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홍콩이다!!!

 

처음 문이 열리고 자호와 마크가 트렌치 코트 휘날리며 등장하는데, 진짜 홍콩 느와르 보는 느낌이라 좀 설렜다. 빠바밤 노래가 나오면서 둘이 계속 문을 넘나드는데, 거래를 성사시키기도 하지만 소위 암흑세계에서 전설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관문'을 통과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호는 동생이 밝은 세상에 살기를 원했다. 엄마처럼, 형처럼 자걸을 보살폈다. 자걸 입장에서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情)보다는 형에 대한 애정이 더 컸기에 뒤에 배신감도 컸을테다. 훈련 도중 도선에게 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사랑이 흘러 넘쳤다.

 

흑사회에서 자호는 신망 두터운 형님이고 마크 역시 자호와 함께 전설 같은 존재이다. 마크가 아성에게 이야기할 때 주윤발 같아서 정말 깜짝 놀랐다. 아마 그 장면 하나는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병원에 있는 아버지 병문안을 온 자호는 아버지로부터 자걸을 위해 손을 씻으라는 충고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번 건으로 끝내리라 생각했을텐데, 그 마지막 한 번이 결국 발목을 잡고 만다.

 

경찰 세계이든 깡패 세계이든 배신자는 있기 마련이다. 여기 저기 욕망을 위해서든 이익을 위해서든 말이다. 결국 대만에서 있던 거래에서 자호는 함정에 빠져 감옥에 가고, 아성의 음모로 아버지는 희생되고, 자걸은 모든 분노를 자호에게 쏟아 붓는다.

 

사랑한만큼 미워한다던가... 사실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신을 키워준 건 형이라고 하면서 형을 그토록 경멸하다니. 비록 형이 나쁜 짓으로 돈을 벌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은 나쁜 사람의 계략 때문인데 모든 책임을 형에게 돌리는 자걸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형의 전과 때문에 진급이 누락되기는 하지만.

 

아성의 음모 때문에 페기의 아버지가 죽지만 페기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이해하려 했다. 만약 자호가 죽었다면 자걸은 어떠했을까...

 

물론 고회장과 자호의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자걸이 조금은 자호를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긴 그러면 극이 막을 내려야겠지.

 

자걸이 어린아이 같던 모습에서 형을 이해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마크는 지난날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자신의 이상을 찾는다. 친구... 우정을 위해 불꽃처럼 타오른 마크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영화에서 좋아했던 인물은 자호였다.

 

과거가 궁금해지는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길래 이런 삶을 사는 것일까. 동생을 위해 흑사회에 들어간 것일까. 뮤지컬에서도 역시 멋진 인물이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모두를 품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의지를 잃지 않는 인물. 고회장이 딸바보라면 자호는 동생바보라고나 할까. 새 인생을 살다가도 동생이 위험하다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유명한 마약왕이었던 고회장이 개과천선해서 바르게 산다한들, 과거의 검은 물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걸은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전과자 형을 둔 죄로 잠입수사를 하게 되고, 진부하지만 사랑에 빠진다.

 

처음만 거짓이었단 말은 사실이었다. 수족관에서 수많은 물고기들 이름을 나열하며 -가물치, 잉어, 붕어, 문어 이랬으면 기억했을텐데 선셋프리티 밖에 모르겠다. 남미의 석양? 이런 거?- 너무 귀엽고 예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에게 배신감을 느낀 채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자걸이 무장해제되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웠다. 거짓으로 다가갔지만 어느새 진짜가 되어버린 마음이 가슴 아픈 사랑으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듯 하지만 결국 갇힌 공간인 수족관이라는 곳은 그래서 예뻐도 안타까웠다. 

 

스파이의 삶은 쉽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땐 빌리였다가 안경을 벗으며 자걸이 될 때는 소름이 돋았다. 진짜 같은 사람이야? 하지만 내리는 비에 옷이 젖듯, 사랑은 빌리와 자걸의 마음에 이미 스며들어버렸다.

 

자호는 견숙의 정비소에서 일하게 되는데, 여기 견숙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stand up' 노래는 정말 흥겨워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춤 춰야 할 것 같았다. 우중충한 삶에 빛 같은 존재. 견숙은 그렇게 전과자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여전히 아성은 탐욕의 화신으로 모두를 수렁으로 몰고 있었다. 아성의 음모 때문에 자호는 자걸을 위해 다시 흑사회로 돌아가고, 형제는 비극적인 순간에 서로를 마주본다. 겨누는 손 끝도 떨리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나 시간 순서의 배치를 어긋나게 하는 것 등 연출이 참 좋았다. 이미 유명한 영화를 각색해서 뮤지컬로 올린다기에 어떨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좋아서 놀랐다. 하지만 넘버들이 전부 과하게 끝을 지르는 것으로 끝이 나서 감정이 좀 깨지기도 했다. 조용히 읊조리듯 끝나도 좋았을텐데. 엘이디도 너무 현란할 땐 눈이 좀 피곤하기도 했다. 번쩍번쩍 홍콩의 밤거리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되려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저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가겠지.

 

그 유명한 장국영의 전화박스 씬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했는데, 비장함은 덜 하지만 간절함은 그대로였다. 살아남기를, 나는 죽어도 그대는 어서 도망치기를 바랐는데 결국 페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 내부에 있던 배신자 때문에 정체가 탄로난 자호, 자걸, 마크는 이제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마크는 이대로 끝날 수 없다 절규하며 위조지폐 테이프 원본을 훔쳐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건 친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여전히 형을 용서하지 못한 자호와 자걸을 뒤로 한 채 보트를 타고 가던 마크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 형제란!을 외치며 죽는다. 벽에 피가 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짧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친구를 지키고 친구의 품에서 죽는 건... 그가 원한 삶이었을지도 모르지...

 

마크의 죽음으로 자걸은 비로소 마음의 빗장을 풀고 형을 이해하려 한다. 어쩌면 자신이 형을 그 길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형을 애써 미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동생을 따뜻한 마음으로 기다려 준 자호는 여전히 동생을 사랑한다.

 

결말은 영화대로였다. 포스터대로 같은 수갑을 찬 두 사람은 차가운 쇠조차 녹일만큼 뜨거운 심장으로 형제애를 나누었다.

 

뮤지컬 내내 자호가 부르는 넘버들은 어딘가 짠했다. 세상 풍파 다 맞고도 여전히 누군가를 지키려는 그 마음.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자호는 자걸의 영웅이 될 만 했다.

 

자걸이 빌리의 모습으로 아성을 협박할 때 온갖 물고기 이름 다 대며 안 예뻐! 하는데 너무 웃겼다. 하하

 

자호, 자걸, 마크 모두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몰입해서 봤다. 셋이 같이 있을 땐 뭔가 훈훈하지만 처연했다. 바람결에 모든 것이 다 흩어진다 해도, 언젠가 삶의 저 끝에 서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있었음을 기뻐하며 함께 해서 행복했음을 기억하기를...

 

자호 : 유준상

자걸 : 한지상

마크 : 박민성

아성 : 박인배

한전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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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영시경 - 배혜경의 스마트에세이 & 포토포에지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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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를 사랑한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화. 둘이 있을 때보다 혼자가 되어 서로를 더 가슴 아리게 그리워하는 영화. 화면 가득 뒷모습이 쓸쓸하게 자리하는 영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리첸과 차우가 서로의 손을 온전히 겹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도 천천히 읽었다. 내 마음에 스며들도록.

 

보랏빛 가득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정겨움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진들을 찬찬히 보았다. 흔들리는 꽃잎과 시간이 멈춘듯 한 나뭇잎들, 이 세상이 아닌 듯 보이는 바다까지, 주위에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았던 풍광들을 눈에 담았다. 그럴 때면 책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본다. 비 온 뒤 느껴지는 물내음과 디지털이 표현해내지 못할 깨끗한 색감의 하늘이 있다. 언제나 있지만 언제나 느끼지는 못하는 자연... 그런 풍경들이 다시금 내 안에 담긴다.

 

첫 장을 읽으면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그렇게 길진 않지만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특히 아버지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사주셨다는 이야기에서는 눈물이 났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거나 이해해주지 못했던 어린 날이 떠올라서다. 그 나이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무언가를 끄적였지만, 두툼한 공책 한 권이 갈기갈기 찢겨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었다. 그 쓰레기통에는 찢은 이의 비웃음과 방조한 이의 무관심과 내 눈물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내 감정, 내 상황, 내 주변, 이 풍경들을 솔직하고 고즈넉한 말로 풀어낼 재간이 없는터라, 응원에 힘입어 글을 잘 썼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일상 풍경들을, 경험들을, 추억들을 아련하고 처연한 말투로 물빛 가득하게 그려낸 이 책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 걸까. 갑자기 마음이 과거로 날아갔다.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옛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차우가 앙코르와트 벽에 비밀을 남기고 봉인한 것처럼.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 풍경인데, 나는 어두운 기억을 불러와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붉은 꽃가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좋지 않은 기억 곳곳에 좋은 기억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푸르름 가득하던 그 때 따뜻한 말로 날 위로해준 친구가 있고, 집에 가기 싫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무슨 일인지 들어준 선생님도 있다. 사랑하는 고양이들이 있고, 내게 힘을 주는 책이 있다.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 즐거운 음악이 있다.

 

기억을 불러온다는 건,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 같다. 시간은 상처를 흔적으로 만들고, 환희를 따뜻한 미소로 만든다. 그 흔적들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따뜻한 미소는 내게 안식을 준다. 나는 좀 더 어른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어린 수도승이 왕금수도복을 벗고 어른이 된 것처럼 말이다.

 

덧글)5부 책 들려주는 시간에 수록된 책들 대부분이 읽지 않은 책들이다. 프레이야님이 들려주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읽어보고 싶다.

무언가에 집중하여 걸어가는
저 앞발의 우아함,
발레리노의 까무룩대는 발끝을 닮았다.
허공을 치고 가르다 유연하게 돌아가는
발끝에 쏠린
고통을 닮았다.- P62

멀리서 보이는 대상과 가까이서 보이는 대상, 앞에서 보는 대상과 옆이나 위에서 보는 대상 그리고 뒤에서 보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르게 보인다. 원형은 그대로이나 시각은 착각을 불러온다. 중요한 건 어쩌면 사실보다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P161

서로 빈구석을 예쁘게 봐준다면 금상첨화겠지.사람은 누구나 못난 구석이 있는 예쁜 존재이니까.-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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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에 온 몸이 쭈뼛해진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의 존재가 내 옆을 스쳤는지도 모른다.

 

이 뮤지컬이 그러했다. 그냥 지나갈수도 있었지만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약속을 했다. 꼭 후기를 남기겠다고. 그것이 비록 나 혼자 '그럴게'라고 했을지라도 지켜야했다.

그래서 이미 막공까지 지나버린 공연이지만, 후기를 남겨본다.
 
이 뮤지컬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기반해서 실존 인물이었던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체페슈를 모델로 한 것 같다. 용의 기사단 단장으로 임명 받아 용 문장을 받았던 블라드 2세가 아버지이고, 루마니아어로 드라큘(dracul)이 용이니까 '~의 아들'이란 뜻의 라(-la)를 붙여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가진 블라드 3세는 용맹함과 잔인함 덕에 유명해진 인물이며 바토리 백작, 카밀라와 더불어 뱀파이어 전설의 굳건한 토대가 되는 인물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몰락시킨 메흐메트2세의 라이벌이자 당시 강력한 이슬람 세력과 대적한 거의 유일한 이 인물을 본 뜬 주인공답게 여기 나오는 드라큘라는 천하무적에 고결한 성품을 가진 훌륭한 군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는 내막을 가진 그 천하무적은 정작 본인에겐 저주이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유전의 고리일 뿐이다.

사랑하는 아내인 아드리아나는 피를 갈망하는 저주를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오로지 그녀만이 각인처럼 그의 심장에 새겨져 그의 욕망을 멈춰준다. 피의 천사들도 그녀 앞에선 어떤 힘도 쓰지 못하고 저 너머로 사라질 뿐이다.


하얀 잠옷 차림으로 가장 내밀한 욕망을 저주하지만 갈망하며, 무너지는 자아를 연기하는 엄큘은 그야말로 드라큘라의 비극성을 처절하게 보여줬다.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지 싶을만큼 비참하고 간절한데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절망 속에 비추는 단 하나의 빛, 그녀의 사랑은 그를 저주에서 거듭 구해주고 평범한 인간이길 원하는 드라큘라는 그녀의 품 안에서 불안한 안식을 얻는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무너뜨리고 유럽 대륙을 위협할 때 최전방에 있던 곳이 왈라키아 공국이었고,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 서유럽 등은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십자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십자군이라고 나선 이는 블라드 3세였고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했으며 적에게 자신의 힘을 보이고 흔들리는 공국을 바로잡기 위해 적에게 매우 잔인했다.(물론 나중에 메흐메트2세에 의해 목이 잘리긴 하지만. 이 때 목이 잘린 시체가 사라져서 드라큘라 전설이 더 더욱 공포스러워졌다.) 

하지만 여기서는 드라큘라가 돈장사를 하는 루치안 반 헬싱 교황에게 맞서는 것으로 나온다.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재물과 군사를 모은 반 헬싱은 고결하고 용맹한 드라큘라를 견제하며 그의 부를 탐한다. 실제로 4차 십자군 전쟁이나 그 후 교황들의 행태를 보면 드라큘라가 왜 그들을 저어했는지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사람들의 믿음 위에 군림하고 있었고, 구원과 심판이라는 이름 아래 드라큘라의 성은 결국 무참히 희생 당하고 만다.

드라큘라가 자신의 저주 때문에 수도원에 기도하러 간 사이, 반 헬싱은 드라큘라 성을 습격하고 성 안을 도륙한다.

마지막까지 십자군에게 저항하던 로레인과 디미트루는 그들의 칼에 쓰러지고, 드라큘라의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부상을 입은 아드리아나는 미끼로 끌려간다.

뒤늦게 도착한 드라큘라... 아들의 주검 앞에서 온 영혼이 뒤틀리듯 오열하다 마침내 이런 저주 받은 힘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다. 절대신을 저주하며 자신의 사랑을 찾는 드라큘라. 거듭 생각하지만 세상 어느 인간이 감히 신에 대항하여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했을까. 저주도, 믿음도 사랑 앞에서는 모두 바래져 버리고, 드라큘라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리고 만다...

아드리아나는 드라큘라가 주는 피를 거부하며 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 그녀의 별이 다시 떠 올라 그의 별과 함께 춤을 출 때, 그 때야말로 그의 저주가 끝나고 피에 묶인 영혼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이제 드라큘라는 그녀를 기다린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반드시 올 그녀를... 그의 시간은 멈추고 쏟아지는 별들 안에서 단 하나의 별만을 찾으며 웃음도, 생기도 모두 잃어버린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살아있는 시체'라는 표현은 정말 아드리아나가 없는 드라큘라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시간의 흐름 속에 멈춰선 채, 하나의 별만을 기다리는 드라큘라... 2막의 첫 장면은 그래서 너무나 아프고 슬펐다. 

400년 후, 아드리아나의 별은 파리에서 멈췄고, 운명처럼 드라큘라도 파리로 온다.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얼굴이지만 약간의 분노와 무언가 애타는 듯한 표정이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했는데, 거짓말처럼 기다리던 얼굴을 마주본다. 드디어!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라큘라는 400년을 아드리아나만을 그리워하며 드디어 만났는데, 아드리아나는 드라큘라를 알아보지 못한다. 실망하다 못해 좌절한 드라큘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지만, 디미트루의 설득에 그녀와의 만남을 준비하게 된다.

 

여기서 드라큘라는 우리가 아는 소설 속 드라큘라와는 좀 다르다.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고 하니까. 거울 속 자신을 조우할 수 있는 존재... 그는 괴물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그저 사랑을 잃은 가여운 한 남자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군중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절박한 몸짓은 마치 운명을 예견하듯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그녀 때문에 더 애처로웠다. 이 부분 연출이 너무나 감각적이고, 드라큘라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줘서 너무 좋았다. 끝내 닿지 못할 사랑일까, 아니면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만나질 수 있을까...

 

그리고 마주한 자리... 그는 운명을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드리아나... 긴 세월의 강을 건너 드디어 만나게 된 영혼의 반쪽, 삶의 이유. 천 년을 산다한들 그녀 없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 하루를 살아도 그녀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일테다... 마침내 서로를 알아 보지만, 운명은 그녀만을 데려온 건 아니었다. 반 헬싱 주교의 환생이든, 후손이든 거짓된 믿음으로 무장한 반 헬싱 역시 나타났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피에 묶이도록 만든 자가 그 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아드리아나를 드라큘라와 만나도록 이끌었다. 신의 심판을 입에 올리던 반 헬싱은 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 그가 믿는 신은 그에게 어떤 심판을 내릴까... (뱀파이어 다른 전설에 따르면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한 영혼은 흡혈귀가 된다 하니 반 헬싱이 뱀파이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움직인 것도 잠시... 결국 드라큘라는 마지막에 아드리아나가 아닌 엘로이즈란 이름으로 그녀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녀를 놓아준다. 자신은 이미 400년 전에 사라졌어야 했지만, 단 하나의 기원, 간절한 맹세인 그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시간을 멈췄던 것 뿐이니까. 마치 40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드라큘라 성에 있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드라큘라를 마중나오는 장면은 너무 짠했다.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사랑을 지키고, 원한을 용서로 승화시킨 그는 드디어 자신의 저주를 벗고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 그 사랑을 이은 그녀의 기도에, 그를 위해 흘리는 눈물에, 그리고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을테니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롯이 그 사랑만을 남기고 간 최고의 로맨티시스트로 말이다.

 

액션씬들 다 좋았다. 드라큘라가 죽었다 살아나는 장면에서는 정말 놀랐고, 첫 흡혈 때 붉은 안개가 핏빛으로 퍼져 나가는 것도 좋았다. 파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흡혈귀의 소행이 아닐까 할 때는 왠지 영국의 유명한 살인마 잭더리퍼가 떠올랐다. 사람을 죽이는 건 보통 인간 아닌 존재보다 인간이 더 잘 하는 짓이기도 하니까.

 

보는 내내, 드라큘라의 그 감정들이 너무 생생하게 전달되어 나도 따라 울었다. 사랑, 분노, 절규, 슬픔, 오열, 기쁨... 엘로이즈 앞에서 순한 강아지처럼 긴장하는 모습에 더해 눈물 흘리다 못해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까지...

하염없이 흘러 떨어지는 그 눈물 방울방울 모아 목걸이를 만들면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시킨다면, 이 눈물 목걸이는 사랑의 마음을 비출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눈물로 기도한다면, 내가 신이라면 그의 소원은 무엇이든 다 들어줬을거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드라큘라 : 엄기준

아드리아나 : 김금나, 권민제

반 헬싱 : 김법래, 이건명

로레인 : 쏘냐, 최우리, 황한나

디미트루 : 최성원,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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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발력, 대담함, 유연함이 돋보이는 퍼시. 그 대범함과 느긋함이 부럽고, 똑똑한 머리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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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듣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그만 둘 수 없다. 정보석님 목소리가 내용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탐미주의, 유미주의라더니 과연 그러했다. 일단 서사는 전통적인 여성과 그냥 매혹적인 여성 둘 다를 ‘갖고’ 싶은 재산 있는 것 같은 남성의 ‘사랑’ 이야기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내는데 특히 ‘주근깨’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상대가 미우면 뭐든 밉겠지만 악의를 품고 있는 주근깨라니...

거기다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데, 눈으로 읽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많이 달랐다. 정말 화자가 나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귀를 쫑긋하게 했다. ‘나’는 이렇게 마음 상태의 변화가 잘 드러나는데 정순과 영희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정순이야 전통적인 여성이라 순종하며 산다지만, 영희는 어떤 사람일까.

살고 싶은 삶과 강제된 삶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민은 비단 사랑 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랑, 즉 가정을 꾸리는 기본적 삶을 대하는 데도 뭔가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일 역시 우유부단하겠지 싶었다. 과연 진짜 살고 싶은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대가 개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이 때 뿐만은 아니겠지만, 정순이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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