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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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는 사람을 멀리 데려간다. 거기에 어떤 감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불현듯 다다르게 되는 그곳은 내 경험, 내 생각에 빗대어 시작된 공간이자 시점이며 순간이다. 때로는 깨달음으로, 기쁨으로, 분노로, 우울로, 각양각색의 감정 집합소인 그곳들. 


 비비언 고닉의 책을 관통하는 몇 가지 화두 중 나를 끌어당긴 건 '우정'이다. 한 단어로 말하자면 그렇고, 두 단어로 말하자면 '좋은 대화'다. 뉴욕의 거리, 사람들, 공중을 떠도는 말들과 관계들 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듯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배어 나오는 통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대화, 좋은 대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연'이 매 순간 겹쳐지는 관계, 나는 그것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슬펐다. 단순히 슬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뭐든 그렇지 않겠는가. 언어에서 명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글 곳곳에서 나와 겹쳐지는 무언가가 보였고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그 문장들에 나를 대입했다. 그러면서... 


 뒤늦게야 깨닫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되묻지 않는, 그런 말 없이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관계. 그런 관계를 찾고 싶어 하는 것, 그게 나이고, 인간이구나. 그게 안 돼서 매번 실망하고 자책하고 돌아서는구나.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열린' 마음, 그걸 갖추기가 그렇게 어렵다. 자기 비하 성향은 이미 존재하는 것마저 가려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다. 



"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 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 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142/195)


 손상된 자아, 두 걸음 옮기지 못하는 것, 두려움을 사랑하는 일... 저기, 혹시 내 얘긴가요? 좋고 많은 이야기들 다 놔두고 이런 구절이 눈에 훅 들어온다. 그리고 이젠 나도 좀 달라져야지 생각한다. 이 생각은 뻔한 전개로 이어진다. 나는 비비언 고닉이 아니고, 깨닫는다고 변화하는 건 아니니까. 



"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선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기 마련이다. " (110/195)


 저자의 다른 책에도 언급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맞는 말이고 당연해 보이는데, 일상에서도 그렇다고 느끼는데, 유독 이 구절이 뇌리에 오래 남아있다. 친구들이 떠올랐고 '공통의 기질'을 가졌을, 그래서 대화가 좋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내게도 있다, 그런 '우연의 순간'들이. 그러나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인 동거인과 나에게는 대화에서 필요한 '공통의 기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깨닫고 표현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를 자주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었고, 나중에는 알고 싶은 마음을 버렸는데, 귀를 열어도, 되물어서 답을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게 무슨 말이야?'는 아직 서로 자주 쓰는 말이다. 몸으로 막연히 느끼던 것을 책의 언어로 마주하는 일이 기쁨이면서 슬픔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세상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과의 관계이고 세상 가장 따스한 것이 또 인간과의 관계이다.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아주 절실하게. 인생에서 말이 통하는 친구만큼 필요한 게 또 있을까? 우정은 곧 사랑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심리적 거리다. 고닉도 '절친' 레너드와 한번 만나면 일주일 동안 연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그와의 대화가 그리워진다고. 너무 찰싹 붙어있지 않기. 


 다른 의미에서 또 슬펐던 부분이 있다. 노작가 앨리스의 요양원. 그가 요양원에서 보낸 7년이라는 시간. '좋은 대화'를 할 수 없어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생활. 어떤 모양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노년에는, 앨리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가닿은 여러 명처럼 그렇게 나와 연결된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 나는 좋은 대화를 계속 갈망할 수밖에 없겠다. 노년을 생각하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읽고 쓰고 말하면서. "뭔 말인지 딱 알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위해서. 지금 그런 관계인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새 친구와,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낯선 이와도 우연의 순간을 나눌 수 있기를, 매일 보는 이와도 그런 순간을 맞을 수 있기를, 책을 읽으면서도 자주 그럴 수 있기를. <짝 없는 여자와 도시>가 내게 그런 순간들을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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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3-17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럴 수 있을 거예요☺️

2023-03-17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7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에나 2023-03-17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에서 제가 별표 막 해둔 문장이랑 똑같아요. 저도 동거인과는 대화가 아예 안 되는데 (좋은 대화만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남성에겐 그런 기대도 안 했고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생각도 안했다는 걸 깨닫고...아악.ㅋㅋㅋㅋ
내가 한 마디 하면 그 뒤에 숨어있는 열 마디를 캐치해주는 대화가 있죠. 쾌락 폭발!그리고 좋은 대화를 나누려면 (고닉과 레너드처럼) 적절한 거리감과 은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고로 동거하면서는 힘들닼ㅋ)

난티나무 2023-03-17 20:24   좋아요 1 | URL
오홍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셨다니 역시! 저는 기대를 했더랍니다...ㅠㅠ 배우자 선택 기준도 그거였는데... 하... 안 되더라고요. ㅎㅎㅎ
동거하면서 그게 되려면 진짜 거리 필요하고요, 은은한 그리움, 음 이건 어째야 하나... 주말부부 정도면 딱 좋을 거 같은뎅, 아니 한 달에 한 번 보는 사이 ㅋㅋㅋㅋㅋ

baboya333 2023-05-05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난티나무가 떠오르네요.

난티나무 2023-05-05 13:18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ㅋㅋㅋㅋㅋ
 
특별한 소녀 - 페미니스트 고스트 스토리
베니타 코엘료 지음, 유숙열 옮김 / 이프북스(IFBOOKS)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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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라고 부제가 붙었지만 이 책은 귀신이야기가 아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페미니스트 고스트 스토리'라는 구절이 흥미를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도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몇 글자라도 써야 겠다고 생각하고 리뷰창을 연다. 별 넷? 별 다섯? 하다가 다섯 개를 꾹 누른다. 인도의 이야기라는 점이 별 하나를 더했다. 우리에겐 세계의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읽어보면 알겠지만 각각의 짧은 귀신이야기들은 한마디로, 남성이 저지르는 여성혐오범죄들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데, 어차피 맨앞에 옮긴이가 다 써놓았다. - '결혼 지참금, 가정 폭력, 매매춘, 성적 학대, 자살, 이슬람 종교, 카스트 제도 등 여성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7) 성폭력, 명예살인, 동성애, 남성우월주의+남성중심주의+남성특권, ...... 


때로는 몽환적이고 가끔은 시적이기도 한 글들은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중반을 넘어서 피아노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거리 두기 또 실패. 특별히 아름답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거나 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들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귀신은 말 그대로 귀신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하고 형체가 없기도 하다. 문득 내 삶에서 이런 귀신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백인여성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물들어있는 탓인지 중간중간 인도여성을 떠올려야 했다. 오 이런, 내 머릿속 기본값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또 깨닫는다. 







 (Venita Coel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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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2-1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해외문학 읽을 때 기본값 백인인 것 같아요. 공감 ㅠㅠ

난티나무 2023-02-11 17:23   좋아요 1 | URL
재밌는데 슬퍼요, 분노도 욱!
읽다가 헐 했답니다. 기본값 백인… ㅠㅠ 흐융

단발머리 2023-02-11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기본값은 백인…. 표지가 엄청 강렬하네요.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난티나무 2023-02-11 17:27   좋아요 0 | URL
표지 저는 좀 응? 했는데 아무래도 인도인데? 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그러면서 읽을 때는 어느새 인물을 백인으로 상상… 아 정말 ㅠㅠ
영어판 표지는 심플(?)하더라고요.

미미 2023-02-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갈래요! 어릴 때 봤던 <전설의 고향>도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소재가 여성혐오, 성차별, 계급차별... 그땐 그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마냥 무서웠는데 다시 보면 무섭기 보다 슬플 것 같아요.

난티나무 2023-02-11 17:31   좋아요 1 | URL
오 전설의 고향!!! 무서웠죠.ㅠㅠ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들을 잘 매만져서 글로 쓴 것이 이 책… ㅠㅠ 배경이 인도라는 차이만 있겠네요. 맞아요 미미님 말씀대로 지금 다시 본다면 슬플 것 같습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커버 에디션)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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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옳다. 의지하거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곁의 사람은 중요하다. 우리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보고 살피고 함께 걱정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 인간이므로. 아니 인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소설 속 테이트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카야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꼭 테이트여야 했을까. 흔하디흔한 영화나 드라마나 다른 소설들처럼 약한 여성 주위에 그를 돌보는 남성과 그를 해치는 남성을 놓아둔 설정. 도움을 주는 '착한' 존재인 남성. 악을 제거하는 역할은 여성일지 몰라도 찜찜함이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인 듯하다. 내가 썼다면(이라고 말이 안되는 가정을 해보자) 테이트는 여성이었을 것이다. 단단하고 여유있고 힘이 세고 똑똑하며 결단력이 있는, 그러나 장점만 가지지는 않은, 여성. 그 여성과 카야는 물질적 거리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성애주의와 로맨스 환상(이라고 하긴 그렇지만)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다 위안삼기에는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닌가.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고 여성은 여전히 교육받지 못한 채 버림받고 상처받고 폭력에 내몰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그만큼 성장했으니 다행이다 하기에는... 그런데, 주인공이 남성이었더라도 불만스럽긴 했을 것이다. 또 남성성장서사야?하고. 1960년대(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라는 시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이건 소설인데. 픽션이라고. 


여성연대, 자매애, 같은 걸 내세우기에 현실은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도 싶다. 소설에서조차 그려낼 수 없다는 건 작가의 상상력 빈곤 탓일까, 불가능 지레짐작 탓일까,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무심함 탓일까,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까... 테이트라는 남성을 결국 비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어쩌면, 적절한 현실 반영일까. 어째서 항상 이성애가 시작되고 이성애로 끝나야 하는 걸까. 그래서 그 둘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걸 너무 똑같은 모양으로, 한결같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이성애의 모양도 이젠 좀 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 이미 오래 전에 바뀌었어야 하지 않나 말이다. 


소설 곳곳에는 백인우월주의를 포함한 인종차별, 성차별,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차별, 등의 묘사가 엿보인다. 이런 부분들을 좀더 강렬하게 썼다면 소설의 분위기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으로는 좀 모자라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간간이 눈물을 흘렸으며 곳곳의 문장들에 스티커를 붙였다.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들. 서사와 상관없이 곱씹게 되는 문장들. 




"놀란 사슴들이 고개를 홱 치켜들자 허공에 물방울이 흩뿌려졌다. 카야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소스라쳐 달아날 테니까. 야생 칠면조를 관찰하면서 배운 교훈이었다. 포식자처럼 행동하면 상대도 먹잇감답게 행동한다. 그냥 못 본 척, 천천히 가던 길을 가면 된다. 표표히 지나치자 사슴도 카야가 염생초 군락을 지나 사라질 때까지 소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58)


"지금은 점핑에게서 필요한 물건을 구하면 되고,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 만큼 홍합이 있었다. 그리츠에 넣어 끓이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으깨면 꽤 먹을 만했다. 홍합은 물고기처럼 눈이 달려서 카야를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100)


눈이란 무엇일까, 가끔 생각하게 되는 문제. 눈이 달린 건 먹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도 점점 눈이 달린 것들을(아직은 먹긴 하지만), 그 눈들을, 한참 쳐다보게 된다. 살아있는 눈, 죽은 눈, 내 눈. 자연의 법칙(?)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 그러나 자연적인 것은 얼마나 자연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또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 생각하다 보면 한없이 도돌이표가 찍히는 기분. 




"엄마는 여자들은 남자보다 서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정을 가꿀 수 있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카야는 숲속 더 깊이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들이 백사장을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멀어져 모래사장의 작은 얼룩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104)


카야의 엄마는 피해자이며 희생자이다. 동시에 카야나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성의 삶을. 우리가 흔히 '버리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비난하는 많은 어머니들의 것이기도 한, 족쇄와 같은 그것을. 안타깝기는 해도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복잡하다. 알면서도, 지킬 수 없는 것. 그런 상황. 우정을 가꿀 수 있는 방법은 누구나 당연히,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다. 




"열네 살치고는 야윈 편이지만 몸이 다부진 카야는 오후의 해변에 서서 빵 부스러기를 갈매기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아직도 갈매기들의 숫자를 헤아리지 못했다. 아직도 글을 읽지 못했다. 이제 독수리와 하늘을 나는 백일몽 같은 건 꾸지 않는다. 진흙을 파서 저녁거리를 장만해야 하는 아이는 상상력이 납작해져 빨리 어른이 되나보다. "(111)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먹고 살기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 다른 무엇도 안중에 없게 된다. 생존과 더불어 존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생존을 위해 얼마나 행동하고 있나, 어영부영 살면서 입으로만 가치니 존재니 부르짖는 건 아닌가, 가끔 회의에 빠지고. 




"그렇게 누워서 엄마는 말했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며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함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122)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애들은 함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었다. 대단한 일이다. 겉으로 보면 멍청해 보이는 여자애들이었지만, 메이블이 여러 번 말한 대로 확실한 한 패거리였다. 

"어디에서도 여자 친구들이 필요해요. 영원히 지속되거든. 서약도 필요 없고. 여자들끼리 꼭꼭 뭉쳐 다니면 거기가 이 땅에서 제일 따뜻하고 제일 터프한 곳이지요." (188)


여자 친구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얼마나 잘 맞으며 어떻게 현명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지속하는지의 능력(?)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렇다. 여자들은 지속한다. 한 사람과 영원히 지속하기는 어려워도 많은 관계를 이어나간다. 카야의 성장과 성공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들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간의 연결과 관계를, 그 중요함을 말하는 문장들. 




"카야는 체이스를 생각해서 웃어주었다. 살면서 해본 적 없는 일인데도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했다. "(221)


체이스, 이 나쁜 놈. 나쁜 놈도 머리를 쓸 줄 안다. 기다릴 줄 안다. 먹잇감을 포획해놓고 잡아먹기 전에 충분히 기다렸다고 나쁜 놈이 조금 덜 나쁜 놈이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한 조각을 포기하는 일, 자신의 수많은 조각을 모두 포기하는 일, 이성애와 결혼, 가부장제. 




"정말로 외딴 이곳에서는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채집하고 글을 읽고 야생을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의 기척을 기다리지 않는 건 해방이었다. 그리고 힘이었다. "(226)


타인의 기척. 할 말 많음. ㅠㅠ 옳다. 타인의 기척을 기다리지 않는 건 해방이다. 그리고 힘이다. 




"[잘 알려져 있듯 자연에서는 2차 성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수컷들이 약한 수컷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영역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뿔이 가장 크다든가 목소리가 굵다든가 가슴이 넓다든가 우월한 지식을 가졌다든가. 암컷들은 이런 위풍당당한 수컷들을 선택해 짝짓기하고 주위에서 가장 뛰어난 DNA를 지닌 씨앗을 받아 자식에게 물려준다. 생명의 적응과 지속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현상이다. 덤으로 암컷들은 새끼에게 최고의 영역도 물려줄 수 있다. 

그러나 강인하지도 못하고 아름답게 꾸미지도 못하고 지능도 떨어져서 좋은 영역을 지킬 능력이 없는 발육 미달의 수컷 중 일부는 온갖 교묘한 술수를 써서 암컷을 속이려든다. 왜소한 몸을 한껏 부풀린 자세로 돌아다니며 과시하거나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라도 자주 고함을 질러댄다. 이런 수컷들은 위장과 거짓 신호에 의존해서 여기저기에서 교미의 기회를 움켜쥔다. 작가에 따르면, 조막만 한 황소개구리들은 풀밭에 웅크리고 숨어 우렁차게 울며 암컷을 부르는 알파들 옆에 바짝 붙어 있곤 한다. 강인한 목청에 이끌린 암컷이 여러 마리 나타나 알파 수컷이 그중 한 마리와 교미하느라 바쁜 틈을 타 약한 수컷이 펄쩍 뛰어나와 남은 암컷 중 한 마리와 교미를 하곤 한다. 이런 사기꾼 수컷이 바로 '음흉한 섹스 도둑'이다. "(228 - 음흉한 섹스 도둑 이라는 제목의 논문 인용 부분)


음흉한 섹스 도둑. 생각하면 할수록 섹스의 '폐해'가 많아진다. 오늘 아침에는 그런 이야기도 했다. 세상에서 삽입섹스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강간도 사라지고 결혼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간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남편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들이 생길 거라고 큰넘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가 말했다. 암울한 지구다. 




"몇 주가 지나고, 카야의 판잣집에서 달걀 프라이와 햄 그리츠로 아침을 마친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카야는 사랑을 나눈 후 맨몸에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섹스는 모텔에서의 첫 경험 이후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카야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곤 했지만 어떻게 그 얘기를 꺼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원래 어떤 기분이라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게 정상인지도 모른다. "(241)


환상. 권력. 그리고 감정. 인간의 '일반적인' 섹스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섹스는 감정이다. 여성들의 감정노동에는 섹스도 포함되지. 카야처럼 '이런 게 정상'인 줄 알고 평생을 사는 여자들이 있다. 많다. 많았고 지금도 많을 것이다. 




"카야는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왜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피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용서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걸까? 카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247)


이 주제로 많은 글이 씌어졌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장착시키고 '용서'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라는 헛소리는 사라져야 한다. 



그밖의 구절들.


"카야는 논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 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229)


"카야는 별뿐 아니라 시간도 고정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다. 시간은 행성과 태양을 두고 속도를 내거나 휘어지고, 골짜기와 산에서 서로 다르며, 공간과 같은 결인데 이 시공간의 결은 바다처럼 휘어지고 부푼다. 행성이나 사과 같은 사물이 추락하거나 궤도를 도는 건 중력에너지 때문이 아니라 질량이 높은 사물이 창출하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시공의 주름으로 - 마치 연못에 잔물결을 일으키듯 - 직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야는 이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중력은 인간의 사고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않으며, 고등학교 교재는 여전히 지구의 강력한 중력으로 인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진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232)


"... 바다는 늘 습지보다 크게 분노한다. 깊은 만큼 할 말도 많다. "(261)


" "속상하지, 당연해. 하지만 카야, 신의를 지키지 않는 건 남자만이 아니야. 나도 속고 차이고 여러 번 상처받았어. 사실, 사랑이라는 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아. 하지만 실패한 사랑도 타인과 이어주지. 결국은 우리한테 남는 건 그것뿐이야. 타인과의 연결 말이야. ..." "(300 오빠 조디의 말 중에서)


"암컷 반딧불은 허위 신호를 보내 낯선 수컷들을 유혹해 잡아먹는다. 암컷 사마귀는 짝짓기 상대를 잡아먹는다. 암컷 곤충들은 연인을 다루는 법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340)


"법정의 언어는 습지의 언어처럼 시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야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점을 꿰뚫어보았다. 대장 수컷에 해당하는 재판장은 위상이 확고하므로 제 영토의 멧돼지처럼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느긋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톰 밀턴 역시 수월한 동작과 자세로 온몸에서 자신감을 풍기며 높은 위상을 뽐냈다. 강력한 수사슴의 위상을 의심할 자는 없었다. 그러나 검사는 원색의 와이드 넥타이와 어깨가 떡 벌어진 양복 정장으로 자기 입지를 본래보다 부풀리려 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거나 언성을 높여 의견에 무게를 실었다. 법정 경위는 제일 하급의 수컷이었고 빛나는 피스톨과 쩔렁거리는 열쇠 꾸러미, 거추장스러운 무전기의 힘을 빌려 자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지배의 위계는 자연에서 안정을 도모하지.' 카야는 생각했다. '그런데 좀 덜 자연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봐.' "(396)





+ 마음에 안 드는 표현방식


"카야는 물살이 잔잔한 곳을 찾아 바람을 등지고 모래톱에 다가가 첫 키스처럼 부드럽게 정박했다." (263)

"시들한 해의 엉덩이가 무거운 먹구름 사이 틈새를 찾아내어 모래톱에 닿았다." (265)


--> 이러다가 의인법을 포함한 모든 비유법을 미워하겠네.ㅠㅠ 




......

소설을 읽는 동안 옆에 있던 중학생 조카에게 내용을 간간이 이야기해주었다. 아이가 가장 궁금해한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 였지만 짧은 내 이야기 속에서 단지 그것만이 궁금하지는 않았으리라, 혼자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소설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경험, 오랜만이다. 가끔 그랬으면 좋겠다고, 혼자 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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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1-31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3, 265 쪽에 옮겨주신 류의 문장이 많이 있다면, 읽는 속도가 안 날 것 같아요...^^;; 비유법이 미워질랑 하는 마음을 감히 상상해봅니다.

난티나무 2023-01-31 01:53   좋아요 0 | URL
많지 않습니다.^^;; 딱 거슬리는 두 부분만 옮겼어요. ㅎㅎ

다락방 2023-01-3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카야 엄마의 입을 통해 여성연대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정작 카야에게 여성 연대는 없었잖아요. 그것은 부러 그런 것일까 궁금했어요. 외딴 곳에 사는 여자를 남자들은 찾아오지만 여자들은 찾아오지 않는, 남자들은 말을 걸지만 여자들은 말을 걸지 않는. 평생 여자보다 남자를 더 많이 알고 살아가죠, 카야는.

난티나무 2023-01-31 06:5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닐까 저도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다면 더욱 실망이고요.
어찌 보면 남자들의 세상, 여자들의 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린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별 생각 없이 쓴 것 같기도 하단 말이죠. 흠흠.

라로 2023-01-31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직히 별로였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문장이 있었지만… 너무 소설 같다고나 할까요?? 물론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지만…

난티나무 2023-01-31 06:51   좋아요 0 | URL
소설인데 너무 소설 같은...ㅎㅎㅎㅎ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렇더라고요.

공쟝쟝 2023-01-31 0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님의 삽입섹스란 무엇인가 ㅋㅋㅋㅋㅋ 🥹

난티나무 2023-01-31 06:52   좋아요 1 | URL
그렇다, 핵심은 그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짜, 그렇지 않아요? 삽입섹스 무엇인가!!!! 하.....ㅋㅋㅋㅋ

공쟝쟝 2023-01-31 07:07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남성에게 좋은 것일까요? 일단 남성성연구를 좀 해봐야하겠지만…. 여성에게도 잃기 어려운 쾌락이라는 경험적 증언들이 케바케라 ㅋㅋㅋㅋ 아니 나는 잃어도 되는 것들이라서…. (응?)

공쟝쟝 2023-01-31 07:08   좋아요 0 | URL
아 지속적 연구를 해야하는
데 내 몸에 맞는 데이터가 너무 희미해…(응?) 연구에의 동기가 요즘 식었습니다…

난티나무 2023-01-31 0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님의 동기가 식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왜 식었을까? 쾌락은 식을 수 있는 것인가?(쟝님의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니지만 ㅋ 아니 그 전에 쾌락은 어디에서 오는가?) 남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이란 무엇이고 얼마만큼인가? ...... 끝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지만 이쯤에서 말을 접기로 해요. (맥락 파악 못하는 것같아 급히 마무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삽입섹스를 논하는 우리!!! 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1-31 08:02   좋아요 0 | URL
번식이 인류 지탱의 이유였으니 합당한 쾌락이 따랐을 것으로 사료되는 가운데…. 섹스자본이 없는 저로서는 상당한 쾌락을 알지 못합니다 ㅋㅋㅋㅋ 이제 인류 번식이 중단되는 것이 인류 지구 모두에게 이로운 바, 모두가 마약을 할 필요없이 모두가 섹스를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욕구 조절이 가능하니까요…?
전생처럼 희미한 오르가즘의 기억🧠

공쟝쟝 2023-01-31 08:09   좋아요 0 | URL
근데 난티님 아침부터 너무 뜨거운 주제라서 제가 오후 체력 안배를(?) 위해 뇌 사용을 중단하고 ㅋㅋㅋㅋ 운동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ㅋㅋㅋㅋ 더 생각하면 안될 거 같음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1-31 08:54   좋아요 1 | URL
왜 또 여기서 섹 연구야!

공쟝쟝 2023-01-31 09:08   좋아요 0 | URL
하다가 멈췄어요….. 하고 싶어질까봐 ㅋㅋㅋ 응? 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1-31 14:2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2015년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픽션 우수상) 반달 그림책
지경애 글.그림 / 반달(킨더랜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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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담이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나 잠시 생각해 본다. 기억 조각들에 딱히 담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담과는 어떤 큰 사건(?)은 없었나 보다. 아니다. 분명 좋은 기억과... 그리고 나쁜 기억도 얽혀 있다. 그래, 담이란 햇살을 받아 따스하게 등을 대고 앉아있던 시간일수도,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시간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림책을 보는 동안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림이 좋았다. 오래된 기억이 있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련함을 느낄 듯하다. 좋은 느낌은 '엄마'와 '밥'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잠깐 끊어진다. 탓할 생각은 없다. 사실이 그러했을 테니. 이젠 의도적으로 좀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닌가? 엄마는 밥 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든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 지금 깨지 않으면 언제 깰 수 있나.(그래서 별 하나 뺌. 아, 아이의 원피스도!) 2014년이라는 출판연도를 감안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림은 강렬한 힘을 가졌다. 높이로 위압감을 주거나 크고 무거운 부피로 넘을 수 없는 선을 나타내거나 무너져서 제 기능을 잃었거나 한 담들은 없고 거기 얽힌 이야기도 없지만 그려진 수수한 담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그림 속 낡은 담의 정겨움은 이제 사라지고 있으니까. 아예 그런 담을 본 적도 없이 아이들이 자라니까.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기도 중요하겠지만 새로운 담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현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창작하는 모든 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반달 그림책을 사면 만년다이어리와 스티커를 주는 이벤트를 10주년 기념으로 하고 있다. 안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구입하려 했는데 다이어리를 준다니 얼씨구나! 하고 구입. 출판사와 전혀 관계없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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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1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담하면 담벼락 아래서 소꼽놀이하던 기억이 나요. ~ 난티나무님 연말 즐겁게 보내세요 *^^*

난티나무 2022-12-31 13:56   좋아요 1 | URL
친구들과 공깃돌놀이하던 옆에도 담벼락이 있었겠지요.^^ mini74님도 2022년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1-02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 저를 확 낚으셨어요 난티나무님.
ㅋㅋ저는 ˝담˝자가 3번 들어가길래
˝담 결리다˝의 그 담인가 했는데 ㅎㅎㅎㅎ아 정말 부끄럽네요

난티나무 2023-01-22 23:13   좋아요 1 | URL
답글이 완전 늦어버렸네요.ㅠㅠ
담 걸리다...ㅋㅋㅋㅋㅋㅋ 그 담도 있죠.^^
 
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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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상관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관없어보이)는 에피소드 하나. 

"엄마 옛날에 코다리조림 했었잖아, 왜, 꽤 자주 먹었던 거 같은데?"

"그랬나? 모르겠네."

"엄마가 코다리 좋아해서 자주 했다고 기억하는데. 나도 좋아했어. 그 왜, 꾸덕하게 꽤 많이 말려서, 먹으면 꼬들꼬들한 식감 나는 거 있잖아."

"맞아맞아. 옛날 코다리는 그랬지. 요즘은 그런 게 없더라. 언니 말하는 건 그거야, 그 꼬들꼬들한 거." 

동생이 옆에서 거들지만 엄마는 영 생각이 안 난다고 하고 만다. 

엄마의 음식, 엄마의 밥상, 이런 말들에 두드러기가 돋는 요즘이지만 이렇게 가끔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기억에는 엄마가 만들던 음식이 하나 둘 끼어있다. 힘들었던 시절, 엄마는 통째로 기억을 어디다 묻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옛일을 기억 못하듯이. 그러나 그 코다리조림의 맛과 식감은 시간을 초월한다. 


짧은 소설을 후루룩 읽어버릴 수 없었던 건 문득 떠오르는 그런 기억들 때문이다. 겹쳐짐. 소설처럼, 엄마가 나를 칼 하나로 키운 것도 아니고 다른 무엇 하나로 키운 것도 아니지만, 비슷한 삶을 산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짐작되는 삶의 모습, 엄마의 말과 마음과 느낌, 딸의 입장과 느낌... 한밤에 읽고 성급하게 별 다섯을 준 이유도 어쩌면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 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8) 


첫장을 넘기면서 나온 이 구절.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말. 써놓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인데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는 몸, 그 무게와 그 상처... 아득하다. 딸의 입장에서, 또 엄마의 입장에서, 내가 자라고, 아이가 자라고, 그러는 동안 '엄마'는 "'다라이'로 통하는 저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 버둥대는 것처럼"(15)......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내가 보아온 엄마의 방식은, 철저하게 남자를 우위에 두기, 항상 미안해하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기 등 한마디로 '나'가 없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렇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식들을 먹인 기억이 희미한 것 또한 엄마의 방어기제일 테다. 엄마는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먹는다는 것, 먹인다는 것, 그 행위에 대한 생각들.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들. 좀은 투박하게, 담담하게 엄마를 생각하는 어투는 지나친 감정이입도 막고 뻔한 서사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뻔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빠 이야기...ㅠㅠ 어째서 하나같이 비슷한 모양새인가.) 나는 이렇게 담담하게 하지만 제법 날카롭게, 엄마를 쓸 수 있을까, 막연하게 질문하게 된다. 아직도 엄마, 하면 날 세워 비판의 탈을 쓴 비난을 하는 데 머무르고 있으니까.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못했었다. 조카 읽히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리즈의 다른 단편도 하나 읽은 적 있는데 그것(제목 안 밝힘)보다 훨씬 좋았다. (뒤늦게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샀었다. 아직 안 읽었는데^^;; 거기에 이 <칼자국>이 실려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엄마 서사'가 그러니까 효도해라 식의 교훈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엄마를 '밥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엄마=집밥'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엄마가 그래서가 아니라 지난 시절 집밥을 했던 사람이 많은 경우 엄마여서일 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 삽화 불만 (78) : 소설 뒷부분에서 화자가 깎은 사과의 껍질은 '푸른' 색이라고 되어있다. 사과가 푸른 색인지는 뭐 빛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치자. 화자는 칼로 슥슥 사과 껍질을 깎아서 베어문다. 삽화에서 깨물고 있는 사과는 붉은색이다. 뭥미?


+ 시리즈 이름이 '소설의 첫 만남'이다.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지금 보니 뭐가 뭐를 만난다는 말인지 헷갈린다. 사람'이' 소설'을' 처음 만나는 것 아닌가요. ~의,를 너무 쉽게 쓴다는 생각.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51)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곧 사라질 것 같다 예감한다. 대개 어미는 새끼보다 먼저 죽고, 어미가 쓰는 말은 새끼보다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칼을 갈 때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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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1-30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래전 <침이 고인다>로 김애란작가를 처음 만난 후 계속 읽어오고 있는데, 저 책에서 “칼자국”을 제일 좋아했어요^^ 인용하신 몸속의 칼자국 부분은 아직도 기억나네요!

난티나무 2022-11-30 23:13   좋아요 2 | URL
나온지 꽤 됐죠? 저는 사놓고 아직 안 읽었네요.ㅎㅎㅎ
독서괭님 기억하고 계시는 것처럼 저도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mini74 2022-11-3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 아이가 엄마가 해준 음식 중 제일 좋은거 물었더니 옥수수차 ㅠㅠ 라고 한 저는 별로 할 말이 없네요 ㅎㅎ 제 기억의 엄마는 도시락 여덟아홉개 싸고 감자 박스로 깎던 거. 김애란 작가님 문장 참 좋아요. 저도 좋아합니다 ~

난티나무 2022-11-30 23:17   좋아요 1 | URL
옥수수차 맛있게 끓이기, 그거 어려운 일입니다. 암요.
도시락 @@ 도시락 하면 또 생각나는 거 너무 많죠...ㅠㅠ
오랜만에 읽으니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