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알지는 못하며 항상 말할 수도 없다는 사실’!

1장 동의에 대하여

여성의 (추정된) 욕망은, 설령 단 한 번이라도, 한 남성을 향한 것이라 해도,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그녀는 보호받을 자격, 정의의 대상이 될 자격을 상실한다. 일단 여성이 무언가를 승낙했다고 여겨지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것도 거부할 수 없다. - P17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집단적인 욕구, 걱정과 분노의 언어로 나타나는 욕구, 진실을 말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근본적이고 공리적인 가치라는 믿음에 말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이 욕구는 모른 척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MeToo는 여성의 말에 가치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말을 의무화하는 위험까지 감수했다. 즉, 자기 실현self-realisation이라는 페미니즘적 힘, 수치심을 거부하겠다는 결단, 모욕에 맞서 말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학대와 굴욕을 겪는 여성의 서사에 대한 음란한 갈망을 충족시킨다. 물론 매우 선별적이었다 해도 말이다. - P20

그러나 말하기와 진실의 토로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발언이나 침묵이 본질적으로 자유롭거나 억압적인 것도 아니다. 더욱이 억압은 발언의 메커니즘을 통해,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담론에서의 선동’을 통해 작동할 수도 있다. 동의와 그것의 절대적 명확성에 대한 과신은 좋은 성적 상호작용에 대한 부담을 여성의 행동에 떠넘긴다. 즉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알고 어떻게 말하는가, 이 섹스가 양쪽 모두에게 즐겁고 강압적이지 않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자신 있는 성적 자아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여부에 책임을 미루는 셈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고, 그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는 여자에게 재난이 있으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런 상황은 위험하다. - P25

동의, 즉 좋다고 말한 것과 욕망을 표현한 것이 쾌락을 보증해주는가? 그것이 남성이 여성을 도구화하지 못하게 막아주는가? 물론 아니다. 쾌락과 그것을 추구할 권리는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 P28

… 아무리 적극적 동의라 해도 동의는 여전히 누군가의 제안에 응하는 행위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해도 될까? 응, 해도 돼.’ 이 구조는 최악의 이성애 규범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유명한 데이트 코치인 코넬 배럿은 "상호작용을 이끌고 심화시키는 것은 남성이 해야 할 일이며, 여성이 할 일은 이에 대해 좋거나 싫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쓴다. 《강간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앤 카힐은 만일 결혼과 섹스가 여성에게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경험으로 보였다면 ‘우리가 여성의 욕망이 아니라 동의에 대해서나 말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비꼬듯 지적했다. 동의 문화의 신념은 성적 욕망과 행위성에 관해 그저 일면적 그림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 P56

법학자 니컬러스 J. 리틀은 2005년 논문에서 적극적 동의를 주장하며 "데이트 상대가 여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때,
여성은 성관계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어떤 여성, 여자 엑스나 그레이스나, 아마도 당신과 나와 같은 여성은 섹스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닐 수 있다. 그 여성은 이렇게 확연한 입장들 사이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항상 욕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항상 알 수 있을 만큼 존재하는 것도 - P69

아니다. 섹스를 고려할 때 여전히 동의의 규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반드시 인정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지점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알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섹스에서든 다른 상황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관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언제일까? 동의의 수사는 너무 자주 욕망이 언제나 대기하고 있으며, 우리 안에 완전히 형성되어 있고 언제든 우리가 꺼낼 수 있는 무언가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원했는지도 몰랐던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무언가를 하는 중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알지는 못하며 항상 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거추장스럽다며 옆으로 치워버리지 말고 섹스의 윤리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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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2-01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이 책 괜찮지 않나요?
읽다 중단 상태지만 읽는 동안에는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난티나무 2023-02-01 19:47   좋아요 2 | URL
엇 네! 안 그래도 이 책 읽으면서 예전에 미미님 올리신 글 떠올랐더랬어요.
쉽게 죽죽 읽히지만 내용은 정말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어제 순식간에 1장을 읽었네요.ㅎㅎ
하고픈 말이 무척이나 많지만 이걸 꺼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곘다는 생각도 하면서...^^;;;;

공쟝쟝 2023-02-01 20:09   좋아요 1 | URL
저도 도서관에서 읽다가 ! 안되겟다 사야지! 이러고 안샀네? ㅋㅋㅋ

미미 2023-02-01 20:26   좋아요 0 | URL
이 책 이상한 표지 때문에
과소평가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진ㅋㅋㅋㅋ
저 꼭 읽을꺼예요!!😆

난티나무 2023-02-01 20:41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얼른 사세요!!!!!!
미미님 표지 ㅎㅎ 동의합니다.
저 방금 2장 읽었는데 !!! 꼭 읽어야 할 책이네요!!!!!

공쟝쟝 2023-02-01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공쟝쟝의 섹탐은 중단되었는 데 ㅋㅋㅋㅋ 난티나무님에게로 옮아갔나 봅니다? 아아. 삽입섹스란 무엇인가 🤔 연구 기다리겠습니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2-01 20:42   좋아요 1 | URL
저는 탐구라기보다는 이유(?)를 찾고 싶은 거고 설명을 하고 싶은 거 같아요. 뭐 그 말이 그 말일 수는 있는데 암튼 저는 함으로써가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의 섹스 탐구라는 점을 밝혀놓습니다.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2-01 20:43   좋아요 0 | URL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책에 주로 나옵니다????? ㅋㅋㅋㅋㅋ

2023-02-0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트라우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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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머리말!

페미니즘은 여성 자신이 성 계급 sex class의 일원임을, 다시 말해 ‘성‘ 혹은 ‘섹스‘라는 것 - 인간 문명세계의 토대가 되는 자연적이고 전 "정치적이며 객관적인 물질적 기반 - 을 근거로 했을 때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 P8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는 이 ‘성‘ 혹은 ‘섹스‘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여기엔 이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체는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된다. 많은 신체가 어느 한 범주에 맞춰 훼손되고, 또 훗날 많은 신체가 이미 정해진 결정에 불복하더라도 말이다. 신체가 어떤 사회적 목적을 부여받을지는 이 근원적인 분리를 통해 판가름 난다. 어떤 신체는 새로운 신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다른 신체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기 위해, 다른 신체에 기분 좋고 온전하며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다른 신체에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섹스는 자연적인 것임을 가장하는 문화적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sex와 젠더 gender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미 섹스 자체가 가면을 쓴 젠더다.

‘섹스‘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섹스화된 신체로 하는 행위, 즉 성행위 말이다. 어떤 신체는 다른 신체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신체는 다른 신체에게 쾌락·소유·소비·숭배 ·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다른 신체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존재한다. 이 두번째 의미의 ‘섹스‘ 역시 자연적인 것, 정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이런 생각 역시 허구임을, 어떤 이익에 이바지하는 허구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가장 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섹스는 사실 공적인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 우리가 느끼는 감정, 누가 주고 누가 받는가, 누가 요구하고 누가 제공하는가, 누가 원하고 누가 원해지는가,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고통을 받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한 규칙은 우리가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훨씬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느 유명 철학자가 자신은 섹스를 하는 동안만큼은 진정으로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섹스에 대한 페미니즘 비평에 반대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당신 아내가 그 말에 뭐라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그의 아내는 식사 자리에 초대되지 않았기에 내가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가 하려는 말이 곧 섹스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오래전부터 성적 자유를 꿈꿔왔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성적 자유의 시뮬라크르, 그러니까 평등해서가 아니라 흔해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섹스다. 이 세상에서 성적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하는 무언가이며, 늘 불완전하다. - P9

(버니스 존슨) 레이건에 따르면 정치가 완벽한 집 - 레이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궁‘처럼 완벽한 소속의 장소 - 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많은 페미니즘을 배타적인 모순으로 이끈다. ‘집‘으로 그려지는 페미니즘은 사실보다는 공통성을 주장하고, 집 안의 평화로운 풍경을 해치는 모든 걸 배제한다. 반면 진정으로 포용적인 정치는 불편하고 안전하지 못한 정치다. - P14

최선의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이 혼자일 때 하는 생각, 피켓 시위 라인과 생산 라인에서, 길모퉁이에서, 침실에서 주고받는 말, 남편·아버지·아들·상사 그리고 선출직 공무원에게 수천번 하려고 했던 말에 뿌리를 둔다. 최선의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들의 투쟁에 잠재된 여성들 삶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그 가능성에 더 바짝 다가선다. 그러나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들 삶의 세세한 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저 높은 곳에서 여성들에게 그들 삶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만을 이야기해줄 때가 너무 많다. 대다수 여성에게 이런 말만 번드레한 주장은 쓸모가 없다. 그런 말에 귀기울이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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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1-0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샀쥐 ㅋㅋㅋ 미리미리 ㅋㅋㅋ

난티나무 2023-01-22 23:13   좋아요 0 | URL
저 지난달에 다 읽었어요!!!!!! ㅎㅎ
 

여행 중에도 틈틈이.

겨우 책 몇 글자 보는 정도.
<포르노랜드> 읽을 수 있겠어? 했는데
서정적인 글보다 오히려 더 잘 읽히는 건 반전이다. ㅋㅋ
재독이라 그럴지도.
대신 글을 쓸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

북플 글도 대충 휘리릭, 제대로 못 읽음.
당분간 이럴 예정.






아마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항하는 가장 목소리 큰 논리는 "포르노는 판타지다"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판타지는 머릿속에 존재하고 그 안에만 머무르며, 관계, 섹스, 사람, 친밀감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 남자는 포르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이들은 포르노를 재미있는 판타지로 즐길 줄 아는 교양 있는 소비자로 선을 넘는 형위나 유치한 플롯, 과장된 신체 묘사는 물론, 매번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오르가슴을 느끼고 남자는 다량의 정액을 분출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터무니없는 성적 장난질을 그저 즐길 뿐이라는 얘기다. 포르노가 끝나면 남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은 채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일부 포르노 옹호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를 반박하는 사람은 판타지와 현실을 혼동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207/433)

아이러니하게도 포르노는 판타지라고 주장하는 측이 놓치고 있는 짐은 실은 포르노가 우리의 상상력과 성적인 창조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포르노가 전달하는 이미지가 사고를 마비시킬 정도로 내용이 반복적이고, 정신이 둔해질 만큼 단조롭기 때문이다. (211/433)

"포르노는 강간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질문 대신, 포르노의 메시지가 우리의 현실과 문화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해 더 섬세한 질문을 던진다면, 이미지가 곧 강간으로 이어진다는 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재정립함으로써, 포르노의 서사가 그 일관성과 통일성으로 만들어 낸 세계관이 이용자의 사고체계에 통합되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 인지, 해석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214/433)

남아와 성인 남자는 비디오 게임, 영화, 텔레비전, 광고, 남성잡지에서 그러한 이미지를 접하며, 그 이미지는 그들에게 여성, 남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서사를 제공한다. 포르노의 역할은 이 같은 여성에 대한 문화적 메시지를 가져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간결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미디어 이미지는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미디어 연구에서는 이를 ‘다의적polysemic‘이라고 한다) 특히 곤조 포르노의 경우 -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멸시와 여자가 굴욕당하고 폄하당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끝도 없이 보여주는 서사를 통해 남자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들은 성차별적 대중문화 이미지로 가득한 사회에서 자란 덕분에 어느 정도의 포르노적 시선을 이미 체득한 상태다. (215/433)

해방을 위해 싸워 온 집단이라면 누구나, 미디어 이론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사실, 즉 미디어 이미지가 억압당하는 집단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 이미지는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메시지의 더 광범위한 체계 안에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권력은 대개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묵인하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정상화하는 데서 나온다. (217/433)

텔레비전에서 예컨대 흑인이나 유대인을 계속해서 인종차별적 혹은 반유대주의적으로 그리는 드라마나 시트콤이 쏟아져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백인 남자가 이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격하고, 목을 조르며 그들의 입에 이물질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추측건대 격한 항의에 부딪힐 것이고, 그러한 이미지는 단지 판타지라는 이유로 옹호받지 못할 것이며 보이는 그대로 간주될 것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가하는 가혹행위다.
포르노는 폭력에 성적인 외피를 덧씌우며 그것을 비가시화하며, 결과적으로그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반섹스주의자로 규정된다. (218/433)

포르노가 강간에 개입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포르노를 이용하는 모든 남자가 강간을 저지르는 건 결코 아니지만,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상화하고, 합리화하고, 묵인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이 ‘강간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미지들은 폭력과 학대로 가득한 섹스를 당사자 모두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는 ‘섹시‘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포르노의 메시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정상적이며 용인될 수 없다고 규정하는 사회의 규범을 갉아먹는데, 사실 이 규범은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이미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된 이미지 대다수가 여자에게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신체 온전성이나 영역, 경계가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 이미지는 총체적으로 작용해 그러한 경계선을 넘는 행위를 여자가 원하고 즐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전파하는 다양한 강간 신화 중 일부이다. 포르노에는 다른 수많은 신화가 내재해 있는데, 모두 성폭력을 폭력의 행위가 아니라 합의에 기반한 행위로 묘사하는 게 목적이다. (234/433)

포르노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질문을 뒤집어 보는것이다. 포르노가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대신, 어떤 조건에서 그러한 이미지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지 물을 수 있다. 즉, 남자가 포르노의 서사에 대항하려면 어떤 것에 노출되어야 할까? 나를 비롯한 미디어 연구자들은 자본주의와 짝을 이루는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유입으로부터 사람들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방법을 논의할 때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대개 그 해답은 그것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여 소비 이데올로기의 허위적 본질을 드러내고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있다. 포르노의 반이데올로기 또한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 메시지를 방해하고 파괴해야 하고, 포르노만큼 강력하고 즐거워야 하며, 남자에게 포르노 속 여성의 이미지는 허구이고, 특정한 형태의 섹스만을 팔기 위해 꾸며낸 거라고 설득해야 한다. 또한 이 대안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섹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하며, 그것은 성 평등과 정의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한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남성은 극히 드물다. 남자(그리고 여자) 대다수는 성 불평등이 자연스러우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 지배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일 주입당하며 살아간다. 포르노는 이 이데올로기를 최대한으로 뽑아먹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장해서 고도로 성애화한 형태로 남자에게 돌려준다. 그것에 대항하는 반이데올로기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같이 달콤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사고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포르노는 사회화의 유일한 행위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와 우리신체에 미치는 영향 덕분에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되었으며, 남자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자기가 당연히 갖는 인권을 마찬가지로 당연히 가지는 존재로 보는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 (237/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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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사이버 성폭력에 맞서 싸우기 : 불법 촬영물을 중심으로’ 중 스피노자 부분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 곧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코나투스의 인간적인 표현은 ‘욕구‘ 내지 ‘욕망‘이다. 욕망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노력으로서의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사랑 등의 정서가 이성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정서가 없다면 인간은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정서affectus, affect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로 정의하면서 인간의 모든 정서는 욕망conatus, 기쁨laetitia, 슬픔ristitia 이라는 세 가지 기본 정서에서 파생된다고 간주한다(3부 정리11의 주석). 정서는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의 한 종류이지만 인지적 기능에 따라 정의되는 일반적 관념에 따라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진태원, 2015).
특히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인간들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정서모방 개념을 중시하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사람들의 욕망과 정서(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두려움, 시기 등)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정서를 모방한 결과다. 이는 인간들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원초적 개인들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존하고 성립한다고 보는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2010/2012)의 표현에 의하면, 스피노자에게 인간들의 관계는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성격을 지닌다.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의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미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개인 자신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인 것이다."(진태원, 2018: 330). 이러한 관개체적 존재론으로 인해, 인간들 각자는 정서모방의 네트워크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욕망을 비롯한 정서를 갖는 법을 배우게 된다.
스피노자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를 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아이들의 신체는 마치 계속 평형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우는 것을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웃거나 울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곧바로 모두 따라하려고 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모든 것을 스스로 욕망한다."(윤리학 3부 정리 32의 주석). 스피노자는 더 나아가 정서모방이 반드시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만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민이라든가 공감, 민족주의적 정서 등은 모두 정서모방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90% 지점)

이러한 감정들도 정서모방 개념에 입각하여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분개indignatio를 타인에게 잘못 대해준 이에 대한 미움이라고 정의한다("윤리학 3부 "부록" 20항). 여기서 타인이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분개 개념은 사회정치적 소요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된다. 스피노자의 『정치론』 4장 4절에 의하면 "국가civitas는 자신의 권리 아래 존재하기esse sui juris sit 위해서는 두려움과 공경의 원인들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통치권imperium을 보유한 이(또는 보유한 이들 중 하나)가 술에 취한 채로 또는 벌거벗은 채로 창녀들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거나 광대짓을 하면서 또는 자기 자신이 만든 법을 공공연히 위반하거나 무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보

존한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민들을 도륙하거나 약탈하고, 젊은 처자들을 성폭행하는 일 그리고 그와 유사한 행위들은 두려움을 분개로 바꾸게 되며, 결과적으로 사회상태를 적대상태로 바꾸게 된다."
물론 이 당시의 국가는 군주론』에 제시된 마키아벨리의 교훈을 염두에 둔 상황이므로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차이가 있겠지만, 두려움이 분개로 전환되면 사회상태statum civilem에서 적대상태statum hostilitatis로 전환되는 원인이 된다(진태원, 2018). 이러한 분개의 감정은2018년 혜화동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를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홍대 남성 누드 모델 사진 유출 사건은 피해자가 사건을 인지하기도 전에, ‘정의로운‘ 목격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공론화되었고, 학교는 신속하게 가해자를 색출하려고 노력했고 즉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여성 가해자는 ‘긴급‘ 체포되었고 포토라인에 세움으로써 불법 촬영의 ‘범죄성‘을 전시했다. 이는 여성들이 그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바라던 불법 촬영 범죄를 대하는 모범 답안이었다(김민정, 2018).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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