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을 읽고 있으나 나는 아직 서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책 미주에 있는 말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인데, 이것은 내가 ‘철학적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때로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을 때 어렴풋한 무언가가 잡히기도 하니까, 그냥 읽는다, 여러 번. 미주만 밑줄긋기하는 것도 처음이네. 일단 밑줄. 그리고 또 때로는 책을 다 읽고 서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니까.

책의 제목은 <행복의 약속>이고 부제는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이다. 나는 나를 불행한 자에 놓는다. 사라 아메드여, 불행한 자를 위함이 이렇게 어렵습니까???

싹 다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철학이론 책(아, 남성철학자들 책...)은 읽을 욕심이 안 생기는 건 무슨 조화냐.ㅋㅋㅋㅋㅋㅋ




10 느낌이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될 때 그런 접근법이 갖는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레이어드는 뭔가 그릇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지거나 감정이 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어드에 따르면 행복학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부의 재분배를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Layard 2005: 120-21).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에는 유감스럽게도, 만일 불평등이 불행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면 불평등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노예들은 자유를 원했다. 그 이유는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이 주는 굴욕 때문이었다. 노예제는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옳지 않은 것이다"(121[170]). 노예제가 그릇된 것인 이유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관념은 이런 그릇됨의 모델에서 무엇이 그롯된 것인지 보여 준다. 그것은 사회적 그릇됨을 개인화하고 심리화한다. 사회적 그릇됨과 상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내 책 ‘감정의 문화정치 (2004)의 결론과 고통과 불의의 융합에 대한 벌란트의 중요한 비판(Berlant 2000)을 참조. 특히 주목할 점은, 불의와 상처가 융합돼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타인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델에서는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형태의 그릇됨도 보이지않게 된다. - P413

13 페이 웰던이 여성과 행복에 관한 저서에서 한 말을 인용해 보자. "젠더 평등을 위한 투쟁은 외모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진화를 통해서도 전해지지 못한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다면, 그 투쟁은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의 턱만 발달시키고, 보톡스로도 가릴 수 없을 이마 주름을 만들며, 뷰티 플래시[안색을 밝게 해주는 화장품]를 아무리 발라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안색을 탁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좋은 점이 아무것도 없다"(Weldon 2006: 52). 웰던은 불행 때문에 외모가 상할 것이며 그 불행은 평등을 위한 싸움이 유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하다는 건 외모가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웰던이 보기에 행복하려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다시 말해 여자가 더 나은 남자를 얻으려면, 평등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 행복은 자기-증진의 기술이다(그녀는 이를 진화적 신체 단련이라고도 한다). 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행복과 여성에 대한 리서치는 전통적 여자다움의 형태로 돌아가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수동성과 연결되는데, 이는 행복을 능동성과 연관 짓는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이 책의 결론에서 행복과 능동성의 일치에 대해 논할 것이다. - P414

14 그렇다고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법이 이런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단지 현대의 행복보다 고대의 행복을 이상화하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행복을 덕으로 보는 오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서의 글들은 인생에 대해 덜 배타적인 또는 덜 특정한 개념에 근거한 대안적 좋은 삶 개념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매킨타이어는그의 저서에서 덕은 "후천적인 인간적 자질로 그것의 소유와 실행은 우리가 선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것의 결여는 우리가 그와 같은 선을 성취할 수 없도록 효과적으로 가로막는다"
라고 설명한다. 매킨타이어의 무의식 개념적 분석 (MacIntyre 2004) 개정판 서문도 보라. 여기서 그는 정신분석적 모델들을 비판하며 "합목적론적으로 구조화된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옹호한다. 그는, 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은 "인간의 번영이라는 개념과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개념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서 인간의 번영을 "[인간] 특유의 잠재력의 실현이 이성에 근거한 활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는데, 이는 그도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중시하는 배타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34-35). 이와 같은 설명을 제안해 준 데이비드 글로버에게 감사한다. - P414

15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하는 사람은 다른 유형의 덕 있는 사람보다 외적인 재화를 덜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Aristotle 1998: 193[374]). 그가 보기에, 사색하는 철학자에게 외적인 재화는 오히려 사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조하는 철학자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193[374-375]). 바로 이 지점이 정치경제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철학자 주체의 좋은 삶을 사는 역량의재생산은, 인간으로서 갖는 특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동은 철학자를 부양해 주는 노동으로 따라서 가구처럼 배경에 머물러 있게 된다. 퀴어 현상학』(Ahmed 2006)에" 있는 후설과 철학이라는 노동, 그리고 가사 노동이라는 "배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보라. - P414

18 콜브룩은 이런 구분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행복에 대한 니체의 새로운 철학적 개념화를 든다. "행복은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순간의 특수성이나 구체성을 능동적으로 긍정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역량 혹은 힘이다" (Colebrook 2002: 19). 그러나 이 "새로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기존의 행복 개념들과 별 차이가 없으며, 이 책의 결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개념들 상당수가 능동성으로서의 행복 관념에 입각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새로운 것의 언어 속에 존재하는 오래된 것의 유산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즉, 철학은 일상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할 때 기존의 습관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자신의 습관을 유지할 뿐이다. - P415

20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특히 1장과 결론에서 윤리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아감벤이 인간을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자,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삶이 행복에 할당돼 있는 유일한 존재"로 정의하고 "그렇지만 이 사실 자체가 곧 삶의 형태를 정치적 삶으로 구성한다"(Agamben 1996/2000: 4[14])라고 하면서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 행복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해 두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행복을 위험에 처해 있는 무언가로 만들면서 아감벤은 행복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문에 부치려 한다. 심지어 이 질문은 고통스럽다. 인간에 관한 질문은 행복에관한 질문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 P415

23 행복의 시기는 "반명제antithesis가 사라진 시대로 "역사의 빈 페이지"(Hegel 1837/ 1988: 29)라고 하는 헤겔의 명제와 내 주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평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명제는 역사의 활동은 불행과 부정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나는 개념-어concept-word인 행복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즉, 행복은 사고의 지평을 제공한다. 개념어로서의 행복의 과잉결정은 행복이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명멸해 왔는지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역사 속의 행복이 공백이 아니라고, 즉 공백은 행복의 규제력을 관념으로서 유지시키는 판타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의 공백은 투쟁이나 부정성의 부재를 나타내는 표지가 아니다. 행복이 주어져 있을 때 우리는 투쟁이나 부정의 표지를 볼 수 없을 뿐이다. 행복이 공백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상황이 진행되고 우리가 "잘 지낼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백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비롯해 "잘 지냄"을 나타내는 표지들에 의해 지워진 것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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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합니다. 미주가 왜 이리 긴가요ㅠㅠ 미주 읽는데 한참 걸려서인지 진도가 계속 멈춰있어요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1   좋아요 0 | URL
흑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부분 어떡하나요? ^^;;;;; 미주는 또다른 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네요… ㅎㅎㅎ

시에나 2023-04-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미주도 읽으시는구나... 전 세번 읽었어도 미주는 안 읽..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7 18:22   좋아요 0 | URL
악 그러시군요. ㅎㅎㅎ 격하게 안 읽고 싶어지네요.ㅋㅋㅋㅋ
 















서문(- 왜 하필 지금 행복을 이야기하는가)에서 딱 한 구절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아래 구절을 고르겠다. 


⌈ 주체들이 "몰입" 상태가 아닐 때 그들이 만나는 세상은 저항적이며, 행동을 가능하게 하기보다는 차단한다. 그래서 불행한 주체들은 세상을 이질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칙센트미하이가 신체와 세상의 친밀성에 기초한 행복의 현상학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 세상으로의 몰입에 단순히 심리적 속성만 있는 건 아니라면 어쩔 텐가? 만약 어떤 신체들이 세상을 저항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유가 세상이 어떤 신체들을 다른 신체들보다 더 잘 "수용"하기 때문이라면 어쩔 텐가? 그렇다면 우리는 특정 신체들에게는 공간으로의 몰입을 가능케 하는 바로 그 삶의 형식들이 [다른 신체에게는] 스트레스로 느껴진다는 점을 숙고해 봄으로써 행복에 대해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행복의 경로를] 따라가지 않는 경험, 스트레스를 받는 경험, 우리가 속한 공간에 섞일 수 없는 경험이 아마도 행복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지 모른다. ⌋ (29~30) 



왜냐하면 나는 킬조이killjoy이고 싶기 때문이다. ㅋㅋㅋ 


대체로 무엇이든 어디에든 적응을 잘 한다고 여기고 살았으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성향을 가졌던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분위기 깨는 자'에 속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좀은 다른 방식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였던 듯하다. 그러니까 불만은 있는데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내가 왜 불만을 갖게 되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그런 사람. 자연스레 말투는 삐딱해지고 인상은 굳어졌다. 당연하지. 원인을 모르는데 어떻게 불만이라고 말하겠어.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낯선 이와의 대면에서도 같았다. 말도 행동도 엉뚱할 때가 잦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이해되지 않는 언행들이 그야말로 수두룩... 우리는 진짜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알아채는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나? 억누르는 교육만 받고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또르르... 

아무튼지간에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이런 부분들은 알 수 없는(던) 나를 좀 알게 해주고 어떤 면에서는 토닥거려 주기도 한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에게는 매일 말과 글로 보고 들어야만 할 수도 있다. 


+ 몇 가지 언급해보자면. 


- 21쪽 '결혼'에 대한 이야기. 대표적 행복 지표 주자 되시겠다. 뭐 두말 하면 입 아프지. '그래도 해보는 게 낫다'에 격하게 반대합니다. 안 하고 행복하게 사세요.ㅋㅋㅋ 


- 25쪽 긍정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 "스스로의 행복 추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게 주로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거잖아. 


- 28쪽 로렌 벌란트 언급됨. "로렌 벌란트는 이런 행복에 관한 판타지를 "어리석은" 낙관의 형태라 부르면서, "특정 형식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행복이 보장될 거라는 믿음"이라고 지적한다." 이거 지금 읽고 있는 <정동 이론>에 나온다. 제목은 "잔혹한 낙관주의". 그러나 말이 어려워서 두 번 읽고도 정리가 안 되고 있음. 이해하고 싶다... 그래도 반가웠다. 로렌 벌란트. 


- 33쪽 각주의 용어 설명. 이것 참 곤란하네. 사라 아메드의 이 책에서 affect를 '정동'이라는 단어 대신 '정서'로 번역한다고 되어 있다. 처음부터 '정서'로 생각하고 읽으면 상관없는데 이미 <정동 이론>을 읽고 있어놔서 조금 헷갈림. 


- 41쪽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영화가 결말에서 보여 준 행복한 화해의 이미지였다" 괄호 안의 작은 글자인 이 문장을 보자 수많은 영화의 해피엔딩이 떠올랐지만 그 중 문득 <에에올>의 결말이... 만약에 말이야, 조이가 에블린에게 그래도 반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에블린에게 100% 감정 이입하면서도 결말의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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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4-04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주문한 책이 왔습니다^^

난티나무 2023-04-04 21:20   좋아요 2 | URL
😍 열공해요 우리~!!!^^

건수하 2023-04-04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동과 정서 가 같은 개념이라니 동-서 반대인데 말이죠 … (썰렁)

저도 좀 킬조이 경향이 있는데, 페미니스트면 다 경험도 그런 경향도 있을듯요. :)

난티나무 2023-04-04 21:22   좋아요 2 | URL
악 동/서!!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어쩐지~~~~~ㅋㅋㅋㅋ

맞아요 비슷하게 그럴 듯해요.^^
수하님도 킬조이! 저는 요즘 집에서는 완전 그렇고요.ㅋㅋㅋㅋ 분위기 깨부수는 자.ㅋㅋㅋ

시에나 2023-04-0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해보는 게 낫다‘에 격하게 반대합니다. 안 하고 행복하게 사세요.ㅋㅋㅋ >>> 아악, 너무 마음에 들어요. 딱 제 마음!! 이 책 2장으로 가면 결혼하면 그래도 행복해질거라고 강요하는 것들에 대해서 킬 조이!! 해버리는데 으찌나 속이 시원하던지요.

그리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 이런 말들이(저 진짜 이 말 싫어했는데 이유를 알았!!) 어떻게 여성들에게 행복하기를-곧, 가부장제에 순응하기를 은연 중에 강요하는지도 말해주고요. 진짜 저의 인생 책입니다!! (같이 읽어가고 싶은데.. 열심히 댓글이나 달아야겠어요)

난티나무 2023-04-06 16:36   좋아요 1 | URL
오 저 지금 1장 다시 읽으면서 버벅거리는 중인데 2장에 대한 희망(?)으로 이겨내야 겠어요.ㅋㅋㅋ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왜 행복을 멀리(?) 했나(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과 개념을)를 탐구(?)해보게 될 것 같아요. 답을 찾기보다는 탐구…ㅎㅎㅎ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까 하며 폰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갑자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나 듣던 소리다. 이게 뭐더라. 잠시 혼란한 사이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입니다. 화재 경보입니다. 모든 투숙객은 지금 즉시 대피하십시오. 실제 상황입니다."

맙소사. 내 생에 이런 일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와 나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사이를 기타등등의 생각과 함께 두서없이 오갔다. 진짜 불이 난 건지, 경보가 실수로 울리는 건지, 전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컸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실재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실재적이게 되어 있을 것이다. 위험이 존재했든 하지 않았든, 그 위협은 두려움의 형태로 느껴졌다. 실제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위협은 현재에 임박한 현실성을 가진다. 이러한 실제적 현실성은 정동적이다.

두려움은 어떤 위협적인 미래의 현재에 속하는 예상적 현실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느껴진 현실이며, 그 문제의 정동적 사실affective fact로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99)




급히 잠옷을 벗어던지고 바지를 꿰입고 배낭에 눈에 보이는 소중한(!) 것들을 쓸어담고 운동화를 끌고 복도로 난 문을 (열어도 되는지 겁이 났으나 일단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으므로) 열었다. 옆에서도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직원이 화재 경보 아니라고, 들어가라고 한다. 어휴. 


「위협이 물질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은 아니다. 그것은 진짜로 느껴진, 어느 과거-미래의 모든 정동적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미래의 위협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연기된 것이다. 그 상황은 영원히 열려 있다[끝을 알 수 없다].」 (99)

「수행적 행위나 말a performative은 항상 자동-발효되는self-executing 명령으로 닥쳐온다. ...... 경보라는 기호는 아무것도 없음 이상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명령법에 불과하고, 여전히 자율적으로 하나의 명령을 발효시킬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해서, 우리가 외부를 향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해 하나의 사태 현실에 깨어 있게 한다. 그것은 계속 주의를 강제로 집중시키며, 다음 느낌으로 변이되면서 이전의 느낌을 깨뜨린다. 여전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기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 경험이며, '지각이 드러내는 것 이상'보다 더욱 많은 것을 포함한다.」 (121~122)




글로는 짧게 썼지만 방에서 허우적거린 시간이... 음. 실제 상황이었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경보가 울리고 방송이 나올 때부터 그랬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해야 했다. 위기대처능력 꽝인 나. 어렵거나 곤란하거나 난처하거나 힘들거나 위험하거나 한 상황에 놓이면 어쨌거나 나는 줄곧 이런 신체 반응을 보일 텐데 하는 생각에 소심해졌다. 이걸 뒤집으면 그동안 나는 꽤 안전(?)한 생활을 했다는 말일 테다. 아니 딱히 그렇지도 않... 흠 헷갈린다. 심장 두근거리는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싶다. 쉽지 않겠지. 아무 일도 없다는 직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텔에 울려퍼지는 경보와 안내방송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물론 방문을 열기 전과 후의 내 마음은 당연히 달랐다.


「기호활동semiosis은 기호가-유도하는 되기이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의 기호가 실제 경험에서 몸의 되기를 역동적으로 결정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적 힘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실수로 기표화된 현재 존재하지 않는 불에 대해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미래-발생적 불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선취적으로 옳을 것이다.」 (123)




경보의 시간이 지나고 옆지기와 나는 화재가 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묵고 있는 방은 건물 7층, 만약 중간 어디쯤에서 화재가 나고 복도가 연기로 가득하다면,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없다면, 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리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도.


「 선제행동이 명시적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안전은 그것이 피하고자 했던 것을 암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입각하고 있다. 즉, 선취적 안전은 그 자체가 기여하는 불안전의 생산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제행동은 그 자체의 실행을 위한 조건을 생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선제행동은 본래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위협-잠재성에 내재된 자기-원인적인 힘을 그 자체의 작동을 위해 포획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09)

「위협의 정동적 현실은 전염성을 가진다. (107)

...

위협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 선제행동이란 아무런 실제 지시대상이 없는 위협을 대상으로 삼는 권력의 한 양식이다. 선제행동의 정치학이 그 자체의 작동에 대한 위협의 잠재능력을 포착하면, 권력의 실제적 대상을 찾는 것을 중단한다.」 (111)




가끔, 내가 지금 죽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었어, 하는 순간이 온다. 진짜로 불이 난 거였다면, 방에서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지만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위기대처능력도 없고 근력도 없고 끈기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 나는 죽을 위험에 처하면 그냥 죽는 것인가. 몇 년 전의 나보다 죽는 게 좀 덜 억울할까. 그러면 몇 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좀 덜 억울하게 될까.

그 와중에도 물건을 챙기려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대책 없다. 옷도 갈아입었고 책도 쓸어담았다. 챙기지 않은 물건들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화재였다면 나는 내 목숨을 아까워하는 귀신이 되었을지도...@@


「신체적인 활성화 사건은 아직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분이 없는 거듭-깨어남의 문턱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몸이 자신의 '본능'과 기호의 구성적 수행에 의해 전달된 거듭-깨어남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124) (*마치 꿈과 사건의 경계처럼)

「선제적 논리는 정동적 기재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현재와 미래 사이를 돌고 도는 비선형적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논리에서와 같은 무모순noncontradiction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규범적 논리란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선형적 인과관계에 특권을 주며 현실의 효과에 대한 원인을 미래성에서 찾기를 꺼린다.」 (105)




밖으로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벽에 박힌 글자들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치던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화재시 절대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마시오." 그 옆에서 소화기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내가 저걸 사용할 줄 알던가. 


 "만일 우리가 [과거에] 위협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위협을 느낀다면, [미래에도] 위협은 항시 있을 것이다. 한 번 위협은 영원한 위협이다once and for all,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는 비선형적의 시간 속에서." (100)






** 인용문 : 2장 정동적 사실의 미래적 탄생 (브라이언 마수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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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04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화재가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던 그 시간의 떨림은 쉬이 가라앉질 않겠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순간은 자꾸 떠오를 거예요. 저도 교통사고를 목격했던 것,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것들이 여전히 수시로 떠오르거든요.

인용하신 정동이론의 문장들은 정말 다 맞춤하네요. 그리고 어쩐지 이런 순간들의 불안을 좀 다스려주는 느낌도 들어요. 정동이론 사야겠네요. (왜 결론이..)

난티나무 2023-04-04 15:33   좋아요 1 | URL
그런데 좀 웃긴 건요, 그 순간엔 다리가 후들후들 정말 무서웠는데 몇 개월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무엇일까요? 일단 미시트라우마로라도 기억을 간직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으로 보면 그건 또 나름 칭찬(?)할 만한 반응인데, 만약 위험에 처했던 경험이 없어서 혹은 위기대응방식에 무지해서 그 공포를 잊은 거라면?? ㅠㅠ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게 작동한 거잖아요. 생각이 많아집니다…

책 재밌다니깐요? ㅎㅎ 2장에서 제가 겪은 일과 엮으려고 인용문 뽑아왔지만 대테러대응 등 정치적 위협과 정동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거든요. 뒷장들도 재밌어요. 저는 5장까지 읽었지만 정리하려니 끙 힘이 듭니다…ㅋㅋ

그레이스 2023-04-04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라셨겠어요.
우리 아파트 화재경보는 일상이어서 듣고 무심히 지나요.
정동이론 읽어보고 싶네요
수동과 능동 깨어남...!

그런데 막상 위기의 순간엔 제 기질과 습관만 발휘될듯 ㅠ

난티나무 2023-04-04 15:39   좋아요 2 | URL
아이쿠 경보가 일상이면 어쩌나요… 양치기 소년 생각나요.ㅠ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의 (형편없는) 위기대처능력을 욕하는 사람으로 ㅠㅠ 저도 비슷하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요. 일단 팔뚝힘을 키우는 걸로!(읭?)

책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2023-04-04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화재경보가 오보여서 다행이고요.
그런데 그런 순간을 저렇게 막 이론과 연결시켜 글을 쓰는 난티나무님의 능력에 깜짝 놀라고요. 역시 열심히 공부하는 분의 글은 다르구나 막 느끼면서 보고나면 다 까먹고 글은 글이고 생활은 생활인 저를 또 막 반성하고요. ㅠ,ㅠ
그래도 정동이론 어려울거 같아서 안읽을거같은걸 또 미리 반성하고요. ㅠ.ㅠ

난티나무 2023-04-04 15:50   좋아요 1 | URL
작년 가을에 있었던 일을 대략 써놓았었는데 책을 읽다가 똭 나와서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짜맞춤이죠.^^;;;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생각은 계속 했거든요. 아마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실제로’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겠죠. 경험을 풀어내주는 글을 만나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여러 가지로요.^^

책은 끌리면 읽는 거지요. 반성이라니요.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4-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재 경보ㅜㅜ
놀라셨겠어요ㅜㅜ
가슴 두근거림!
오늘 지인을 만나 나이 들수록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우리는 왜 심장 두근거리는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런 얘기를 나눴었는데 난티님의 화재 경보 울림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었다면.....ㅜㅜ
암튼 다행입니다.
이게 정동이론과 연결된다니?
띠용~ㅋㅋㅋ

난티나무 2023-04-04 21:43   좋아요 1 | URL
심장 두근거림! 그러고 보니 그런 신체현상도 억압교육의 결과로 볼 수 있겠네요.ㅠㅠ 뭐 하나 연결 안 된 것이 없어요...@@
알고 보면 모두가 ‘정동‘인 것이죠....ㅋㅋㅋㅋㅋㅋㅋ
 

3장 사드 후작


사디즘과 사드 후작,이라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 ‘사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완전 도그또라이미친셰키... (미쳤다는 말은 그냥 욕으로 쓴다. 이런 놈을 미쳤다고 해버리면 안 된다. 또라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아, 뭐라고 욕을 해야 할까. 여성혐오자, 이건 너무 진실이고 올바른 말이야. 욕을 만들어야 게쒀...)


*** 생트 뵈브. 보들레르, 플로베르, 스윈번, 로트레아몽, 도스토예프스키, 콕토, 아폴리네르, 폴 틸리히, 시몬 드 보부아르, 카뮈, 조지(조르주) 바타유, 롤랑 바르트, 도널드 토머스, 리차드 시버/오스트린 웨인하우스, 노먼 기어, 장 폴랑, 호버트 라이런드, 제프리 고러, 로널드 헤이먼, 에리카 종, 모리스 하이네/길버트 렐리, 조지 스타이너, 존 T. 누난 Jr, 린다 버드 프랭크, 피터 와이스, 크리스토퍼 라시... ***


책에 의하면, 위에 나열한 이름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드를 옹호하는 글을 쓴 사람들의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에리카 종이 포함된다는 사실이 뜨악하다.(에리카 종은 모나 숄레의 책 <마녀>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도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여성 혐오자인 남성 작가가 쓴 글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 것인지 가끔 아리송할 때가 있는데, 그러니까 문학적 가치와 의의 / 이론적 가치와 의의 운운하면서 여성 혐오의 면들을 빼고 읽어야 하는지, 뺀다고 빼지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그런 사람이 쓴 글을 왜때문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읽어야 하는지? 토 나온단 말이야... 저기 저 사람들이 사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만’ 깔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도나티엔 알폰소 프랑수아 드 사드 - 일반에게는 사드 후작으로 알려져 있고, 일대 군단을 이루는 그의 열렬한 숭배자들에게는 <신성한 후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 는 세계 최대의 포르노그래피 작가이다. 포르노그래피 작가로서 그는 남자의 성적 가치를 자기가 구현하고, 그 가치를 정의내린다. 그 사람 안에서 강간자와 작가가 꼬아지고 합해져 하나의 비열한 형태로 결합한다. 그의 인생과 작품이 일체가 되어, 공상 안의 여자와 현실의 여자의 피로 물들어 있다. 생애를 통해서, 그는 여자들을 고문하고 강간하였다. 그는 여자를 때리고, 강간하고, 유괴하고, 아동을 학대했다. 작품 안에서, 그는 집요하게 잔인성을 에로티시즘의 본질로써 찬양하였다. 다시 말해, 성교와 고문과 살인을 일체화하고, 폭력을 섹스와 동의어로 만들었다. 문학자·예술가·지식인들이 그를 숭배하고, 좌익 정치사상가들이 그를 자유의 화신으로 주장함으로써, 그의 작품과 그에 관한 전설이 오늘날까지 거의 두 세기 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 P131

어느 여자의 인생도 그처럼 숭배받은 적은 없다. 어느 여자의 고통도 그처럼 탄식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다. 남자들이 동일한 자유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여자의 윤리·행동 또는 강박관념이 그처럼 영광스럽게 표현된 적은 없다.°

° <[그리고] 어느 여자의 범죄도, 그 문제에 관한 한, 한번도 정당화되고, 변명되고, 양해를 받고, 낭만시되고, 매력이 넘치게 의미를 부여받은 적은 (절대로) 없다>고 1979년 7월 20일의,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빈 모건이 적고 있다. - P156

사드의 윤리를 강간자의 윤리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사드에게 강간은 몹시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웬만한 정도의 침해의 양식이다. 사드의 작품에서, 강간은 전희이고, 나중에 오게 될 수족을 절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메인이벤트의 준비단계일 뿐이다. 물론, 사드의 성적 행동관념에서는 힘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강간이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기는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강간의 색조가 퇴색되고 지루해져서 에너지의 절대 소모를 피하기 위해서는 희생자에게 고문을 가하든지 흔히는 살인을 동반해야 한다. 사드는 문학 방면에서 경지에 오른 살인 장면의 묘사가이다. 즉, 오르가슴은 궁극적으로 살인을 부른다. 희생자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의 몸을 저며서, 막대기에 찔러 꿰어서, 산 채로 태우고, 천천히 기름을 튀기면서 굽고, 먹고, 머리를 자르고, 희생자들의 껍질을 벗긴다. 여자의 질과 직장을 봉합했다가 나중에 찢어발긴다. 여자들의 몸이 테이블이 되어 그 위로 구운 음식이 서브되고, 양초가 탄다. 사드가 묘사한 잔학행위의 목록을 적으려면 수천 페이지에 달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의 주제가 나타난다. - P159

여자의 비열함과 여성 성기에 대한 극심한 증오가, 사드의 전 작품에 나타나는 중심 주제이다. - P164

사드가 격찬한 것은 살인의 성적 가치이며, 그는 낙태를 살인의 한 형태로 보았다. 사드에게는 낙태는 성적 행위이고, 육욕의 행위이다. 그의 가치체계에서는 임신은 필히 살인을 불러일으키고, 보통 임신부, 특히 임신의 단계가 진전된 임신부의 살해는 훨씬 더 자극적이다. 위법한 낙태로 피를 흘리면서 공포에 가득 찬 죽음을 맞는 임신부보다 더 사드를 황홀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낙태는 사드의 성욕 충족의 수단인 것이다. - P165

사드의 중요성은 결국 반체제자나 사회의 일탈자로서가 아니라, 보통사람으로서의 중요성이다. 권력광인 귀족의 남자라면 보통사람이라는 호칭을 혐오하겠지만, 상세히 검토한 여자들은 그 같은 호칭이 사드에게 합당하다는 것을 안다. 사드에게 있어서, 다음의 등식이 확실한 토대 위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즉, 포르노그래피의 권력 = 강간자 겸 구타자의 권력 = 남자의 권력.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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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0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끔 현타 올 때가 있다. 흔히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때로 여기가 어디며 나는 누구인지 대충 아는 상태로 현타를 맞을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타격감이 제법 크다. (자, 이럴 때 '현타' 즉 '현실 자각 타임'이라는 말이 적절한가, 는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잠시 해보자.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 현실은 어떤 것인가. 내 현실이 어떻기에 자각하는 타임이 오는가. 그 또한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상상에서 벗어나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아닌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도, 그렇다고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내 현실.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게 현실이야, 이게 현실이야, 라는 말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혹은 포기의 다른 모습 아닌가. 더하여 지금 내 현실이 뭐가 어때서? 라는 말. 부질없지, 소용없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런 생각을 주워섬기게 만드는 말들. 생각들.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는.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는데 합리화와 죄의식은 아직 나를 떠날 줄을 모른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


" "아이들이 없다면 책을 써서 번 돈으로 지금쯤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 텐데. 대신 집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주중에는 매일같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리석은 훈계를 읊어대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하녀로 여기는 아이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한다. 어떨 땐 후회를 한다. 그렇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후회한다."

더 나아가 "아이들이 없고, 장보기와 식사 준비, 아이 돌보기에 덜 매였다면 내가 무엇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고백컨대 나(코린 마이에르)는 오로지 한 가지만 기다린다. 아이들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드디어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창작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 쯤이면 내 나이 쉰 살이겠지.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그때의 인생이 내겐 이제 막 시작한 것이겠지." " (204)


눈물이 맺혔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나 도나스의 <엄마됨을 후회함>을 읽을 때에도 이런 순간은 없었는데, '그쯤이면 내 나이 쉰 살이겠지'에서 해보지 않은 생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미 쉰 살을 넘겼는데 내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아니아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는 알고나 있는 거야? 뭘 시작하려는지 알기나 해? 작은넘이 바칼로레아 시험을 칠 때까지 일 년여가 남았다. 그럼 나는 더 '자유'로와지는 건가? 아이를 낳으면서 사라진 내(나'만'의) 25년은 그 '자유'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여행을 많이 하는, 아이가 셋인 한 남성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나타샤 아파나)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자신은 "매우 운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 말을 "'매우 운이 좋다'라는 말은 '나는 엄청난 아내가 있어요'라는 말의 현대적 표현인 듯하다"라고 해석했다. 그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플래너리 오코너, 버지니아 울프, 캐서린 맨스필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토니 모리슨은 자녀가 둘, 첫 소설을 서른아홉에 출간했다. 페넬로페 피츠제럴드는 자녀가 셋, 첫 소설을 예순에 출간했다. 솔 벨로, 여러 명의 자녀, 여러 권의 소설 출간. 존 업다이크, 여러 명의 자녀, 여러 권의 소설 출간." (139)


나에 대한 생각과 다른 여성들에 대한 생각이 겹쳐져 가슴이 아파왔다. 현타는 종종 이런 것이다. 뒤늦게 무언가를 뼈아프게 깨닫는 것, 돌이킬 수 없음에 가슴 아파 하는 것, 앞으로도 그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가슴아파 하게 될 거라는 예감.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들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것도 모른 채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회고록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한국어판은 민음사, 2017)를 쓴 미국 작가(1969~)]는 여성은 세 범주로 나뉜다고 말한다. 즉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성들, 이모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성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최소 3미터 이내로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걸 허용해서는 안 되는 여성들.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속한 범주를 혼동하는 바람에 그 모든 슬픔과 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은 '이모 부대'에 속한다. " (185)


혼동까지 가지도 못한다. 그런 범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니까. 모두가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길버트의 저 세 범주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특히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이 부분)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여성은 알아야만 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미 알고 선택한 여성들에게 박수를, 아직 몰라 휩쓸려다니는 여성들에게 각성을.)

나는 열렬히 '이모 부대'이기를 바란다. 이미 세상에 내어놓은 내 아이들에게도 물론 그러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 어쩌면 나는 아이들과 친할 수 없는 여성들의 범주에 속하는 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 떨어뜨려 생각하는 사회적 경향 때문에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인데. 그렇게 보면 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냥 대인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나. 가끔 조카와 어린 아이들에게 멋지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부러움은 원인을 찾게 만든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감당할 수 없는 몫을 아무 생각 없이(글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짊어지게 되었을까? 얼마 전만 해도 모르고(외면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내 아이들로 있을 거라는, 나는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엄마'일 거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퍼뜩 깨닫고는 모골이 송연해졌었다. 쉰이 넘은 내게도 엄마가 엄마로, 아빠가 아빠로 있다. 내가 그걸 원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인간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무섭다. 무서운 일이다.




" 미국에서 출판된 그녀의 저서는 최근에 작고한 할머니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된다.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이 기뻤던 할머니 노가 도나스와 손녀 오나 도나스는 서로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이며 상대방 말을 경청했고,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고 그 성취를 자기 것인 양 기뻐하며 긴 담화를 이어갔다.

에이드리언 리치 또한 이렇게 말했다.

"'자녀가 없는 여성'과 '어머니'를 대조하는 것은 잘못된 설정이다. 이 둘을 견주는 식의 대조가 출산 제도와 이성애 제도에 기여했다. 보통 이 둘을 단순한 범주로 간주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11)


할머니, 어머니, 더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 쉬운 기혼여성의 시가쪽 여성들. 그들에게 한없는 인류애가 솟아올라 가슴이 아리다가도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경험을 반복한다. 관계가 과연 내 언행에 달려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주고받지 않음에 대한 열망. 거부하고 싶은 마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얽매인 듯한 느낌이 들 때 홀로 다짐하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내게는 아이가 있지만, 아이 없는 여성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믿음은, 내가 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 아이가 있다면 "20년을 예상해야"(205) 한다. 물론 나도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려)는 여성들을 안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시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혹독하게 자기 몸을 던져 돌보고 일하고 나가떨어진다. 조력자가 없다. 독하다는 말이 돌아올 뿐이다.("당신은 나쁜 엄마, 복수의 여신 메가이라 취급을 받을 것이다."(131)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당연한 세상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제도가 뒷받침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 제도에는, 마치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여성의 부모(이하 일가친척 및 동반자 포함)에 대한 돌봄'의무'를 없애는 방편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망상이 아니다. 이것은 헛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후회한다/후회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점점 밝아지기는커녕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눈앞에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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