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 책을 써내려간 저자의 강단과 통찰에 박수를 보내구요.
그 책을 힘들게 읽고 쓰는 우리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난티나무 2022-01-01 23:40   좋아요 1 | URL
박수를!!!!!!!
단발머리님 해피뉴이어!!!!!!! 편안한 1월 1일 밤 보내세요~~~~~^^

공쟝쟝 2022-01-04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더 읽으면서 임파워링합니다! 난티님 새해 복 많이받으세요 !

난티나무 2022-01-05 01:11   좋아요 1 | URL
임파워링!!!!!!! ❤️❤️❤️
공쟝쟝님도 복 많이 받으시길!! & 건강!

난티나무 2022-01-05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 글 다시 읽어보니 그냥 읽으세요, 의 대상은 여성과 광기인데 왜때문에 미괴오똑을 그냥 읽으신다고???ㅋㅋㅋ 😊😊😊 다 읽자!!!!
 
드립백 알라딘 블렌드 하프카프 - 10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2월
평점 :
절판


카페인에 약한 나에게 알맞은 커피라는 생각이 든다. 구매 후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질 않아 맛보기 전이지만, 하프카프,라는 말에 한껏 마음이 부푼다.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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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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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버리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사실 이런 내용인 줄 몰랐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또 울게 되겠구나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지금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 든다. 왜 아기(아이)를 '버리는(포기하는)' 사람은 늘 엄마인가? 아이의 입장에서 '버려졌다는' 이유로 부모를 특히 엄마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이 과연 일반적인 감정일까? 사정이나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편을 드는 건 아니다. 나라도 증오할 듯하다. 그런데, 어쨌거나 왜 '버리게' 되었는지 진실을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람은 이미 일어난 한 가지 일에 수만 가지 이유를 갖다붙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 이유가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할 길이 없어도 말이다. 어떻게 엄마가 돼서 아이를 버릴 수가 있어? 이 말은 또다른 '모성 신화' 때문은 아닌가? 


프랑스에 처음 와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마르고 키가 크고 말수가 없는 한 사람을 알았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자주 표정이 굳은 것처럼 보이던 그. 힘들었겠다, 어릴 때 고생했겠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 복잡하고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을 헤아려보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해외입양은 난해한 단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곳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른이 엄마 아빠로 부르라고 하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허구헌날 놀려대는 삶. 소설의 주인공 '나나'는 그런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슬픔과 분노와 증오가 얼룩진 그 감정의 강도를 알기는 어렵다. 이제 아주 조금 짐작할 수는 있을 것도 같다. 나도 이방인으로 살고 있지만 '버려진' 것이 아니고 설령 그것이 도피였다 할지라도 내 선택으로 여기 있으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식구들이 있으므로, 그 짐작은 어렴풋한 것이 될 테지만. 아이 학교에서 동양인이라고 놀림과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애가 닳았지만 절대 학교에 찾아가지 말라는 아이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기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게 하는지, 선택을 후회하며 자책했다. 외모만 조금 달라도 약자/타자가 되는 학교 안 세상이다. 어른들은 표 내지 않으려고 노력이나 하지. 아이들은, 좋게 말해준다면 솔직하다. 혐오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이 외모라는 조건에는 피부색, 인종과 더불어 순수혈통(?)이냐 아니냐도 들어간다. 엄마나 아빠가 프랑스인이 아니라면, 그 아이도 차별의 세계에 놓인다는 말이다. 백퍼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아이들은 학교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다. 친해지고 나면 인종 간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눈에는 늘 이방인. 그러니 오죽하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부모를 증오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어쩌면 그 증오심이 삶의 버팀목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나의 눈으로 천천히 짚어나가는 인물들의 역사는 슬프다. 그들은 착취당했고 당연히 힘도 없었으며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없었다. (이미 나온 '입양'이라는 단어 외에 소설 속의 여러 상황을 보여주는 단어들을 여기에 쓰면 그 단어들이 소설의 이미지를 규정지어버릴 것 같다...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글이 될 테지만 감수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의 존재를, 걱정한다. 그건 엄마가 될 '나나'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이 과연 둘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조차 커버해 줄 수 없는 삶, 나나는 우주를 지켜보는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 한편으론 복희의 두번째 엄마 연희를 어느 정도 이해할 듯하다. 이방인을 만드는 재주들이 너무도 탁월한 사회를 나라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고난은 개인이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 도망가서도 불행해야 하는 것일까?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지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삶은 더 나았을까?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등을 떠밀린 거라면,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심'은 어디까지가 진심인가. 진심은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상처받기 싫고 불안하기 싫어서 덮어놓고 다른 색으로 칠해놓은 것을 진심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믿고 싶은 마음, 그것을 진심이라고 말하는 마음. 소설 속 여자들의 마음은 '단순한 진심'이었을까. 그들이 만드는 확대가족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나 그 이면에는 질투와 인정욕구, 욕망 등도 동시에 존재한다. 일관성 있게 착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이방인, 결국 장소가 어디냐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생 최대의 난제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여전히 어렵다. 그 뒤에, 거기에서 멀리 있는, 여자들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괴로움이 있든 없든 삶은 계속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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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2-23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이 소설 가뭇가뭇 하지만 많이 울면서 읽었던 기억은 나네요. 뭐랄까.. 의외의 정말 의외의 소설 이었어요!

난티나무 2021-12-23 15:47   좋아요 2 | URL
되게 어려운 소설이었어요. 죽죽 읽히는데 생각은 막 얽히고… 아, 작가의 말에 나온 책 사야 하는데!!! 아! 또 책 사는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 되는데!!!!!^^;;;;;;

잠자냥 2021-12-23 15:52   좋아요 2 | URL
쟝쟝 증말 울었쪄? 나도 궁금하네.

라로 2021-12-2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고 싶게 만드시는 난티님!! 더불어 공쟝쟝님!! 하아~~~

난티나무 2021-12-28 04:30   좋아요 0 | URL
전자책 있죠 아마? ㅋㅋㅋㅋㅋ
 
제2의 성 2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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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열고 한참을 서성거린다. 희고 비어있는 공간, 어떤 글자들을 채워넣어야 할지 망설인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렇게 망설이다가 페이지를 닫았다. 안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야 한다,는 각오로 오늘도 페이지를 열고 한참을 서성거린다. 그동안 부분부분 부족하지만 페이퍼들을 썼으니 오늘은 책 전체에 대한 감상을 간략히 남기려 한다. 동서문화사의 <제 2의 성>은 1,2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리뷰도 실은 2개를 써야 하는데 1권의 리뷰도 페이퍼들로 대신하기로 한다.^^;;;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자유로운가. 자유를 지향하며 살고 있는가. 자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인가.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온몸으로 받고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답을 찾은 보부아르. 책을 읽는 내내 격정적으로 글을 써내려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느꼈다. 


1부는 솔직히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여자의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 밝혀내려는 작업이기에. 2부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실제로 1권과 2권을 들쳐본 페미니즘 초짜 옆지기는 2권부터 읽고 있다. (2권이 앞에 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태어나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는 2부는 여자의 삶을 모르는 남자들에게도 훌륭한 안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생각한 만큼 옆지기가 읽고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슬며시 가져본다. 


"여자는 자기를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로 있다." (879) 


너무 슬픈 말.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서 더 슬프다.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잃느냐에 따라 여자들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일까. 잃어버려야 '함'을 알면서 동시에 잃어버리기를 거부하는 여자는 '모호성'이 더 증폭하는 것 같다. 정도의 차이들. 싫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는 여자, 대충 끼워맞추고 잊어버리는 여자, 사소하게 언쟁하면서 스트레스를 축적하는 여자, 표출할 데가 없어 안으로 썩어가는 여자, 그래서 몸까지 아픈 여자, 들. 나, 나들. 수많은 나들. 

경제적 독립이 없이는 해방도 없다는 말에 무릎이 꺾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에(이노므 사회!) 슬그머니 희망을 다시 손에 쥐어보고. 쥐락펴락하시는 보부아르님.^^ 


길고 긴 본문이 끝나고 이어지는 해설 또한 양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갈피를 잃어 헤메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생애도 정리하고 있고 보부아르의 다른 저서들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하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을 것', '한 자리에서 썩어버리지 않을 것', '상대를 타자로서 인정할 것',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하기 위한 방법을 탐색할 것', '나만의 가치를 찾을 것', '존재로 존재하기'.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건져올린 생각들.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 내 생각과 생활에 반영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은 보람이 사라진다. 슬슬 도망가고 싶어질 때 다시 이 책을 손에 들 수도 있겠다. 다른 책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언제든 그 때가 되면 보부아르의 견해를 조금은 비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길게 자란 손톱이 키보드에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조금만 더 길면 두드리는 데 불편할 듯하다. 깎아야지, 다음 머리 감고 나서 잘라야지, 생각만 하면서 그 순간에도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을 손톱을 애써 무시한다. 아직 괜찮아, 아직은 걸리적거리지 않으니까, 곧 깎을 거니까. 마음에서 저도 모르게 솟아나는 '자유롭지 못한' 생각의 파편들, 삐죽삐죽 돋아나버린 열등감과 수동성, 끊임없이 자라는 내 손톱 같다. 적당한 때에 잘라주어야 하는 손톱마냥, 나를 부정하는 생각들을 잘라주어야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그렇게 나에게 손톱깎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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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01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가 경제적 독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지적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보부아르 결론 부분을 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읽은 이번에 개정판 을유 제2의 성에서는 제2의 성 발표후 20년이 지나도 세상이 바뀌지 않아 보부아르가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부아르가 더 궁금해졌어요. 보부아르 전기를 시작으로 보부아르의 다른 책들을 계속 보려고 해요.

책 읽는 거 너무 좋아요, 난티나무 님.
:)

난티나무 2021-11-01 17:20   좋아요 0 | URL
우리는 모두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걸까요? ㅠㅠ 1949 - 1969 - 2021 바뀐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많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는...
저도 전기 읽고 싶어져요. 다른 책들도요. 아 읽을 책이 많아랑~~~~~^^;;;;;; 깜냥은 안 되는데 가랑이 찢어질까 슬쩍 걱정되기도 합니다요.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11-0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문장 중에 879쪽 여자는 자기를 잃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이 문장 오늘 읽으니 엄청 가슴 아프게 읽히네요. 저도 정리해야 하는데 정리가 될지 모르겠어요. 함께 읽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11월 책도 같이 고고씽.

난티나무 2021-11-01 17:24   좋아요 0 | URL
ㅠㅠ 그쵸. 슬포..... (그래도 정리는 하셔야 합니데이.)
어제는 잠깐 무슨 프로그램 보는데 할머니들이 그림을 배우시더라고요. 지난 시절 잠깐 이야기하는데 저 분들도 다 잃어버리고 사셨구나, 그럼에도 얻은 건 무엇인가, 싶어서 같이 눙물이...ㅠㅠ
11월도!!!

단발머리 2021-11-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읽어서 너무 좋았어요, 난티나무님.
인용해주신 879쪽도 절절하고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게 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수고많으셨어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1-11-01 17:27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분 덕분에 읽기를 마칠 수 있었어요~^^
계속 같이 읽어요!ㅎㅎ

막시무스 2021-11-0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통해서 여성의 역사를 알고 느낄수 있었던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언급하신 자유에 대해 의미있는 고민을 해봤다는게 정말 좋았던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ㅎ

난티나무 2021-11-01 17:29   좋아요 1 | URL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죠. 막시무스님도 애쓰셨어요. 그리고 정말 잘 읽으셨어요~!^^

라로 2021-11-0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이 페이퍼와 지금 제가 읽고 있는 보부아르의 전기가 어떤지 맞물리면서 저도 곧 제2의 성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문단 비유 넘 좋아요!! 짱이에요, 난티님!!^^

난티나무 2021-11-01 17:31   좋아요 0 | URL
저도 나중에 전기 읽어보려고요.^^ 사르트르 이야기 좀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안 나올 수는 없고 참.ㅎㅎㅎ 손톱깎이!!!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1-1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분과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어 더 값진 시간이시겠습니다.저도 마지막 문단!!!!
앞으로 손톱 깎을 때마다 난티나무님의 글을 떠올리게 될 듯 합니다.
부정적 생각들을 정리를 잘하고 사는 삶도 발전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성들이 좀 더 지혜롭고 자유로운 세상이 왔으면 싶네요~
난티나무님의 생각들도 늘 곱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난티나무 2021-11-01 17:41   좋아요 1 | URL
악 어쩌죠. 손톱...ㅎㅎㅎㅎㅎ
남편과는 가끔 도란도란 자주 티격태격 때로는 침묵이...ㅋㅋㅋㅋㅋㅋ 에려워요.^^;;;
자만도 안 될 일이지만 자기비하도 안 될 일이니 늘 그 사이에서 중심 잡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실제로는 자주 비하 쪽에 서는 거 같아요. 내가 무슨, 내가 뭐라고,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들 말이죠.
이번에 책읽는나무님과 따로 또 함께 읽어서 좋았습니다. 댓글은 못 남겼지만...^^;; 앞으로 노력해야 겠다고 또 슬쩍 다짐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