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시계 이야기    - 법정스님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경우, 서투르고 서먹한 분위기와는 달리 속으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는 36억인가 하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데, 지금 그 중의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선 만났다는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하늘 밑, 똑같은 언어와 풍속 안에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설사 나를 해롭게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나는 그만큼의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나와 마주친 것일까.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가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과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상에는 내 생활을 거동케 하는 국적 불명의 시계가 하나 있다. 그놈을 보고 있으면 물건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정말 기구하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그놈이 단순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禮佛)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版殿)을 거쳐 내려오면 한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선생(盜先生)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갔다. 내게 소용된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심을 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게 마련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과보(果報)인지 모른다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샅샅이 뒤져놓았다. 잃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는데 흐트러놓고 간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자리에 챙기자니 새삼스레 인간사(人間事)가 서글퍼지려고 했다.

당장에 아쉬운 것은 다른 것보다도 탁상에 있어야 할 시계였다. 도선생이 다녀간 며칠 후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 허름한 것으로 구해야겠다고 작정, 청계천에 있는 어떤 시계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허허, 이거 어찌된 일인가. 며칠 전에 잃어버린 우리 방 시계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웬 사내와 주인이 목하(目下) 흥정중이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 사내는 슬쩍 외면해 버렸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못지않게 나도 당황했다. 결국 그 사내에게 돈 천 원을 주고 내 시계를 내가 사고 말았다. 내가 무슨 자선가라고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어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인데. 뜻밖에 다시 만난 시계와의 인연이 우선 고마웠고, 내 마음을 내가 돌이켰을 뿐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샘터, 1972. 4)

♬ George Winston - Thanksgiving

출처 : 어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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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What is the Matrix?"

출처:본효아줌마 이야기

[원문] 재미있는 영화 베스트 추천   

                            

                            

 

 

 

   1999년 미국 전역 극장에 방영이 시작됐던 Matrix는 기대했던 것보다 그다지 반응이 좋지않아서

   영화관련자의 많은 실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디오로 출시 되자마자 그 인기도와 흥행은 급물쌀을 탄 배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비디오 업계 기록들을 모두 달아 치우는 놀라운 흥행 변화를 가져와 굉장한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전편 만한 속편은 없다는 혹평도 있었고

   국내 비평가들처럼 미국의 영화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매트릭스3 레볼루션]가 엉망이라고 비판도 합니다. 

   폭력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이다. 진부하고 단조롭다 등등 ,,

 

   그러나 나에게

   Matrix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매트릭스는 과연 무엇일까?

 

   Matrix 1편을 보면

   “What is the Matrix?" 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Matrix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견해와 해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현실…프로그램…환상…나……?

 

   나 스스로 결론 내린바.

   결국 네오는 진정한 나를 깨우쳐서 매트릭스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게 되고,

   Agent에게 잡힌 그의 스승을 구출하게 되는 영화.

    ‘깨어나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구제' 한다고  했을때

   저 가슴은 마구마구 뛰었습니다.

  

 

   나 스스로 결론 내린바.

   간접적인 체험으로 매트릭스를 깨우친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는

   잠재적인 의식이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어도 계속 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 스스로 결론 내린바.

   깊은 동양 철학의 교훈을 가슴에 담고,

   발전된 과학과 대중매체의 전달력과 신속성을 날개로 삼은 The Matrix

   나를 버렸을 때 진정한 “참 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 네오의 삷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나에게  올바른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였답니다.

 

 

   .......

 

   2003년  두 달을 남기지 않은 11월 초였을겁니다..

   함께 수행하는 젊은 벗 11명과 함께
   밤 11시 전 세계적으로 함께 개봉했던  [The Matrix Revolutions]를 보았습니다...

 

   어두운 녹색 빛이 감도는 디스토피아의 분위기, 의상과 소품을 통한 퓨전적인 스타일,

   선글라스로 인간성을 지워낸 기호화된 인물들, 산성비처럼 쏟아지는 녹색 문자들.

 

   그리고 우리가 늘 쓰는 단어들이 무수히 나왔던  사랑, 진실, 정의, 평화, 존재의 가치...
   전 편 내내 [The Matrix Revolutions] 는 충분히 난해하고 복잡하여,

   그 뜻을 해석하느라 이미지에 집중할 여지를 빼앗아 버렸지만

   두 장면만 이라도 오늘 기억에 담을 수 있으니.


   트리니티가 죽음 앞에서 네오에게 이런말을 합니다.(내 기억이 온전 할리 없지만...)
   "함게 한 긴 시간이 참 행복했었다..그러나 더 행복한 것은 지난날 행복했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합니다.



   레오가 영화 내내 말을 하지요.

    "내가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그 길을 가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과연 실재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쬐금은 철학적일 수 밖에 없었답니다.

   영화 관람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몇가지 결론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들은 우물 바깥에서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일로만 끝마칠 것이 아니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또는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실재 하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 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빠져들어 거기서 헤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 할 필요가 있다.'

   '우물 속은 맑은 물만 있는지 이끼만 끼여 있는지 누군가 빠뜨린 동전이 우물 바닥에는 가라앉아 있는지를

   알아 가기 위해 서라도 우물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용기의 수행이 필요 하다.' .....

 

    다음날 몇몇 도반과 함께 하루 300배 100일  기도를 입제 원인을 제공한 'The Matrix Revolutions'

 

   "함게 한 긴 시간이 참 행복했었다...그러나 .지난 날 행복했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

   라고 한  트리니티 말을 가슴속으로 간직하게 된 'The Matrix Revol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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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현각스님 ‘Matrix 리로디드’ 관람기 (2003년 6월 17일)

‘매트릭스 광’ 현각스님 ‘‥2 리로디드’ 관람기

 


위험한 질문‥종교도 매트릭스?

 

 

1편‥'더 원'이 세계를 구할것이다

 

종교는 때때로 위험하다. 진실한 믿음은 마음을 해방시키는 혁명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혁명은 종파에 상관없이 매우, 매우 위험한 것이다. 혁명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도그마 자체가 매트릭스이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지난 주, 이집트 정부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이하 <리로디드>)의 상영을 전면금지했다. 금지된 이유는 폭력이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창조에 대한 전통적 종교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중동지역 특정종교 하나의 편견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다. 이집트 문화검열국장이 밝혔듯, “이 영화가 금지된 이유는 인간의 실존과 창조같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존중하고 신봉하는 3대 유일신 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모두와 관련된다.”

2003년 현재의 “현실세계”에서조차 이처럼 곤란한 질문은 위험하다.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은 기존 종교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왜 창조되었는지 묻는 것은 위험하다. 종교의 권위자들은 말한다.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단지 거기 놓였을 뿐이다.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를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리로디드>는 매우 변혁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매트릭스 2 리로디드' 장면들

2편‥구원자 '더 원'은 없다

 

<매트릭스> 1편은 스스로 깨달은 니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초영웅적 존재인 니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옴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겉으로 보면 감독들이 이런 생각을 은근히 유도하면서 관객이 모피어스처럼 맹목적으로 생각하도록 유혹한다 - 우리가 예언을 따르기만 하면 초인적인 ‘더 원’(The One)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리로디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모피어스가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떠받드는 예언자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권력에 봉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어머니”이고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는다. 니오가 모피어스에게 말하듯 “예언은 거짓이었다. ‘더 원’의 목적은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건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어.” 바로 이런 전복성이 이 영화의 뛰어난 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파적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더 원’이 단순한 정답인 듯도 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 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니오는 오러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금지된 것이다.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니오와 설계자의 만남 역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니오는 두개의 문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 한쪽으로 가면 시온을 구하지만 연인은 죽는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연인을 구하지만 시온주민 모두가 멸망한다. ‘더 원’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다. 예언에 따르면 그것이 니오의 목적인 것이다. 시온을 구하지 않으면 니오는 ‘더 원’이 될 수 없다.

 

 

당신 자신이 당신을 구한겁니다

 

그러나 니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니티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니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니오의 말처럼 “선택, 문제는 선택이다.”

 

만일 신앙에 대한 전통적 지지를 철회했다면, <리로디드>에서 종교적 믿음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99년 인터넷 채팅 인터뷰 중 “이 영화에서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감독 워쇼스키 형제 스스로 답한 바 있다. “(우리가 관심 있는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니오가 시온에 돌아왔을 때 한 청년이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니오는 퉁명스럽게 답하기를 “아니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너를 구한 것은 네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이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더 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허나 니오도 인간 밖의 수퍼맨이 구원자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이뤄진 <리로디드> 비평 가운데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불교적 영향을 받았는지 언급한 것은 드물다. 1999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는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 대답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관객이 이 점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러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는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오는 마치 최후의 초영웅 ‘더 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니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 - 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로 간주된다. 고전불경에 따르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리로디드>가 던지는 화두는 바로 믿음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따라서는 대중문화가 성서나 불경처럼 올바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본효아줌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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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지금 미국에서는 선의 선풍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숭산 큰스님께서도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셨던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일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

스님 “그곳 미국에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아들 친구를 붙들고 우리 아이를 제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양이에요.

브라운대학, 하버드, 예일, 콜럼비아, 버클리…. 아무튼 이렇게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는 이 친구는 아는 것이 많은 데다가 얼마나 오만한지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말을 잘 붙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번은 이 박사의 친구가 ‘얘, 너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선사가 일본에 계시다가 오신 분이 있는데, 너한테 질문이 있다고 한다더라.’ 그러니까 그 친구 말이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해.’하며 자신이 만만해 가지고 대답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결국 그 선사와 박사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버클리 젠 센터’라는 꽤 큰 선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예불하고 법문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인데 그 친구가 말한 만물박사가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하러 왔으면 질문을 하라.’ 했더니 ‘내가 언제 질문이 있다고 했느냐? 선사가 질문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무엇이든지 물어 보시오.’하면서 그만 화를 벌컥 내더란 말이야.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놈이 서로 만나게 하려고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럼 좋다. 내가 질문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는 ‘네가 100% 믿고 있는 자신있는 말을 한 마디만 일러다오.’

그랬더니 이 녀석이 머리를 컴퓨터식으로 회전하면서 그 말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참을 지나도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내가 ‘네가 100% 믿는 말을 안다.’ 그랬더니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더군요. 그래 내가 다시 물었지요.

‘하나에 둘을 보태면 몇이냐?’
‘셋이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거야 국민학생도 아는 거 아닙니까? 나는 좀더 고상한 말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상하고 고상하지 않은 말이 어디 있느냐? 네가 100% 믿는 말이면 됐지….’
‘그렇지만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받은 사람인데 하나에다 둘 보태면 셋이라는 말을 해야겠습니까?’

‘너는 나보다 하나 더 몰라.’했더니
‘무얼 더 아느냐?’고 반문을 해와요.

‘나한테 물어봐. 하나에다 둘 보태면 몇이냐고?’ 그랬더니
‘도대체 하나에다 둘 보태면 얼 맙니까?’하고 물어왔어요.

‘없다. 제로다.’ 그랬더니
‘내가 박사학위를 다섯 개나 땄어도 하나에다 둘을 보태면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왜 그렇게 되느냐.’고 하면서 화를 벌컥 내요. 내가 대답해 주었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과를 한 개 주었다. 내가 먹었지, 그 다음에 사과를 또 두 개 주었지. 그런데 그것도 또 먹었어. 그 사람은 분명 나에게 사과를 세 개 주었는데 사과는 없어졌어.

그러니까 제로가 되지 않았느냐, 숫자라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다는 도리다. 우리 불교는 유치원생이 하는 것이야.

내가 또 하나 묻겠는데 하나 더하기 둘은 셋과, 하나 더하기 둘을 제로라는 것 중 어느 것이 맞느냐?"
"둘 다 맞지요."

"그게 틀린 거다. 나는 다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어디서 나왔느냐? 둘은 또 어디서 나왔느냐? 셋은, 제로는 어디서 나왔느냐? 누가 만든 거냐? 개가 셀 수 있느냐? 닭이 셈을 할 줄 아느냐?

너의 생각이 하나, 둘, 셋을 만들었고, 너의 생각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지. 본래는 하늘도 땅도 없고, 하나, 둘, 셋도 없는 거야. 자 예를 들어보자. 저 눈(雪)이 무슨 색깔이냐?"

"흰색입니다."
"그것 틀렸다."
"왜 그것이 틀립니까?"
"네가 눈한테 물어보아라."
"눈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대답을 안한 걸 보니 눈이 희다는 말을 안한 것 아니냐? 네가 눈이 희다고 했지 눈이 언제 내 색깔이 희다고 얘기하더냐?"고 했더니 한대 얻어맞았다고 하더구만 하하…(웃음)

"해를 너는 썬(SUN)이라 하고 나는 해라고 한다. 물론 자기 멋대로 지은 거지, 태양이라는 것은 본래 이름이 없어…. 이 모든 것은 네 생각이 만들었을 뿐이야.

네 생각이 만들었으니까 네 생각이 없어지면 하나 둘 셋이 있겠는가? 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무색(無色) 무공(無空)으로 넘어가는 도리라는 거야.

네 생각이 태양하고 끊어질 때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 어떤가? 생각 이전의 세계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없다."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나라는 것도 생각에서 나온 거야. 내 생각이 딱 끊어져야 내가 없어지는 거야.

내가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이 텅 비어지고 대허공 같이 되고, 대허공 같이 되면 대원경이 되어가지고 맑은 거울 같아서 산에 비추면 산이 되고, 물에 비추면 물이 되고 비추는 그대로야.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고, 개는 멍멍 짖고,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이것이 실상이라는 거다."

이렇게 《반야심경》의 도리를 설명하자 박사학위 다섯 개라는 것도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았는지 ‘선생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런 쟁쟁한 놈을 굴복시켜 놓으니 그 밑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서양 사람들은 한국 수좌들처럼 윽박지르며 시키면 통하지가 않아요. 머리들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가르쳐서 자기들의 이론이 밑받침되지 못하는 곳까지 끌고 가야 해요.

하나하나 따져서 합리적인 옳은 답이 나와야 믿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이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지금 화계사 국제선원에 많은 스님들이 동안거 참선 정진하고 있어요. 아주 열심입니다.

이렇게 먼 외국에서도 부처님 법을 찾아 화계사로 오는데 우리 화계사 불자님들도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부처님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자 “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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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직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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