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영어교과서에는 유독 favorit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툭하면 favorite movie, favorite sport, favorite food, favorite country, favorite subject, favorite star...반드시 무엇인가 좋아하지 않으면 대화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나온다. 왜일까? 왜 편견을 조장하고 강화시키는 걸까? 왜 자신의 속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하는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밝혀야만 서로 소통이 가능한가?

 

소설가 윤후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걸 단박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망설이던 참에 favorite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80~90년대는 나에게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와 윤후명의 시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첫사랑의 아련함 같은 게 배어있고, 윤후명은 그의 어떤 특정한 소설보다 그냥 윤후명 자체로 남아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윤후명스러움', '윤후명체'라고나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윤후명의 책을 만나면 무심결에 손이 간다. 눈인사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잡게 된 책이 다음 책이다.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사랑의 방법>, <원숭이는 없다>와 몇몇 작가의 감상평, 그리고 말미에는 작가가 쓴 '문학적 자전'.

 

<원숭이는 없다>는 분명 예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했다. 윤후명이란 소설가의 소설이 대개 그런 것 같다. 새 소설을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 같고, 다시 읽어도 마치 처음 읽는 것 같다. 소설 속 문장들이 때로 시와 같아서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문장도 그렇고 소설 속 분위기도 그렇다. 뭐가 시적이냐? 라고 뭉는다면 딱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윤후명의 소설을 접할 때면 늘 느끼는 기분이다. 한때는 그의 소설을 필사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생각으로 그쳤지만.

 

분명 읽은 소설인데 새롭게 다가온 구절을 옮긴다.

 

그 뒤 나는 원숭이 꿈을 여러 번 꾸었는데 나타난 것은 어김없이 그 원숭이였다. 그리고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한 마리의 원숭이를 두고두고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외로운 상태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 속내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함께 나누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서의 원숭이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소설속 원숭이는 다의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위의 문장을 보고 원숭이의 의미를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만약 이 소설을 지문으로 해서 문제를 내게 된다면, 예를 들어 '작가의 의도는?', 혹은 '이 소설에서 원숭이가 상징하는 바는?' 같은 걸 묻는다면 분명 작가조차도 정답을 맞힐 확률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 얼마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에서 안도현 시인이 그랬다. "내 시가 실린 문제를 풀었는데 다섯 문제 중 하나가 틀렸다. '작가의 의도는?'이라는 문제였다.'

 

 

오늘도 내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윤후명의 소설을 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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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favorite 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편인가요. 읽다보니 그냥 궁금해서요. ^^;
오늘 눈이 참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면서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nama 2015-12-03 12:32   좋아요 1 | URL
그거야 모르지요. 실제 어떤지는...
눈이 펑펑 쏟아지다가 해가 반짝나고, 참 황홀한 날이네요.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올 겨울엔 소설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이 책 말미에 부록처럼 달린 <취향 리스트>가 마음에 들어 복사를 해둔다. 내 책이 아니므로.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주는 이 책, 마음에 든다.

자기가 아는 가장 좋은 걸 타자와 함께 나누며 삶을 고양하는 게 바로 연애고, 연애는 취향을 남기고, 그 취향은 사랑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되고...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일단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 말은 또한, 사람의 인격을 결코 관습적 도덕으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 체험으로 검증되지 않은 도덕은 불신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생각 때문에 심지어 감옥에 갔다......그러니까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실수를 범한다는 말이다.

사실상 여행과 독서는 내게 동일한 것이다. 모양새나 방법이 다를 뿐 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영혼의 샴쌍둥이랄까?...알랭 드 보통이 말한 `생각의 산파`로서의 독서와 여행은 내연과 외연처럼 한 몸인 거다.

하긴 인간들이 답답하긴 해요. 우리는 모두 우주에 단 하나뿐인 매우 우주적인 존재인데 맨날 남과 똑같은 잣대로 서열화하고, 손바닥 보이듯 빤히 들여다보이는 세상에서 오직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삶에만 골몰하고 있잖아요.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최지암이라는 남자에게 무작정 편지를 쓰게 된 배경에는 답답한 내 삶의 조건을 보다 우주적인 걸로 개선하고 싶은 기대 심리가 작동했을 거라는 얘기죠.

남들한테 늘 쓰이던 나, 남들한테 늘 써 먹히던 내가 필요 없어지는 공간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내가, 정말 나 스스로가 나를 쓰는 자신을 만나는 거, 그러기 위한 충실한 시간을 갖게 되는 거.

이 세계는 바뀌지 않는가고, 자본주의가 심화된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자본 앞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살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대세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얘기지요. 그러니 이 세계가 다른 누군가-예를 들면 양식 있는 선량한 통치자-에 의해 바뀌길 희망하지 말고, 그 희망에 기대어 살지도 말라고. 그러면서 세계가 변하길 바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구엉이 없는 것` 그게 행복이고 평화고 사랑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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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구광렬 지음 / 새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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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강경준은 왜 멕시코에 갔을까?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악명 높은 나우칼판 교도소로 향하면서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자유란 저런 걸까. 어디서든 퍼질러지는 것. 사실 난, 파타고니아를 가기 위해 멕시코로 왔다. 모든 것이 헐렁한 그곳, 언젠간 가고 말 테다.’

 

그러나 강경준은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으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 소설 제목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들의 목숨으로 삶을 이어 가고, 끝내 특급살인죄의 공범으로 99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그것도 머나먼 이국의 땅 멕시코에서.

 

여기에서 멕시코의 법률체계나 정의를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록 강경준이 감옥에 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부조리하고 정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유독 멕시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1968년 올림픽을 치를 당시만 해도 멕시코의 국민소득은 우리의 열 배였다고 하니 그때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정의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을 때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세상은 앞으로도 절대로 정의롭지 않겠지만.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멕시코는 사실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OECD회원국 가운데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길며, 산재사망률도 최근 10년 1~3위를 다투고 있다. 현재 경제상황이 우리가 좀 낫다고 해서 멕시코와 우위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면 굳이 멕시코를 소설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멕시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땅일까? 강경준이 가고 싶어 하던 파타고니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는 70~80년대 일련의 민주화 과정에서 마음에 진 ‘시대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동료들은 국내에서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 가거나 가열하게 살아야 했던 시대에 작가는 한국을 등지고 멕시코로 향하면서 부채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계 어느 곳이나 민중들의 삶은 부당함과의 싸움이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멕시코라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 같지만 결코 다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편협한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생각한다. 파타고니아는 아직은 도달 수 없지만 그래도 꿈으로라도 가야할 자유의 상징이 아닐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의 <메르세데스 소사>라는 시에 나오는 ‘구석’은 말 그대로 구석이면서 온 세상이기도 하다.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건만 세상은/구석을 향해 닫혀 있다는 걸//세상 힘든 것들 구석으로 몰리건만/묵묵히 구석은 그 어깨들을 받쳐준다는 걸//수평선에도 구석이 있고/그 면도날 같은 파도의 한 줄 구석에도/등짝을 곧게 펴는 고기들이 산다는 걸’ 강경준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멕시코 오지로 숨어드는 강경준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고 그 구석은 강경준의 어깨를 받쳐주어 삶을 이어가게 했으며, 면도날 같은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등짝을 곧게 펴고 살아갈 수 있었다. 세상 힘든 것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도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다만 세상이 구석을 향해 닫혀 있을 뿐이다, 종종. 시리아 난민처럼.

 

http://blog.aladin.co.kr/nama/3395532

 

이 소설은 세상이 구석을 향해 닫혀 있는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애니깽이라 불리는 선인장으로 고된 작업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땅, 멕시코. 이제는 문학이 멕시코를 우리 곁으로 오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하나로 연결하고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든 곳이 헐렁한 그곳’, 파타고니아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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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읽기는 집중도를 높인다. 시간이 잘 흐른다. 단, 적당히 읽을 만한 것을 읽을 때.

 

 

 

 

 

 

 

 

 

 

 

도서관에 신간도서로 비치했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몇자라도 적어서 학교 홈피에 올려야되겠기에 읽기 시작했는데...재밌다.

 

엄마 없이 사는 시골농장의 세 식구. 어느 날 아빠가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서 Sarah 라는 평범하고 키가 큰(plain and tall) 여자가 들어오는데, 조건이 있다. 일단 한 달 살아보고 결혼여부를 결정짓겠다는 것이다. 어린 남매는 혹여 이 여자가 아빠와 결혼하지 않고 멀리 가버릴까 불안해하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희망과 절망이 오간다. 새엄마를 향한 아이들의 마음 움직임이 눈물겹다. 담담한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내용이다.

 

아이들 책이지만 읽고나면 맑고 개운한 느낌이 난다. 좋은 책이다. 특히 거의 마지막 장면에선 눈물이 핑 돈다. Sarah가 마차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장면이다. 세 식구는 Sarah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Papa took the reins and Sarah climbed down from the wagon.

Caleb burst into tears.

"Seal was very worried!" he cried.

Sarah put her arms around him, and he wailed into her dress. "And the house is too small, we thought! And I am loud and pesky!"

Sarah looked at Papa and me over Caleb's head.

"We thought you might be thinking of leaving us," I told her. "Because you miss the sea."

Caleb은 어린 남동생, Seal은 Sarah의 고양이. "Seal was very worried!"라며 눈물을 터뜨리면서 새엄마의 치마폭으로 뛰어드는 어린 남자아이의 외로움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한 폭의 그림같다. 아이들에게 읽힐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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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강렬한 햇볕을 쬐고왔더니 심신이 여의치 않다. 이열치열이란 사자성어는 복날에 땀 흘리며 삼계탕 먹을 때나 쓰는 말이지 뜨거운 여행지에서 더위와 갈증과 싸워가면서 쓰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열치열을 몸으로 직접 체득하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에 속수무책일 때, '더워야 얼마나 덥겠어.'하면서 아궁이에 불을 때가며 3박 4일을 그 뜨끈한 방에서 더위와 싸웠더니 그 후부터는 아무리 더워도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한여름에도 긴 소매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실험정신이 대단하지만 섵불리 흉내낼 일은 못된다. 그냥 내 식대로 산다.

 

피서법이 따로 있겠는가. 몸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수밖에. 나무늘보처럼. 그러다보면 오히려 더운 한여름에 집중이 잘된다. 무더위가 사람을 단순하게 하고, 단순해진 몸은 사고를 단순하게 한다. 물론 재미있는 책을 읽을 읽으면 최대의 피서법이 되지만 반대로 아주 재미없는 외국어 공부도 정신집중에 도움이 된다.(적어도 20대엔 그랬다는 얘기.)

 

 

 

 

작년에 도서관에 신청해놓은 책을 이제야 읽었다. 돈을 번다는 건 내 시간을 파는 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이 책. 예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딱 우리동네 사람들 얘기같다. 한여름 바람 잘 통하는 부엌 문지방에 앉아 책을 읽었던 기억도 나고.

 

 

 

 

 

 

 

 

 

 

 

여행 후유증을 이 책으로 달래다. 이제야 이 책을 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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