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 우리 집 전화번호는 128번이었다. 동네(읍단위)에 전화기가 몇 대 없던 시절이었다. 부자였냐고? No~~. 얼리 어답터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전화기만 있었다. 송수화기를 들면 교환수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원하는 번호를 말하거나 '**가게'라고 말하면 전화를 연결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세월이 좀 흘러 세 자리였던 전화번호가 네 자리로 바뀌면서 전화기에 부착된 원반에 구멍이 송송 뚫리고 숫자가 적힌 다이얼식으로 바뀌었다. 교환수를 상대로 가끔 장난을 치던 오빠들, 만취하신 아버지가 툭하면 청와대를 연결해달라는 억지 같은 것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쏙 들어갔다. 다시 몇 년 후 국번호 6이 붙으면서 6-**** 가 되더니 다시 얼마후 국번호가 두 자리로, 다시 얼마후 국번호가 세 자리가 되었다. 역사가 깃든 28번은 끈덕지게 살아남아서 지금도 오빠가 그 번호의 집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임용고시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순위고사라고 불렀다. 내가 시험을 치르고 가까스로 교사가 되었던 건 마지막 순위고사를 통해서였다. 한동안 순위고사 시험 자체가 없다가 어느 해 느닷없이 많은 수의 교사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9시 뉴스 마무리를 하면서 보도했다. 내가 지원한 과는 42명을 선발했는데 나는 그 중 28번으로 합격해서 교사가 되었다. 그리 자랑스러워할 순위는 아니었으나 팔백 명 이상 지원했으니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7년 만이었다. 그리고 교사 생활 28년 끝에 명퇴를 했다.
옛날 얘기를 하다보니....이래서 라떼가 되는구나!
김연수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확인했다. 김연수 소설에서 느끼는 모호한 느낌 같은 게 거의 없었다. 어차피 여행을 못 떠나는 시절, 철 지난 여행담조차도 반갑게 다가왔다. 게다가 문장은 깔끔하고 적당히 낭만적이니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한장 한장 넘기며 읽는 맛이 꽤 괜찮았다. 그러나 아무리 재밌게 읽었어도 내일이면 거의 잊어버릴 터. 마치 치매를 예행연습하는 것처럼. 꼭 하나만이라도 기억해서 읽은 보람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차에 으례 숫자 28이 눈에 들어왔다.
리스본이 내게 꿈의 도시가 된 건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파두 그룹 마드레데우스와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가 리스본에 가게 된 건 이들이 아니라 28번 트램 때문이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종착역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구글 어스로 찾아보다가 그만 28번 트램을 찍은 사진을 본 것이다. 사진 속에는 개나리의 노랑보다는 겨자의 노랑에 가까운 노란색 전차가 좁은 골목 사이에 서 있었다. 동화 속 풍경 같았다. 세상에 저렇게 예쁜 전차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반드시 그 노란색 전차를 타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p.101 <밀물처럼 밀려오던 리스본의 노스탤지어>에서
글은 계속 이어진다. 그가 묵었던 숙소는 포에츠 호스텔(Poets Hostel), 유서 깊은 예술가들의 카페 아 브라질레이라( Cafe a Brasileira)가 있는 거리, 빔 벤더스의 영화<리스본 이야기>의 사운드트랙 앨범 <Ainda>를 들으며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
리스본이 하구의 도시, 석양의 도시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파두 때문이었을까? 장난감 같은 트램과 골목의 풍경이 하도 애틋해서였을까? 마치 한 시대가, 한 생애가 끝나는 순간의 감정처럼 막대한 노스텔지어였다. 얼마나 대단한 그리움이었던지 그 순간 리스본에 있으면서도 나는 리스본이 그리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리스본이 그립다. -102~103쪽
어제는 18,293 걸음, 14.41km 를 걸었다. 평소보다 좀 더 걸었다고 오늘은 몸이 말이 아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몸이 사그라들겠지. 더 사그라들기 전에 '언젠가, 아마도' 나도 리스본에 가서 28번 트램을 탈 수 있겠지. 28번은 나의 인생 숫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