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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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무척이나 무모했던 것 같다. 초2 때, 키가 1미터가 조금 넘었는데 작아서인지 괴롭힘을 좀 당했었다. 내 기억으로 그 애는 아주 컸는데,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기에 나는 그 애에게 방과 후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결과는 웃프다고 해야하나. 처참하게 얻어 맞고 다음 날부터 나는 괴롭힘에서 해방되었다. 그 때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얻어 맞고 울고 돌아오자 그제야 심각함을 느꼈던 엄마가 학교에 갔으니까. 솔직히 심하게 맞았고, 그 남자애는 선생님께 혼났고, 사과를 받았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더 이상 나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이 일은 흑백영화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운동장 모래와 주변 아이들의 소음, 죽여라 외치던 내 목소리가. 20대 중반까지는 모든 걸 명확히 기억한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들이 희미해지거나 기억이 안 나거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그랬다. 그것은 성장의 한 부분일걸까. 모든 일들이 나를 자라게 했지만, 필연적으로 지워지고 마는 걸까.


첫번 째 이야기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를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자라게 한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일들이 남긴 감정들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어릴 때 저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던 것 같다. 나를 도와주는 건 나밖에 없다고. 그보다 더 어릴 때 엄마를 잃어버리고 어떤 언니의 도움으로 파출소에 가서 집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엄마를 찾았는데, 그 때 파출소에 있던 나보다 더 덩치 큰 남자애는 내가 집에 갈 때까지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울고만 있었다. 그렇다. 세상은 일단 내가 한 걸음 나아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는 걸 아주 조그마할 때 알았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내 인생이 막 도전적이고 그렇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한없이 힘들고 작아질 때 속절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었고, 결국 관계가 틀어졌다. 자라지 못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원했고, 그 누군가들은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도 안 도와준다고 그들을 원망했으니까. 여기 이 이야기의 알파와 오메가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성인식을 치를 때 하나로 합쳐진다면 어떨까. 반듯하고 모범적인 알파와 모나고 반항적인 오메가는 서로의 정체성을 잃기 싫어 성인식을 거부한다. 하지만 알파의 할머니는 그런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지켜봐준다. 때론 충고도 하면서. 십여 년을 다른 몸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건 어떤걸까. 지금은 좀 덜하지만, 사춘기 때를 돌이켜보면 하루에 마음이 수십 번도 바뀌고, 이상한 행동도 많이 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의욕적으로 공부하다가도 어떤 때는 세상이 나만 미워하는 것 같고 억울해했다. 그런 마음들은 따로가 아닌 모두 다 나의 마음들이었다. 이 알파와 오메가도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들을 다 겪고 받아들이며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들 역시 그러하리라.


두번 째 이야기는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이다. 아즈깔이란 풀이 있고, 이 풀 때문에 사람들은 '각성'을 하기 시작한다. 각성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모든 생과 살아갈 모든 생을 알게 되는데, 각성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바를 토대로 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선한 일'을 하는 것에는 큰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 '선한 일'이란 것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보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일까. 각성자들은 일어났던 일들과 일어날 일들을 아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행동은 정해진 것일까. '각성'이란 것은 '깨달음'과는 비슷하지만 달라 보였다. 결국은 그 인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런 그들에게 '감정'은 무엇일까. 앞의 이야기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의 알파와 오메가처럼 수많은 삶을 살았고 살아갈 '나'는 결국 그 모든 삶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수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가 또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을 다 알 수 있다면,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각성'인 것일까.


세번 째 이야기는 <긴 예지>이다. 이 이야기는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에도 실렸던 단편이다. 효주는 '볼볼볼'이란 게임 때문에 센터로 가게 된다. 수많은 예지자들이 예지를 하게 되면 다수결처럼 우세한 예지가 미래가 된다고. 점점 예지자들의 예지는 세계의 종말을 향하고 있었고, 최초의 예지 인공지능 '레마'의 베타버전이 가동되려 하고 있었다. 레마의 예지는 중첩된 예지들의 최종본 같은 것이라 그것이 곧 미래라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효주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생각했고, 종말을 막기 위해 레마를 통해 과거의 삶들을 보려 했다. 과거가 있어서 현재가 있고 현재를 통해 미래가 구현된다는 건 3차원적인 생각일까. 사실 모든 시간은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그 시간을 재생하는 것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 재생 시점을 과거로 돌려 무언가를 바꾸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 바뀌는 무언가가 있을까.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나를 반성하고 바꾸면 미래도 바뀌는 건 아닐까. 나는 우주의 일부이자 하나의 우주이고, 내가 바뀌면 우주도 바뀌는 것일까.


네번 째 이야기는 <기도는 기적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는 <바우키스와 필레몬>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세상은 탐욕에 눈이 멀어 눈 앞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메시아 유리가 나타난 건 그럴 때였다. 탐욕스러운 다국적 회사들은 석유든 무엇이든 자원을 추출하고, 바다를 오염시켰다. 개발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사람들은 땅과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정작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없앴다. 기록적인 폭우는 그렇게 이상기후라는 이름으로 찾아왔고,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고립된 사람들은 아기 '유리'에게서 희망을 보고 살아남았다. '기도하는 아기'라는 이름으로, 유리가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동영상은 세계 곳곳으로 퍼졌으나 그 뿐이었다. 그 후 유리는 '메시아 유리'가 되어 지극히 낮고 어려운 곳에 임했다. 하지만 '메시아'의 재림은 더 이상 기적이 될 수 없었다. 탐욕은 탐욕을 불렀고, 유리는 지쳤다. 그리고 마지막 내기에 응했다. 탐욕이 없는 곳이 있을까.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까. '신'은 단 한 사람의 한 순간의 선행으로도 지상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그 선행이 바로 '신'이 아니었을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이 기계의 먹이가 아니라 새로운 인류를 위해 요람의 인류를 만들었다는 것. 결국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요람 속의 인류를 만들었고, 그들은 가상 세계를 살아간다. '매기'라는 AI 혹은 시스템이 '요람 안 인간'을 '키우고', 레오처럼 '세계를 의심하고 세계를 부순 자'는 요람을 나갈 수 있다. '혜경'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는다. 전자적인 방법이 아닌 어딘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 편지를 쓴 이는 '승용'이다. 혜경이 처음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요람 밖을 기억하는 그 존재는 매기 안에서 '승용'을 보았고 '승용'에게 이입됐으며, 급기야 '승용'이 되었다. '승용'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탐구했다. 그 욕망이, 그 생각이 '나'의 것인지, 알고리즘화 되어 세뇌된 것인지, 혜경이 불어넣은 것인지... 내가 가진 욕망은 나의 것일까. 작가는 나의 생각과 욕망이 정말 오직 나로부터 비롯한 고유한 것일까 자문했다고 한다. 정말 나의 욕망은 오롯이 나의 것일까. 나의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람은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앞선 사람들의 생각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동물들이나 길에 핀 꽃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처음부터 처음인 생각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마지막일 생각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면 결국 모든 것은 모두로부터 기인하면서 오롯이 나로부터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주가 나이고 내가 우주가 되는 것일까. 나를 깨닫게 해 줄 '검은 개'는 어디 있을까.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야 가장 밝은 시간을 만날 수 있고,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다시 새벽이 오는 법이다.

각성자들이 이생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깨고 구태어 누군가를 돕는 것, 그리고 때로는 명백히 도울 만한 관계의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86

우리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 P278

매기를 다루는 방식을 사고와 신경을 조작하는 원천 기술로 사용하는 인간은, 또한 종이 가진 신체 매커니즘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중일까요?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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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22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깨달으시다니... 저는 그런 생각은 못했지만, 혼자 하려고 했던 것 같군요 자신은 자신밖에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나중에 안 듯해요 그래도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살면 좋겠네요 여전히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한 적 없고 어른이 아니다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그냥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거여도 그게 다 자신이 생각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1-22 16:12   좋아요 1 | URL
어릴 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사실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 싶었는데 부모님이 화를 많이 내셔서 저희집 삼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했어요. 그것도 좋아요, 지금 삼남매 사이가 정말 좋거든요. ㅎㅎㅎ 어른이 되었다는 건,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죠. 미성년자일 때는 강매를 당해도 벗어날 수 있었는데, 대학을 가니까 제가 계약한 건 유효하더라구요. 갓 신입생 때 뭐 모르고 무슨 영어교재 강매 당한 거 진짜 겨우 해지한 기억이 납니다. 정말 무서웠어요ㅠㅠ 그 때 저 혼자 하다하다 못해서 아빠가 해 주셨는데, 엄청 혼났어요. 엄마가 어찌나 뭐라하시던지... 그래서 부모님께 안 알리고 해결하고 싶었더랬죠. 울타리가 있으면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어른이 되기 좀 더 쉬울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거여도 다 자신이 생각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어려워요^^
 
호랑이가 눈뜰 때 소설Y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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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령 주황 부족의 '세빈'은 열세 살이다. 세빈은 자신의 삼촌인 '환'처럼 우주군의 배를 이끄는 선장이 되기를 원했고, 호랑이령 주황 부족 특유의 권위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인이 되는 훈련을 하던 중 두 가지 소식을 들었다.


첫번 째 소식은 세빈이 우주군 생도로 뽑혔다는 것이었고, 두번 째 소식은 자신의 우상인 '환' 삼촌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수선한 마음을 묻어두고 세빈은 가모장 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위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하고 해태호로 떠났다.


세빈은 해태호에서 만난 동기들인 지, 남규, 유나와 특별조사관 이와 이의 수하 민과 인사를 하고 서로를 탐색하며 하나의 거대한 사건에 휩싸이게 되는데...


세빈은 가문에서 훌륭한 군인이자 가문을 위한 군인이 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세빈은 해태호에서 알게 된 '환' 삼촌에 대한 일이나 '민'에게 얽힌 사연 등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가문과 나라 중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까. 아주 단순할 수도 있지만 또한 아주 어려울 수도 있는 이 문제를 세빈은 대가를 치러가며 풀어간다. 어쩌면 세빈이 어려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장이 어색해서 잘 읽히지 않았고 지나친 우연과 알 수 없는 '환'의 선택 등이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방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호랑이, 여우, 무당 등 민속 문화를 거대한 우주 속에 담아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결국 과학이 발전하기 전이든 이후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건 비슷한가 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나 희망, 사랑 혹은 탐욕은 살아있을테니. 물론 그조차 호르몬이니 뇌의 화학적 작용이니 말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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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타운하우스
박희종 지음 / 메이드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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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술술 읽히면서 즐겁기까지 한 이야기이다. 아파트가 아닌 타운하우스로 이사왔는데 옆집 사람이 한 때 좋아했던 연예인이라니!! 어릴 때 친구네 삼형제가 미쳐있어 알게 된 ‘트러스트’라는 밴드의 보컬인 강하준이 이웃이고, 심지어 가구나 집기들도 다 빌려주고, 강아지도 맡아달라 하고, 또 멤버들도 다 데려와서 왁자지껄하게 지내게 된다면 어떨까.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다면, 성실한 사람은 그 행운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준호는 늘 성실했고 한결같았다. 그래서 하준과 하루를 이어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자신의 또 다른 바람을 찾고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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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환상이야, 감독.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저 발견을 멈추지 않을 뿐이지."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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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8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홉 꼬리의 전설
배상민 지음 / 북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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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그 속에 약한 이들의 사연이나 바람도 있고, 권력을 가진 이의 의도도 있다. 무엇을 담든, 이야기는 햇솜처럼 부풀려져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때는 고려시대 말이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왜구가 날뛰고 이인임이나 임견미 등이 토지 수탈 등 전횡을 일삼다가 제거되는 등 나라가 매우 어려운 지경이었고, 백성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다못해 '가왜'라고 나라나 호족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왜구인 척 도적질을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가왜'의 정체를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관리가 있었고, '가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 선비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이다.


정덕문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로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음서로 출사할 수 있었으나 과거를 보러다니는 한량이다. 그리고 금행은 양백연의 수하에 있다가 그가 제거되자 최영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인물로 당파가 없는 천출 무관이다. 왜구 토벌이든 홍건적 토벌이든 전쟁은 신분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신분상승한 이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혜린 님의 만화 <인월>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도 왜구의 침입 때문에 감동은 인수라는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니까. 물론 이는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정덕문의 고향은 최씨 호장이 세력을 가지고 고을 일을 좌지우지 하는 곳이었다. 고려 조정은 그런 호장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고을마다 조정 관리인 '감무'를 보냈고, 호장과 감무의 알력과 이중 세금 때문에 고을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생기면서 마을은 더 뒤숭숭해졌다.


"여우가 나타났다!!" 

난자당한 시신이 나타날 때마다 호장의 노비들이 외치고 다니는 소리였다. 주로 고을 처녀들이 희생자였고, 노인이 살해당할 때도 있었다. 이들의 시체는 내장이 다 파헤쳐진 채였고, 간이 없었다. 여우의 소행이라는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고, 어느덧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라는 둥, 인간으로 둔갑할 줄 안다는 둥 갈수록 더 기이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이한 존재를 찾아다니는 문덕은 불가살이라는 쇠붙이를 먹는다는 요괴 때문에 금행을 만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여우가 사람을 죽인다는 이 마을의 감무로 오게 된 금행과 만나게 되었다. 둘은 이 사건은 잔혹한 범죄를 여우라는 존재로 사람의 짓임을 덮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범죄자를 찾기 위해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여우 소문 뿐만 아니라, 처녀 귀신 소문도 있었다. 이 고을에 부임한 감무는 귀신의 방문을 받게 되고, 다음 날 타살의 흔적 없이 혼백만 빠져나간 것처럼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장화홍련'이나 '아랑'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 이야기들이 억울하게 죽은 혼령이 방문한 것이었다면, 이 이야기 속 처녀 귀신은 혼령이 아닌 사람이라는 게 다를까. 그리고 또 다른 중대한 범죄를 들키기 싫은 누군가의 사주로 교묘하게 일어난 사람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이 달랐다.


이 처녀 귀신 사건으로 만나게 된 수선과 문덕, 금행은 끔찍한 살인의 범인을 찾기 위해 힘을 합쳤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성장하게 된다. 권력 싸움에 발을 딛기 싫었던 문덕은 지키기 위해 힘을 가져야 함을 알았고, 왜구와 싸우던 용맹한 장수는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동생의 죽음에 슬퍼하던 수선은 동생의 한을 풀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어지럽고 힘든 시기,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살아갔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곳이던가. 하지만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 커다란 의리를 보여주었고, 제법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많은 이들을 구했으니 슬픔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때라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모든 순간이 행복한 것도 아니니 삶은 그렇게 시간을 견디며 작은 기쁨들을 맞이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디 사람을 해치는 여우 이야기가 아니라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가난한 이들이 수확한 농작물이 뺏기지 않도록 해주는 암행어사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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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09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려 말이 시대 배경이라니... 고려 말이어서 더 어지러운 세상이었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참 힘들 때, 왕은 피살당하다니... 옛날 이야기는 현실에 일어난 일을 바꾼 것일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이긴 쪽이 써서 안 좋게 쓰기도 하겠지요 귀신이나 여우 이야기를 이용한 살인... 그런 건 밝혀져야죠


희선

꼬마요정 2024-01-09 10:4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살인자가 가해자를 다른 이로 탈바꿈하는 이야기를 지어 퍼트리는 거 나빠요ㅜㅜ 안 그래도 죽은 피해자들은 억울한데 말이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야기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몸집을 부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이야기의 매력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