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도시 - 지금 여기의 두려움이
김동식 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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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무서운 이야기이다. 


제일 안전해야 하고 편안해야 할 곳인 '집'이 삶을 망가뜨리고 만다. 집값이 무엇이길래, 층간소음이 무엇이길래, 전세사기가 무엇이길래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가. 무서운 것은 선량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간다.


가사노동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복잡한 도시와 몰락한 시골의 간극은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다가 갑자기 그 흥미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자살하면 내일 출근을 안 해도 될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경쟁에 뒤쳐져서 도태될까 두려운 사람들이 많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 좋아하던 것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과정이 끔찍하다. 삶의 방식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수만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한다. 결국 희생되고 밟힌 자가 대부분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임신은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임신한 여성의 몸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이는 당연히 두려울 수 있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 여성의 몸에 대해 사회는 어떤 시선을 보내는가. 자신은 없어지고 오로지 아기 주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모성애'라는 단어로 억눌러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출산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지는 않는가.


이 망각의 도시에는 기이한 존재들도 등장한다. 제방에 박힌 억울하게 죽은 민초들을 도깨비불로 말하기도 하고, 오히려 삶을 응원하는 자살귀도 있고, 영화 <매트릭스>처럼 붉은 은하와 백색 은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외계인도 있다. 나와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하게 공포가 드러나는 인간의 범죄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과 살인은 무섭다. 그 이유가 유희든, 돈이든, 복수든, 그 무엇이든 간에. 결국은 인간이 제일 무섭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외로움과 고독, 소외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면 결국 먹혀버릴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세상에. 그리고 그런 이들의 두려움을 망각한 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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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드라이버
강지영 지음 / STORY.B(스토리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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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을 잘 못한다. 면허는 대학 가자마자 땄는데, 차가 없었다. 차도 없는데 왜 면허를 땄느냐하면, 그 땐 다 그랬으니까. 미리 따 놓은 건 좋은데 막상 차가 생겨도 운전이 영 안 되는거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불편해하지 않고, 남편이 늘 운전을 하니까 나는 더더욱 운전 할 기회가 없어서 운전을 영 못하는 것 같다. 가족이든 누구든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내 옆에 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만약 주인공인 수현이 하는 일을 하라고 한다면? 사연 있는 귀신을 태우기 전에 내가 귀신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수현은 젊은 나이에 문단에 등장한 스타였으나 지금은 간간이 원고 청탁을 받으며 대학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녀는 뇌동맥류를 앓고 있었고, 찾는 사람이 있었다. 죽을 뻔 한 순간 푸른사향노루 향낭을 받게 되고 그 푸른 실이 떠날 때까지 죽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며 기이한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향낭은 귀신을 불렀고, 차에 태워야 하는 귀신은 와이파이로 떴다. 수현은 사연 있는 귀신들을 태워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그 귀신들이 자신이 찾던 '다정'이를 아는지 물어봤다. 


그녀의 차에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다가 되려 죽음을 맞은 청년도 탔고, 정치인의 가족에게 공개입양되어 장식물처럼 살다가 남에게 떠넘겨진 영혼도 탔고, 내부고발을 하려다 살해당한 간호사도 탔다. 그녀의 언니인 지민의 병원에는 죽었지만 떠나지 못한 간호사 윤경이 있었고, 제자인 예슬에게는 잘 생긴 도령이 붙어 있었다. 예슬은 귀신을 볼 수 있었고, 백현이란 이름을 가진 도령은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백현은 수현을 원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회자정리, 거자필반, 생자필멸, 사필귀정 이 네 가지 고사성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고,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온다. 수현이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테넷>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든 순간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속에 갇혀 앞, 뒤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현은 자신을 아무리 속이고, 자신이 한 일을 아무리 후회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수현은 여전히 자신의 선택을 했다. 그리움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정을 찾아다녔던 그녀는 좋은 일들을 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선뜻 자신을 바꿀 선택을 하지 못했다. 인간은 변하기 어렵다. 아무리 반성하고 아무리 후회해도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에게 감화되었음에도 소년의 은화를 훔쳤고, 팡틴의 사연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잘못들을 거치면서 결국 잘못 잡힌 범인을 위해 자수를 했고, 아무 조건 없이 자베르를 구해줬다. 


수현과 백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계속 실수했고, 오만했고,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생되었던 이들 역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빛이 될수도, 어둠이 될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푸른사향노루만이 피해자이자 숭고한 희생자일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악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없애고 없애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자라난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자 '진실'임이 틀림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함께 사연 있는 귀신들을 태우고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앞서 수현의 차에 탔던 '수혁'의 복수는 성공했을까.

"악귀일수록 사연이 깊기 마련이오. 말이 사연이지 실은 원한 아니겠습니까? 최근 실어 나른 귀신 중 제일 마음이 가는 자가 누구였소? 살해된 자가 있다면 말해보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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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혜 - 내 삶의 기준이 되는 8가지 심리학
김경일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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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때문에 나쁜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선택하지 말 것.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를 알고 솔직하고 품위있게 표현하는 법도 연습해야 한다.

행복은 좋은 것이 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고.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 둘 다 필요하다 한다.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 무언가를 배우는 게 좋다고.

메타인지는 ‘내가 나를 아는 능력’이다. 메타인지 능력이 좋으면 좌절도 덜 하고 우울감도 덜 느낀다고. 역시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살아가면서 언제나 맑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흐린 날, 궂은 날이 있기에 맑은 날이 빛나고, 비가 와야 작물은 자라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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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29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꼬마요정 2023-11-30 22:51   좋아요 0 | URL
오디오북으로 듣기에도 좋은 책일 것 같아요. 인간이란 참 까다로운 듯해요. 관계가 먼 것도 싫고 가까운 것도 싫고 ㅎㅎㅎ
 
[eBook] 여름기담 : 매운맛 여름기담
백민석 외 지음 / 읻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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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무서울까, 인간이 무서울까. 나는 인간이 무섭다고 생각한다. 귀신은 하다못해 내가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기이한 일들도 나름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다른 존재들에게 저지르는 일들은 직접적으로 고통이 오기도 하고, 보거나 듣기만 해도 너무 참혹한 경우도 많으니까.


그래서 첫 번째 이야기인 백민석 작가의 <나는 나무다>에서 화자인 나무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오백년을 버틴 나무마저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은 세월을 거듭하면서 자기종 뿐만 아니라 숲도, 나무도, 바다도, 산도 모두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오백년의 세월 동안 그 고통스러운 파괴를 지켜보는 나무의 마음은 절망에 가득찼다. 여전히 죽지 못한 나무는 다가 올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할 것이기에. 인간은 불로불사를 꿈꾸지만, 돈이나 권력, 동반자가 없는 불로불사가 의미가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인 한은형 작가의 <절담>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게 했다. 암매암의 유심 스님은 인플루언서이자 절밥의 대가이자 힙한 인물이다. 자신이 있는 암자의 매실을 정과로 만들어 스토리를 엮어 상품을 만들었고 유명해졌다. 그런 유명세 및 부(富)를 어떻게 거머쥘 수 있었을까. 암매암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능력을 요리조리 베끼고 이용한 것일까. 붉다 못해 피처럼 검은 홍매에서 나는 매실은 누구의 피를 머금었을까. 피보다 더 진한 욕망은 누구의 것일까. 유심 스님은 정말 성직자일까... 시대정신을 따른다는 그는 이 시대가 낳은 황금만능주의에 헌신하는 성직자일까. 


세 번째 이야기는 성혜령 작가의 <마굿간에서 하룻밤>이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이자, 그런 외로움을 파고든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의지할 데 없는 암환자를 등쳐먹기 위해 교묘하게 기억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사실 그 기억이 온전하기는 할까. 문진의 어머니는 왜 그 마굿간이 있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을까. 돌아갈 곳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머금는 사랑은 어떻게 이리도 이기적일까, 슬퍼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성해나 작가의 <아미고>이다. 아미고, 친구를 뜻하는 그 단어는 AI 로봇에게 붙혀진 이름이다. 스턴트 배우들 사이에 어느 날 들어 온 그 로봇은 어느 새 그 스턴트 배우들을 모두 몰아냈다. 단 한 사람, 죠만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죠는 이미 한 차례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인해 자동차 엑셀을 밟기가 무서워졌고, 결국 그 씬은 아미고가 대신 찍었다. 동전 던지기 같은 미신이라도 단 한 차례의 행운을 바랐던 죠는 인간에게는 버림 받았고, 로봇에게는 구원 받았다. AI가 대체한 현실이 무서울까, 인간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실이 무서울까.


역시 인간이 제일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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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4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 저는 책 표지만 보고 알라딘이 이젠 팔다 팔다 카레도 출시한 줄….

꼬마요정 2023-11-24 00:22   좋아요 2 | URL
말씀 듣고 보니 카레처럼 보입니다 ㅋㅋ 요즘 추세로 보면 카레 판다해도 이상하지 않은 알라딘이네요. ㅋㅋㅋ 그나저나 은바.. 아니 푸바오랑 잘 어울리십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3-11-24 00:23   좋아요 1 | URL
카레 판다…. 에 흠칫 ㅋㅋㅋㅋ

꼬마요정 2023-11-24 00: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11-24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인간이 가장 매운건 맛는거 같아요.
내용 자체는 흥미로워 보이는데 표지가 좀 그렇네요 ㅡㅡ 진짜 3분카레인줄

꼬마요정 2023-11-24 15:30   좋아요 1 | URL
그쵸? 인간이 젤 매운 건 알겠는데 표지가...
저도 표지 보고 뭐지 하다가 기담이라길래 읽었거든요. 표지랑 제목을 바꾸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읽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희선 2023-11-25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신도 사람이 되는 거기는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산 사람을 저주할지도...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섭기는 하죠 사람은 괜찮기도 하지만, 아주 안 좋기도 하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11-25 09:17   좋아요 1 | URL
아주 거룩한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이고 아주 부정하고 사악한 일을 하는 것도 인간이네요. 귀신이 산 사람이 죽은 존재라면 살아있을 때의 인간 속성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것두 무섭긴 합니다만. 그래도 실체 없는 존재보다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 제일 무섭네요… 좋은 일들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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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 여자 이야기는 흔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제법 특별하다. 왜냐하면 미은이 남장을 하게 된 계기가 죽음이나 어떤 불가항력적인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은이 약간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이 불가항력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 자체만으로 봤을 때 미은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진정 원하지 않았더라면. 


집안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자은이 없다고 해서 망해가는 집안이 순식간에 폭삭 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미은이 자은을 대신한다고 해서 금방 집안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셋째이지만 첫째가 되어버린 호은의 성격이 우리가 보기에 상식적이지 않아 보여도 의외의 곳으로 열린 사람이기도 하지 않은가. 미은에게 죽은 오라비인 자은을 대신하라는 제안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하여 미은은 선택을 했고, 남자인 자은이 되기로 결정했다. 아마 그 결정 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보다 넓은 곳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이는 갖은 고생 끝에 자은이 금성으로 돌아오자 동생인 도은이 지은 표정이나 도은이 한 말로도 알 수 있었다.


 자은은 여동생이 무척이나 함께 가고 싶어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언젠가 자신이 지었던 표정일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모든 일에서 소외되었을 때.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다니, 미쳐도 한참 미쳤다고. 그런데 이제 언니가 왜 그런 장단에 끌려들어갔는지 이해해. 왜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했는지. 큰물을 두 번 건넌 대가로...... 이름을 바꾼 대가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75-76쪽)

 

 자은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죽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미은이 죽었고, 그렇게 미은은 자은이 되어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기까지 많은 역경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들은, 심지어 당나라와도 싸웠기에 당나라에 유학 가 있던 신라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안 그래도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집안에서 유학 온 자은이었으니, 신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던 기간 동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더랬다. 먹을 것이 없어 내내 굶다보니 살이 너무 빠져서 달거리마저 하지 않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게 여자임을 숨길 수 있어 좋다고 자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겨우 사신단을 따라 금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사건들이 자은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시작은 사신단과 함께 금성으로 돌아오는 물길에서였다. 배에서 상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동행했던 아내와 딸은 사라졌다. 사신은 설씨 가문을 알고 있었고, 자은에게 이 사건을 해결할 것을 명령했다. 자은은 배에서 만난 백제 사람인 목인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서글프고 우울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한 나라가 망하면서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린 왕실 핏줄의 여인들 이야기라든지,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의 왕을 팔아넘긴 신하들 이야기라든지 말이다. 그렇게 자은은 범인을 찾을 듯 못 찾을 듯 사건을 해결하기는 한다. 자신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자은은 갈 곳 없는 인곤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손재주가 좋고 명민한 인곤은 식객이 되어 자은과 함께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아마 그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한가득 있을 것이다. 망한 나라의 백성일지, 귀족일지, 왕족일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사건은 진짜 자은의 과거와 함께 나타났다. 시장에서 자은을 알은 체 하던 여자는 산아였다. 미은이 모르는 여자였고, 자은과의 감정 교류가 꽤나 깊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그런 산아의 아버지인 독군 김무헌이 매소성 전투에서 돌아와 '업화'인지 병인지 모를 이유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단서는 손바닥에 있는 붉은 글자였으며, 이런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산아는 자은을 찾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참으로 참혹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들에는 인간의 사악함이 대놓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자은이 차라리 '업화'였으면 하는 것도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전쟁은 참전한 군인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전쟁터가 된 곳의 백성들도 모두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살아돌아와서 기뻐하는 가족들에게도 전염되고,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은 살아돌아 온 사람에게 자신의 염원을 투영한다. 김무헌이 끝내 밝히지 말라는 것도 슬펐고, 약야 스님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슬펐다. 그 전쟁에서 살아돌아 온 모두가 슬펐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도 모두 슬펐다. 그렇게 그 사건은 가슴 아프게 끝났다. 하지만 산아의 말처럼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로우니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단단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상대등의 아들과 결혼한 처지라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자주 나오지는 못하지만.


세 번째 사건은 길쌈대회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자은의 동생 도은은 산학에도 밝고 집안 살림도 맡아하고 길쌈도 잘 하는 등 다재다능한 여자다. 그런 도은이 소판 부인 쪽에 서서 북을 잡게 되었는데, 하필 도은이 베를 짜야할 차례에 누군가가 베틀을 망가트린 것이다. 도은은 울상이 되었고, 소판 부인은 놀랐고, 자은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소판 부인은 문무왕의 조카로, 안승의 처다. 안승은 결국 고구려도 보덕국도 다 포기하고 신라 왕실에 편입되었는데,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고구려 유민이나 보덕국인들의 표적이 되어 소판 부인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지내고 있었다. 그런 부인의 집에서 길한 행사인 길쌈 대회를 위한 베틀이 부서졌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대회는 많은 여인들이 그나마 바깥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금전(나라의 비단, 직물 관련 부서)의 모가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 이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도 범인을 밝혀야 했다. 


자은은 산아에게 도움을 청했고, 산아는 소판 부인과 반대편인 도철 부인 쪽이었지만 쓸만한 정보를 건네 주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인지,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도 있었고 예순이나 먹은 남자가 십 대인 어린 여자를 처로 들이려고도 했고, 아름답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혼인을 거부한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도 있었다. 저마다 사연이 모두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들었다. 


범인은 결국 밝혀지고, 기구한 사연들도 드러났다. 진실 앞에서 소판 부인 쪽 여자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닌 모두의 결단이었고, 길쌈 대회에 참가한, 그리고 앞으로 참가할 여자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월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자은이 신문왕을 만난 이야기이다. 왕이 자신의 곁에 둘 인재를 찾기 위해 여러 신하들을 월지로 불렀고, 그 안에 호은과 자은이 있었다. 그리고 산아의 남편인 진오룡도 있었다. 자은은 진오룡을 몰랐으나 진오룡은 꽤나 자은을 의식했다. 진골이고 상대등의 아들인 그가 육두품인 자은을 의식하는 것은 모두 산아 때문인데, 아무래도 산아와 자은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 권에서 다뤄주었으면 좋으련만.


왕이 부른 자리에서 절대 눈에 띄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던 자은의 계획은, 그녀를 따라다니는 사건 때문에 실패한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상서로운 흰매의 사냥이 있었고, 사냥 이후 흰매를 돌보던 매잡이가 연못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누군가는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누군가는 연적을 이기기 위해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나 결국 사건은 자은이 왕의 매가 되도록 이끌었다. 자은의 목젖을 더듬은 왕은 자은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다음 이야기가 시급히 나와야 할 것 같다.


미은이 자은이 된 후, 자은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자 이 책에서 중요한 인물들인 인곤, 도은, 산아, 호은은 각기 개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비밀을 안고 있는 백제 장인 인곤, 산학에 밝고 자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도은, 자은의 옛 연인이며 단단한 성품을 가진 유부녀 산아, 정신세계가 궁금한, 우리 이야기의 결정적인 열쇠를 지닌 것 같은 호은. 자은과 이들이 만들어 갈 이야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해도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결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은이 만나게 될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도 궁금하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 미은일까, 자은일까. 정체성의 혼란이 올 그 시점에 한층 성장한 자은은 어떤 답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작가가 경주 월지에 갔을 때 입출구와 사출구를 보고 인상 깊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나도 월지에 갔었고, 신나게 야경 사진을 찍었다. 같은 장소를 다녀오고도 누구는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누구는 사진만 남기는구나. 세상이 다 그런 것이련가.


신라 시대 때도 여자는 조신하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했을까. 산아가 그렇게 몸을 사릴만큼이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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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17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우주로 가는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신라 시대 얘기였군요?!

꼬마요정 2023-11-17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금성이로군요. 샛별 금성이 아닌 신라 금성입니다. 정세랑 작가 글을 참 잘 써서 재밌게 읽었는데,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자라서 할 수 없는 것들이 화가 나기도 하구요. 멍청한 남자들보다 자은이 훨씬 나은데, 여자가 되는 순간 인정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자은이란 인간 자체를 좋아해서 비밀을 숨겨주는 사람은 좋았지만, 자은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인 것을 모른 체 하는 건 좀 비열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래놓고 들키면 어떤 자세를 취할 건지 좀 궁금하기도 하구요. 생각해보면 굳이 남녀에 차이를 두는 게 그저 그들의 권력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고나 할까요 ㅎㅎㅎ 재밌습니다!!

페크pek0501 2023-11-17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존 그레이의 <화성~~금성~~>이란 책이 연상되었어요. 여성과 남성의 다른 점이 있긴 한 것 같아요. 반면 유사한 점도 많은 것 같고요.
네 가지 이야기로 이리도 자세히 쓰시다니... 저는 이렇게 쓰려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필요해서 쉽지 않은 작업이더라고요. 그래서 리뷰를 잘 안 쓰게 되나 봅니다. 내년에는 리뷰를 많이 쓰는 걸로 계획이라도 세워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꼬마요정 2023-11-19 22:31   좋아요 1 | URL
아, 다들 신라의 수도 금성이 아닌 우주의 금성을 떠올리시는군요. ㅎㅎㅎ 요즘 sf 소설도 많이 나오고, 말씀하신 존 그레이 책이 또 워낙 인기가 있기도 해서인가 봅니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란 면이 겹치는군요!!!!
이야기가 재미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줄줄 썼네요. 스포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조심스럽습니다. 페크 님 긴 글도 많이 쓰시고 리뷰도 곧잘 쓰시면서 너무 겸손하세요^^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희선 2023-11-25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은이 자은이 되어서 살아가다니... 그게 좋을지 안 좋을지... 그것부터 생각하네요 그 시대에도 여성보다 남성이 자유로웠겠지요 꽤 옛날이군요 신라라니... 이건 시리즈로 쓸 생각인가 봅니다 자은은 탐정 같기도 하네요 진짜 자신을 찾기도 하면 좋겠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3-11-25 09:2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벌써 3부까지는 계약이 되어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자은은 탐정이면서 해결사 같은 느낌입니다. 진짜 자신을 찾는 길은 험하겠죠… 신라시대 까마득하다지만 또 익숙하기도 한 시대니까요.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