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나의 독서 기록이 독서 행위를 따라가지 못한다. 리뷰나 페이퍼 쓰는 것은 점점 시들해지고 있으나 그나마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어 다행이지 싶다. 리뷰나 페이퍼 쓰기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웅얼거림 같아서 마음이 자꾸 가라앉는다. 그래도 좋은 책은 울림이 강하다. 무기력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 바로 이 책. 책에 몰입하다보니 집 나갔던 기운도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총 455쪽 중 178 ~ 179쪽에 있는 반딧불 얘기는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결말을 암시하는 듯했다. 다 읽고보니 역시 그랬다.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기억하고 싶어서 옮겨본다.

 

 

   카야는 탁한 눈으로 멍하니 밤에 낙서하는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병에 반딧불을 잡아 수집한 적은 없었다. 병에 가둘 때보다 풀어놓고 관찰할 때 훨씬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암컷 반딧불은 꽁무니의 불을 깜박여 수컷에게 짝짓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고 조디가 말해주었다. 반딧불은 종마다 불빛 언어가 다르다. 카야가 지켜보는 사이 어떤 암컷들을 지그재그 댄스를 추며 점, 점, 점, 줄, 이렇게 신호를 보냈지만 또 전혀 다른 패턴으로 춤을 추면서 줄, 줄, 점 신호를 보내는 것들도 있었다. 물론 자기 종의 신호를 잘 아는 수컷은 그런 암컷만 찾아서 짝을 지으려고 날아간다. 그리고 조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다수 생명체가 그러듯 서로 엉덩이를 비벼 새끼를 만든다.

   카야는 문득 벌떡 일어나 앉아 주의를 집중했다. 암컷 한 마리가 암호를 변경했다. 처음에는 올바른 줄과 점의 조합을 반짝거리며 자기 종의 수컷을 끌어들여 짝짓기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다른 신호를 반짝거렸고, 그러자 다른 종의 수컷이 날아왔다. 그 암컷의 메시지를 읽은 두 번째 수컷은 짝짓기 의사가 있는 자기 종의 암컷을 찾았다고 확신하고 암컷의 머리 위에서 체공했다. 하지만 별안간 그 암컷 반딧불이 다리를 뻗더니 입으로 수컷을 물어 잡아먹었다. 여섯 다리와 날개 두 쌍을 모조리.

   카야는 다른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암컷들은 원하는 걸 얻어낸다. 처음에는 짝짓기 상대를, 다음에는 끼니를, 그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됐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이 소설의 끝부분에 나오는 <반딧불>이라는 시는 이 작품의 결말을 드러내는 멋진 장치가 되는데, 직접 읽어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7-30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30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온갖 시름을 잊고 깊이 빠져든 책. 소설은 역시 재미가 먼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무위당 장일순에 대해선 말만 많이 들었지 제대로 읽은 책 한 권이 없었다. 근접하기 어려운 분이라 생각하고 지레 겁 먹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의 존재도 알고는 있었다. 선입견 앞에서 그저 망설이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번 원주 터득골에서 주인장의 말씀을 듣고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주인장은 직접 이 책을 기획하신 나무선이라는 분이셨다. 전국을 샅샅이 뒤지며 장일순에 대한 일화를 어렵게 수집해서 지은 책이라는 말씀에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 읽자.

 

일화로 엮은 책이다보니 생각보다 책은 쉽고 재미있다. 장일순이 어떤 분이었는지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중 몇 대목을 옮겨본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는 김진홍이 지학순, 장일순과 함께 치악산으로 바람을 쐬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가는 길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렀는데,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장일순과 지학순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했다! 지학순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고, 장일순은 평신도다. 김진홍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3쪽

 

나는 아직 내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불상은 우상이라고 절대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을 봐왔을 뿐이다.

 

상을 받고 나서 자신을 찾아온 이형만에게 장일순은 이렇게 말했다.

"상 받았다고 껍죽대지 마. 그러면 죽어."

그 한마디뿐이었다. 다른 말이 일체 없었다.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장일순은 늘 말했다. 기어라. 겸손하라. 엎드려 살아라. 앞에 나서지 마라. 모가지 세우지 마라.     -181쪽

 

가슴이 뜨끔해지는 말씀이지 싶다.

 

그 책(논어)을 채희승은 십 년을 읽었다. 그러나 두 시간 가량에 걸친 장일순의 논어 강의에서 얻는 기쁨이 십 년 공부를 뛰어넘었다. 정말 혼자 듣기 아까운 내용이었다. 그 마음을 채희승은 이렇게 나타냈다.

"선생님, 꼭 책을 쓰십시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엄청난 일을 해놓고도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신 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183쪽

 

책을 쓰지 않고도 책으로 남아있는 사람들. 앞 선 사람들이다.

 

이화여대 교수이자 <미래에서 온 편지>의 지은이로도 유명한 정현경이 물었다.

"불교에서는 좌선을 한다거나 하고, 기독교에서는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그러는데, 선생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닦습니까?"

"주로 혼자서 걸어요.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돌아올 때는 대개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와요. 방축 길을 걸으며 '오늘 또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하고 반성도 하고. '이 못난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하고 감사도 하고 그럽니다.

또 길가로 풀이 나서 자라는 걸 보는데, 그 풀들이 절 일깨우지요. 풀은 땅에 뿌리를 박고 밤낮으로 해와 달을 의연히 맞고 있단 말이야. 난 거기에 못 미치지요. 부끄럽지요. 이렇게 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마음을 씻는 거지요."       -226~227쪽

 

풀 한 포기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그걸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 장일순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용만으로도 배가 부른 리뷰.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장일순은 여자 관계에서 놀랍도록 깨끗했다. 오직 아내만 알았다. 혹시 어디 숨겨진 이야기가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224쪽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전까지도 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내노라 하는 남자들은 대개 여자 관계가 있고 그게 흠이 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자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시절에도 깨어있는 사람은 있었고 그 당연한 몸가짐으로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같은 날에 좀 씁쓸하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 ): 20세기 프랑스 조각가로 주요 작품으로는 <마망>.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태피스트리를 제조하는 부모를 도우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결혼 후 미국에서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판화를 전시했다. 이후 시험 삼아 시작한 조각으로 추상적인 경향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난 자전적 제품을 만들었다. 라텍스, 대리석, 석고 등 재료를 불문한 조각을 만들었으며 나이가 들어서도 활력과 창의력을 잃지 않았다. (출처: 다음백과 )

 

 

 

 

 

 

 

 

 

 

 

 

 

 

루이즈 부르주아가 궁금해서 구입한 책. 한 예술가의 생애가 오롯하게 드러나 있는 아름다운 그림책이다. 여기저기 자료를 읽다보면 루이즈 부르주아를 흔히 '고백 예술의 창시자'라고 하는데, 작가나 예술가들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굳이 '고백 예술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건 군더더기 같은 설명같아 보인다. 어쨌든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생애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다음은 그의 작품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마망>이란 작품이다.

 

 

 

'마망'은 엄마라는 뜻이란다.

 

SHE DREW,

SHE PAINTED,

SHE WOVE.

SHE MISSED HER MOTHER

SO MUCH, SHE SCULPTED

GIANT SPIDERS

MADE OF BRONZE, STEEL, AND MARBLE

SHE NAMED MAMAN.

 

 

옷감을 짜고 옷감의 헤진 부분을 수선하는 일을 했던 어머니를 커다란 거미로 형상화하면서 위로와 위안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왜 거미지?하던 마음이 그런 설명을 읽고니니 조금은 이해갈 듯도 하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작품을 책으로만 접하니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다가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지유의 과학 에세이. 여행과 과학이 버무려진 책이다.

 

거미는 새끼를 잘 보살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잘 알려진 것은 늑대거미로, 이들은 알을 거미줄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배에 매달고 다니다가,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면 등에 태우고 다닌다. 이때 어미 늑대거미를 보면 덩치가 두 배 이상 커 보이고 등에는 반짝이는 보석을 붙인 것처럼 보인다. 등에 타고 있는 새끼들의 눈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바로 이 거미에게 꽂혔다. 새끼들이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책임감 있게 돌보는 어미 늑대거미에게서 모성을 읽은 부르주아는, 어머니를 투사해 거대한 거미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우연히도 부르주아의 어머니는 베 짜는 사람으로, 언제나 부르주아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는 어머니에 대한 신뢰와 거미의 생태적인 삶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 <마망>을 제작한 것이다.    -124쪽

 

그래서 이지유 작가님은 전 세계에 있는 '<마망>을 다 보리라 결심하고, 이후 캐나다 오타와, 일본 도쿄, 영국 런던 그리고 서울에 있는 <마망>을 다 보았다'고 한다. 뭔가를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누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삶인가.

 

과학 분야는 워낙 문외한이라 이런 책을 읽긴 읽되 머잖아 하얀 백지가 되겠지만 적어도 이것 만은 기억할 것 같다. <마망>의 거미는 늑대거미라는 것.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0-07-08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즈 브르주아라는 이름은 생소해도 저 거대거미는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리움미술관에서 보았군요.
이지유님의 저 에세이도 목차를 보니 범상치 않아보이네요. 무슨 얘기를 어떻게 썼을까 궁금해지고요.

nama 2020-07-09 12:56   좋아요 0 | URL
저 에세이는 제게 과학보다는 여행서에 가깝게 느껴져요. 다 읽고나면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데, 아는만큼 보이나봐요.
 
창을 순례하다 - 건축을 넘어 문화와 도시를 잇는 창문 이야기
도쿄공업대 쓰카모토 요시하루 연구실 지음, 이정환 옮김, 이경훈 감수 / 푸른숲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을 찾아 떠나는 순례 같은 여행. 창문 집중 탐구. 다양한 창을 가진 집에서 살아보거나 머물진 못해도 잠시 기분전환이 될 수 있는 책. 창에 대한 관심과 안목도 키워주리라 생각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