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얘기지만, 나는 한때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고3이 다되도록 화실에 드나들었다. 그러나 영문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결의에 찬 집요함 "영문학과 아니면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는 말씀에 결국은 백기를 들어 항복했다. 그때부터다. 내 인생이 재미없게 된 것이. 이렇게 시작된 영어와의 전쟁은 지금까지도 휴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얼마나 영어에 한이 맺히셨기에 나에게 그토록 강요하셨을까. 그게 궁금했다. 물론 나에게 영문학을 강요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아버지 왈,
첫째,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분명 영어가 크게 쓰일 것이다. 너희들 세대에는 영어가 필수가 될 터이니 영어전공을 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너는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어서 영어를 하면 성격도 좀 밝은 쪽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 세대에는 영어가 크게 쓰일 것이라는 예견은 딱 들어맞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아버지의 독창성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집 근처에는 유명한 미공군부대가 있었고, 아버지는 읍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셨고, 집에서는 늘 <서울신문>이나 <조선일보>를 구독하여서 어느 정도 세상물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을 내다보시는 아버지였지만 내 성격과 영어가 잘 맞으리라고 생각하신 건...이건 나의 불행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리라. 말 보다 행동이 빠른 편인 나 같은 언어기피증이 있는 사람에게 외국어는 언제나 고문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예상하지 못하셨으리라.
자식의 성향을 깡그리 무시한 아버지는 왜 영어를 자식에게 강요하셨을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더니 영어에 대한 아버지의 한 같은 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1924년생인 아버지는 아마도 영어 하나만 잘해도 출세길을 달렸던 많은 사람들을 알고 계셨으리라. 서당 훈장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한문만큼은 탁월하셨지만 이미 세상은 영어가 판을 치고 있었으니 그게 평생 원망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여럿 자식 중에 대학 하나 겨우 들어갈 자식이 생기니 그토록 영어를 강요하셨을 것이다.
1816년 최초의 영어교육을 시작으로 영어광풍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한국인과 영어라는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을 읽다보면 시름만 더욱 깊어진다. 끝까지 다 읽어도, 대안이라고 하는 부분을 읽어보아도, 그저 가슴만 답답해진다. 물론 동의하는 부분은 많다. 가령,
p. 229.... 우리의 영어는 실수요가 아니라 가수요....가수요가 또 다른 가수요을 낳고 그것이 또 가수요를 낳고 하는 악순환이 바로 우리 영어 열풍의 참모습이다. 이런 가수요는 영어가 가진 막강한 힘 때문에 일어났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항구적 위기의식, 정신적 사대주의, 휩쓸리기 쉬운 문화, 지나친 경쟁 이데올로기와 상업주의, 그리고 학벌주의와 못 말리는 교육열 때문에 급기야 '정신 나간'수준에까지 이르렀다.....그 맹목성은 영어가 가진 권력에서 나오지만, 그것에 기대어 세력을 확대하는 기업, 언론, 정부, 사교유계와 상류층 전반이 이를 조장하기도 한다....영어 교육의 기본 철학을 혁파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와 권력의 문제다...(가수요의 정체는) 내부 서열을 정하기 위해 역사적 상황과 시류에 맞는 판별 도구로 영어가 선택된 것이다.
p.231...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가 서열화를 전제로 한 경쟁의 구도로 짜여 있고 그 장점을 한껏 누리는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엘리트 계층에 오른 상황에서, 서열 타파는 근본적인 국가 개조론과 같다.
p.233...외국의 학생들이 배움에서 '깊이'를 추구할 때에 우리는 순전히 내부경쟁용 변별 수단으로 영어 교육에만 올인하는 꼴이니, 그게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p.249...장기적인 문화 개혁을 추진하려면 기존 학벌 엘리트의 행태를 사교육 문제와 연계시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낙하산 인사와 전관예우가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좋은 학벌로 한 번 출세하면 죽을 때까지 돌아가면서 여기저기 좋은 자리와 기회를 독식하는 기존 풍토를 당연시하면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p230. 서열 없는 사회를 꿈꾸는 건 아름답지만, 그건 종교의 비전과 비슷한 아름다움이다.
희망이 보이는가? 차라리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다. 이민이라도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