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이름만 알고 있었던 페기 구겐하임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자서전이라 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왜 진즉에 읽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예술은 한가해야 나오는 법' 처럼 독서도 한가해야 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내게 해당하는 말)

 

읽으면서 역시 페기 구겐하임은 자서전을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화가들을 키워내거나 도와주었고, 무엇보다도 현대미술분야에서 또렷한 족적을 남겼으니까.

 

자신을 드러내는 솔직함에 놀라고, 곳곳에 숨어 있는 인간미 넘치는 유머에 웃음 짓고, 화랑과 미술관을 일궈낸 열정에 감탄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가들 이름에 압도 당하다보니 만사 제쳐놓고 끝까지 읽게 되는데....하루가 저물고 있다.

 

이 분이 어떤 안목을 지닌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일화 하나. 때는 2차 세계대전, 독일이 프랑스로 다가오고 있을 무렵. 그간 수집해온 작품들을 보존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신세를 지려고 하는데,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루브르 박물관 측은 내가 가진 그림은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공간을 내주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보존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림' 의 작가를 열거하면

 

칸딘스키, 클레, 피카비아, 브라크, 후안 그리스, 레제, 글레이즈, 마르쿠시, 들로네....몬드리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 데 키리코,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브랑쿠시, ...자코메티, 헨리 무어..

 

그림(조각)도 그림이지만 이 분이 밟았던 여러 나라도 기를 죽인다는 것.

 

뉴욕을 떠나온 지 12년 동안 나는 여러 차례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미루었다. 대신 시칠리아, 말타, 키프로스, 인도, 스리랑카, 레바논, 시리아, 그리스, 코르푸 섬, 터키, 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 에스파냐, 탕헤르에 갔다. 하지만 숙부 솔로몬 구겐하임의 미술관 개관식 때는 뉴욕에 갈 것이라고 줄곧 말해 왔다.

 

어쨌거나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유산 상속이 있었으니까 가능했겠지만 그 돈을 이렇게 멋지게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결국 그녀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었을까.

 

 

딸내미 친구 중에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과 베네치아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모두를 다녀왔다기에 어떤 미술관이 더 좋았더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아마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고 갔더라면 영혼이 깃들인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에 대해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는데...두 군데 다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그런가?' 싶을 뿐.

 

 

이 책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메기 구겐하임의 연인이 여럿 등장하는데 특히 막스 에른스트와의 관계를 보면 그 유명한 막스 에른스트는 알고보면 여자에게 기대는 찌질하고-페기가 사랑하는 애완견까지 가져가고 그 애완견이 낳은 새끼를 돈을 받고 페기에게 팔았다는-  치사한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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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4-0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욕 구겐하임에 1998년에 다녀왔어요. 일단 들어가기도 전에 건물 모습을 보고 입이 벌어지더군요.
둘러보고 나오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누구와 나눌수 없어 참 아쉬웠네요. 처음 가보는 뉴욕을 지하철 타고 혼자서 ㅋㅋ
베네치아에도 구겐하임이 있는줄은 처음 알았네요.

nama 2018-04-01 15:59   좋아요 0 | URL
뉴욕 구겐하임은 구겐하임 집안 사람이 (돈이 많아서) 세운 것이고 베네치아 구겐하임은 페기 구겐하임이 이곳저곳에서 살다가 베네치아에 정착하면서 세운 곳으로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해요.

저는 아직 미국에는 가보지 않았어요. 의도적으로.
 

 

 

 

 

 

 

 

 

 

 

 

 

 

 

 

 

 

 

 

 

 

 

 

 

 

 

내리 4권째 읽고 있는데 서서히 끝자락이 보인다. 흥미진진하긴 한데 신물이 올라오려고 한다. 이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입술에 물집도 생겼다. 마음껏 쉬려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는데 이건 쉬는 게 아니다. 게을러지고 싶은데 도대체 이 책 때문에 게을러질 수가 없다. 차라리 빨리 읽고 쉬는 게 나으려나.

 

30여 년 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열흘 동안 읽은 적이 있다. 책에 등장하는 온갖 사람들을 각주를 달아가면서까지 읽었다. 물론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면 자신이 없다. 이젠 기억에 남는 것도 거의 없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그 당시 곰브리치 대신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단지 어려운 책을 읽어냈다는 쓸데없는 자만심 대신 좀 더 내실있는 지식의 기초를 닦지 않았을까 싶다. 소화도 제대로 시키지 못할 책에 집착하느니 기초부터 차근히 다져주는 것이 훨씬 빠른 길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에겐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있었다. 남들 다 하니까, 그래도 명문 축에 들어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나 역시 <수학의 정석>을 끼고 끙끙거렸다. 게다가 되지도 않을 미술대학에 간다고 2년 간 헛된 일에 빠져 있었다. 고3이 되어 미술을 접고 공부에 전념하고보니 수학이 문제였다. 한번도 제대로 풀어보지 못한 수학의 정석을 과감히 버렸다. 우선 수학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보았다. 성적이 올랐다. 이번엔 <기초해법수학>을 집어들었다. 두 번을 풀었다. '기초'를 접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성적도 많이 올랐다. 예비고사에서 수학이 50점 만정이었는데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본고사에서도 수학의 덕이 컸다. 기초의 힘이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미술이야기>가 기초를 다져주는데 그만이다. 역사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로. 예를 들면,

 

사실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세 뒤에 이어지는 유럽의 근대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로 포장하려는 역사 서술 방식 때문입니다. 서양의 근대는 르네상스로 시작하죠. 르네상스를 빛과 영광의 시대로 강조하기 위해 비교 대상이 되는 직전 시기를 낮춰 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빛과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와 어둡고 무지몽매한 중세를 대조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쉽지 않겠어요? 사람들도 이런 선명한 비교를 좋아하고요.

 

앞서 설명했듯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영주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얻어서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고요. 함게 나선 농노들 역시 이 기회에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다채로운 욕망이 뒤엉킨 가운데 상인 계층의 이윤 추구는 단연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새로운 장사의 기회로 보았어요. 1202년에 출정한 4차 십자군은 그 욕망이 가장 숨김없이 드러난 원정이었습니다. 이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가서 같은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학살했거든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콘스탄티노플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5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3만 명으로 줄고 하기아 소피아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요. 4차 십자군의 약탈은 기독교도가 자행한 역대 최악의 노략질일 겁니다.

 

..고딕 성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는 하늘 높이 솟은 고딕 성당이 신과 통하는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고딕 성당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거나 발상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조너스 소크 박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의학자였던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전 세계에 무료로 배포해서 소아마비를 퇴치하는 데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 덕분에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을 선정되기도 했지요.

소크 박사는 언젠가 연구 도중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혀 교착 상태에 바졌다고 합니다. 그때 우연찮게 13세기에 지어진 한 성당을 찾아가게 되었죠. 그리고 바로 그 성당 안에서 실험실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높은 천장 덕분에 꽉 막혔던 자신의 생각이 갑자기 트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 박사는 훗날 자신의 이를을 딴 연구소를 지을 때 건축가에게 연구소의 천장을 높여 달라고 주문했다고 해요. 마치 고딕 성당처럼 말이죠. 이 덕분일까요? 이후 조너스 소크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여러 차례 노벨상을 타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소크 박사가 찾아간 성당은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라고 함.

 

 

읽다보면 작은 감탄이 절로 나오곤 한다. '그랬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책 읽는 기쁨이 배가된다. 책이 좀 두껍다는 것만 빼면. 4권 끝부분이 고딕미술인데 르네상스는 또 언제쯤 출간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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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 인천공항에서 오는 길. 2g폰 보다 훨씬 비싼 일반 카메라는 저렇게 대놓고 태양을 찍으려면 촛점이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2g폰은 어떤 피사체도 거부하지 않는다. 단도직입의 단순함.

 

 

 

생태공원의 소금 창고. 어느 날 보니 지붕이 다 벗겨져버렸다. 마치 탈모가 심한 내 머리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스러져가는 모습을 촘촘히 카메라로 잡아놓을 걸...뒤늦은 후회.

 

 

 

 

 

 

생태공원의 물길. 밀물과 썰물이 있으니 분명 바닷물이다. 물 위에 있는 검은 점 같은 건 물오리들. 너희는 도저히 가까이서 못 찍겠구나.

 

 

 

생태공원에 새로 생긴 해수족욕탕.

 

스마트폰이 지구촌을 접수한 요즘, 2g폰을 꺼내는 행위는 조심스럽기만 하다. 종종 스마트폰에 식상한 아이들이 2g폰을 '간지난다'라며 신기해하지만, 이것도 용기라면 용기라고 할까, 폰을 꺼내며 남을 의식하게 된다. 당당함으로 위장하지만 소심한 마음이 살짝 살짝 드러난다. 작은 떨림 같은 것, 사진에도 드러날까?

 

 

해수족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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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2-18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도직입과 스러져가는 소금창고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머물러요.

nama 2018-02-18 20:23   좋아요 0 | URL
저 소금창고처럼 스러져가는 2g폰이 아쉬워요. 지금은 시대에 뒤뗠어지지만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일 텐데요....
 

 

 

 

 

 

 

 

 

 

 

 

 

 

 

어쩌다보니 두 책을 함께 읽게 되었다. 무민을 탄생시킨 토베 얀손이라지만, 고백하건데 무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정강자, 국제 여성 아방가르드의 대표 화가. 사실 이 분 그림도 직접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화가의 그림보다 책을 먼저 접하는 건 좀 앞뒤가 바뀐 감이 없지 않다. 

 

책만으로 얘기를 하자면, <토베 얀손~>은 토베 얀손의 일대기라서 그녀에 대한 내용이 시시콜콜하게 자세하게 나와있다. 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막간을 이용해서 책을 읽는 습관을 형성해 온 나같은 얼치기 독자에게는 약간 무리가 되는 책이다. 꼼꼼한 내용을 도저히 꼼꼼하게 읽을 수 없다. 숨이 막혀온다. 무민이라는 캐릭터에 미칠듯이 빠져있다면 모를까, 무민이 등장하는 만화 한편이라도 보고나면 그런 의욕이 생길라나, 대강 읽었는데도 눈이 몹시 피곤하다.

 

<화가 정강자~>는 한마디로 하면 병상일기쯤 되는 책이다. 글은 '수술 10일째'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소멸되는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안타까움은 느껴지지만 독자에게는 그 절실함이 잘 와닿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려진 병상의 모습은 이해는 가능하나 너무나 낯설고 이질감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그림이 도식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두 화가는 한 시대를 풍미한 분들로 열정적으로 생을 불태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이분들을 좋아하지 못하는 건 그저 나의 무식과 게으름 탓. 좀 더 공을 들여서 이 분들의 작품을 접하는 게 먼저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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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2-15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18-02-15 19:03   좋아요 1 | URL
우리에겐 구정이 있어 새해 복도 두 배로 받네요.
서니데이님도 새해에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기 기원합니다.
 

90년대 초반, 나는 홍신자에 홀딱 빠져 있었다.

 

 

 

 

 

 

 

 

 

 

 

 

 

 

 

 

그 당시 <자유를 위한 변명>만큼 온몸으로 읽은 책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강렬했다. 감히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라는 염원 같은 것도 마음 속 깊이 품었을 지도 모른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홍신자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더니 자연스레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도 알게 되었다.

 

 

 

 

 

 

 

 

 

 

 

밤 늦은 시간, 홀로, LP판으로 나온 <미궁>을 턴테이블에 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숨이 막힐 지졍이었다. 이건 노래도 아니고 연주도 아닌 접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넋두리라고 생각했다. 원초적인, 음악 이전의 소리였다. 그 후 cd가 나와서, 이국의 친구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으나 글쎄, 제대로 감상했을라나 모르겠다.

 

 

 

 

 

 

 

 

 

 

 

 

 이것도 구입했으나 끝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이 책은 그냥 밋밋했다. 한 세상 자기 길을 잘 찾아간 사람의 소소한 얘기 같은 거여서 큰 울림 같은 것은 없었다. 손자 자랑 따위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평생을 무탈하게 잘 살아온 사람의 얘기는 큰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여튼.

 

 

자신의 길을 오롯이 간 황병기 님,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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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0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있어요 <미궁>
저 지금 <미궁>들으러 갑니다.

nama 2018-02-02 07:27   좋아요 0 | URL
저는 <미궁>이 너무 징그러워서 이젠 잘 안 들어요. 턴테이블도 고장이 났구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