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에쿠니 가오리 

 

병원이란

네모나고 하얀 두부 같은 장소에서

당신의 목숨이 조금씩 갂여가는 동안

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어요

 

지금 당신의 찻잔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군요

 

먼 옛날

엄마가 어쩌다 찻잔을 깨뜨리면

당신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죠

슬퍼해서는 안 돼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니까

슬퍼하면 엄마를 책망하는 셈이라고

당신의 갑작스런

-그리고 영원한-

부재를

슬퍼하면 당신을 책망하는 셈이 될까요

 

그날

병원 침대에서

이제는 지쳤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사실은

그만 길을 떠나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러지 못했지만.

그 조금 전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던 당신에게도

사실은

그냥 피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곧 먼 길을 떠날 테니까

라고.

그러지는 못했지만.

 

미안해요.

 

안녕,

저도 곧 갈게요.

지금은 아니지만.

 

 

무제

                                                     에쿠니 가오리 

 

어차피

백 년이 지나면

아무도 없어

너도 나도

그사람도

 

 

 

아파트에서는 '謹弔(근조)'燈(등)을 볼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걸치는 '금줄' 역시 볼 수 없다. 누구네에 아기가 태어났는지, 누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겉으로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주기적으로 소독해주는 아파트는 태어남도 죽음도 소독해주는 것같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 시집은 마치 이런 아파트 풍경처럼 읽힌다. 말끔히 소독처리된 것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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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은 아예 사용하지 않고, 블로그의 글도 최대한 요점만 쓰려고 하고. 컴퓨터 작업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아프다. 목을 둘러싼 어깨와 손마디, 손목이 아프고 눈도 몹시 피로하다. 도수치료를 받으면 좀 통증이 완화되는데 시간이 흐르면 다시 아파오는 게 문제다. 이 책 저 책 사대면 좀 나을까 싶어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책은 바이블이다. 지간신경종으로 고생할 때 구입한 책인데 날이 갈수록 요긴하게 쓰인다. 온몸을 다루고 있으니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쓰일 터. 이를테면 '통증사전'이다.

 

 

 

 

 

 

 

 

 

 

 

 

 

이 책은 통증의 이름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설명이 쉬워서 쉽게 읽힌다. 스트레스를 어깨를 괴롭히는 원인 주의 하나로 보고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을 그림으로 적절하게 제시해서 가독성이 뛰어나다.

 

' 때때로 자신의 존재에 현실감이 사라져 지금까지 개의치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스트레스로 느껴지거나 슬퍼지거나 한다. 이것은 후두하근군이 뭉쳐 기능하지 않게 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나도 슬슬 이 경지(?)에 이르고 있는 참이라서.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온 독일각시가 한 말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사람들은 이상하다. 사는 게 사는 거지 왜 열심히 산다고 하는가."

 

이 페이퍼를 끄적거리며 내내 한 다짐은, '열심히 살지 말자."인데, 또 부질없이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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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로드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겐 너무나 익숙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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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커튼이라니. 블라인드를 사용하는 곳에서 10년을 보냈는데 새삼 커튼이라니. 이런 전통은 성가시고 거추장스럽다. 아니나다를까. 툭하면 고리가 빠지고 그러면 고리를 제대로 끼우라는 관리자의 잔소리를 듣게 되는, 학교란 잔소리가 메아리 치는 곳임을 커튼이 확인시켜준다.

 

한학기 동안의 교육과정에 대한 설문지가 가정통신문으로 나갔다. 그중 커튼에 대한 학부모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커튼 세탁을 단체로 맡기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흐흠...예전엔 반장, 부반장에게 커튼 빨아오라고 한 장씩 손에 들려주었는데 이제는 민원 들어올까봐 그것도 못한다.

 

오늘. 운전을 못하니 할 수 없이 남편을 꾀어 학교에 가서 커튼을 떼온다. 세탁기로 빨고 건조까지 시키니 3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자세히 보니 바느질 풀린 곳이 여러군데, 손으로 박음질을 한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면 댓가가 있어야 한다. 상점을 준다거나 하는 보상을 제시해야 겨우 심부름을 시킬 수 있다. 물론 댓가 없이 하는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나 극소수이다. 오죽하면 심부름 담당 학생을 따로 지명하여 봉사시간을 주겠는가.

 

커튼 빨아오는 일을 시키려면, 글쎄 상점으로 5점 정도 줘야 아이들 마음이 움직일까? '학급 비품 관리를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할 경우' 상점 3점을 부여하는데...상점도 싫다고 거절하는 아이들의 냉랭한 모습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느니 차라니 내가 하지. 바느질 솜씨도 발휘하고.

 

우리집 안방에 걸린 얇은 커튼을 언제 빨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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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차메'라는 단어도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는 '참외'라는 표준어가 있는 줄 몰랐었다. 어른들은 '참외'를 '채미'로, '무'를 '무수'로, 부침개를 '누루미'로, '가위'를 '가세'로 불렀다.

 

어느 곳의 특산물이 유명하다고해서 일부러 그 상품을 찾는 일 따위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시절이 시절인지라 '성주'가 눈에 들어왔다. '채미'를 연상시키는 '차메'도 눈에 들어왔다.

 

검색해보니 '당차메'라는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4년도인 것 같다. 대강 살펴본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10년 넘게 걸려서 가꾸어 온 '애틋한' 참외임에 틀림없다. 맛은, 검증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주를 방문한 황교안 총리에게 분노한 성주 주민들이 달걀을 던진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인터넷을 보니 성주참외는 벌써부터 '사드 참외', '전자파 참외'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정부는 성주를 망하게 할 생각이냐."

"당신이 와서 살아라."

"우리는 개돼지고 너희만 국민이냐."

 

'자식농사'라는 말 속에는 농사 역시 자식을 키우는 일과 같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본다. '당차메'는 소비자에게는 한낱 일개의 상품 브랜드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가꾸고 일구어온 사람들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다.

 

무심히 먹는 참외 하나가 그냥 참외가 아니어서 참외 하나를 먹는데도 의미를 꼽씹어야 하는 사실. 사람으로 살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사람임을 부르짖어야 하는 것도 참혹한 노릇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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