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 엄청 좋아요 잘 읽혀요 하고 9월 2일에 글 올리고는 엄청 좋았던 앞부분에 대한 페이퍼는 쓰질 않았네.ㅠㅠ 가사노동에 관한 글들, 57페이지까지 플래그 위주로 다시 훑어보니 이건 뭐 다 밑줄을 그어야 하는 거였다. 고민된다. 다 옮겨야 하나. 



** "만약 기술 혁신이 일어나서 반드시 해야 하는 노동량을 줄인다 하더라도, 노동 계급이 산업 안에서 투쟁하여 그러한 기술 혁신을 활용하고 자유 시간을 얻는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에는 그 내용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고립된 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책임져야 하므로, 가사노동을 고도로 기계화한다 해도 여성에게는 자유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성이 항상 근무 중인 이유는 아이를 만들어 내고 신경 써 주는 기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화를 통한 가사노동 생산성 증대는 요리, 빨래, 청소 같은 특정 서비스에만 적용될 수 있다. 여성의 노동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이유는 기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 P34


고립,에 동글동글동글 동그라미. 기계는 핵심노동만 하고 주변노동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므로 '기계화를 통한 가사노동 생산성 증대'는 3분의 1(혹은 그 이하)만 기대할 수 있다. 



** "또한, 여성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알지 못하면 남성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이것은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여기서 분명히 하려는 바는, 우리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세계에서 생산 활동을 하면서 임금을 받지 않을 때 상사의 형상은 남편의 형상 뒤에 숨이 있다는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남편이 가사 서비스의 유일한 수혜자처럼 보이는데, 이 때문에 가사노동은 모호하고 노예 상태와 유사한 특징을 띠게 된다. 다정하게 관여하고 다정하게 협박하는 남편과 아이들은 가사노동의 첫 번째 감독관, 즉 친밀한 관리자가 된다.
아내가 남편과 마찬가지로 밖에서 일하고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오는 경우에도, 남편은 신문을 읽으며 아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차려 주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가사노동으로 대변되는 특수한 착취 형태에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특수한 투쟁 형태, 다시 말해 가족 내부에서 여성이 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 P40


따라서 요점은, 기껏해야 거리 시위에 가끔 참여할 준비를 하고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임금을 기다리고 있을 뿐인 주부를 집 안에 평화롭게 남겨두지 않는 투쟁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주부라는 우리의 역할 그리고 우리 존재를 고립시키는 게토가 된 가정을 거부하면서, 가사노동의 전체 구조를 당장 깨부술 수 있는 투쟁 방식을 찾아야만 한다. 가사노동 중단 뿐만 아니라 주부 역할 전체를 끝장내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작점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투쟁의 주인공으로서 어떻게 위치를 점할 것인가이다. 요컨대, 가사노동의 생산성이 아니라 투쟁의 전복성을 더욱 높여야 한다.
가사노동 시간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의 관계를 지금 당장 전복해야 한다. 침대보와 커튼을 다림질하고 바닥이 반짝거릴 때까지 닦고 먼지를 터느라 매일매일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여성이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분명 여성들이 멍청해서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앞서 여성의 상황을 교육 수준이 보통 이하인 학교와 비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실제로 여성이 자아를 실현할 방법은 가사노동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자본이 여성을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 과정에서 차단해 버렸기 때문이다." - P41


그러니까 말이다. 투쟁. 싸워야 하는데. '투쟁의 주인공으로서 어떻게 위치를 점할 것인가'. 마침 또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다.@@ (나는 그 이후 쓰기를 일단 멈춤 했다고 한다. - 주방으로 갔더니 옆지기가 오늘은 오징어볶음 할까, 하고 저녁 준비할 태세를 갖추길래 밥만 얹어놓고 냅다 도망나왔다. 시간이 생겼으나 글은 쓰지 못하고 마당 풀 뽑다 왔다. 아침에 이 책 마저 읽느라 책상 앞에 꼼짝않고 앉아있으니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났다. 지저분해도 청소를 하지 않는 요즘의 나다. 청소하는 건 좋은데 책 읽는 게 방해되는 건 싫다. 방 청소한다고 들어와서 여기저기 밀어댄다. 청소하는 행위가 단순히 행위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무엇이 우선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무엇이 상생인가.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과 '뭐라고 말해야 기분나쁘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어처구니없음-나에게 짜증나는 순간-의 괴리, 이상과 현실의 괴리, 언제나 좁혀지려나.) 





** "우리는 여기서 승화라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한다. 단조롭고 하찮은 잔일들이 주는 절망감과 성적 수동성이 주는 절망감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성의 독창성과 노동의 독창성은 인간 욕구의 두 가지 영역으로, 우리는 ‘선천적 활동과 후천적 활동의 상호작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여성은 (따라서 남성 역시) 선천적 힘과 후천적 힘을 동시에 억압당한다. 여성의 수동적인 성적 수용성은 강박적으로 깔끔함을 추구하는 주부를 만들어내고, 단조로운 조립 라인조차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대부분의 하찮은 가사노동과, 같은 일을 매일, 매주, 매년 반복하고 연휴에는 두 배로 하게 만드는 규율은, 자유로운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우리의 유년기는 순교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우리는 백지보다 더 하얀 천 위에서 깨끗한 성생활을해서 행복을 얻으라고 배운다. 또, 섹슈얼리티 및 다른 창조적 활동을 동시에 희생하도록 교육받는다.
이제까지 여성 운동은 특히 질 오르가슴 신화를 파괴하여 여성의 성적 잠재성을 남성이 엄격하게 규정하고 제한하도록 허용하는 육체적 메커니즘을 폭로해왔다. 이제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독창성의 다른 측면들과 결부시키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의 노동이 우리와 우리 개개인의 능력을 불구로 만드는 한, 우리가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인 행세를 하고 그들이 하는 노동이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한, 섹슈얼리티가 항상 속박당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질 오르가슴 신화를 깨뜨리는 건, 종속 및 승화와 상반되는 여성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질 오르가슴 신화가 음핵 대 질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음핵과 질 대 자궁의 문제이기도 하다. 질은 애초에 상품으로 팔리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통로, 즉 자궁의 자본주의적 기능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우리의 선천적 힘, 우리의 사회적 도구의 일부이다. 결국 섹슈얼리티는 가장 사회적인 표현이고 가장 심오한 인간의 소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성의 해체이기도 하다. 노동 계급은 계급 자체를 초월하기 위해 계급으로 단결한다. 자율성을 초월하는기반을 만들어 내려고 우리는 계급 안에서 자율적으로 결속한다."  - P48~49


** "그리하여 우리는 가장 먼저 여성들을 서로에게서, 남성에게서, 자식에게서 분리하고, 여성 개개인을 가족 안에 가두려는 역할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마치 스스로 누에고치 안에 갇혀 죽어 가면서 자본을 위해 비단을 남기는 번데기 같다. 주부들이 이 모두를 거부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노동 계급의 한 집단으로,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지위가 가장 강등된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투쟁 전반에서 주부의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주부의 지위가,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지지하는 기둥, 바로 가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보완하는 인물, 바로 주부에 반대하고 여성의 개별성을 긍정할 수 있는 계획을 마땅히 제안해야 한다. 주부 역할의 생산성이 지속되는 상황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마땅히 내놓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성이 기본적인 육체적 기능의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게 시급히 요구해야 한다. 생산적인 창조성과 함께 가장 먼저 강탈당하는 성性적 기능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아 제한 연구가 이토록 더디게 진행되고, 거의 전 세계에서 임신 중절이 금지되고 결국 ‘치료‘ 목적으로만 허락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이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안이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자본주의적으로 관리되면 거듭해서 계급 차별, 특히 여성 차별을 만들어 낸다. " - P54



가사노동과 성을 연결지을 생각은 못했다...고 쓰려다가 어라 연결해서 자주 생각해 봤네 싶다. 가사노동 자체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가사노동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모양의 정신적 스트레스다. 안정감을 찾을 수 없고 친밀함을 느낄 수 없고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고 누구도 나의 정신적/육체적 힘듦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고립의 감정을 느끼는 여자에게 성이란, 섹스란, 그것을 나눌 사람에게서 조금의 위로도 받지 않을 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하면 섹스의 횟수가 늘 것이라는 내용을 어느 책에선가 봤는데 이 말은 절반만 유효할 것이고 가사노동의 의미를 단순화시킨다. 왜냐하면 '집안일'이라는 '행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 쓴 청소기의 예를 보라. 남편이 집안일을 했으나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여성은 마치 스스로 누에고치 안에 갇혀 죽어가면서 자본을 위해 비단을 남기는 번데기 같다." 

"여성 투쟁 전반에서 주부의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주부의 지위가,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지지하는 기둥, 바로 가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로사 언니도 좋아하고 싶다.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글인데 문장 사이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아마도 그 거리는 나의 부족함일 터, 이 언니 책 더 읽고 싶어 찾아보았더니 <집 안의 노동자> 달랑 한 권 번역되어 있다. 뭐야.  <탈정치의 정치학>에 글 한 편이 실려있는데 제목이 「발전과 재생산」 이다. <페미니즘의 투쟁>에 실린 글과 같거나 비슷한 내용일 듯하다. 


















** "수백만 여성이 전통적으로 여성이 영위하던 자리를 거부하면서 여성 운동이 일어났는데, 자본은 여성 운동을 만들어 낸 이 추동력에 달려들어, 더 많은 여성을 노동력으로 재편하고 있다. 여성 운동은 이 상황에 저항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성 운동은 운동의 존재 자체로, 또 더욱 분명한 행동으로, 여성들이 노동을 통한 해방이라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분히 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십억 톤의 목화를 자르고, 수십억 개의 그릇을 씻고, 바닥을 수십억 번 닦으며, 단어를 수십억 개 입력하고, 수십억 번 타전하며, 수십억 개의 기저귀를 빨았다. 이 모든 일을 손수, 또 기계로 했다. 저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던 영토에 우리를 들여보내 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착취를 마주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제3세계의 저발전과 거대 도시의 저발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대 도시의 부엌에 도사리고 있는 저발전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인 기획은 제3세계가 성장할 것을 제안한다. 제3세계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에다가 반反산업혁명의 고통까지 당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거대 도시에 사는 여성들도 이와 동일한 ‘원조'援助를 받아왔다. 그러나 해야만 했기에, 또 여분의 돈이나 경제적 자립 때문에 집 밖으로 일하러 나간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인플레이션이 우리를 이 빌어먹을 타이핑 인력 혹은 조립 라인에 못 박아 버렸고, 이 상황에서 구원은 없다고. 우리는 저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성장을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하는 여성의 투쟁은 가정의 고립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게 아니다. 종종 월요일 아침이 되면 그렇게 하고 싶어지더라도. 마찬가지로 주부의 투쟁 역시 집 안에 감금되는 상황을 사무실 책상이나 공장 기계에 붙들려 있는 상황과 바꾸려는게 아니다. 때때로 12층짜리 집단 주택 안에 존재하는 외로움보다는 나아 보일지라도." - P55~56



자, 일단 여기까지 쓰고 늦은 아침을 먹겠다. 어제는 일요일이었고 오늘은 월요일이다. 당연한 것 같은 시간의 흐름인데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뽀인뜨다. 뭐래.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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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책도 그렇지만 왼쪽 책도 어쩐지 페미니즘의 투쟁과 중복될 것 같아요.

읽느라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고생하셨어요. 꼭 나의 마음 같은 글을 읽는 것도 기쁘고 몰랐던 작가를 알게 되는 것도 기쁘죠. 고되지만 분명 얻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난티나무 님, 10월도 11월도 12월도 함께 열심히 가봅시다!

난티나무 2021-09-27 17:59   좋아요 1 | URL
그쵸그쵸. 그래도 <집안의 노동자>는 왠지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긴 해요. 가사노동 부분이 좋았거든요.^^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이야기한 것들이 더 자세자세하게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또 운동한 거 위주로 이야기할려나...ㅎㅎㅎ
12월까지 이미 도서 구비 완료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9-2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리뷰 어떻게 쓰나 앞이 캄캄합니다. 멋진 언니들도 왤케 많은지요! 중간중간 정리해놓은걸 정리중인데 하...읽어야 할 책도 더더 늘어났고요. 저도 밥부터 먹어야겠어요ㅋ😳

난티나무 2021-09-27 18:01   좋아요 1 | URL
리뷰 쓸 수 있을까 싶습니다요.^^;;;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감상문...이 될 거 같은, 뭐 저야 늘 그렇지만요.ㅎㅎㅎ
저는 집에 있는 에코페미니즘,을 이제 읽어야 하는가보다 했습니다. 맛난 거 드세요, 미미님~!^^
 

















학교라는 제도의 유해성과는 별도로,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선생님들이 모두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꿈을 응원하고 책을 읽는 법을 알려주고 끌어주고 다독이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새삼 가져본다. 어린 시절에 그런 선생님을 단 한 명만 만났다면, 독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면,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건 여전히 쓸모없는 말일 뿐이지만, 그랬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생각한다. 그랬다면. 괜찮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만 선생님인 것은 아니니까.

열등생이었던 페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십 대 후반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설령 그것이 암기 위주 지식에 불과하더라도, 책상에 앉은,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그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나에겐 너무 벅찬 -가슴 뿌듯한 벅참 말고 힘겨운 벅참- 일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 국어를 가르치면 한문도 자동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일종의 세트세트 교과분류에 따라 한문 수업도 잠깐 한 적이 있다. 공부를 싫어하는 한 중학생 아이는 대체로 10점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내 나름 성의를 다해 공부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켜보려고 수업시간 애를 썼고 아이들의 시험성적이 오르기를 바랬으며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랬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계속 싫어하지 않기를 - 왜냐하면 몇 년간 어쩌면 대학에 간다 하더라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주구장창 느껴야 할 테니 - 바랬다. 또 한 명의 어른이 하는 시덥잖은 잔소리로 들릴 게 뻔하더라도 말이다. 다음번 시험을 치고 온 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예의 그 아이가 눈을 빛내며 선생님 선생님! 나를 불렀다. 자랑스러운 기운이 눈에 가득했다. 저 한문 잘 쳤어요! 반가운 마음에 몇 점 받았냐고 물었다. 미숙한 나. 아이는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뿌듯하게, 외쳤다. 20점이요!!!

미숙한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띈 채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 입을 열면 조롱의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미 내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잘했다고, 말했어야 했다는 자책. 아이의 자랑스러움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 순간의 격려가 아이를 도울 수도 있었으리라는 후회.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인지라 이 생각은 나중에 이렇게 바뀌기도 했다. 내 입에서 조롱의 말이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랬다면 나는 더더욱 그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 순간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소용없다. 너는 그저그런 선생 나는 그저그런 학생, 이었던 멀찍한 관계가 너는 쫌 괜찮은 선생 나도 쫌 괜찮은 학생, 그래서 우리는 다정한 사이,인 관계로 바뀔 기회는 그 순간 이후 사라졌다. 친밀함을 쌓을 수 있었던 기회는 날아갔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까까머리와 동글세모한 얼굴과 장난기 많은 그 웃음과 눈을, 기억한다. 여전히 그 눈에 미안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 아이들에게도 쫌 괜찮은 사람인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현재진행형 사실은 이십대의 나와 오십이 코앞인 지금의 내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그저그런 사람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매일 조금씩 페낙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기억들이 무한반복으로 튀어나오리라는 걸 알았다. 학생으로, 선생으로, 그리고 이제는 학부모로, 내 경험들이 순간순간 치솟아오를 것을,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들과 수많은 두려움과 죄책감과 미련과 후회와 그에 비해 양으로 따지자면 엄청나게 적은 만족감과 희열, 행복과 자긍심 같은 감정들이 함께 툭툭 비집고 나올 것을. 그러기를 바란다.


En tout cas, oui, la peur fut bel et bien la grande affaire de ma scolarité ; son verrou. Et l‘urgence du professeur que je devins fut de soigner la peur de mes plus mauvais élèves pour faire sauter ce verrou, que le savoir ait une chance de passer.

어쨌든 그랬다.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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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상황은 폭력을 내재한다. 말하자면 임금을 받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상황이 폭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성의 상황은 마녀가 화형당한 장작더미 위에서 구축되고, 폭력으로 유지된다. 현재 전 세계 인류의 재생산이 처한 상황 속에서, 여성은 계속 빈곤의 폭력에 시달린다. 여성은 가정에서 보수 없는 책무를 짊어져야 하고, 그 결과 외부 노동 시장에서 힘없는 계약 당사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심화된 폭력에 시달리며, 착취적이고 끔찍한 노동 환경을 가진 성산업 유형에 점점 더 끌려 들어간다. 자본주의 발전은 갈수록 전쟁 같은 민낯을 드러내면서 여성의 상황을 그야말로 더욱 악화시키고, 여성을 대상으로 삼은 폭력 행사 및 폭력적인 태도를 확대시킨다. 한 전형적인 사례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 강간 형태로 이루어진 전시 강간이다. - P186

여성의 출산 거부로 제기된 인간의 재생산 문제는, 이제 다른 발전 유형을 요구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웰빙 개념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행복을 요구한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발전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데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오로지 노동이 전부인 삶을 거스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과 다른 이의 몸으로 이뤄진, 육체가 있는 삶과 섹슈얼리티가 필요하다. 단지 몸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드는 기능들이 아니라, 온전한 몸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단순 저장고 혹은 노동력 재생산 기계인 몸을 거스르는 온전한 몸, 그 몸으로 만들어지는 육체적 삶과 섹슈얼리티가 필요하다. 비단 다른 남녀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필요하다. 이제는 도시 밖으로 멀리 힘들게 나가야만 이런 생명체들과 마주칠 수 있다. 사회 집단 속에서 살아있는 전체 자연 속에서 개인의 고립에 반대하는 공동체성이 필요하다. 겨우 공영공원과 광장 혹은 허용된 극소수의 다른 구역들이 아니라, 공공 공간이 필요하다. 인클로저와 사유화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공공 공간이 필요하다. 유희, 불확정성, 발견, 경이, 사색, 감동이 있어야 하고, 공유 공간으로서의 대지와 온전하게 관계 맺기를 꿈꿔야 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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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1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어억 저는 아직 백페이지도 못갔어요. 부지런히 따라갈게요!!

난티나무 2021-09-16 20:44   좋아요 1 | URL
👍👍👍👍👍👍👍

청아 2021-09-16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난티나무님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벌써 이만큼이나👍👍👍

난티나무 2021-09-16 22:18   좋아요 1 | URL
조금씩 조금씩 ㅎㅎㅎㅎ 재미 없으려다 막 재미(?) 있고 뼈때리고 그래요. ㅎㅎㅎ
 

페이퍼 써야 하는데. 

리뷰 써야 하는데. 

아 뭐라도 끄적여야 하는데. 

와 같은 상태가 이어진다. 별 수 없이 일기만 몇 글자 적는 날들이다. 

쓰기에 대한 조바심과는 별개로 읽기에 대한 조바심도 극성이다. 매일 읽어야 하는 책들도 널렸는데 대출은 왜 자꾸만 하는 것인지. 전자도서관 들어갔다가. 




예약권수 꽉 채워 다섯 권 예약해 두었는데 한 권 가능하다고 알림이 왔다. 



대출하기,를 누르려다 멈칫. 음. 





현재 대출 중인 책은 두 권. 다음주 월요일 반납이니 그 전에 다 읽어야 한다. <욕구들>은 예약이 밀려 있어 연장도 안 된다. 자 지금 대출대기인 책까지 빌리면... 다 읽을 수 있을까? 예약 줄이 길어서 안심하고 있다가 패스패스패스되어 내일도 대출대기함에 책이 들어있을 수 있는데. 뭐 이런 생각 다 필요없다는 거 이미 나는 안다. 이 글 작성하고 나면 돌아가서 대출하기를 누를 거라는 거. 오늘 누르나 내일 누르나 그 고민 조금 더 하겠지. 와 이거 읽어야지 이거는 읽어야 해 이거도 궁금한데 이러면서 예약 줄 세우는 거 진짜 대책 없다. 미루기를 그렇게 잘 하면서 이건 뭐 순식간이야. 


왜 때문인지 <페미니즘의 투쟁>과 <제2의성>은 열심히 읽고 밑줄 치고 플래그 붙이고 그러취! 윽! 하면서도 글 쓰기를 미룬다. 어쩌면 이런 책들을 완전하게(?) 소화시키지 못하고 내 언어로 풀어낼 길 없는 무지와 스킬 부족으로 나도 모르게 찌그러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읽기 능력이 한없이 떨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집중,이라는 것을 제대로 했을 때 눈에 머리에 들어오는 글자와 문장들은 뼈를 후리는데 조금만 정신이 흩어지면 사라락... 집중 시간이 아주 짧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한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페이퍼는 대책 없는 읽기 욕심에 대한 것이다. 능력 없이 쌓아두는 욕심.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반납해야 하는 책들 쌓는 거는 도서관 앱에 들어가지 않아야 해결이 될까. 그 와중에 사고 싶은 책은 계속 생기고. <욕구들> 앞부분 읽고 있지만 좋다. 집중, 해서 읽어야 한다. 그냥 슥 읽을 책이 아니다. 그래서 종이책을 사야 하나. 뭐 이런.  


여자는 실제보다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어. 그러니 나는 과소평가하지 않겠어. 긍정하겠어. 그게 과대평가가 될런지 한없는 낙관이 되어버릴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읽자. 정신 차리고. (이게 정신 차리는 짓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대출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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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16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입니다^^

난티나무 2021-09-16 20:44   좋아요 2 | URL
🤣 저만 그런 거 아니죵? ㅎㅎ
 

나는 고립된 생활을 한다. 몇 년 전까지는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 있어 고립까지는 아니었는데 모두 이사를 가고 난 후 친구들의 왕래가 끊겼다.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는 것을 절대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인 친구는 없다. 시골일수록 이방인을 배척하는 문화가 짙어서 10년 이상을 산 마을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산다. 

지금보다 더 철이 없던 30대 초반에는 여기 알라딘에 미주알고주알 페이퍼를 쓰며 이웃님들의 위로를 받았다. 추억을 돌아보라는 오래전 페이퍼들이 뜨면 새삼 그때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분들이 생각나 가슴이 따뜻해지고 한없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알라딘을 떠나있던 동안에는 또다른 인터넷 세상에서 놀았다. 책은 못 읽었지만 거기에도 따뜻한 사람들은 있었다. 말을 나누었고 한국에 들어가면 아주 드물게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연락이 끊어졌다. 많은 부분 내 탓이라 생각한다. 성격 어디 가질 않지. 어떤 공통점을 발견해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거의 모든 인연을 쳐내면서 살았던 듯하다.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두고 절대 먼저 넘어가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 나를 알아보고 그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오는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되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소극적인.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만 친구를 (그나마)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여성에게 협력적 자아란 어떤 의미인가" "여성들 간 관계의 재배열" "자기 정의(self definition)의 부재" 같은 구절들이 가슴을 툭 툭. 이주민들의 "가장 큰 공포는 낯선 곳에서 외롭게 죽을 수 있다는 것" 은 바로 내 이야기. 질병과 의사와 병원이 두려운, 작은 눈의 아시아 여성. 난 여기에서 죽고 싶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간다 하여 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껏 멀리 할 수 있어 다행이었던 관계들이 나를 옥죌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엘 갈 수 있다.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불러모아 음식을 나눠먹고 수다를 떨 수 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손짓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단지 언어 하나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과는 하지 못하고(안 하고) 산다 생각하니 한없이 내가 초라해진다. 핑계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 또한 나다. 단순히 언어 때문이라 퉁 치기엔 원인이 더 복잡한 것 아닌가 또 합리화. 무서울 것이 없어야 하는데 겁이 너무 많다. 그것이 언어에 대한 두려움인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인지 모르겠다. 둘 다인 것 같다. 





어젯밤에 이렇게 적어놓고 새날이 밝았다. 김현미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어느 순간 눈물이 났고, 그런 와중에 힘이 없고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나에 대한 원망이 조금은 사라졌다. 고립된 생활 속에서 나는 그래도 쓰러지지 않았다. 자주 아팠지만 병들지 않았다. 우울했지만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를 칭찬하기로 한다. 

언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나도 그 이후의 나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를 도와주었던 분들,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분들, 비록 얼굴도 모르고 인터넷상에서만 만나는 분들이지만, 그럼에도 모두에게 고맙다. 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버팀목의 많은 부분이다.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친구들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고 연결될 수 있음에 다시 감사하기로. 직접 만나지 못하는 제약과 한계가 얼마간은 장점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것 말고는 나에게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나를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그러다보면, 어쩌면, 이곳에서도 한걸음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얼굴에 철판을 까는 용기를 조금은 내어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이제는 선을 끊는 사람에서 잇는 사람으로. 제발. 



"일상생활에서 너무 지치고 내가 현재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계속 망각이 일어나잖아요. 내 자존감을 충족하지 못하고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을 때, 삶의 균형을 맞춰가려면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의례화된 형태의 사회적인 관계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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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12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이 글 너무 좋아요~♡
공감되는 부분도 너무 많고요. 저는 외동이라 그런지 사람들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더 많아요. 대신 혼자인 시간은 오롯이 나를 들여다볼 여유를 주기도 하니 진정한 관계를 위해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해요. 이렇게 온라인에서의 만남도 이곳에서 참 특별하게 생각하게 됐고요. 그런 면에서 좋은 글로 마음을 나누어주시는 난티나무님 항상 응원하고 있고 저도 오늘 칭찬드립니다~🤗

난티나무 2021-09-13 17:37   좋아요 1 | URL
부끄러운데 공감해주셔서 늠 감사해요 미미님. 좋은 말씀도~
흑흑 울고 싶다...^^;;;
‘사람들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더 많아요‘ 이거 저도 그래요. 그래서 사람의 성격을 소극적이다 적극적이다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고요.
여기는 오늘 아침 해가 좋습니다. 미미님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시기를~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