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서우> 


순전히 호기심에서 산 책이었다. 그러니까 소설의 내용보다는, 한글과 영어가 함께 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영어로 된 부분은 안(못) 읽었... 허허. 

책을 받자마자 얇아서 술러덩 읽어버린 기억은 있는데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아 그렇지, 새벽 귀갓길 택시... 그런데 제목이 왜 서우,더라. 끝에 어떻게 되더라. 

짧은 소설을 다 읽은 후, 좀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잠긴다. 그러니까 그게... 그래서 그러니까... 아마도, 그렇지? <나를 찾아줘>를 읽었을 때와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기분이랄까. 그동안 남성이 주인공인 스릴러물을 어떻게 읽어왔을까 싶은 생각도. 아직 잘 모르겠다. <나를 찾아줘>도 정리 안 되고 <서우>도 정리 안 됨. 차차 생각해보기로 한다. 


책 이미지를 넣으려고 강화길,을 쳤더니 집에 있는 책들이 주루룩 나온다. 































몽땅 가져와서 「음복」(2020 젊은작가상..)부터 시작해 다른 단편들을 슬쩍슬쩍 다시 읽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서우>에 비하면 「음복」은 이해하기는 쉽다. 훨씬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뭔가가 다르긴 하다. 그 뭔가를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 「선베드」(<나의 할머니에게>), 「호수 - 다른 사람」(<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 「산책」(<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역시 모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기묘한 분위기다. 일관성도 있네. 문장들 뒤에 숨은 의미를 추측/짐작하기가 아직 좀 어렵다. 잘 모르겠다.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떻게 다가올까. 강화길은 천천히 조금 더 읽어보는 걸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1-08-06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이트 호스에 다 묶여 있는 걸 여기저기 분책으로 소장 중이시군요 ㅋㅋㅋ강화길 읽을 땐 섬뜩한데 다 읽고 갸웃하게 되요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8-07 00:15   좋아요 1 | URL
그래서 화이트 호스는 안 사야 겠습니다.ㅋㅋㅋ
섬뜩, 맞아요. 서우,도 한참 생각했어요.^^;;;;
 














에디트 에바 에거,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프롤로그를 읽는데 눈이 번쩍. 



"나는 고통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어떠한 것도 내 고통을 상대의 고통보다 더 나쁘거나 더 좋게 만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비교하여 상대적 중요도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제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제겐 불평할 권리가 없어요. '아우슈비츠'가 아니니까요." 이러한 종류의 비교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축소하거나 깎아내리게 만들 수 있다. (중략) 

어느 날 아침 나는 두 명의 내담자를 연이어서 상담했다. 두 사람 모두 40대의 엄마였다. 첫 번째 여성은 혈우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두었다. 그녀는 상담 시간 내내 울면서 어떻게 신이 자기 아이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여성의 이야기에 매우 가슴이 아팠다. (중략) 

그 다음 내담자는 병원이 아니라 컨트리클럽에서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녀 역시 상담 시간 내내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캐딜락이 조금 전에 배달되었는데 자신이 원한 색이 아니어서 화가 나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녀의 문제는 사소해 보였다. 특히 죽어가는 아이에 대해 비통함을 토로한 이전 내담자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관해 충분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 색깔에 대한 실망의 눈물이 사실은 그녀 삶의 더 커다란 문제들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외로운 결혼 생활, 또다시 학교에서 쫓겨난 아들, 남편과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되기 위해 포기했던 커리어에 대한 열망 등의 문제들이었다. 우리 삶의 작은 속상함은 더 커다란 상실의 상징일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걱정거리들이 더 커다란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날, 매우 달라 보이는 두 내담자가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다. 서로와도 그렇고, 여느 곳의 여느 사람들과도 그랬다. 두 여성은 자신의 기대가 무너진 상황,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하략) " 


보통은 캐딜락 색 때문에 우는 여성을 비난한다. 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일차원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다.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경우를 봐왔나. 나 또한 얼마나 많이 엉뚱하게 눈물을 흘렸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아이가 이유도 없이 짜증을 내거나 사소한 일에 화를 낸다고 덩달아 화냈던 수많은 경우들을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그 감정들 뒤에 숨어있는 고통의 원인을 짐작하고 그 사람을 껴안는 포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고통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에는 높낮이도 없고 크기의 차이도 없다. 내가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들 뿐이다. 섣불리 다른 사람의 고통에 판단질을 하지 말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별것 아닌 거라고 말하지 말자. 나의 고통은 '표현'하자. 다른 사람이 '표현'하는 고통을 주시하자. 물론 지금까지 그랬듯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자잘한 속상함이 어떤 상실의 상징인지 이제는 좀 알아차릴 때도 되었다. 방어 기제를 벗어던지면 그 안에 내가 있을까? 





"나는 분노의 힘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전혀 죽이지 못한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살아 있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과거에 관해 기억하거나 이야기할 때마다 두려움과 상실감에 다시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매우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들은, 얼마나 강력할지는 몰라도 결코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감정들은 일시적이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감정을 떠나보내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표현Expression은 우울Depression의 반대말이다." (67% 지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나는 정말 삐딱하다. 좋은 구절에 밑줄을 긋는 게 아니고 읭? 싶은 곳에 밑줄을 긋는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글로 만난 심채경이라는 천문학자의 글이 아마도 더 좋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으로 쓸 때 한번 더 고심해 보았으면.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힘들었을 이소연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몰랐던 것들이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14% 지점) 


응응, 그렇지, 좋은 말이다. 하고는 삐딱선을 탄다. 그저 묵묵히 내가 선택한 길을 걸으면, 그러면 되는 건가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요? 파도에 이기고 지다가 그만 휩쓸려 죽는 뱃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뭐 이런 식...ㅠㅠ 




"남편의 배려를 얻어 한동안 연달아 야근을 했다. " (31% 지점)


이런 구절이 걸리적거린다고 끌어오다가, 내 아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 쫌! ㅠㅠ 




"그러나 그 숭고한 '연쇄 선물마'를 따라 하기에는 나의 인간관계가 턱없이 빈약했다." 57% 


보자마자 거부감이 생기는 저 단어,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지 모르곘다. 꼭 이렇게 표현해야 하나 싶다. 오해는 마시길. 좋은 구절 많으니까. 



외계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우주에 지구에만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사는 것은 아닐 거라는 궁금함과 호기심이 과학자들에게 우주로 신호를 쏘아보내는 일을 하게 만들었다면, 있을 지 없을 지 모르는 그 외계인들이 지구를 찾아 연락을 하거나 방문(?)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구 인간들에게 좋은 일일까. SF 영화를 보면서 식구들과 가끔 하는 이야기다. 외계인은 정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고 있을까? 왜 영화 속에서 지구는 항상 외계인의 침략을 받고 파괴당할까? 반대일 수도 있지 않나? 아, 반대의 경우라면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구인이 외계인을 찾아내고 침략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건가. 아아, 그래서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로군. 쩝. 외계인은 있을까? 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는데. 



책을 읽다가 <어린 왕자>를 꺼내러 갔다. 'tirer ta chaise de quelques pas' 표현에 대해 작은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천문학자의 눈으로 읽는 어린왕자.ㅋㅋㅋ 나도 노을을 좋아한다. 그런데 수성에서는 해 지는 광경을 엄청나게 오래 볼 수 있다고 한다. 오! 했다가, 해가 지는 데 88일이 걸리고 다시 뜨는 데 또 88일이 걸린다는 말에 윽! 했다.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는 말은 틀렸다. 일몰을 사랑하지만 88일 동안 볼 수 없다면 그게 뭐야. 짧아도 매일 보는 게 훨씬 좋아. 그리고 왜때문에 게으름뱅이?????? 



우주선을 쏘아올리겠다는 생각은 진취적인 것일까 허황된 것일까. 달에 우주선이 착륙한 사건이 있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여러 나라가 달에 가려고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운다. 우주선 한 대를 쏘아올리는 데 필요한 인력과 기술과 장비와 시간과 물리적/정신적 뒷받침들, 세세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이런 내용을 읽다 보니 도대체 우리는 왜 우주 탐사를 열망하는 것인가 싶다. 



우주에 조그마한 미생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은 인간의 행동이 우주에 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윤리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관찰자일 뿐, 바깥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다. 생태계를 위해 어떤 잔인한 포식자 종을 절멸시키거나 가여운 피식자를 집중적으로 키워낼 권리가 우리 인류에게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지구가 인간들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는 건 사실 아닌가? 우주에 인간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는 노력과 자세를 지구에도 적용시키면 좋을 텐데 하는 씁쓸함. 



달에 집을 짓는다면 어디가 좋을까 부분에 이르자 달의 땅을 분할해서 파는 사람, 그것을 사들여 매매계약서를 가지고 있다는 돈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돈을 번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관련 법이 없어서 처벌도 못 한다는데.



중간중간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본의 아니게 좋은 말보다 안 좋은 말을 더 많이 쓴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에세이는 응원해야 한다. 더 깊고 더 날카로운 이야기가 쏟아져야 한다. 말하다 보면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불안한 직장, 구조의 모순, 출산과 육아의 함정 들이 뒤집어지는 세상이 되기 위해, 더 많이 써주시길! 무언가를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왤케 다들 아름다운지! 게다가 천문학이야!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어디서나 진실이다. (36% 지점) (- 이런 좋은 구절들도 많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월에 읽겠다고 골라둔 책들을 미처 다 끝내지 못했다.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100자평 백일장 대상책을 읽어보겠다고 설친 때문이기도 하다. 짧은 문장으로 책 한 권에 대한 감상과 평을 '알흠답게', 어쩌면 출판사의 의도에 딱딱 맞게, 쓰는 능력이 내게는 없음을 알기에 뻘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책을 빌려보려고 노력했다. 최근의 책들이라 도서관 대기줄 느무 길어서 7월 말이 가까워올 때에야 한 권씩 대여가 가능했다. 정말,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펼쳐보지 않았을 책들도 있다.ㅎㅎㅎ 
















에디트 에바 에거,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어제 대출해서 새벽 2시까지 눈물을 흘려가며 읽은 책. 아직 뒷부분이 남았다. 역시 책은 사전정보 없이 읽어야 더 맛이 나는 법. 뒷부분이 얼마만큼 글의 힘을 잡아줄 지 아직은 모르겠다.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방금 다 읽었다. 간간이 약간의 메모를 하며. 뭐랄까. 완전 좋은 부분과 그렇게 좋지는 않은 부분들이 적절히 섞여 있는 책? 리뷰를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조금 고민되는. 
















뉴욕주민, <디 앤서> 


정확히 어떤 성격의 책인지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곳곳에 등장하는 전문 용어들에 대한 이해는 제쳐두고. 간혹 문법이 안 맞거나 좀 아닌 문장들도 있기는 했다. 조금 더 다듬는 시간을 가졌다면 좋았을 듯. (고치거나 아님 빼야 할 것 같은 예시가 있었다.) 

애초에 주식 투자 등에 관심이 없고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건가 대세에 궁금증을 가지는 정도인 나여서 애널리스트나 헤지펀드 어쩌구 하는 직업에 대한 관심도도 낮다. 지식도 없다. 그래도 책은 읽을 수 있다.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대한 책이 아니므로.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글쓴이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것이 설령 자본주의 끝판왕인 월스트리트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쪽 세상도 다를 건 없다. 투자도 결국 사람이라는 글쓴이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금융, 헤지펀드 등과 관련된 직업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전혀 문외한인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삶을 살고 싶은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 


덧) 글쓴이가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 뭐니. 왜 그랬어.ㅠㅠ 더 응원하고 싶게, 글쓴이는 여성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 <죽음의 춤> 


내가 갖고 있는 책이 마침 <아주 편안한 죽음>과 같은 책이었다. 길지 않아 금세 읽는다. 을유문화사의 번역보다 한빛문화사의 번역이 더 좋았다.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전자책 구입해서 읽었다. 종이책 살 거다! 다시 읽을 예정이고 아마도 여러 번 읽게 될 것 같다. 



*** 


아직 끝내지 못한 7월의 책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7-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끝내지 못한 책이 40권입니다요;;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07-30 21:21   좋아요 1 | URL
악!!! ㅎㅎㅎ 저도 그간 못 끝낸 책들 다 세면 어마어마할 거예요.ㅋㅋㅋㅋ
 

죽음. 존재하던 사람이 사라지는 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일.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어떤 이의 죽음이 희망이 될 수도 있는 일.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처음 친지의 죽음을 접한 건 20대 후반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큰집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살아생전 몇 번 뵙지도 못했고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더더욱 없는 할아버지, 나는 죽음이라는 걸 실감하지도 못하고 관이 나갈 때 울며 뒤따르는 고모들을 보며 꿋꿋이 서있었다. 너는 어째 눈물 한 방울 흘리지를 않니.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어떻게 억지로 흘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 후 시집에서 몇 번 장례식을 봤다. 내 할아버지의 죽음에도 울지 않던 내가, 얼굴도 잘 모르는 남의 집 식구의 죽음에 눈물이 났다. 그러니까 그 눈물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날 그 집의 분위기와 말들 때문이었던 듯. 


가끔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나는 엄마가 사라지면 슬플까. 나는 아빠가 사라지면 울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건데 그래도 괜찮냐고 묻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 거지, 하고 돌아서 어쩌면 코가 시큰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이방인>의 레몽이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것을 이해한다. 각자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더 필요하다. 생각하기 싫은 일이지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껏 죽음이라는 걸 멀리서 바라본 경험밖에 없다. 한국을 떠난 지 20년, 그 사이 누군가들은 점점이 사라졌지만, 나에게까지 연락이 올 일은 드물었고 연락이 오더라도 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보부아르처럼, 죽어가는 누군가를, 병에 걸려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면, 그때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는 그래서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누워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이제는 여기저기서 부고가 날아들 나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다. 겁이 나서 부모님과 통화할 때 하나마나 한 말을 내뱉는다. 아프지 말아라. 아픈 사람도 고생이지만 옆에 있는 사람도 고생이다. 씁쓸한 것은 이런 소리를 내 엄마한테는 하는데 아빠나 시집 어른들한테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자식의, 주로 딸의 보살핌과 병간호를 당연히 누려야 할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보부아르는 이런 씁쓸함을 초월했다. 어머니와 화해(또는 용서)를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미움과 증오와 상처를 제껴두고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또한 자기와의 타협이 아닌가. 이기적인 나는 이렇게 삐딱하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럴 수만 있다면 '편안한 죽음'이었으면 좋겠다. 남는 사람들이 덜 힘들게,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덜 힘들게, 그렇게 편안한 죽음을 바라는 것이 잘못일까. 죽음 앞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은, 주고받은 상처들은, 이해되고 용서될 수 있는가. 그러니 결국 죽음이라는 것도 관계의 일부분인 것이다. 보부아르의 자리에 서보고 그의 엄마 자리에 서보고, 수많은 상상을 펼쳐보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건'을 만난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까. 울지 않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겁이 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1-07-3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주전에 아는 분의 부모님 장례식을 다녀왔어요. 난티나무님이 얘기하신 ‘어떤이의 죽음이 희망이 될수 있다‘라는 생각 처음으로 했어요. 그래서 죽음이 만들어낸 상실이 아닌 희망 때문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진짜 세상은 참 단순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난티나무 2021-07-30 04:39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경우를 직접 보셨군요. 방금 문득 소설의 장면이 떠올랐어요...
하나로 정의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들로 이루어진 게 이 세상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