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저녁, 도장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샤워를 하려고 보니 따뜻한 물이 안 나오는 거다. 잠깐 고민한 후 찬물로 샤워하기로 했다. 운동 후 찬물 샤워는 운동으로 인해 생긴 염증을 줄여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가. 나는 재빠르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데, 몸에서 열이 나서 놀랐다. 찬물로 샤워를 하니 몸에서 열이 나네? 덕분에 집에 올 때까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 


찬물 샤워를 하면서 떠올린 건 두 권의 책.
















우연히도 <리센코의 망령>을 읽고 얼마 뒤 <악의 유전학>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최근 러시아 유전학계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을 탐구하는데, 첫 번째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란 무엇인지와 획득 형질의 유전이 정치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이다. 두 번째는 후성유전학에 대해 살펴보고, 후성유전학이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석한다. 세 번째는 획득 형질의 유전이 러시아의 역사에 끼친 영향 때문에 현재 후성유전학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다룬다. 


획득 형질의 유전은 부모 세대에 일어난 형질 변화가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마르크(1744~1829)의 <동물철학>의 서문에 이 이론이 자세히 제시되어 있어서인지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획득 형질의 유전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주의가 곧 획득 형질의 유전을 뜻한다고 이해하는 방식이 생물학계의 표준이 되었다고 한다.(p.43/334) 라마르크는 환경이 진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1920년대 러시아에서는 인간 유전 대논쟁이 있었다. 콜초프를 비롯한 소수의 비(非)마르크스주의적 멘델주의 유전학자들은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시 서유럽과 미국에서 회자되던 우생학이 러시아에서 실현되기를 소망했다. 콜초프는 인간 유전자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회적, 정치적 환경은 인간의 유전과 무관하다 주장했다.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고전유전학자들 역시 우생학을 지지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우생학이 올바르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생학적 선택 앞에서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였다. 


그 외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생명사회적 우생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라마르크주의적 생명사회 우생학이 실현되어야 하며 획득 형질의 유전이 그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소련 시민의 후손들은 그들 부모 세대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획득한 형질을 물려받게 될 것이며 이로써 '새로운 소비에트형 인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바실리 슬렙코프 등 유전학자가 아닌 인사들로 구성된 그룹은 어떤 형태의 유전학이든 유전학이 소비에트 사회 발전의 핵심과는 관계없으며 마르크스주의에 위배된다고 믿었다.


이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센코였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는 189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도시 외곽의 농민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폴타바 원예연구소에서 실용적인 농업 교육을 받았고, 1925년부터 아제르바이잔의 간자 식물육종장에서 농작물의 생장 기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생물의 발달에 대한 리센코의 견해는 '영양분 이론'으로 정리된다. 그는 '영양분'이라는 단어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했고, 유전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세포를 구성하는 특정한 일부분이 아니라 세포 전체가 유전을 매개한다고 믿었다. 리센코는 코오페라토르카 겨울밀 실험에 가장 오랫동안 매달렸는데, 이 겨울밀 종자를 3월 초에 온실 속에 파종하여 4월 말까지 온실 온도를 매우 낮게 유지했다. 이렇게 식물을 저온에 노출시켜 개화를 촉진하는 과정을 '춘화 처리'라고 하는데, 이 춘화 처리를 거친 후 온도를 높였다. 이 실험을 계속해서 9월 9일에 살아남은 밀 한포기가 이삭을 팼다. 리센코는 이 식물에서 채취한 곡식을 다시 온실에 파종했고, 다음 해 1월 말에 이삭이 팼다. 3세대는 8월에 이삭이 팼다. 리센코는 코오페라토르카 밀이 봄에 자라는 식물인데, 춘화 처리를 통해 이 식물의 습관이 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오류투성이였다. 대조군도 없었으며 통계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리센코는 생물의 유전이란 여러 세대에 걸쳐 외부 환경의 조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외부 환경 조건에 변화를 가하면 유전에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전 과정을 물질적으로 매개하는 어떠한 운반자가 존재한다는 개념에 도달했으나 이 운반자가 유전자를 뜻하지는 않았다. 이 내부 입자는 내자화된 환경 조건으로서, 그 표현의 측면에서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의 측면에서나 굉장히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p.154/334) 그리고 선천적으로 우성 유전자나 열성 유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내재적 잠재력'이 '발전하는 데에 필요한 외부 조건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우성형질을 열성으로, 열성형질을 우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이 유전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데에 더 나은 수단을 제공한다고 보았다.(p.161/334)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이 러시아의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탈린과 후르쇼프는 현대유전학에 대해 몰랐고, 리센코의 과학적 견해에 어떠한 오류가 있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리센코와 그들은 초라한 가문 출신이었고, 서방 세계와 맞서 싸웠다. 리센코는 그들의 지지 아래 러시아 유전학계를 군림했고, 바빌로프 등 저명한 유전학자들을 추방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리센코의 실험은 실패했고, 대기근이 찾아왔다. 리센코가 축출된 이후 러시아 유전학계는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고, 그래서 후성유전학의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리센코의 이론과 후성유전학은 연관이 있어보이지만 전혀 같지 않았다. 리센코는 심지어 통계를 조작하기까지 했다. 그가 옳았던 부분에 있어서 그는 독창적이지 않았다. 그가 독창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옳지 않았다.(p.236/334) 


저자는 리센코의 이름이 언급될 때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폭압적인 국가 덕분에 자신의 견해를 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강요할 수 있었던 무능한 과학자'의 모습이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 러시아는 푸틴이 통치하고 있다. 신리센코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정치와 무관한 것일까.


 이 책은 서론을 지나고 리센코 후작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짐작이 가능해진다. 시대는 다르지만, 작가가 홀로드나야 실험의 수장을 리센코 후작으로 이름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대조군을 둔 점은 좀 달랐다고나 할까. 리센코 후작은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와 독대한 후 추위를 타지 않는 위대한 러시아 백성을 만드는 실험에 착수했다. 


그 실험은 너무 잔혹했다.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을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 환경을 조작해서 말이다. 시베리아에서도 외곽이자 가장 추운 곳에 홀로드나야란 마을을 만들고 그 곳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고아들을 살게 했다. 250명씩 남녀를 각각 동쪽과 서쪽 마을에 분리한 후 그들에게 얇은 옷을 입혀 생활하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연못에 입수시켰다. 이렇게 하면 '한랭 내성' 입자가 생겨서 그들의 자손은 추위를 타지 않게 된다는 이론을 위한 실험이었다. 


처음으로 결혼하는 나타샤가 긴팔인 혼례복을 입자 한 말이 "따뜻하다..."였으니 이 아이들이 얼마나 추위에 떨었을지 참담했다. 아이들은 다른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이 상황이 어떤지 알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인 케케는 그저 굶지 않고 다같이 살아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마 그 말은 맞을 것이다. 자신을 보살펴 주는 언니 나타샤가 있고, 마음 속에 품은 베소가 있고, 다정한 후작이 있고, 늘 먹을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사이의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황제가 준 기한이 다가오자 리센코 후작은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이론에 함몰되어 자신 이외의 모든 이를 망쳐버린 리센코 후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 이 무시무시한 실험을 계속할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고 학대를 일삼은 후작, 그리고 그 악을 품은 유전자는 어디로 갔을까.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없는 형질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있는 형질이 온오프 되는 것이지, 이미 발현된 형질을 더 많이 만든다거나 내용을 바꿀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저 학살의 유전자는 얼마나 충분히 발현된 것인가.



잠시 잠깐 찬물로 씻을 때 너무 춥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심장마비 걸릴까봐 오래 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케케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얆은 속옷 같은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얼음을 깨고 연못에 들어간 아이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자 하는 학문이 어쩌다 인간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 그것도 유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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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6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추워지지 않았나요?! 찬물 샤워라니!! 폭포 밑에 가신 건 아니죠?! ㅋ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26 11: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부산은 그렇게 안 추웠어요. 워낙 온도가 높았었거든요. 날씨 너무 이상해요. 19도까지 올랐다가 9도 정도로 떨어지니까 한파 경보 오고... 온도 차가 10도인가 이상이면 한파 경보라고 하던데... 근데 또 주말은 너무 춥네요ㅠㅠ 날씨 적응이 안돼요ㅠㅠ
찬물 샤워라지만 추워서 물칠만 했어요 ㅋㅋㅋㅋ 폭포라니요 ㅋㅋㅋ 30초컷이었어요 ㅋㅋㅋㅋ

호시우행 2023-11-26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잔인한 동물이란 생각이 들어요,ㅠㅠ

꼬마요정 2023-11-26 13: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참으로 선하기도 하고 참으로 잔인하기도 하죠...
뭐든 꼭 자기 이익에 부합하게 인간을 조종하고 싶은 인간들이 무섭습니다.ㅠㅠ

새파랑 2023-11-26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물 샤워 덕분에 유전학을 떠올리시다니 대단합니다. 이게 바로 독서의 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하는걸 보면 인간이 제일 무섭긴 한거 같습니다.

아 오늘 너무 춥네요 ㅜㅜ

꼬마요정 2023-11-26 22:58   좋아요 1 | URL
마침 유전학 관련 책들을 읽어서 그런가봐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악의 유전학>은 소설인데 마치 실제인 것처럼 써 놓은 것 같아요. 제가ㅠㅠ 소설인데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을 것 같긴 하지만요ㅠㅠ

춥죠ㅠㅠ 겨울 되니까 저 소설 너무 와닿아요ㅠㅠ
 
[eBook] 여름기담 : 매운맛 여름기담
백민석 외 지음 / 읻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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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무서울까, 인간이 무서울까. 나는 인간이 무섭다고 생각한다. 귀신은 하다못해 내가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기이한 일들도 나름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다른 존재들에게 저지르는 일들은 직접적으로 고통이 오기도 하고, 보거나 듣기만 해도 너무 참혹한 경우도 많으니까.


그래서 첫 번째 이야기인 백민석 작가의 <나는 나무다>에서 화자인 나무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오백년을 버틴 나무마저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은 세월을 거듭하면서 자기종 뿐만 아니라 숲도, 나무도, 바다도, 산도 모두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오백년의 세월 동안 그 고통스러운 파괴를 지켜보는 나무의 마음은 절망에 가득찼다. 여전히 죽지 못한 나무는 다가 올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할 것이기에. 인간은 불로불사를 꿈꾸지만, 돈이나 권력, 동반자가 없는 불로불사가 의미가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인 한은형 작가의 <절담>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게 했다. 암매암의 유심 스님은 인플루언서이자 절밥의 대가이자 힙한 인물이다. 자신이 있는 암자의 매실을 정과로 만들어 스토리를 엮어 상품을 만들었고 유명해졌다. 그런 유명세 및 부(富)를 어떻게 거머쥘 수 있었을까. 암매암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능력을 요리조리 베끼고 이용한 것일까. 붉다 못해 피처럼 검은 홍매에서 나는 매실은 누구의 피를 머금었을까. 피보다 더 진한 욕망은 누구의 것일까. 유심 스님은 정말 성직자일까... 시대정신을 따른다는 그는 이 시대가 낳은 황금만능주의에 헌신하는 성직자일까. 


세 번째 이야기는 성혜령 작가의 <마굿간에서 하룻밤>이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이자, 그런 외로움을 파고든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의지할 데 없는 암환자를 등쳐먹기 위해 교묘하게 기억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사실 그 기억이 온전하기는 할까. 문진의 어머니는 왜 그 마굿간이 있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을까. 돌아갈 곳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머금는 사랑은 어떻게 이리도 이기적일까, 슬퍼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성해나 작가의 <아미고>이다. 아미고, 친구를 뜻하는 그 단어는 AI 로봇에게 붙혀진 이름이다. 스턴트 배우들 사이에 어느 날 들어 온 그 로봇은 어느 새 그 스턴트 배우들을 모두 몰아냈다. 단 한 사람, 죠만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죠는 이미 한 차례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인해 자동차 엑셀을 밟기가 무서워졌고, 결국 그 씬은 아미고가 대신 찍었다. 동전 던지기 같은 미신이라도 단 한 차례의 행운을 바랐던 죠는 인간에게는 버림 받았고, 로봇에게는 구원 받았다. AI가 대체한 현실이 무서울까, 인간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실이 무서울까.


역시 인간이 제일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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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4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 저는 책 표지만 보고 알라딘이 이젠 팔다 팔다 카레도 출시한 줄….

꼬마요정 2023-11-24 00:22   좋아요 2 | URL
말씀 듣고 보니 카레처럼 보입니다 ㅋㅋ 요즘 추세로 보면 카레 판다해도 이상하지 않은 알라딘이네요. ㅋㅋㅋ 그나저나 은바.. 아니 푸바오랑 잘 어울리십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3-11-24 00:23   좋아요 1 | URL
카레 판다…. 에 흠칫 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24 00: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1-24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인간이 가장 매운건 맛는거 같아요.
내용 자체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표지가 좀 그렇네요 ㅡㅡ 진짜 3분카레인줄

꼬마요정 2023-11-24 15:30   좋아요 1 | URL
그쵸? 인간이 젤 매운 건 알겠는데 표지가...
저도 표지 보고 뭐지 하다가 기담이라길래 읽었거든요. 표지랑 제목을 바꾸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희선 2023-11-25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도 사람이 되는 거기는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산 사람을 저주할지도...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섭기는 하죠 사람은 괜찮기도 하지만, 아주 안 좋기도 하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11-25 09:17   좋아요 1 | URL
아주 거룩한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이고 아주 부정하고 사악한 일을 하는 것도 인간이네요. 귀신이 산 사람이 죽은 존재라면 살아있을 때의 인간 속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것두 무섭긴 합니다만. 그래도 실체 없는 존재보다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 제일 무섭네요… 좋은 일들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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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 여자 이야기는 흔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제법 특별하다. 왜냐하면 미은이 남장을 하게 된 계기가 죽음이나 어떤 불가항력적인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은이 약간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이 불가항력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 자체만으로 봤을 때 미은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진정 원하지 않았더라면. 


집안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자은이 없다고 해서 망해가는 집안이 순식간에 폭삭 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미은이 자은을 대신한다고 해서 금방 집안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셋째이지만 첫째가 되어버린 호은의 성격이 우리가 보기에 상식적이지 않아 보여도 의외의 곳으로 열린 사람이기도 하지 않은가. 미은에게 죽은 오라비인 자은을 대신하라는 제안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하여 미은은 선택을 했고, 남자인 자은이 되기로 결정했다. 아마 그 결정 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보다 넓은 곳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이는 갖은 고생 끝에 자은이 금성으로 돌아오자 동생인 도은이 지은 표정이나 도은이 한 말로도 알 수 있었다.


 자은은 여동생이 무척이나 함께 가고 싶어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언젠가 자신이 지었던 표정일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모든 일에서 소외되었을 때.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다니, 미쳐도 한참 미쳤다고. 그런데 이제 언니가 왜 그런 장단에 끌려들어갔는지 이해해. 왜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했는지. 큰물을 두 번 건넌 대가로...... 이름을 바꾼 대가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75-76쪽)

 

 자은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죽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미은이 죽었고, 그렇게 미은은 자은이 되어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기까지 많은 역경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들은, 심지어 당나라와도 싸웠기에 당나라에 유학 가 있던 신라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안 그래도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집안에서 유학 온 자은이었으니, 신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던 기간 동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더랬다. 먹을 것이 없어 내내 굶다보니 살이 너무 빠져서 달거리마저 하지 않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게 여자임을 숨길 수 있어 좋다고 자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겨우 사신단을 따라 금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사건들이 자은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시작은 사신단과 함께 금성으로 돌아오는 물길에서였다. 배에서 상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동행했던 아내와 딸은 사라졌다. 사신은 설씨 가문을 알고 있었고, 자은에게 이 사건을 해결할 것을 명령했다. 자은은 배에서 만난 백제 사람인 목인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서글프고 우울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한 나라가 망하면서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린 왕실 핏줄의 여인들 이야기라든지,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의 왕을 팔아넘긴 신하들 이야기라든지 말이다. 그렇게 자은은 범인을 찾을 듯 못 찾을 듯 사건을 해결하기는 한다. 자신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자은은 갈 곳 없는 인곤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손재주가 좋고 명민한 인곤은 식객이 되어 자은과 함께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아마 그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한가득 있을 것이다. 망한 나라의 백성일지, 귀족일지, 왕족일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사건은 진짜 자은의 과거와 함께 나타났다. 시장에서 자은을 알은 체 하던 여자는 산아였다. 미은이 모르는 여자였고, 자은과의 감정 교류가 꽤나 깊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그런 산아의 아버지인 독군 김무헌이 매소성 전투에서 돌아와 '업화'인지 병인지 모를 이유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단서는 손바닥에 있는 붉은 글자였으며, 이런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산아는 자은을 찾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참으로 참혹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들에는 인간의 사악함이 대놓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자은이 차라리 '업화'였으면 하는 것도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전쟁은 참전한 군인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전쟁터가 된 곳의 백성들도 모두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살아돌아와서 기뻐하는 가족들에게도 전염되고,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은 살아돌아 온 사람에게 자신의 염원을 투영한다. 김무헌이 끝내 밝히지 말라는 것도 슬펐고, 약야 스님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슬펐다. 그 전쟁에서 살아돌아 온 모두가 슬펐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도 모두 슬펐다. 그렇게 그 사건은 가슴 아프게 끝났다. 하지만 산아의 말처럼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로우니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단단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상대등의 아들과 결혼한 처지라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자주 나오지는 못하지만.


세 번째 사건은 길쌈대회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자은의 동생 도은은 산학에도 밝고 집안 살림도 맡아하고 길쌈도 잘 하는 등 다재다능한 여자다. 그런 도은이 소판 부인 쪽에 서서 북을 잡게 되었는데, 하필 도은이 베를 짜야할 차례에 누군가가 베틀을 망가트린 것이다. 도은은 울상이 되었고, 소판 부인은 놀랐고, 자은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소판 부인은 문무왕의 조카로, 안승의 처다. 안승은 결국 고구려도 보덕국도 다 포기하고 신라 왕실에 편입되었는데,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고구려 유민이나 보덕국인들의 표적이 되어 소판 부인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지내고 있었다. 그런 부인의 집에서 길한 행사인 길쌈 대회를 위한 베틀이 부서졌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대회는 많은 여인들이 그나마 바깥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금전(나라의 비단, 직물 관련 부서)의 모가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 이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도 범인을 밝혀야 했다. 


자은은 산아에게 도움을 청했고, 산아는 소판 부인과 반대편인 도철 부인 쪽이었지만 쓸만한 정보를 건네 주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인지,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도 있었고 예순이나 먹은 남자가 십 대인 어린 여자를 처로 들이려고도 했고, 아름답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혼인을 거부한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도 있었다. 저마다 사연이 모두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들었다. 


범인은 결국 밝혀지고, 기구한 사연들도 드러났다. 진실 앞에서 소판 부인 쪽 여자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닌 모두의 결단이었고, 길쌈 대회에 참가한, 그리고 앞으로 참가할 여자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월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자은이 신문왕을 만난 이야기이다. 왕이 자신의 곁에 둘 인재를 찾기 위해 여러 신하들을 월지로 불렀고, 그 안에 호은과 자은이 있었다. 그리고 산아의 남편인 진오룡도 있었다. 자은은 진오룡을 몰랐으나 진오룡은 꽤나 자은을 의식했다. 진골이고 상대등의 아들인 그가 육두품인 자은을 의식하는 것은 모두 산아 때문인데, 아무래도 산아와 자은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 권에서 다뤄주었으면 좋으련만.


왕이 부른 자리에서 절대 눈에 띄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던 자은의 계획은, 그녀를 따라다니는 사건 때문에 실패한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상서로운 흰매의 사냥이 있었고, 사냥 이후 흰매를 돌보던 매잡이가 연못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누군가는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누군가는 연적을 이기기 위해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나 결국 사건은 자은이 왕의 매가 되도록 이끌었다. 자은의 목젖을 더듬은 왕은 자은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다음 이야기가 시급히 나와야 할 것 같다.


미은이 자은이 된 후, 자은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자 이 책에서 중요한 인물들인 인곤, 도은, 산아, 호은은 각기 개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비밀을 안고 있는 백제 장인 인곤, 산학에 밝고 자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도은, 자은의 옛 연인이며 단단한 성품을 가진 유부녀 산아, 정신세계가 궁금한, 우리 이야기의 결정적인 열쇠를 지닌 것 같은 호은. 자은과 이들이 만들어 갈 이야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해도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결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은이 만나게 될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도 궁금하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 미은일까, 자은일까. 정체성의 혼란이 올 그 시점에 한층 성장한 자은은 어떤 답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작가가 경주 월지에 갔을 때 입출구와 사출구를 보고 인상 깊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나도 월지에 갔었고, 신나게 야경 사진을 찍었다. 같은 장소를 다녀오고도 누구는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누구는 사진만 남기는구나. 세상이 다 그런 것이련가.


신라 시대 때도 여자는 조신하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했을까. 산아가 그렇게 몸을 사릴만큼이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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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7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우주로 가는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신라 시대 얘기였군요?!

꼬마요정 2023-11-17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금성이로군요. 샛별 금성이 아닌 신라 금성입니다. 정세랑 작가 글을 참 잘 써서 재밌게 읽었는데,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자라서 할 수 없는 것들이 화가 나기도 하구요. 멍청한 남자들보다 자은이 훨씬 나은데, 여자가 되는 순간 인정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자은이란 인간 자체를 좋아해서 비밀을 숨겨주는 사람은 좋았지만, 자은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인 것을 모른 체 하는 건 좀 비열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래놓고 들키면 어떤 자세를 취할 건지 좀 궁금하기도 하구요. 생각해보면 굳이 남녀에 차이를 두는 게 그저 그들의 권력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나 할까요 ㅎㅎㅎ 재밌습니다!!

페크pek0501 2023-11-17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존 그레이의 <화성~~금성~~>이란 책이 연상되었어요. 여성과 남성의 다른 점이 있긴 한 것 같아요. 반면 유사한 점도 많은 것 같고요.
네 가지 이야기로 이리도 자세히 쓰시다니... 저는 이렇게 쓰려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해서 쉽지 않은 작업이더라고요. 그래서 리뷰를 잘 안 쓰게 되나 봅니다. 내년에는 리뷰를 많이 쓰는 걸로 계획이라도 세워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꼬마요정 2023-11-19 22:31   좋아요 1 | URL
아, 다들 신라의 수도 금성이 아닌 우주의 금성을 떠올리시는군요. ㅎㅎㅎ 요즘 sf 소설도 많이 나오고, 말씀하신 존 그레이 책이 또 워낙 인기가 있기도 해서인가 봅니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란 면이 겹치는군요!!!!
이야기가 재미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줄줄 썼네요. 스포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조심스럽습니다. 페크 님 긴 글도 많이 쓰시고 리뷰도 곧잘 쓰시면서 너무 겸손하세요^^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희선 2023-11-25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은이 자은이 되어서 살아가다니... 그게 좋을지 안 좋을지... 그것부터 생각하네요 그 시대에도 여성보다 남성이 자유로웠겠지요 꽤 옛날이군요 신라라니... 이건 시리즈로 쓸 생각인가 봅니다 자은은 탐정 같기도 하네요 진짜 자신을 찾기도 하면 좋겠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11-25 09:2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벌써 3부까지는 계약이 되어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자은은 탐정이면서 해결사 같은 느낌입니다. 진짜 자신을 찾는 길은 험하겠죠… 신라시대 까마득하다지만 또 익숙하기도 한 시대니까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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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그냥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맛. 그릭요거트랑도 잘 어울리고 달콤한 게 땡길 때 어디든 넣어 먹어도 좋다. 튀지 않고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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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17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맛있겠네요. 어디든 넣어 먹을 수 있다니 좋은 정보네요.^^

꼬마요정 2023-11-20 19:53   좋아요 0 | URL
아카시아도 맛있는데 산벚나무꿀도 맛있어요. 이거 다 먹으면 다음엔 그거 사려구요^^
 
부샤드 나폴리탄 카라멜 씨솔트 초콜릿 - 13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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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짭짤한 맛. 커피나 쌉싸름한 와인이랑 딱 어울린다. 사실, 앉은 채로 몇 개를 까 먹었는지… 다른 맛도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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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1-14 0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초콜릿도 파는군요 좀 비싸지만 언젠가 한번 사 먹어 보고 싶네요 선물하기도 좋을 듯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3-11-14 10:04   좋아요 1 | URL
초콜릿이 맛이 있습니다. 근데 양에 비해 비싸기도 합니다. 그래도 맛있어서 좋아요. 선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3-11-14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다크를 또!! 주문햇습니다 ㅋ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14 11:01   좋아요 1 | URL
ㅋㅋ 저는 밀크를 주문해보려구요. 다락방 님 이걸로 땡투 부자될 것 같아요 ㅋㅋㅋ

2023-11-17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