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시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어제는 수다스러운 지인을 만났다. 그가 정의한 수다의 의미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서로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의 수다를 떠올리면 아직도 피로가 몰려온다. 그의 수다는 자신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수다를 되새기는 사람이다. 수다에 서투른 사람이다. 타인의 수다를 듣는 능력에 한계치가 얇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이런 성향은 바뀌지 않을 터이다. 나는 왜 수다에 약한가? 


각설하고.


심보선. 사회학자로서의 글보다 시인으로서의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시를 쓸 때, 나는 '타자'가 됨으로써,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쓴다. 혹은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타자가 된다. 김수영이 '딴사람'이라고 부른 타자 말이다. 이때 타자는 사회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약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때 타자는 소수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데, 이 소수자는 상식의 세계에서, 우리가 소위 '위대함'이나 '정당성'이라는 관념과 감각으로 구축한 말과 행위의 질서에서 목소리와 이미지를 박탈당한 모든 존재를 일컫는다. 요컨대 시는 "침묵하고 있던 돌이 드디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고 발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쓰기의 '타자 되기'는 일종의 모험이며, 해방이다. 단언컨대, '타자 되기'는 우연하게,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그것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자신에게 할당되고 강요되는 정체성과 이력을 거슬러서, 기쁨과 슬픔 사이의 동요를 견디며, 쓰기와 살기를 수행해야 한다.                           - p.134



  나는 시라는 말 만들기 놀이를 통해 주어진 삶 말고 또다른 삶을 제작해왔다. 시 때문에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게 됐다. 첫번째 삶은 정체가 뚜렷하지만 나를 구속하는 삶, 두번째 삶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나를 자유롭게 하는 삶. 어쩌면 시 때문에 나는 첫번째 삶을 더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 p.169



---시는 "침묵하고 있던 돌이 드디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고 발명한다. 

---시 때문에 나는 첫번째 삶을 더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단 두 문장으로도 심장을 떨리게 하는 시인, 심보선.



  좌파이건 우파이건, 보수 아버지건 진보 자식이건, 전쟁에 관해서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모두 전쟁이라는 비극의 생존자라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니 자식도 가까스로 태어난 셈이다.        -p. 57



---아버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니 자식도 가까스로 태어난 셈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부모가 만나서 짝이 될 확률이 전무하기에 나는 절대로 태어나지 못했을 터. 나는 이 사실에 늘 전율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기막힌 문장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3-04-1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nama 2023-04-17 20:18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대한 정보 없이 지은이만 보고 샀는데 역시 잘한 선택이었어요.
 


양양의 진전사는 도의국사라는 분이 창건한 신라시대의 사찰로 조선시대에 명맥이 끊어졌다가 근래 복원되었고 아직도 복원 중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 절과 인연이 있었던 듯, 이곳에서 출가했다는 설도 있고, 이 절에서 득도했다는 설도 있다. 전망 좋고 볕바른 고적한 곳에서 선현들을 떠올리며 한가롭게 걷기에 딱 좋은 절이다.




도열한 주춧돌이 이곳이 한때 사찰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 자리잡은 도견당(길을 보는 곳)? 도현당(길이 나타나는 곳)? 

*견(見): 볼 견, 나타날 현

개는 집을 지키는 게 일이니 도견당이 맞을 듯하다.



'행복'이라는 댕댕이가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인이 없다. 주인 없는 집은 사람집이나 개집이나 쓸쓸하다. 절집에 어울리는 개집이지 싶다.




처마에 달린 풍경. 손으로 흔들어보니 소리 또한 낭랑하다. 



화사한 봄볕에 나른하고 적막한 개집에서 묘한 상실감에 젖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 매일 보는 나물을, 오늘 맘 먹고 사진에 담았다. 





두고두고 쑥개떡을 해먹기 위해서 거의 매일 일정량 쑥을 뜯고 있다. 쑥 채취는 봄 한철에 하지만, 잘 하면 가을에도 가능하긴 하다. 가장 흔한 풀 같지만 막상 채취하려고 보면 쉽지 않다. 아무데서나 자란다고 해서 아무거나 뜯을 수는 없다.





머위. 심지도 않았는데 땅 한 구석에서 잘 자라준다. 덕분에 봄엔 나물로, 가을엔 머위대를 즐길 수 있다. 막 올라온 머위순을 된장에 무쳐 먹으면 사라진 입맛이 돌아온다. 뿌리는 약으로 쓴다는데 뿌리는 못 뽑겠다. 약은 그냥 약국에서 해결하는 게 낫다.





뭐니뭐니해도 봄나물의 여왕는 엄나무순이 아닐까. 엄나무순은 일년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으리라.





봄엔 두릅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엄나무순을 먹어보곤 두릅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렸다. 미안해.





울릉도 출신이라고 한다. 맛은 가죽나물의 식감에서 특유의 향을 제거한 맛? 부침개도 해먹었는데 그냥 들기름 넣고 무치는 게 맛있다.





장아찌로 유명한 명이나물, 쌈으로 먹으면 마늘 냄새가 난다. 



 



삼잎국화. 쌈 채소로 적격인데 나물로도 먹는다고 한다. 국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을엔 노란 꽃이 핀다. 작년 가을에 우리 아파트 화단에서 이 꽃을 보았다. 아는만큼 보인다. 



 


당귀. 고기 먹을 때 상추 대신 쌈으로 먹으면 좋다. 포만감도 있다.





다래순. 나물로 먹으면 뭔가 고급 나물을 먹는 기분이 든다.





돌나물. 다른 나물에 밀려 온몸을 온전히 보존한다. 인기가 없어서 행복한 나물.





금낭화. 이 귀한 식물을 나물로 먹는다고 한다. 맛이 궁금한데 저 예쁜 꽃을 보고 먹는 상상을 하다니...





돌단풍. 양양 오일장에서 돌단풍 나물을 파는 것을 보고 맛이 궁금했다. 그렇다고 몇줄기 솟아난

것을 달랑 먹어치울 수야 없지.





앞 집 이장님네 잔대. 이름도 낯설고 맛도 궁금. 언젠가 얻어 먹을 날이 오겠거니.



이밖에 참취, 얼레지, 우산나물, 병풍취 등이 있는데 아직 철이 이르다. 아니 얼레지는 나왔는지 모르겠다. 자나깨나 산불조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23-04-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레지는 지난번 화암사 가는 길에 잔뜩 핀걸 보았어요. 그러니까 3월 말이겠네요.

nama 2023-04-12 10:3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지역마다 개화시기에 차이도 있겠고, 여기는 가까운 주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네요.
 


내 발로 걸은만큼만

세상은 내 것이 된다.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내 말을 해야 내 것이 된다.


남의 글을 읽는 것보다

내 글을 써야 내 것이 된다.


필사 따위

서평 나부라기 따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활 속의 보왕삼매론
김현준 지음 / 효림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세상살이에 고난 없기를 바라지 말라./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마음이 어두울 때 찾게 되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