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실시 기담괴설 사건집 허실시 사건집
범유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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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괴담류를 좋아한다. 그리고 조상신이 도운다거나, 귀신이 해코지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살아있는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인간이 죽는다고 깨닫거나 해탈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귀신이 산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죽는 순간 깨닫는 바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득도할만한 것일까 하는 거다. 그리고 대부분은 죽는 순간 집착하는 대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텐데, 그 집착이 과연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까? 그래서 뭐 찻집을 가든 저승사자를 따라 삼도천으로 가든 어쨌든 무사히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간다면 정말 다행이면서 이승에 남은 이들에게 영향을 안 끼칠테고, 집착이 심해서든 죽은 줄 몰라서든 계속 이승을 떠돈다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구에 인간만 사는 게 아니니까 돌이든 여우든 나무든 요괴가 될 수도 있을 거고, 도깨비도 있을 수 있을 거고, 이름을 그렇게 붙여서 그렇지 그냥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살 수도 있을테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허실시'는 있으면서도 없는 도시다. 우리 주변에 혹은 내가 사는 이 도시가 허실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향토사 연구자라고 주장하는 진설주 씨에 따르면, 허실시의 연원은 조선 중기 문신 김중환의 문집 <지구집>에서 찾을 수 있다. 헛개나무 열매가 마치 매실처럼 커다랗게 열리는 고을이라 '헛매실골'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허실골'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허실정(虛實町)이라는 한자가 붙어 지금의 허실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땅의 기운을 죽이려고 이름의 유래와는 상관없는 한자를 끼워넣기도 했다는데, 아마도 '허허로운 과실'을 의도했을지도 모를 그 작명은 당시 허실정(虛實町)에서 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던 이로 하여금 묘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p.7) 진설주 씨는 계속 허실시에서 전설이나 괴담을 모으고 있는데, 이제 나오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모두 그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었다.


<최애빵 구출 레시피>는 범유진 작가의 이야기로,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허실시에는 '허실당'이 있다고나 할까. 허실동의 아이인 노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빵은 '김말자 빵'인데 그 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허실당에서 파는 김말자 빵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허실당으로 내려 온 노지연은 자신의 최애빵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허실당에 알바로 취직한 지연은 이 빵과 얽힌 사연을 밝혀낸다. 과학을 미신으로 덮고, 진짜 귀신은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 앞에 놓인 진실은 역시 인간의 탐욕과 편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땅이 울린다'는 표현으로 화재가 난 캠핑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한 지연은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고, 나이도 어렸기에 피해자였겠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덕대골' 이야기는 남편 없이는 제사상에 위패 하나 올리기 힘들었던 여인네들의 한이 서려 있었고, 지연의 인정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역시 인간이나 귀신이나 살아있을 적 삶이나 희망, 원한 등을 내려놓기는 힘든가 보다.


<학교의 흉터>는 박하루 작가의 이야기이다. 학교에 호랑이 귀신이 나타났나? 호랑이 발톱 같은 것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양들이 남았다. 그 날 학교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물건만 찾아서 집으로 갔는데 떠나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의심받은 차우진부터 말이다. 이야기는 갑자기 <삼국유사>에 나온 김현의 이야기로 뛰어간다. 신라시대 김현이 탑돌이를 하다 만난 아리따운 여자가 사실은 호랑이였고, 둘은 사랑을 속삭였고 미래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호랑이 처녀의 오라비들이 사람들을 죽였기에 나랏님은 호랑이 토벌을 명했다. 죄는 오라비들이 지었으나 호랑이 처녀는 자신이 사냥 당하는 것으로 김현의 앞날을 닦아 주었다. 뮤지컬 <송산야화>로도 만들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도 재연된다. 누구의 죄를 누가 벌하고 누가 갚는걸까. 불어 온 바람과 도서관의 소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걸까? 역시 귀신은 살아 생전의 성품을 버리긴 힘든 것 같다.


<사굴기담>은 정마리 작가의 이야기이다. 허실시에 있는 해망산은 예전엔 뱀굴이라 불렸다고 한다. 뱀이 많아서 그런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뱀신을 모시기도 했다고. 한 때는 무당이었다가 하나 뿐인 조카 동희가 무당 이모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자 무당을 그만 두게 된 미령은 허실시에 자리 잡고 조용히 살아간다. 하지만 허실시에서 실종 사건이 몇 차례 일어나고 실종 사건이 일어난 건물이 모두 한 사람 경희 언니의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경희 언니가 커다란 뱀꿈을 꾸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단순히 귀신 탓일까, 귀신 탓인 게 마음이 편한걸까.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귀신은 변덕을 부리는 것일테지. 그렇게 미려는 본래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간다.


<서울에듀아랑 학원 전설>은 김영민 작가의 이야기이다. 성덕은 대구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가 불미스러운 소문 때문에 대구에서 200키로미터나 떨어진 허실시로 가게 된다. 그 곳에 있는 학원에서 자꾸 선생님들이 실종되거나 죽어서 자리가 비게 된 것. 성덕은 그 학원에서 잘해보려 노력하는데, 다음 실종될 사람이 자신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덕은 다음 주에도 계속 학원에 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실종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성덕은 최초의 실종자인 가온과 영주쌤 두 사람의 행적을 학원생인 서정과 향토사 연구자 진설주와 함께 조사하게 된다. 여기서 아랑 전설은 마치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아랑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그 원한을 풀기 위해 귀신이 되어 사또 앞에 나타났고, 사또들이 줄줄이 죽어나갔지만 어느 현명하고 용감한 사또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내려오다 어떻게 허실시까지 온 것일까. 이 이야기 역시 범죄와 과학은 저주로 덮이고, 산 사람이 제일 무섭고, 아랑 전설이 보여준 것처럼 악의에 찬 소문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H골 여우 누이 설화 변이형에 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린레보 작가의 이야기이다. 허실시에서 열린 '요괴소설 컨퍼런스'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주최자인 향토사 연구자 진설주와 대만의 요괴소설 작가 류젠밍은 같이 이 컨퍼런스 사회를 맡아 발표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성별 때문에 BL작가로서의 생명이 끊겨버린 '세실리'는 과연 누구일까. 우리 나라에 전해내려오는 여우 누이 전설은 여느 전설과는 다르게 아주 폭력적이다. 어떤 한이나 이유 따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우 누이 자체가 악한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허설시에서는 이 여우 누이 전설을 살짝 비튼다. 막내 오빠가 세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위급할 때마다 하나씩 던지는데, 허설시에서는 주머니가 아니라 헛개 열매 세 개이며, 하나씩 던질 때마다 가시밭이나 불바다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는데, 허설시 전설에서는 헛개 열매를 던지면 고기나 훈남이 유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엔 갑자기 금강역사가 나타나는데, 진설주 및 세실리는 나름의 해석을 내 놓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여우 누이의 이야기일까, 인간 요괴의 이야기일까. 갖고 싶은 것이 나타나고 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난다는 해석은 제법 그럴싸했다.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거나 유혹을 헤쳐나와야 하는 거나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모든 동네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게 아랑 전설이든 여우 누이 전설이든 말이다. 여우 누이 전설은 제법 신기한 이야기인데, 새로운 해석이 신선해서 좋았다. 역시 옛날 이야기는 이렇게 비틀어도 재미가 있다. 사람이나 귀신이나 어차피 살아 있고 죽어 있고의 차이 뿐이라서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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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8-31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귀신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 요즘 뉴스를 보면 딱 알겠잖아요?^^
리뷰를 읽으면서 줄곧 악귀를 떠올렸습니다.
전설의 이야기는 늘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귀신의 전설이야기는 더 신기하네요.

꼬마요정 2023-09-01 00:33   좋아요 1 | URL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 젤루 무서워요. 결국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건 신체를 가진 사람이고, 악의를 가진 사람이니까요.

우리나라 전설이나 설화 등등 재밌는 거 너무 많아요. 정말 옛날 사람들 천재인 것 같아요 ㅎㅎㅎ 여기 나오는 사굴 같은 경우는 제주 설화를 가져온 것 같고, 아랑 전설은 워낙 유명하니까요 다 아실 것 같고, 여우 누이 전설도 워낙 특이한 이야기라서 다 아실 것 같긴 해요. 김현감호는 삼국유사에 나오니까 다 아실거고... 그런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또 이렇게 비틀어주면 또 새롭고 재미나고... 아, 정말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악귀> 너무 재밌죠? 저도 우와 하면서 봤습니다.
이제 책나무 님 <손 더 게스트>나 <방법> 도전해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ㅎㅎ
방법 드라마에 조민수 배우 진짜 연기 잘 해요 ㅎㅎㅎ
손 더 게스트 보고 나면 저도 모르게 계속 박일도를 찾고 있어요 ㅋㅋㅋ

책읽는나무 2023-09-01 15:53   좋아요 1 | URL
손 더 게스트...방법!!!!✍️
또 정보 얻어 갑니다.
근데 박일도는 중학 동창 이름인데??ㅋㅋㅋ
참 저 그것도 다 봤어요.
경성 스캔들이요.^^
한지민은 옛날 그 시절에도 연기를 잘했더군요. 키도 작아 근대식 한복도 잘 어울렸어요.
한고은의 화려한 드레스 구경하느라 와...ㅋㅋ
가장 멋진 역할이었어요.
결말은 가장 불쌍한 주연이었구요. 시대의 희생 아이콘ㅜㅜ


꼬마요정 2023-09-01 23:42   좋아요 1 | URL
<경성스캔들> 보셨군요. 그거 ost도 좋았는데... 근데 지금 보면 좀 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배우들 모두 연기가 참 좋아서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에 너무 슬펐어요. 한고은 너무 멋졌구요. 류진 너무 불쌍하고... 에휴... 진짜 불행한 시대였습니다ㅠㅠ

박일도... 중학 동창 이름이라구요?? ㅋㅋㅋ 드라마 보시면 알아요 ㅋㅋㅋ 우왓 ㅋㅋㅋ 이런... ㅋㅋㅋㅋ 금방 찾았네요. 책나무 님 ㅋㅋㅋㅋㅋ

서곡 2023-09-02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귀 방법 손더게스트 다 재밌게 본 일인 추가요 ㅎㅎㅎ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꼬마요정 2023-09-02 14:48   좋아요 1 | URL
서곡 님도 재밌게 보셨군요!! 너무 반갑습니다. ㅎㅎㅎ
주말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Book] 유리미인살 6 (완결) 유리미인살 6
십사랑 / 답인(答人)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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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각색이 훨씬 나은 듯. 나름 인연들을 엮었지만 그닥 감흥은 없었다. 성군이 좋다고 하면 거절하지 굳이 돌이 되어버린 직녀만 불쌍하네. 아무리 봐도 백제가 나후계도를 난도질한 건 이해불가. 좋으면 잘해줘야지, 신선이라면서 별 미친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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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27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신선이라면서 별 미친 짓을 ㅋㅋㅋㅋ

2023-08-27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7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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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는, 단 한번도 살고 싶다고 빈 적이 없다. 돌로 그녀를 빚은 것도 피그말리온이었고, 본심은 그 석상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달라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석상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피그말리온이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의 본심을 꿰뚫어 본 베누스(아프로디테)는 그 석상에게 생명이 깃들게 했다. 그 상아 석상에게 갈라테이아란 이름을 준 피그말리온은 그녀와 결혼했고, 딸인 파포스를 낳았다. 파포스는 아들인 키뉘라스를 낳았고, 키뉘라스는 딸인 뮈라를 낳았다. 뮈라는 아버지인 키뉘라스를 사랑했다.


피그말리온이 원한 건 석상이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석상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인형이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오로지 자신만이 만질 수 있는.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어떤 선택권도 가지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가지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 역시 그녀의 몫이 아니었고, 그녀의 목소리 자체를 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매들린은 갈라테이아에게 목소리를 주었다. 


프로포이티데스들이 싫어서, 나그네를 희생 제물로 바친 그들을 베누스가 저주하여 최초로 창녀가 된 그들이 싫어서, 피그말리온은 하얀 상아로 갈라테이아를 빚었다. 순결한 처녀로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갈라테이아가 생명을 얻자 처녀로 남겨두지 않았을까?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술수를 써야했다. 왜 아무도 그녀가 싫다는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래놓고서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 거짓말을 하자 그녀가 나쁘다고 비난할까?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고 싶다고 빈 적이 없었다. 살아서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생명을 얻은 후 그녀에게는 성관계, 출산, 육아의 경험이 주어졌고, 순결함과 고분고분함이 요구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정말로 생명을 얻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라테이아의 딸인 파포스는 아들인 키뉘라스를 낳았고, 키뉘라스는 딸인 뮈라를 낳았다. 뮈라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이는 피그말리온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이 빚은 자식 같은 갈라테이아를 취한 피그말리온과 혈육인 아버지를 유혹한 뮈라를 보니 어쩌면 운명은 돌고 도는 것일지도.


인간은 어리석고, 본질이 돌인 갈라테이아의 선택은 피그말리온의 폭력적인 사랑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다. 피그말리온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었다면,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을 자신과 같은 돌로 만들어보고 싶었는지도. 그러면 조금이나마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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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토럴리아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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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힘들고 한국도 힘들고 중국도 힘들고 영국도 힘들고 일본도 힘들고… 안 힘든 곳이 없나보다. ‘목가적’인 이 테마파크는 거짓이지만 진짜이다. 열정적인 종교인인 ‘윙키’는 닐을 힘들게 하지만 본인은 모른다. 닐도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납량 특집보다 더 무서운 ‘죽은 이모가 돌아 온’ 이야기는 <시오크>다. 학교 폭력이 연상되는 ‘세상에서 퍼포의 끝’은 그냥 끝이다. 화려한 복수?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발사의 불행’은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하지 못했다는 거다. ’폭포‘에서 모스를 보니, 그 짧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람의 머릿속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갈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주마등이란 표현이 괜한 게 아니었다.

세상은 ’똥통‘이고, 더럽고 추악하다. 그런데 변비 환자에겐 어떻게 느껴질까… 여든 살 할머니가 브라만 하고 돌아다닌다는 장면에서 굳이 브라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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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밤 여행자 1 밤 여행자 1
자오시즈 지음, 이현아 옮김 / 달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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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하는 인연 혹은 사랑이 있다. 그리고 시간대를 초월하는 사랑도 있다.1930년에 지어진 699번지 아파트는 곡선형 빌딩으로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조용했고 한 세기 동안 전쟁과 변화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았다.(p.31/433) 이 699번지 아파트는 기묘하지만 소중한 인연을 이어주는 곳이었다. 2015년에 쭝잉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1937년에 성칭랑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1937년 7월 11일, 밤 10시 성칭랑이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꺼졌다. 2015년 7월 11일, 밤 10시 쭝잉이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관 등이 깜박거렸다. 한 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단 하나, 현관 등. 이 등은 1937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성칭랑을 2015년의 상하이로 데려왔다. 37년 당시 일본은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해 전쟁 중이었고, 상하이는 조계가 있는 지역조차 전쟁 위험이 감지되던 때였다. 성칭랑은 성씨 가문의 공장을 중국 내륙으로 옮기고자 노력했고, 한 번도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곧은 성격과 책임감으로 일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여전히 가족들은 성칭랑을 믿지 못했고, 오로지 여동생인 성칭후이만 우호적이었다. 


2015년 7월 쭝잉은 의사였으나, 사고로 인해 더 이상 수술을 하지 못했기에 법의관이 되었다. 쭝잉의 부모님은 모두 신시제약의 임원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쭝잉의 어머니는 쭝잉의 생일에 사망했고, 2015년 현재 쭝잉의 이복동생과 신시제약의 임원인 싱쉐이(새어머니의 동생)가 터널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다. 이 사건은 상하이를 흔들었고, 쭝잉의 사진이 신문에 날 정도였다. 신시제약과 선을 긋고 있던 그녀로서는 난감했으나, 이 사건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이야기는 1937년과 2015년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1937년 상하이 전투가 끔찍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2015년에는 쭝잉의 개인적 건강 문제와 집안 문제가 날실과 씨실이 얽힌 마냥 진행되고 있었다. 밤 10시,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은 성칭랑이었고 그와 닿아 있는 사람이나 사물은 같이 시간을 이동했다. 덕분에 쭝잉은 수차례 1937년의 상하이를 방문했고, 성칭랑의 가족들을 만났다. 뜻하지 않게 성칭랑의 형 성칭샹의 다리 절단 수술에 관여했고, 모르는 이의 출산을 도왔으며,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맡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호했던 그녀는 성칭랑의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겼다.


성칭랑 역시 자신의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의 영역에서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쭝잉에게 의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위안을 받기도 했다. 터널 사고와 관련하여 쭝잉의 어머니 사건까지 성칭랑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선후관계 및 우선순위를 정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에 비하면 다른 사건들은 작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베이징에서 텐진을 거쳐 수도인 난징으로 가는 대신, 바다를 통해 바로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가려고 했다. 일본은 국제연맹도 탈퇴했겠다, 상하이가 외국인 조계 지역임에도 국제 사회를 무시하고 폭격을 시도했고, 끝끝내 상하이를 함락한 뒤 난징으로 가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 석 달 가량의 기간이 성칭랑과 쭝잉의 시간이었다. 둘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서로만의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힘을 보태주고 서로 의지하게 되었으니, 그 아슬아슬한 감정 상태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한 발만 내딛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쭝잉의 동료이자 친구인 쉐쉬안칭이 성칭랑을 의심하여 그를 푸둥 공항에 내려주게 된다. 그 날은 상하이 전투에서 황푸강 우안에 있는 적군을 위협하기 위해 중국 제8 집단군이 푸둥 수비에 나선지 이틀 뒤였다. 복숭아 맛이 나는 입맞춤 뒤 헤어진 두 사람은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쭝 선생 시대의 아파트는 내부가 거의 다 바뀌었고, 이 현관 등 하나만 남아 있더군요."

성칭랑이 한 손으로 신문과 우유병을 든 채로 현관 등을 보면서 말했다.

"저 등이 나의 길을 비추고 쭝 선생의 길도 비춰주니 귀한 인연이네요."

성칭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74/433) - P74

거리 끝에서 서서히 해가 밝아오는 모습은 백 년을 이어온 이곳의 풍경이었다.(30/433)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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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8-22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건 좋게 끝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1937년은 그리 좋은 때가 아니었네요 다른 시대에 갔을 때 사람을 도와야 할지 돕지 않아야 할지... 아무것도 못한다면 모를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 것 같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08-22 10:00   좋아요 1 | URL
37년은 우리나라도 중국도 다 안 좋은 때였네요. 다른 시대로 가면 심지어 과거로 가게 되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말씀처럼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3-08-22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와 다르게 매우 스펙터클한 내용이네요.

꼬마요정 2023-08-22 10:01   좋아요 0 | URL
뭔가 잔잔하고 이성적인 느낌인데 내용은 전쟁에, 음모에… 재밌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