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판으로 현재 한국의 친구들(프랑스어책읽기)과 함께 읽고 있는 책. 같은 책을 두 권 갖고 있지만 두번째 이야기들이 다르니 같으면서도 다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아래 사진 오른쪽 책으로 읽는 중. 두 권 동일하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실었고, 왼쪽 책에는 단편소설 하나가, 오른쪽 책에는 또다른 TED 강연이 실려 있다. (<우리는 모두...>도 TED 강연이었다.)


짧고 적확하고 쉽다. (TED 강연을 텍스트화한 것이고, 워낙에 말(글)이 명료하다.)

제목만 보고 거부감을 가질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맞는 말인 걸.)

스웨덴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책이라고 한다. (부럽다.)

프랑스에서는 나누어주지 않으니 내가 사서 아이들에게 읽혔다. (가격도 싸다. 2유로.)

이런 책은 가볍게 만들어 주저없이 사서 마구 뿌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작고 가벼운 판형으로 갱지를 써서 책을 만들면 좋겠다. (불가능하지 않은데 안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책의 내용보다 판형과 재질과 디자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아닐까 스물스물 드는 생각.(독자들이여 바뀌어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Nous sommes tous des féministes.(should be가 왜 sommes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devons être여야 하지 않나. 페미니스트여야 한다와 페미니스트이다의 차이.)  정말 그러합니다. 알게 되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페미니즘은 나쁜 게 아니라니깐요. 모두를 위한 것이죠. 당신을 짓밟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일단 한번 읽어봐~ 


[편협한 이야기의 위험] -> Le danger de l'histoire unique. 역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TED 강연을 텍스트화한 것이다. 앞부분 번역해 가며 읽는 중. 똑똑해. 빛이 난다. (l'histoire unique, 영어 원문 single story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S님이 답을. 단면 혹은 단편적인 이야기. 짱이야.)

강연 비디오를 찾아 들어도 좋다. 나는 아직 안 들었다. 그냥 글자로 먼저 읽고 싶다. 다 읽고 비디오 볼래. 이미지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더라고. 작년에 <헝거> 읽을 때 록산 게이의 테드 강연 비디오를 봤는데 책 읽는 내내 얼굴이 떠오르더라. 영상이 글자 읽기에 도움이 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그건 이미지를 보기 전에는 알아챌 수 없으니.

이미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젊은 작가들이 게스트 출연 많이 하고 있다. 아는 작가가 티브이에 나오니 반갑기는 한데 그것이 또 예능에 나와 말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그동안 책에서 쌓았던 작가의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지는 경험도 하게 되는지라... 시대가 변하면서 작가의 일상도 변해가는군 하는 중이다. 두문불출하면서 한우물 파던 시대는 버얼써 끝난 거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거지. 이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가 아닌가. 검색도 유튭으로 하는 세상이니 이미지 마케팅은 당연한 것인가.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 쪽의 작가들이 나와서 찌릿하게 만드는 말 한마디씩 하면 좋겠다. 편집에서 다 잘리려나.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예능은 예능인 거야.

잠시 샜다. 영어로 쓰여진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아주아주 어렵지만 아디치에 작가는 이런 나를 위해 어렵지 않은 문장들을 선사해 주었다. 쩔쩔 막히면 안 되는 영어문장도 보고 번역기도 돌려보고 사전도 찾고 우당탕탕. 프랑스어 문장들을 읽으면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당췌 한국말로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는 아주 난감한. 그럴 때 나는 그 문장들을 아는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80% 정도는 모르는 것이 아닐까. 뉘앙스를 눈치채는 일은 정확한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과 다르다. 아니 그리고 나는 왜! 찾아본 단어와 구절들을 자꾸 매번 계속 까먹는 거냐. 들어도 소용없고 적어도 소용없고 입으로 읊어도 소용없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다. 그래서 언어는 밖에 나가 사람들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슬프다. 책 이야기 하다가 자책하는 기술 또한 뛰어나군. 정신 건강을 위하여 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러니까, 음, 이제, 겨우 두어 페이지 읽었는데 이렇게 할 말이 많다고? 계속 이러길 바래. 책 한권 다 읽고도 한마디도 못하는 날은 우울해.

(TED 강연 영상 페이지 들어갔다가 텍스트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걸 알았다.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 아무튼, 한국어 번역이 나름 매끄럽다? 순간 프랑스어 번역하지 말고 여기서 긁을까 하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5초 정도 하다가 황급히 접었다. 공부하는 자세가 글러먹었어. 쯧.)




「스웨덴에서는 스웨덴여성로비, 스웨덴유엔연맹, 스웨덴노동조합연맹 등의 주도로 이 책의 스웨덴어판을 전국의 모든 16세 고등학생에게 배부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스웨덴여성로비의 회장 클라라 버글룬드는 “이 책은 학생들에게 주는 선물이자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에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스웨덴 정부는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 정부”라고 자부하며 세계에서 성평등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나가고 있는 정부로 손꼽힌다. 스웨덴은 현직 장관 24명 중 12명이 여성이며, 젠더 주류화를 정부의 핵심 의제로 삼고 있다. 미국 공영방송사 NPR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배포 소식을 전하면서, 이 프로젝트에 이의를 제기한 스웨덴인은 전혀 없었으며 심지어 한 칼럼니스트는 “페미니즘의 기치를 교육받고 자란 스웨덴 고등학생에게 이 책의 내용은 좀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고 전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성평등 국가인 스웨덴에서 모든 고등학생에게 이 책을 읽히기로 결정한 것은 이 책에서 전하는 ‘21세기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유효하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준다. 아디치에는 멋진 선물을 받게 된 스웨덴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저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 해야 한다, 할 수 없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남녀 모두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 남녀가 진정 평등한 세계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입니다. 16세 때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말뜻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스웨덴의 청소년들도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결정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세계가 진짜로 공정하고 평등해져,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 알라딘 책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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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5-01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줌마라는 이유만으로, 애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는 가능하고 -는 불가능하고 이런 제약을 스스로에게 두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습관이 무서운 건지 저도 모르게 딸아이한테 여자가 그러면 안돼 라고 할때 있어요. 입틀막이죠 -_-;;;;;;;; 반성합니다. 이 얇은 책이 주는 무게가 이렇게 클 줄 알지 못했어요. 읽지 않았다면 큰일날뻔.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락)

난티나무 2021-05-01 00:49   좋아요 0 | URL
저도 입틀막 가끔 합니다.^^;;; 입으로 나가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화들짝 할 때도 있고요. 왜 안 그렇겠어요...ㅠㅠ 얇은 책 많이많이 뿌리고 싶은데 제목 보고 안 펼칠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ㅎㅎㅎㅎㅎ 함께 읽기! 아자!

단발머리 2021-05-0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책이든 번역된 책이든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읽는 사람이 바로 저라서ㅠㅠㅠㅠ 번역의 고충 이야기하시는 거 듣다보니 새삼... 맞아, 아, 그래, 번역가들 진짜 힘들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또 혼란스럽고 헤매고 고민하는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정직한 공부법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더 열심히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싶은데, 이제 의지할 수 있는 번역은 딱 한 개 뿐이랍니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완벽 비매품이죠. 움하하하하하하핫!!!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해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1-05-02 21:53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뭐라고 할 말이....ㅎㅎㅎㅎㅎ 하겠다고 해놓고 하루만에 후회도 했어요.^^;;;
이거시 정말, 한국말로 뭐라고 써야 하나 고민되더라고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 실력에 관한 이야기이니 부담은 갖지 마시고요.ㅎㅎㅎ
저는 번역책 읽으면서 막 욕하면서 읽거든요. 번역이 이게 뭐냐고....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반성도 하지만 또 읽다 보면 그것이, 욕 안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3년 전. 

한국에서 내가 처방받은 약은 여성호르몬제였다. 산부인과 의사는 증상 몇 가지를 듣고는 빼박 갱년기라며 약을 처방했다. 그 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심장이 수시로 벌렁거리고 제멋대로 뛰는 느낌이었으며 어쩐지 안정이 되지 않아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긴 이야기가 있으나 너무 기니까 거두절미하고. 한국 가는 비행기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위에 탈이 났고 다음날 동네 내과에 갔었다. 한국의 병원 시스템을 잊어버리고 구구절절 며칠 간의 일을 이야기하며 증상을 설명하려 애쓴 나는 밖에 환자들 엄청 많다며 의사에게 호통을 들었지만, 다다음날 그 의사의 처방전을 본 산부인과 의사는 그가 명의라고 추켜세웠다. 처방전에는 신경안정제 반 알이 들어있었다. 힘이 너무 없어 링거를 꽂고 누워있던 나를 살피며 나이도 그렇고 혹시 모르니 다른 원인을 찾아보라고 권유한 것도 내과의사였다. 그는 나의 무엇을 보고 내가 불안한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을까? 

병원에서 처방받는 모든 약의 부작용을 알게 되면서 되도록 약을 먹지 않는 나는 한밤에 심장 때문에 잠이 깨는 일에 놀라서 호르몬제를 일주일 정도 먹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저혈당도 아니고 갱년기도 아니라는 것. 불안한 마음과 공포. 공황 초기. 지금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무엇이 그토록 불안했는지. 불안한 게 맞았는지. 그리고 공황증세가 맞는지도 사실. 어쨌든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내 아픔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호전에 영향을 미쳤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화가 났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공황증세는 마찬가지 이유로 갱년기 증세와 비슷하다. 증상 몇 가지만으로 덮어놓고 갱년기라 확신하고 무조건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자세. 왜 의심하지 않지? 그러다 문득, 알았다. 내과에서는 이전의 상황을 횡설수설 길게 늘어놓았었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간략히 증상 위주의 설명을 했다. 내 설명이 진단에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태도는 아직도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산부인과 의사와 내과의사는 모두 여성이었다. 


프랑스에서 우리 가족의 주치의(일반의)는 최근까지 13년 동안 나를 봐왔다. 7년여 전, 어느 날 된통 체했을 때였는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채로 병원을 찾았다. 인사를 하고 문 안으로 들어서는 나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의사가 말했다. 울고 싶은 얼굴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치솟았다. 그랬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 날 의사는 내게 한국에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떠냐고 권했고 그 말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한국으로의 혼여를 꿈꾸게 되었으며 실제로 몇 달 뒤 비행기를 탔다. 내 인생 최초로 혼여라 이름붙일 수 있는 여행이었다. 


한동안 병원 갈 일이 없었는데, 작년 말 편지 한 통이 왔다. 주치의가 병원을 닫았으니 다른 주치의를 찾아보라는. 표정만 보고 우울한 것을 눈치채주던 의사는 이제 거기에 없다. 나는 낯선 의사 앞에서 아픔을 늘어놓게 될 것이다. 나의 주치의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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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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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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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2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서 만나신 주치의. 그런 분 만나기 좀처럼 쉽지 않은데요.
아무래도 이윤추구에는 관심이 없어서 문을 닫았을까요.저도 이 책 읽으며 만났던 의사들 생각나더라구요.🤔

난티나무 2021-04-29 18:29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만나기 힘들지만 또 좋은 인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가져 봅니다. 주치의 그 분은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신 것 같아요. 원체 거구에다가 다리가 워낙 안 좋아 무릎 수술도 하셨거든요.

2021-04-29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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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1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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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2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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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2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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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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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2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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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0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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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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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고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저주


김명순


(1896~1951)

평양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가난하게 숨진 김명순은 소설가이자 시인, 언론인, 변역가, 영화배우다.

식민 통치하의 암울했던 사회 환경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활동하였다. 기생의 딸이라는 낙인, 성폭력 피해 그리고 문학으로 가장된 동료 문인들의 공격이 내내 잇따랐다.

당시 문란하고 독한 여자로 그려지기도 했던 김명순은 사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서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서양 문학을 조국에 선보인 번역가였고, 동시에 '자유연애'를 역설하며 여성해방을 꿈꾼 신여성이자 선각자였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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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분통이 터진다. 왜? 도대체 왜? 이유는 책에 있지만 계속 묻는다. 왜? 도대체 왜? 과격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과격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분통 터지는 사실들을 모조리 알고 나서 얼마나 절망했을까, 얼마나 암울했을까, 그러면서도 그걸 딛고 활동을 하려면 또 얼마나, 매일매일, 순간순간 힘이 들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뀌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왜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기 때문이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분통을 터트리고 잠시 동안 그 여파가 지속되지만, 책을 덮고 일어서서는 설거지를 하러 가거나 세탁기나 청소기를 돌리러 간다. 나처럼. 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는 아니니까, 내가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조차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책을 읽고 열을 내다가 밥을 하러 간다. 헐벗고 나오는 걸그룹 아이를 보며 열불을 내다 화장실 청소를 한다. 모든 여자 캐릭터를 벗기고 벗기고 벗기는 유치찬란뽕짝을 지나쳐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와 한바탕 언성을 높여 싸우다가도 다 돌아간 세탁기의 내용물을 꺼내러 간다. 건조기의 필터 먼지는 나만 치울 수 있는 것 같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테트리스 하는 일은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원래 잘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 해와서 손에 익었을 뿐이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몰랐다. 도표를 보고 그래프를 분석하는 일보다 매일 삼시세끼 무엇을 만들 것이며 그러려면 무엇을 언제 사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글자로 쓰지 않고도 머릿속에 착착 개어놓는 일이 처음부터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니었음을, 반복 학습된 것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으나 깨닫는 것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어렵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머리는 생각을 돌린다. 어제 저녁에 한 밥이 조금 남아 있을 테지. 점심은 뭘 먹지? 어제 점심에 라면으로 때웠으니 오늘은 라면 먹이지 말아야 하는데. 하루의 1/3 이상을 이런 생각으로 보낸다. 시간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정도, 혹은 그 이상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다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난다. 건조기 안의 빨래를 꺼내지 않으면 습기가 차서 냄새 날 텐데 어제 안 빼고 자버렸네. 가서 꺼내야 겠다. 어제 또 현미를 안 씻어놓고 그냥 잤네. 빨리 씻어서 담가 놓아야 저녁에 밥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 젠장. 책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해서 읽어야지 아무리 다잡아도 소용 없다. 내 머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돈다. 샬럿 퍼킨스 길먼은 대단하다. 깨달았으며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행동을 했다. 소설집 하나 읽고 아 좋다 생각했던 것이 존경심으로 바뀐다. 어떻게, 얼마나? 하는 질문이 뒤따른다. 지금 현재도 아닌데, 그 시대에, 실천했다는 그 사실이, 한없이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더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더 오래 책을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용기 없음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그랬다.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오늘도 책 소개 어딘가에서 비슷한 구절을 보았다. 맞는 말이다. 분노는 그저 분노일 뿐이다. 




























「그렇지만 가정과학 옹호자들은 가정관리의 합리화된 논리를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만일 가정관리 활동이 정말로 “전문직”의 내용이라면 글자 그대로 가정을 탈사유화하는 것은 왜 안되는가? 가정의 기능을 훈련된 전문가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왜 안 되는가? 엘렌 리처즈와 그녀의 동료들은 비누 제작, 실잣기 등등이 모두 산업에 흡수됨으로써 개선되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요리, 청소, 육아는 왜 안 되는가? 사실 “가정”은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가? 관습적이고 비과학적인 가정에 대해 비판한 모든 미국 비평가들 가운데 오직 샬롯 퍼킨스 길먼만이 이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가정과학의 초석을 세운 사람들이며, 가정경제학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또 우리는 가정 산업의 표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필요한 것이 바로 가정 산업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이 서너 명의 타인을 위해 요리하거나 청소한다는 사회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길먼은 주장했다. 아무리 많은 “과학”이 가정에 세세하게 적용되었어도 가정의 규모 그 자체가 집안일의 합리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사람 만들기”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이 남성을 시중드는 모든 가정은 과학적이든 아니든 간에 필연적으로 “끝없는 이기심을 [남성에게] 길러 주는” “자아도취의 온상”이었다. 길먼은 “효율성” 주장을 그 논리적 결론에까지 밀어붙였다. 과거와 같은 가정을 해체하고, 중앙집중식으로 음식 준비, 청소, 양육, 세탁을 담당하는 전문 직원을 갖춘 아파트 공동체에 사람들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성들 대부분이 남자와 동등한 기반으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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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악!!!!!!!!

재생산 기관이 질병의 원천이었으므로 그 기관들은 질병 치료의 명백한 대상이었다. 요통, 과민성, 소화불량 등 어떤 증상이든지 간에 성 기관에 의료적 공격을 야기할 수 있었다. 역사가 앤 더글러스 우드Ann Douglas Wood는 19세기중반 거의 모든 여성 통증에 사용됐던 "국부 치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사례가 네 단계를 모두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국부] 치료에는 네 단계가 있다. 손으로 하는 검사, "거머리 붙이기", "주입", "뜸뜨기" 이다. 듀이Dewees[미국 의학 교수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영국 부인과의사 베넷Bennet은 모두 자궁 경부나 외음부 바로 위에 거머리를 둘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 베넷은 의사들에게 거머리가 충분히 피를 빨아들이고 떨어질 때 몇 마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거머리를 세어 두라고 주의를 줬다. 베넷은 자궁 경부의 움푹한 곳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담한 거머리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는 "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몇몇 환자가 경험한 것보다 더 격렬한 통증은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20세기의 사고방식으로는 덜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훨씬 더 무지막지한 것 - P183

은 이러한 의사들이 신봉한 자궁 내 "주입"이었다. 자궁은 일종의 잡동사 자루, 또는 한 격분한 의사가 말했듯이 "중국 장난감 가게"가 되었다.
물, 우유와 물, 아마인 차,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 마시멜로 즙이 신경증 여성 환자의 몸 안으로 주입됐다. 마지막 단계는 뜸뜨기였는데, 반드시기억되어야 하는 사실은, 이 단계는 마취제도 없이 겨우 소량의 아편이나알코올만으로 시술되었다는 것이다. 뜸뜨기는 질산은 고약을 붙이거나 혹은 더 심각한 감염인 경우에는 훨씬 더 강력한 수산화칼륨이나 "하얗게달
구어진 철제" 도구인 "실제 인두를 사용해서 시술되었다. 56 - P184

소를 제거한 여성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중상류 계급의 여성들이었는데, 그이유는 결국 이러한 모든 절차에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여성들이 단지 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부인과 의사의 실험적인 고문 목록에서 면제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부인과 수술의 선구적인 작업은 오로지 외과적 실험이라는 목적만을 위해 자신이 데리고 있던 흑인 여성 노예들에게 시술한 매리언 심스Marion Sims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흑인 여성 노예들 중 한 명을 4년 동안 서른 번이나 수술했는데, 이는 수술 후 감염으로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었다.61 뉴욕으로 옮긴 후 심스는 뉴욕여성병원 New YorkWomeris Hospital 병동에서 가난한 아일랜드계 여성들에게 자신의 실험을 계속했다. 따라서 중간 계급 여성들은 의사들의 수술 자체로부터 가장 고통 받았지만, 냉혹한 실험기를 거치며 고통 받았던 사람들은 바로 가난한 여성들과흑인 여성들이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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