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댕이를 입양한 지 만 4년이 지났다. 꼬박꼬박 하루에 두 번씩 새벽산책과 오후산책을 시키는 덕분인지 댕댕이의 놀라운 변화를 발견한다. 꼬리를 깃발처럼 세우고 걷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얼굴을 뭉개고 자는 일명 쭈구리 자세도 사라졌다. 해맑은 표정으로 간식을 갈구하는 눈망울과 마주치면 가슴 속에서 애정이 퐁퐁 솟는다. 10살이 넘어 노화가 진행중인 댕댕이는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서 어둑한 새벽산책 때는 눈앞의 장애물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돈키호테처럼 몸으로 돌진하곤 하는데 표정만큼은 어린 강아지가 된다. 잃어버린 강아지 시절을 맞이한 것이다. 이제는 제법 인형같다는 말도 듣고 동네주민들이 견종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스쳤스입니다." 

 "처음 듣는 종이네요."

 "이것저것 스쳤어요."

 "아, 잡종."


2022년 나를 스쳐간 책을 살펴보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작년과 비슷하게 100권이 좀 넘는다. 걸어서 20분 거리, 35분 거리, 1시간 30분 거리의 세 도서관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날랐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최대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때는 빌린 책을 공개하는 글을 올렸지만 올해는 생략한다. 굳이 누가 궁금해한다고....다만 나 역시 '스쳤스'라는 것. 아마도 꼼꼼하게 읽은 책보다 그저 스쳐지나간 책이 더 많을 게다. 책이란 게 그냥 스치기만해도 읽은 기분이 들곤 한다. 더군다나 도서관에서 일부러 모셔온 게 아닌가.


올해의 책을 뽑는 기준이라면 밑줄긋기를 많이 하고 완독 후 몸서리를 치게 되는 책이다. 댕댕이가 찰지게 몸을 털 듯 한바탕 내 마음을 털게 되는 책. 나는 책을 읽을 때 책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밑줄긋기를 삼간다. 빌린 책이라면 당연하고 내가 산 책에도 점 하나 찍지 않는다. 연필을 손에 들면 뭐랄까....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고나 할까. 어차피 스쳐가는 책들은 오래 기억하지 못하기에 연필 대신 눈에 힘을 주고 대한다. 그러다가 목 마른 사람 물을 찾듯 연필을 간절히 갈구하게 만드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책은 흔하지 않아서 당당하게 올해의 책이 되는 것이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이 책을 읽었다. 울고나니 시원했다. 책 내용을 묻지 마시라. 그냥 밑줄 좍좍 긋고 그렁그렁 눈물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밑줄 그은 몇 부분을 옮긴다.


가족을 지탱하려 애쓴 세월 동안 어머니의 내면에는 침묵과 억누른 두려움의 여파가 갇혀 있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전심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그렇게 샐리와 나를 다 키워낸 이십 년 뒤의 어느 날, 축적된 후유증이 터져나와 어머니 몸의 모든 세포와 조직을 잠식해버렸다. 어머니는 이후로 돌아가시기까지 사십 년간 심한 류머티즘 관절염에 시달렸다. 결혼 생활 내내 도와줄 이도 없이 홀로 견뎌내야 했던 정신적 스트레스의 결과가 분명했다.  

       -p.78


나는 본능적으로 두려운 일을 무조건 진공 밀폐 포장 안에 넣어버리는 요령을 익혔다. 부정적인 감정을 풀어낼 언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실패나 좌절은 항상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하워드를 외면한 것도 그처럼 수치심과 침묵 속에서 굳어진 행동 패턴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의 정해진 일상을 벗어난 모든 일에 그런 태도를 보이곤 했다. 벽을 둘러치는 것이 당시의 내겐 일종의 생존 수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명백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98


1950년대 대중의 정신질환에 관한 부정적 태도는 지금까지도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들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정신질환은 항상 폭력과 직결된다고 믿는 사람의 수는 육십 년 전의 세 배로 늘었다. 중요한 지점에서 상황이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셈이다.            -p. 114


낙인은 또 다른 광기, 정신질환 자체보다 훨씬 나쁜 최악의 광기다.               -p. 152


정신질환자 자조 모임이나 인권 운동은 아버지가 젊었을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정신보건 분야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p. 168


오늘날까지도 나는 골치 아픈 일은 무조건 덮어두어야 한다는 강박과 싸우고 있다. 익숙한 그 습관은 지금까지도 나를 종종 곤경에 빠뜨리고 있으며, 내가 계속 맞서 싸워야 할 주된 적수 중 하나다.    -p.182


어떤 정신질환도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밝혀졌다. 정신적 취약성은 복잡한 유전자 조합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중략) 특정한 정신질환에 대한 유전적 취약성이 사실은 학대나 생활 스트레스 등 여러 환경적 영향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일 수도 있다.(중략) 다시 말해 정신질환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낙인을 극복하려면 폭넓은 사고와 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p. 359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생존자의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재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이 그러지 못한 사람을 보며 느끼는 감정 말이다. 이런 감정에는 자기 비난, 죄의식, 자기 삶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진 않았지만 다른 조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처럼 느꼈다.        -p.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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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1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31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간단하게 쓴다. 다시 읽지 않기 위해서.















실례의 말씀부터 드리면, 이 책은 너무나 부르주아 향기가 짙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따끈따끈하게 읽었지만 딱 그것 뿐.


p.236~239

<우울한 날이면 남미로 가자>

   우울한 날이면 멕시코, 브라질, 쿠바, 페루, 아르헨티나로 가볼 일이다. 햇빛은 투명한 기름처럼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크레파스를 함부로 문질러놓은 듯한 푸르고 붉고 노란 단층집들과 총천연색의 낡은 자동차들이 굴러다니는 거리.

                   (중략)

   우울한 날이면 남미로 가자. 하던 일 밀치고, 가방을 꾸리자.


멕시코, 브라질이 동네에 있는 카페라면 모를까.


2.

















알라디너들이 간간이 읽기에 궁금해서 빌렸다. <계로록>을 쓴 분이기도 해서 인생의 조언도 듣고 싶었고. 


p. 46

<불행은 사유재산이다>

   인간은 비극적인 체험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 나는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질병, 빈곤, 차별, 폭력에 따른 불안한 생활, 전쟁, 이런 것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이다. 세상에서 근절시키려고 다 같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런 비극적인 체험이 위대한 성과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불행은 엄연한 사유재산이다. 불행도 재산이므로 버리지 않고 단단히 간직해둔다면 언젠가 반드시 큰 힘이 되어 나를 구원한다.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좀 배부른 소리같다. 불행도 불행 나름이고 감당조차 안 되는 불행 앞에서 이런 말은 모독에 가깝다. 불행한 사람은 이런 말을 듣는 것도 거북하리라.



3.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그러잖아도 요즈음 한문을 새로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관심이 있어야 보이나 보다. 고루한 이야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른 모든 책을 제치고 이 책부터 완독했다. '파고 파고 또 파고' 공부하고 싶어지게 한다. 이런 책은 저자의 공부하는 생활을 위해 내돈내산 해야 하는데...


차라리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기 시작했거든 제대로 배울 때까지 그만두지 말고, 

차라리 물어보지 않을지언정 질문을 시작했거든 제대로 알게 될 때까지 그만두지 말며, 

차라리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기 시작했거든 답을 얻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말고,

차라리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기 시작했거든 분명하게 분변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말며, 차라리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기 시작했거든 마음을 다해 진실하게 행할 때까지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남이 한 번에 해내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해내거든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



<중용>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기왕 시작했으면 끝을 보라는 말씀 같은데...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배우고, 일단 물어보고, 일단 생각하고, 일단 분변하고, 일단 행하는 게 낫지 않나...나는 이렇게 '일단' 정신으로 살고 있는데.... 거, 참.


이 책에서 언급한 (<중용> 말고도) <맹자>의 글을 접하며 나는 여직껏 <맹자>를 읽을 생각조차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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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1-2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나마님과 비슷하 마음으로 빌렸는데 저런 글이 좀 많아서 뜨악했어요. 그래도 저에겐 도움이 되는 글도 있어서. 암튼 <나의 첫 한문 수업>을 담습니다. 저는 한문 하나도 모르거든요,, 마음은 안 그런데.^^;;

nama 2022-11-29 18:25   좋아요 0 | URL
가끔 소노 아야코의 글을 읽고 싶을 때가 있어요. 가끔 배 부를 때 투정이 나오는 게지요.
 
 전출처 : nama > 다시 읽어봐도 맞는 말씀

9년 전에 올린 글을 작년에도 올렸는데 올해 또 올린다.
엿도 아깝다. 엿 고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인데. 나라를 거저 먹으려는 자들은 엿부터 고아봐라.
고만큼이라도 땀 흘려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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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통해 인생을 한 바퀴 더 살듯,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춰보니 역시 그와 비슷한 감상에 젖는다. 새록새록 나오는 신간서적의 다양성에 정신을 잃을 정도지만 잊고지냈던 옛 서적을 무시할 일은 아니다. 잠시 옛 친구를 만나는 기분도 든다.


윤정모. 1946년생. 소설가. 80, 9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 현재 제21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고삐>는 확실히 기억하지만 나머지 두 권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삐, '소의 코뚜레나 말의 재갈에 잡아매어, 몰거나 부릴 때 손에 잡고 끄는 줄'. 이 제목에서 단박에 유추되는 것은 고삐에 묶여 끌려가는 상황에서 '가열차게'(80년대에 애용된 단어) 고삐를 끊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뭔가 80년대 민주화를 상징하는 듯한 단어이다. 더 들어가본다.





'매춘과 윤락은 외세와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낯설고 좀 억지스럽게 보이지만 80년대 민주화열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책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러면 땅덩이도 크고 부자 나라인 미국이 왜 끝없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을 종속국으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그 첫째는 미국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고 있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함에도 큰 원이이 있읍니다. 어느 학자의 통계를 보면 미국인 1인당 에너지소비량이 유럽인의 2인분, 인도인 55인, 탄자니아인의 168인, 네팔인의 9백 명의 소비량과 맞먹고 미국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6%에 해당하는데 이 6%의 인구가 세계 전체에너지 1/4 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은 보다 효과적으로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군수산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세상 곳곳에 군인을 주둔시켜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p. 101



  다음은 문화식민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읍니다. 저는 사십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라는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미국식교육을 받았고, OX나 흑백논리와 더불어 대중우상에 혼곤히 빠져든 세대입니다. 물론 왜정 때도 우리의 지식인들은 찻집에서 커피도 아닌 '고히'를 마시면서 일본 인기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고, 그것이 소위 식자의 멋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읍니다만 우리 역시 째즈나 팝송가수를 흠모하고 미국 상업영화를 즐기고 영어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만 지식인 냄새가 나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땽을 접수하고 이승만과 조약을 맺을 때 이미 일주일에 몇 개 이상의 미국 노래를 들어야 한다고 문서로 조인을 했고, 이 땅에서 가장 좋은 네트워크를 차지해 AFKN 방송망으로 저질프로만 흘려보내서 우리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의도된 정책의 일환이었으므로 우리는 그 문화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지금도 아이들은 팝송 뿐만 아니라 옷, 신발, 연필, 지우개까지 영어가 씌어 있는 상품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국민의 순수한 정서를 짓밟고 그들의 저질적인 대중문화를 이 땅에 자꾸만 풀어먹여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 국민들이 건강한 비판력이나 각성을 흐리게 해야만 지배가 용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45년 9월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오늘날까지 숱한 강간, 총살, 교살, 강도, 방화, 사기, 뺑소니 등 10만 명이 넘는 범죄자들이 이 땅의 민중을 짓밟고 있어도, 우리 남한이 미군 범죄의 소굴이 되어가도 우리는 그저 파리약을 먹은 듯 눈만 꿈벅이고 있을 뿐입니다.   p. 102~103



길게 인용했지만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민족해방가이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또 싸워서 찾은 이 나라

쪽발이 양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팟쇼 앞세운 수탈의 나라

이 땅의 민중들은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해방을 위해

손잡고 광화문에 해방기 휘날리자.                          -p.70~71



<고삐>는 80년대 후반 대학 문창과 같은 곳에서는 교과서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누구나 운동권이었던 그 시절에 저 영향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소시민, 부르주아, 매판자본주의...'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사고가 경직된 답답한 분위기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같이 시대에 부응하는 눈부신 소설을 쓰신 분이 2001년에는 다음의 책을 냈다.


















특급열차?


  나는 여태 딸에게 특급열차만 타라고 강요했다. 그 열차의 이름은 '좋은 대학'이었다. p. 21



국내 특급열차 승차에 연거푸 실패한 딸을 영국으로 보내며 자신도 뛰따라가 영국에서 3년을 보낸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다고 성공담 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삶의 고비마다 겪어야했던 처절한 시련, 고통 등을 써내려간 실패담에 가깝다. 때론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는. 특히 첫단추부터 틀어진 결혼생활 등. 픽션같은 이야기를 읽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여러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살아오셨구나.....하고.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사람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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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2003년에 나온 걸 몰랐다. 그때쯤은 이미 홍신자 열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홍신자 열병?




인생은 선배, 나이는 후배였던 동료교사가 어느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결혼할 때 되게 미웠어. 실망했었어."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엉? 왜? 무슨 말이야?" "언니, 홍신자 좋아했잖아....." 물어보니 그분처럼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나 어쨌다나. 그러면 그때 적극적으로 말렸어야지. 설득도 하고 호소도 하고. 제대로 잡아줬어야지. 이 말은 못했다. 실망했다는 말이 가슴에 턱 걸려서 대응할 말을 못찾고 있었다. 흠, 자네도 홍신자 열병을 앓았었구먼. 몰랐네.








<나도 너에게....> 이 책을 끝으로 홍신자를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따금 거울에 비친 내 알몸을 보게 되면 여전히 홍신자가 떠오른다. 바로 제1회 죽산예술제 때문이다.






저 사진 밑의 작은 글씨, '1회 죽산예술제의 오프닝 작품은 카와무라 나미코의 누드 워킹 퍼포먼스였다.' 저 장면을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이렇게 평생 기억에 남을 줄은 몰랐다. 1995년쯤인가?

초여름, 밤바람 살랑거리는 초저녁에 야외에서 개최된 공연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카와무라 나미코는 당시 60세 정도였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균형잡힌 몸매였는데 60세에 저런 몸매가 가능할까 싶었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자연스런 모습이 될까? 그 이후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볼 때마다 저 누드 워킹이 떠오르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야 카와무라 나미코의 이름을 <나는 춤추듯...>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홍신자를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지만 그분의 열정과 도전,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조금은 닮고 싶다. 나는 어떤 순간을 살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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