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첫번째 챕터 ‘창조산업의 핑크게토와 여성 크리에이터의 성별화된 창의성’ 밑줄

핑크게토는 원래 젠더화된 노동 분업으로 인한 젠더화된 공간을 나타내는 지리학적 개념으로 출발했다. 이후 노동 시장 여초 직군이나 특정 문화, 사회 등에서 여초 현상을 가리키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에 내재한 성별 위계와 분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미디어 산업에서의 핑크게토는 여성 크리에이터들이 유독 많이 분포하고 있는 특정 분야 콘텐츠들을 통해 관찰되고 있다. (67%)

이 과정 속에서 비경제적인 것으로서의 여성들의 생활은 ‘정보화된‘, ‘전시를 위한‘, ‘판매를 위한‘ 일상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매일의 보통의 일상이 시장 속으로 초대될 때, 그리고 인터넷 페이지에서 정치와 경제 정보가 소위 유머, 건강, 생활 등과 동일하게 배치될 때, 노동과 놀이, 일상과 비일상, 경제적인 것과 비경제적인 것의 경계 역시 명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콘텐츠 생산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역동을 만들어내며, ‘일상‘의 의미와 형식, 그리고 경계를 바꾸어내고 있다. 대단히 탈경계적인 방식으로 소위 컨버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70%)

성별, 연령, 학력 등과 무관한 일로 여겨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영역에 왜 핑크게토가 형성되는가? 소위 말하는 창의성, 창조적 지식이라는 것의 획득이 단발의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누적적인 경험을 거쳐 인지 체계 속에서 자기 것으로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창조적 지식은 누적된 경험과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의 특수성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개인적 경험에 초점이 맞추어진 오늘날의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바로 필연적으로 핑크게토를 만든다. 지금 여성 크리에이터들이 공통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콘텐츠들은 실생활에 바로 적용 가능한생생한,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들을 다룬다. 이때의 실용적인 콘텐츠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즉 여성으로서의 필요에 의해 알게 된 것들이다. (71%)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여성화된 영역‘ 안에서 커리어를 탐색하고 있다. 이들이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진로로 선택한 이유는 공통적으로 그것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소비 문화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경험과 그에 대한 욕망을 통해서이다. 다양한 소비에의 경험은 또래 사이에서 심미적 노동 분야에 자질이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여성들이 수행해온 오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익힌 소비자로서의 기술과 지식은 진화하고 있는 소비자 문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있으며 여성들로 하여금 마케팅 영역을 포괄하는 서비스 직종으로 더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한다(Gray, 2003). (72%)

여성과 소비주의, 근대성에 관한 글에서 리타 펠스키(1998)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여성들은 남성들 사이에 교환되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여성의 물신화 과정을 통해 상품 형식과 유사한 관계에 위치지어진다고 설명한다.
구매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스스로를 유혹적인 대상으로 만들도록 한다는 면에서 상품과 여성은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보라 파슨스는 여성 소비자를 물신주의적이고 성애적으로 병리화시키는 남성 관찰자의 ‘시선‘ 이면에 여성들의 욕망을 관리하고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Parsons, 2000:49, 재인용 서지영, 2010). (72%)

여성 크리에이터들의 노동에서 드러나는 심미 노동적 특수성은 끊임없이 여성 노동자와 노동의 결과물을 여성과 여성의 몸으로 환원한다.

여성 크리에이터들의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젠더에 관한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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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 법적 인간과 권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밑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민주주의적 법체계를 상상해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종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내용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과 느끼지 못하는 동물 종 사이로 이동한다. 인간 범주는 단지 확장될 수 있을 뿐,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둘째,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법적 인간 개념의 외연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편의상 우리를 "우리 인간" 인간 범주에 새롭게 포괄된 동물을 "동물-인간"이라고 부르자). 그럼 동물을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간주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이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물론, 동물인간이 다른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도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을 죽이는 건 여전히 허용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물-인간의 참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권리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별 인간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민주적 참여에서 배제된 존재는 결코 자율적 인간의 지위를 온전하게 획득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근대정치체제가 전제하는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유지하면서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별 관심이 없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라는 주장은 진지하게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자율적 인간은 태아가 성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냐는 질문을 깊이 탐구해보면,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것과 거의 같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일단 태아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다.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서 자신의 의지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라고 할 수도 없다. 흔히 태아를 "잠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재적이라는 것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아의 경우에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드워킨은 이렇게 질문한다.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로대 웨이드 판결에도 불구하고, 주 법률은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인 법인격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할 것이다. 기업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듯이, 심지어 나무를 법인격으로 보는 법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단, 법이 나무를 인간으로 규정했다면, 나무를 베는 행위를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15 마찬가지로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 출생의 배경이 무엇이든 살아 있는인간을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고 해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또한 태아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도 임신중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물론 모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태아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의 차원에서는 임신중단과 같을 수 있겠지만, 권리상의 차원에서는 결코 임신중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 명의 인간이 신체적으로 결합해 있고, 둘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체를 살리기 위해태아를 희생하는 경우, 그리고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체를 희생하는 경우는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 조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체계를 구축하려면, 임신중단 말고도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태아가 자연유산되었을 경우, 인간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과 동일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난임 여성이 체외 수정을 시도할 때 다태아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적 유산을 시행하는데, 이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이미 착상된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은 살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 한국의 민법과 형법은 각각 출생 시점과 진통이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태아와 인간을 구별하는데, 이런 기준도 다 바꿔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하다보면, 태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많아도, 태아를 인간으로 분류하는 법체계를 구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왜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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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윤리와 파올로 코엘료, 크리스티앙 보뱅

"다른 예가 있다. 프랑스에서 1990년대 말에 가장 놀라운 성공을 거둔 문학작품은 무엇일까? 그 저자는 제3세계 출신의 무명작가였는데, 비교(秘敎)적인 제목을 단 그 책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한 페이지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모든 장르를 통합하여 베스트셀러의 정상 자리를 1년 이상 차지했다. 그런데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은 사람은 그 작품의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안다. 그것은 영적추구에 관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 작품이 10년 전에 출판되었다면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그냥 사라졌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은 20년 후에는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적절한 시기에 나왔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상당한 성공, 심지어 우리가 작품의 질을 생각할 때 상당히 불균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평범한 작품(즉, 몇몇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걸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항상 참지 못하는 파리의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비판한 것처럼, 전혀 무가치한 작품도 아니다)이라는 사실은 그 작품과 관련한 현상이 문학적 현상이라기보다 사회적 현상이라는 걸 가리킨다. 따라서 최소한 이런 관점을 따를 때, 우리가 『연금술사』와 관련한 현상을 간과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문학계에서 차용하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진정한 걸작인 크리스티앙 보벵Christian Bobin의 『아주 낮은 곳Le trés bas』은 출판 시에 미미한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 코saint François d‘Assise를 다룬 책이 프랑스에서-언론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텔레비전에서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20만 부가 팔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끝으로 마지막 예 혹은 마지막 일화를 든다면,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언급한 미셀 셰르(↓17)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30년 전에 학생들에게 흥미를 끌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웃겨주고 싶을 때는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에는 그 반대다. 내가 학생들에게 흥미를 끌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종교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그들을 웃겨주고 싶을 때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말은 단순히 재미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을 내게 전해준 친구는 -나처럼 그리고 나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모든 동료들처럼-이 말이 많은 진실을 내포한다고 생각했다.

17 Michel Serres(1930~ ).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교수, 『헤르메스Hermès』(1969~1980), 『카르파치오 미학Esthétiques sur Carpaccio』(1975), 『자연계약Contrat nature』(1990) 등의 저서가 있고, 소르본과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옮긴이) * 덧붙임 : 미셸 세르 (1930~2019)"

전자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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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2-07-1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제목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로 번역되어 있다.
 

9장 어머니와 딸

밑줄.

나를 울리고 또 위로하는 구절들…

어머니가 어떤 다른 생각을 하셨든간에(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부분적으로는 암묵적으로 내 편임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또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당시에 경험하셨다고 후에 내게 말씀하셨던 ‘무감각한 상태‘ 밑에 깔려 있는, 모든 어머니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쓰기가 어렵다. 어머니의 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묘사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자신이 분열되고, 어머니의 피부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처럼 느낀다. 나의 일부는 어머니와 너무나 닮았다. 아직도 어머니에 대해서 깊이 쌓인 분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이 흔히 저지를 만한 잘못 때문에 벽장에 갇힌 4살짜리 아이의 분노(아버지가 명령한 것이지만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어머니였다), 안면의 틱 증세가 생길 때까지 너무 오래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던 6살짜리 아이의 분노(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우겨서 했지만, 레슨을 시킨 사람은 어머니였다). 내 자신이 어머니로서, 나는 아이의 얼굴에 나타나는 틱 증세가무엇인지 알고 있다 - 그것은 자신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예리한 죄의식과 고통의 칼날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임신하고 어머니를 절실하게 원하고, 어머니가 적에게 가버렸다고 느끼는 딸의 분노를 느낀다.
또한 나는 어머니 안에도 분노가 깊게 쌓여 있음을 안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에 대해 걷잡을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분노를 갖고 있다.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었을 당시의 조건, 불가능한 기대, 임신한 여성에 대한 아버지의 혐오, 아버지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아버지의 혐오감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비애로 바뀌고 그녀를 위한 분노로 바뀌며, 다시 어머니에 대한 분노, 오래되고 정화되지 않은아이의 분노로 바뀐다.
현재 나의 어머니는 항상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사랑받고 존경받는 할머니이며, 새로운 영역을 탐구 - P252

하며 산다. 어머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살고 있다. 나는 끊임없는 치유를 위해 어머니와 대화를 갖는다는 환상, 치유 받지 못한 아이의 환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모든 상처를 내보이고 어머니와 딸로서 함께 겪어 온 고통을 넘어서 마침내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최소한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현재 얼마나 중요한지, 그동안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20세기의 새로운 여성운동의 초기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당한 억압을 분석하고, 왜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가 아마존이 되도록 교육시키지 않았는지, 왜 우리의 발을 묶어 놓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석은 정확했고 철저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의 모든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분석은, 의식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내부에는 여성의 보살핌과 부드러움, 그리고 승인,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행사되는 여성의 힘, 여성의 향기, 감촉, 목소리, 우리가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때, 우리를 감싸는 강인한 팔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 누구라도 크리스타벨 팬크허스트의 말대로,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가를 미리 지불하기로 마음먹은 어머니, 여성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할 자세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갈망했을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여성으로서 우리 자신의 힘을 느끼려 노력할 때,
우리는 어머니를 필요로 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린 소녀의 외침을 수치스러워 할 필요도 없고 퇴보라고 느낄 필요도 없다. 그 욕구야말로 강한 어머니와 강한 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우리욕구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시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어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우리는 단지, 어머니가 계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편에 있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 P253

만일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혹은 우리를 입양시키기로 작정함으로써, 아니면 생활고 때문에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미쳐서 우리를 버렸다면, 제도화된 모성하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위한 여건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생계 때문에 어쩔 수없이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우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면, 제도가 요구하는 대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청교도적인 어머니가 되었다면, 혹은 아이 없이 살 필요가 있어서 그냥 우리를 떠났다면, 우리가 이성적으로 아무리 용서하고 어머니 개인의 사랑과 힘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안에있는 아니, 남성이 통제하는 세상에서 자란 여자아이는 여전히 순간순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러한 역설과 모순에 맞서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잃어버린 어린 소녀의 탐구열을 우리 내부에서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느낌을 바꾸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운동을 해나가는 여성들 가운데서 반복적으로 분출되는 맹목적인 분노와 고통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 간의 자매 관계 이전에, 어머니와 딸이라는-과도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아마도 근본적이고 중요한-지식이 있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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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정체> 3장 동화, 문명화의 기준이 되다 : 샤를 페로와 여성 작가들의 전복적 역할


밑줄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고전 동화를 들려주며 무해한 시간을 보내지만, 고전 동화의 무해함에 어떤 해악이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다.”(p.110)

페로가 구전 설화의 부르주아화(bourgeoisification)에 이바지한 범위는 페로 자신이 의식한 것보다 훨씬 컸다. 페로는 아이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칠 수 있는 아동 문학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 이야기들』에 들어 있는 8편의 산문 동화의 기원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모티프는 페로시대에 퍼져 있던 구전설화 또는 (민속자료를 차용했던) 스트라파롤라와 바실레 그리고 프랑스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서 발견된다. 페로는 민속적 모티프와 문학적 모티프를 혼합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예법에 관한 자신의 독특한 부르주아적 시각을 제시하려 했다. 이를 통해 페로는 민중적 설화 장르의 내러티브 관점을 농민층의 관점에서 부르주아-귀족 엘리트의 관점으로 바꾸어놓았다. 이같은 상황은 얼핏 보면 별로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동 사회화의 측면에서 보게 되면, 설화의 관점이 변함으로써 아동은 자신의 위치와 섹슈얼리티, 사회적 역 - P86

할, 예절, 정치 등을 인식하는 데에서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중류 계급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동화를 반복적으로 들려주기 시작한 이유 역시 이를 통해 설명된다. 이미 남녀 주인공의 경우를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내러티브 관점의 변화는 조야한 표현법과 사회관을 세련되게 만드는 단순한 문체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현실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실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아동동화 장르의 문학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페로는 설화 속에 등장하는 낯익은 인물과 배경, 플롯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아동의 내면적 외면적 본질의 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문명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이미 아리에스와 엘리아스의 저작에서 증명된 것처럼 아동 교육은 명령과 금지를 전달한다는 의도를 점점 분명히 밝혔으며, 페로 동화의 창작 의도는 ‘민중‘으로부터 의사 표현의 통로를 빼앗는 동시에 어린이와 청소년이 지키도록 되어 있는 사회 규약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 P87

강한 소녀가 상징적 제식을 거치는 원래의 설화에서 페로는 혼란과 혐오를 느꼈다. 페로는 이교적 민속 전통에 적대적이었고, 여성을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적대와 공포는 페로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된다. 『신데델라』를 다룰 때 우리는 구전 설화 버전이 동화 문학 버전과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구전 설화 버전은 모계 전통에서 나왔으며, 여기서는 소녀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되찾는 투쟁이 그려진다 (죽은 엄마가 사회를 수호하는 존재로서 소녀를 돕는다). 누더기를 걸치고 중노동에 시달리는 신세로 전락한 신데렐라는 남은 뺨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자기의 불리한 입장을 상쇄하려 한다. 신데렐라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재기를 발휘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하는데, 이때 그녀의 목표는 결혼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이다. 신데렐라는 바로크풍의 드레스를 차려입지도 않으며, 쉽게 부서지는 유리 구두를 신지도 않는다. 오히려 신데렐라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줄 옷차림을 하고 있다. 신데렐라가 잃어버린 가죽 슬리퍼를 되찾고 왕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녀의 강한 독립적 성격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한편 페로의 동화에서 신데렐라는 자기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부지런한가를 증명하려 하는 인물로 바뀐다. 대모 요정과 왕자가 신데렐라를 구해주는 이유는 그녀가 예절에 신경 쓰기 때문일 뿐이다. 페로는 설화 버전을 조롱하며 수동적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투영(投影)하는데, 페로가 겨냥하는 독자층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성을 진지하게 수용하게 된다. - P91

페로의 「더벅머리 리키」를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할 때, 우리는 이 동화가 왜 사회학적·심리학적으로 문명화 과정에 들어맞는 작품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첫째, 부르주아 사회와 귀족 사회에 속하는 비교적 젊은 여성은 끊임없이 중년을 넘긴 남성과의 정략 결혼을 강요받았다(이러한 남성은 육체적으로 매력이 없거나 호감을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둘째, 17세기 말엽이 되면 여성은 잠재적인 마녀형 인물과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교회와 국가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성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위력을 통제하는 것과 악마적 세력을 통제하는 것을 연결지었다. 셋째, 개방적이었던 섹슈얼리티가 은밀한 정사가 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가 혼외정사를 죄악이자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했으므로, 성은 숨겨져야 했고 지극히 사적인 어떤 것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제대로 잘 자란아이는 성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페로의 동화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성의 공포를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페로 자신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공포, 나아가 페로가 자기 자신의 성적 충동에 대해갖고 있는 공포를 그린다. 자신의 성적 충동을 받아들이기 위해 좀 더 문명화된 형태로 위장한 것이다. 페로는 자신의 공포와 욕망으로부터 동화의 지형을 만들어낸다. 믿음직하고 금욕적인 남성이 변덕스럽고 무지한 여성을 다스리는 미학적-이데올로기적 구도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다. - P98

오누아의 동화는 모두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며, ‘미녀와 야수’ 의 테마를 다루는 동화들에서는 페로의 동화에 담긴 메시지가 반복된다. 곧, 여자는 호기심이 많고 믿을 수 없으며 변덕스럽기 때문에 계속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분별력과 신중함에 달려 있다. 여주인공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야수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거나 야수의 명령과 기대에 복종하는 것이다. 야수는 고귀한 귀족의 영혼과 올바른 시민의 예절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동화의 숨겨진 메시지는 일종의 명령이며, 오누아를 포함한 그 무렵의 여성들은 이러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종을 거부하면 천하게 여겨지거나 배척당했다. 예법이란 자기 부정이라는 고뇌를 견디는 것을 뜻했다. 남자들은 여성과 섹슈얼리티와 평등에 대해서 갖고 있던 두려움을합리화하기 위해 여성과 기타 억압받는 집단으로부터 자기 표현과 자립성을 박탈하는 규제들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오누아의 피네트 상드롱Finette Cendron」 「흰 고양이 The White cat」 「마르카생 왕자」 등과 드라포르스의 착한 여자The Good Woman」 「페르시네트Persinette」 그리고 드 뮈라의 복수의 궁전 The Place of Revenge」 「돼지 왕」 등을 보면, 전복적인 기호들이 다수 등장한다. 이런 기호들은 이 여성 작가들이 남자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자의성을 어떻게 비판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 이 여성 작가들은 엄청난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모종의 타협을 행했다. 고전 동화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주는 암울한 상황 가운데 하나는 여성작가 자신이 남성의 욕구와 헤게모니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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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6-24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데렐라 구전설화는 전혀 다르군요?! 동화에 대한 이런 다른 시각의 책이 읽고싶었어요^^*

난티나무 2022-06-25 00:41   좋아요 2 | URL
네^^ 신데렐라 뿐만이 아니고 빨간모자 외 다른 동화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절반 가까이 읽었는데 재밌어요!^^

mini74 2022-06-24 1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화를 통해 은연즁에 남자아이들은 모험을 떠나고 괴물이나 용을 처치하고 땅을 넓히고 보물을 얻고 그런 식으로 여자도 얻지만, 여자아이들은 인내와 순종을 미덕으로 세뇌당하는 거 같아요. 이런 책 좋네요 난티나무님 *^^*

난티나무 2022-06-25 00:44   좋아요 2 | URL
맞아요 mini74님! 세뇌!!!! 지금까지도 17-18세기에 만들어진 동화의 형태가 변하지 않고 읽힌다는 게 참… 분통 터지는 일입니다. 책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