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펌]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한다. 

 

 

 

제 1 장. 이 경을 설한 인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왕사성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3만 8천 인 및 여러
보살마하살과 함께 계셨다.

 

 

 

 

제 2 장. 마른 뼈의 가르침    

그 때에 부처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보셨다.
부처님께서는 오체투지로 마른 뼈에 예배하셨다. 이를 보고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여래께서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여러 사람들이 귀의해 존경하옵는데 어찌하여 마른 뼈에 예배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뛰어난 제자이고, 출가한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널리 알지는 못하는구나.
이 한 무더기의 뼈가 혹시 나의 전생의 오랜 조상이나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에 내가 지금
예배를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다.
"네가 이제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남자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사모로
장식하고 다니기에 남자의 몸인줄 압니다. 또한 여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연지와 곤지를 곱게
찍고 난초와 사향으로 치장하고 다니기에 여인의 몸인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죽은 후의 백골은 모두 같사온데 저에게로 하여금 어떻게 구별해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절에 가서 강의도 듣고 경도 외우며, 삼보에 예배하고
부처님의 이름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뼈는 희고 또한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여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음욕이나 뜻을 두고, 아들 딸을 낳고 키움에 있어, 한 번 아이를 낳을 때 마다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자식에게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흰 젖을 먹여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님 생각에 마음이 마치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이시여, 어머니의 은덕을 어떻게 갚아야 되겠습니까?"

 

 

 

 

제 3 장. 잉태했을 때의 고통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길
"이제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소상하게 말해주리라. 어머니가 아이를
갖게되면 열 달 동안 그 고통과 수고가 말할 수 없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한 지 첫 이 지나면 그 기운이 마치 풀 위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아침에는 잘 보존하나 저녁에는 보존하지 못한다. 이는 이른 새벽에는 피가 모여 들었다가
낮이 되면 흩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잉태한 지 두 이면 마치 엉킨 우유와 같이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셋째 에는 태아가 마치 엉킨 피와 같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넷째 에는 점차로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되며,

어머니가 잉태한 지 다섯 이 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다섯 부분의 모양이 생겨나게 된다.
이 다섯 부분의 모양이란 머리가 한 부분이고, 두 팔꿈치를 합하여 셋이 되며, 무릎을 합하여
모두 다섯 부분이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섯 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여섯 가지 정기(六精)가 열리게
되느니라. 여섯 가지 정이란, 첫째 눈이 한 정기요, 둘때로 귀가 한 정기이며, 셋째는 코가
한 정기이며, 넷째 입이 한 정기이고, 다섯째 혀가 한 정기이며, 여섯째로 뜻이 한 정기이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일곱 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3백 6십 뼈마디와 8만 4천의
털구멍이 생기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덟 이 되면 그 뜻과 꾀가 생기고 아홉 개의 구멍이 뚜렷하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아홉 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먹게 된다.
복숭아나, 배, 마늘은 먹지 않고 오곡만을 먹게 되느니라. 어머니의 생장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은 위로 향한 사이에 한 산이 있는데 세 가지 이름을 갖느니라. 한 이름은 수미산이요,
또 한 이름은 업산이요, 또 한 이름은 혈산이다. 이 산이 한번 무너지게 되면 한 덩어리의
엉킨 피가 되어서 태아의 입속으로 흘러 들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열 이 되면 비로서 태어나게 되는데 만일 효순(孝順)할 아들이라면,
두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오므로 어머니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러나 만일 오역의 죄를
범할 자식이면 어머니의 아기집을 찢어 놓고, 손으로는 어머니의 심장이나 간을 움켜 쥐며,
다리로는 어머니의 엉덩이 뼈를 밟아서 어머니로 하여금 마치 1천개의 칼로 쑤시며
1만개의 송곳으로 심장을 쑤시는 것처럼 고통을 주게 된다. 이처럼 고난을 주고 이 몸 받아
생을 얻었음에도 그 위에 오히려 열 가지 은혜가 있는 것이다."

 

 

 

 

제 4 장.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여러 겁 거듭하여 온 무거운 인연으로 금생에 다시 와서 모태에 들었네.
날 지나고 달이 지나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이 되어서 육정이 열렸네.
한 몸뚱이 무겁기가 산악과 한 가지요. 가고 서는 몸놀림에 바람과 재앙 조심하며
좋고 좋은 비단옷 모두 다 입지 않고 매일 단장하던 거울에는 티끌만 묻었네.

 

둘째, 아이를 낳으실 때 수고하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아이를 배어 열 달 지나 어려운 해산 날이 다가오면
아침마다 흡사 중병 든 사람 같고 나날이 정신마저 흐려지고
두렵고 겁난 마음 어이 다하리. 근심 짓는 눈물은 흉금을 채우고
슬픈 빛을 띠우고 주위에 하는 말 이러다가 죽지않나 겁이 나네.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
자비로운 어머니 그대 낳은 날 오장이 모두 열려 벌어진 듯
몸과 마음이 함께 까무러쳤고, 피를 흘려놓은 것이 양을 잡은 듯 하네.
낳은 아이 건강하다는 말 듣고 그 환희가 배로 늘었네.
기쁨이 가라앉자 다시 슬픔이 오고 아픔이 심장까지 미치네.

 

넷째,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아 먹이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咽苦吐甘恩(인고토감은)]
무겁고도 깊으신 부모님 은혜 베푸시고, 사랑하심 한 때도 변치 않고
단 것은 다 뱉으시니 잡수실 것 무엇이며 쓴 것만을 삼키셔도 싫어함이 없으시네.
사랑이 무거우니 정을 참기 어렵고, 은혜가 깊으니 슬픔만 더하도다.
다만 어린 자식 배 부르기만 바라시고 자비하신 어머니 굶주려도 만족하시네.

 

다섯째, 마른 자리 아이 누이시고 젖은 자리 누우시는 어머니 은혜를 노래하노라. [廻乾就濕恩(회건취습은)]
어머니 당신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이는 안아서 마른 자리 누이시네.
두 젖으로는 목마름을 채워 주시고, 고운 옷 소매로는 찬 바람 막아 주시네.
아이 걱정에 밤잠을 설치셔도 아이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네.
오직 하나 아이를 편하게 하시고 자비하신 어머니 불편도 마다 않으시네.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어머니의 깊은 은혜 땅과도 같고, 아버지의 높은 은혜 하늘과 같네.
깊은 마음 땅과 같고, 높은 마음 하늘같아 어머니마음 그러하고, 아버지마음 그러하네.
두 눈이 없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끝이 없고, 손발이 장애라 해도 귀여워하시네.
내 몸 속에서 키워 낳으신 까닭에 온 종일 아끼시며 사랑하시네.

 

일곱째, 깨끗하지 못한 것을 씻어주신 은혜를 노래하노라. [洗濯不淨恩(세탁부정은)]
아아, 아름답던 옛 얼굴 아리따운 그 모습 소담하신 몸매.
푸른 눈썹은 버들빛을 가른 듯 붉은 두 뺨은 연꽃빛을 안은 듯
은혜가 더할수록 그 모습은 여위었고, 더러움 씻기다 보니 이마에 주름만 느네.
아아, 아들 딸 생각하는 가없는 노고 어머니의 얼굴이 저리 변하였네.

 

여덟째, 자식이 멀리 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遠行憶念恩(원행억념은)]
죽어서 이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생이별 또한 고통스러운 것.
자식이 집 떠나 멀리 나가면 어머니의 마음 또한 타향에 가 있네.
낮이나 밤이나 자식 뒤쫓는 마음 흐르는 눈물은 천 갈래 만 갈래
새끼를 사랑하는 어미원숭이 울음처럼 자식생각에 애간장이 녹아나네.

 

아홉째, 자식을 위한 마음으로 나쁜 업을 행하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아버지 어머니 은혜 강산같이 소중하나 갚고 갚아도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단하면 어머니 마음 편치않네.
자식이 먼 길 떠난다는 말 들으시면 가는 길 밤추위 실로 걱정되네.
아들딸의 잠깐 고생도 어머니는 오래도록 마음 졸이네.

 

열째, 끝없는 자식사랑으로 애태우시는 은혜를 노래하노라. [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
깊고 무거운 부모님의 크신 은혜 베푸신 큰 사랑 잠시도 그칠새 없네.
앉으나 일어서나 마음을 놓치 않고, 멀거나 가깝거나 항상 함께 하시네.
어머님 연세 백 세가 되어도 팔십된 자식을 항상 걱정하시네.
부모님의 이 사랑 언제 끊어지리이까. 이 목숨 다할때까지 미치오리.

 

 

 

 

제 5 장. 부모님 은혜를 잊어버리는 불효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중생을 보니 비록 사람의 모양은 하였으나 마음과 행동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모님의 크신
은혜와 덕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잃고 은혜를 버리고 덕을 배반하며
어질고 자비로움이 없어서 효도를 하지 않고 의리가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열 달 동안은 일어서고 앉는 것이 매우 불편하여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고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아서 마치 큰 병든 사람과 같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을 때도 고통이 심하여
잠깐 동안의 잘못으로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싸이며, 돼지나 양을 잡은 것처럼 피가
흘러 땅을 적신다. 온갖 고통을 이처럼 받으신 뒤, 이 몸을 낳아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아
먹이시며 안아주고 업어서 기르신다. 더러운 것을 빨아도 싫 어하지 않으시고 더운 것도 참고,
추운 것도 참아 온갖 고생 마다 않으신다. 마른 곳을 골라서 자식을 누이시고 자신은 젖은 곳도
사양하지 않고 주무신다.

 

3년 동안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서 마침내 나이가 들면 예절과 의리를 가르치며, 시집 장가 들여
벼슬자리에 내보내기 위하여 공부도 시키고 직업도 갖게 한다. 이렇게 애써 가르쳐도 은혜로운
정이 끊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들 딸이 병이라도 들게 되면 부모님 또한 병이 생기며, 자식의 병이 나으면 자애로운 부모님의
병 또한 나으신다. 이렇게 기르시면서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신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윽고 자식이 다 자란 뒤에는 도리어 불효를 행한다. 부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눈을 흘기고 눈동자를 굴린다.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도 속이고 형제 간에 서로 때리고
따르지 않고, 부모님의 가르침과 지시도 따르지 않고 형제간의 말도 일부러 어긴다.

출입하고 왕래함에 있어서도 어른께 말씀드리기는커녕 말과 행동이 교만하여 매사를 제멋대로
처리한다.

 

이런 것을 부모가 타이르고, 어른들이 그른 것을 바로 말해 주어야 하거늘 어린 아이라고 어여쁘게
생각하여 웃어른들이 덮어주기만 한다.

그래서 점점 커가면서 사나워지고 비뚤어져서 잘못한 일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성을 내게 된다.

또한 좋은 벗을 버리고 나쁜 사람을 벗으로 사귄다. 그러한 나쁜 습성이 천성이 되어 몹쓸 계획을
세우며, 남의 꾀임에 빠져 타향으로 도망쳐가서 마침내는 부모를 배반하게 된다.

집을 떠나고 고향을 이별하여 혹 장삿길로 나가거나 혹 싸움터에 나가 지내다가 갑자기 객지에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혹은 타향에서 잘못하여 남의 꾀임에 빠져 횡액으로 갇히게 되어 억울하게 형벌을 받기도 하며,
감옥에 갇혀 목에 칼을 쓰고 손발에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혹 우연히 병을 얻어 고난을 당하거나 모질고 사나운 운수에 얽혀 고통과 고난에 배고프고
고달파도 누구 하나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다. 남의 미움과 천대를 받아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어 죽게 되어도 구해주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

 

죽게 되어 시체는 부풀어 터지고 썩어서 볕에 쬐고 바람에 날려 백골만 뒹굴게 된다. 이렇게
타향땅에 버려져서 친척들과 함께 만나 즐겁게 지내기는 영영 멀어진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뒤쫓아 항상 근심하고 걱정으로 산다. 혹은 울다가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며, 혹은
비통하고 애끓는 마음에 기가 막혀 병이 되기도 한다. 혹은 자식생각에 몸이 쇠약해서 죽기도
하며, 이로 인해 외로운 혼이 원한이 되어서 끝내 잊어버리지 못한다.

혹은 다시 들으니, 자식이 효도와 의리를 숭상하지 않고,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서 무례하고,
추악하고, 거칠고 사나워져서 무익한 일을 익히기 좋아하고, 남과 싸우며, 도둑질하고, 술 마시고
노름을 하며, 여러가지 과실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형제에게까지 그 누를 끼치며 부모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와서 부모를 근심에 싸이게 한다.

부모의 생활형편이 춥거나 더운 것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저녁이나 초하루 보름에도
부모를 편히 모실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부모가 나이들어 쇠약하여 모습이 보기싫게 되면
오히려 남이 볼까 부끄럽다고 괄시와 구박을 한다.

 

혹은 또 아버지가 홀로 되거나 어머니가 홀로 되어 빈 방을 혼자서 지키게 되면, 마치 손님이
남의 집살이하는 것처럼 여겨 평상과 자리의 먼지와 흙을 털고 닦을 때가 없으며, 부모가
있는 곳에 문안하거나 살펴보는 일이 없다. 방이 추운지 더운지, 부모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일찍이 알 까닭이 없다.

이리하여 부모는 밤낮으로 스스로 슬퍼하고 탄식을 한다.
혹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이것으로 부모님께 봉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하면서도, 혹 좋은 음식을 보면 이것을 가져다가 제 아내와
자식은 주면서도 추하고 못났다 하지 않고 피로하고 수고스럽지만 부끄럽다 하지 않는다.

또 아내와 첩에 대한 약속은 무슨 일이든지 잘 지키면서도 부모의 말씀과 꾸지람은 전혀 어렵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딸자식일 경우 남의 배필이 되어 시집가게 되면, 시집가기 전에는 모두 효도하고 순종하더니
혼인을 한 후에는 불효한 마음이 점점 늘어난다. 부모가 조금만 꾸짖어도 원망하면서 제 남편이
때리고 꾸짖는 것은 이를 참고 달게 여긴다.

성이 다른 남편 쪽 어른에게는 정이 깊고 사랑이 넘치면서 자기의 육친에게는 도리어 소원하게
대한다.

혹 남편을 따라서 타향으로 옮겨가게 되면, 부모를 이별하고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며 소식도
끊어지고 편지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부모는 간장이 끊어지고 오장육부가 뒤집힌 듯하여, 딸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것이
마치 목마른 때에 물을 생각하듯 간절하여 잠시도 쉴 새가 없게 된다.

이렇게 부모의 은덕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건만 불효의 죄는 이와 같이 이루 다 말할수가 없다."

 

 

 

 

제 6 장. 부모님 은혜 갚기의 어려움    

이 때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은덕을 듣고 몸을 일으켜 땅에 던지고
스스로 부딪혀 몸의 털구멍마다 모두 피를 흘리며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한참 후에 깨어나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괴롭고 슬퍼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들은 이제야 죄인임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것도 몰라서 깜깜하기가 마치 밤에 길을 걷는 것 같더니 이제 비로소 잘못된 것을 깨닫고
보니 심장과 쓸개가 모두 부숴지는 듯 싶습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이시여, 불쌍히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옵소서.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겠습니까?"
이 때 부처님께서는 여덟 가지의 깊고도 무거운 범음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설명하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피부가 닳아져 뼈에
이르고 뼈가 닳아져 골수에 미치도록 수미산을 백천번 돌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굶주리는 흉년의 액운을 당해서 부모를 위하여 자기의 온 몸뚱이를 도려내어
티끌같이 잘게 갈아서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잘 드는 칼로써 부모님을 위하여 자기의 눈동자를 도려내어 부처님께 바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아주 잘 드는 칼로 그의 심장과 간을 베어서 피가 흘러 땅을 적셔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괴로움을 참으며 백천 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아주 잘 드는 칼로 자기의 몸을 찔러 칼날이 좌우로 드나들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몸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여서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뼈를 부수고 골수를 꺼내며, 또는 백천 개의 칼과 창으로 몸을
쑤시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하여 뜨거운 무쇠탄환을 삼켜 온 몸이 불타도록 하기를 백천 겁이
지나도록 하여도 오히려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이 때에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깊은 은덕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이 이제야 큰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모님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을 쓰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을 독송하며,
부모님을 위하여 죄와 허물을 참회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삼보를 공경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재계를 받아 지니며, 부모님을 위하여 보시하고, 복을 닦아야 하느니라.
만일 능히 이렇게 하면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이라 할 것이요, 이렇지 못한다면 이는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니라."

 

 

 

 

제 7 장. 불효에 대한 과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불효한 자식은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치게 되면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이 큰 지옥은
길이와 넓이가 팔만 유순이나 되고, 사면에는 무쇠 성이 둘려 있고, 그 주위 에는 다시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느니라. 그리고 그 땅은 붉은 무쇠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며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이느니라.

여기서 끓는 구리와 무쇠 녹인 물을 죄인의 입에 부어 넣으며, 무쇠로 된 뱀과 구리로 된 개가
항상 연기와 불을 토하는데 이 불은 죄인을 태우고 지지고 볶아 기름이 지글지글 끓게 되니
그 고통과 비통함은 견딜 수가 없느니라.

그 위에 무쇠채찍과 무쇠꼬챙이, 무쇠망치와 무쇠창 그리고 칼과 칼날이 비와 구름처럼
공중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사람을 베고 찌른다. 이렇게 죄인들을 괴롭히고 벌을 내리는 것을
여러 겁이 지나도록하여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쉴 사이가 없느니라.

또, 이 사람을 다시 다른 지옥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에 화로를 이고 무쇠수레로 사지를 찢으며,
창자와 살과 뼈가 불타고 하루에도 천만번 죽고 살게 한다.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모두 전생에 오역의 불효한 죄가 저질렀기 때문이니라."

 

 

 

 

제 8 장.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     

이 때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부모님의 은덕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이 이제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모님을 위하여 이 경전을 다시 펴는 일을 한다면 이것이
참으로 부모의 은혜를 갚을 것이 되느니라.
경전 한 권을 펴내면 한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오, 백 권을 펴내면 백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오,
천 권을 펴내면 천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오, 만 권을 펴내면 만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 니라.
이렇게 한 사람은 경을 펴낸 공덕으로 모든 부처님들이 오셔서 항상 옹호해 주시는 까닭에
이 사람이 부모로 하여금 천상에서 태어나게 하여 모든 즐거움을 받으며 지옥의 괴로움을
영원히 여의게 되느니라."

 

 

 

 

제 9 장. 부처님께 맹세    

이때 여러 사람 가운데 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人非人)·천(天)· 용·야차·
건달바와 또 여러 작은 나라의 왕들과 전륜성 왕과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각각
이렇게 발원했다.
"저희들은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차라리 이 몸이 부숴져 작은 먼지같이 되어서 백천 겁을 지낼지
언정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 겁 동안 혀를 백 유순이 되도록 빼어내어 이것을 다시 쇠보습으로 갈아서 피가
흘러 내를 이룬다 해도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백천 자루의 칼로 이 몸을 좌우로 찌르더라도 맹세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또 차라리 작두와 방아로 이몸을 썰고 찧고 하여 백천만 조각을 내어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가
모두 가루가 되어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림 : 김부자 화백

 

 

제 10 장. 이 경의 명칭   

이 말을 듣고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여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대부모은중경》이라 할 것이며 이렇게 이름을 지어 너희들은 항상 받들어 지닐 지니라."
이 때 모든 사람 가운데 천(天)·인(人)·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이 말을 믿고 받들어 그대로 행할 것을 맹세하고 절하고 물러갔다.
 
보무모은진언(報父母恩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
왕생정토진언(往生淨土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싯데율이 사바하
대보부모은중진언(大報父母恩重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남 옴 아아나 사바하(7번)
다생부모 왕생정토진언(多生父母往生淨土眞言)
나모 삼만다 못다나 옴 싯데율이 사바하(7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보물 1125호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출처:山 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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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달 -

       
새벽달은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만나보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스물네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은혜다.



- 법정의《오두막 편지》중에서 - 



새벽달은 언제나 뜹니다.
차고 기우는 새벽달의 아름다운 미소를, 날이 흐리지만 않으면
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건강의 새벽달, 
행복의 새벽달, 성공의 새벽달...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게으른 사람의 하늘에는 뜨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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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오나가나 고통 투성이다. 고국이 그리워 고국에 가면 고국 나름대로 고통이 있고, 그게 안쓰러워 미국에 오면 미국 나름대로 고통이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이 어디서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사랑이 하고 싶어 괴롭고, 먹고 싶어 괴롭고, 자고 싶어 괴롭고, 자식이 없어 괴롭고, 자신이 있어 괴롭고, 명예가 없어 괴롭다고 각기 그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고통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하면 내가 있는 데 원인이 있다. 내가 없다면 이 세상 천만 근의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 5온이 몸이 공한 도리를 비추어 보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있다. 5온은 색·수· 상·행·식(色受相行識)이다. 색은 물질 즉 육체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이다.

물질인 색은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가 인연 따라 모인 것이니 공이요, 수· 상·행·식은 감수작용, 상상작용, 의지작용, 분별작용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정신작용을 일으키므로 공이다. 독립된 실체가 있다면 상호 연관된 관계가 끊어져 없으므로 고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地)는 지대로, 수(水)는 수대로, 화(火)·풍(風)도 각기 제 좋은대로만 하려 한다.
정신도 역시 마찬가지다. 감수작용은 감수작용대로, 상상작용은 상상작용대로, 의지작용은 의지작용대로, 분별작용은 분별작용대로, 각기 제 모습을 드러내 자랑코자 한다.

허나 그것이 잘 되지 않으니 고통이다. 허나 이것이 각기 떨어진 주인이 없는 것이라 따로따로 떼어놓을 것 같으면 있다고 할 것이 없다. 따로따로 떼어놓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간적·공간적으로 잠시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으니 있다고 할 것이 없다.

있다고 할 것, 없는 것을 붙들어 잡고 나라고 생각하고, 그 나를 중심으로 내 것을 형성하다보니 나 아닌 것과 내 것이 아닌 것과의 대립적 관계에서 온갖 탐욕과 진애가 생기고 사랑과 갈등이 생겨서 세상에 온갖 고통이 실꾸러미 처럼 딸려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몸, 즉 5온이 공한 도리를 확실하게 비추어 보아 내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거기에 내가 없는데 무슨 고통이 달라붙겠는가? 그러나 이 몸이 헛것이라 하여 업신여기거나 염세적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수·화·풍 4대나 색· 수·상·행·식 5온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다. 그 놈은 끌고 다니는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 때문에 너 나를 구분하는 것이지, 4대 5온 때문에 분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때에는 받아들이는 감수작용만 있고 한두 살 먹어 조금 더 크면 돌아다니면서 집고 가지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조금 더 크면 갖가지들을 기억하여 시비분별한다.

그러므로 수·상·행·식은 발달심리학적인 면에서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이고, 또 지·수·화·풍 4대, 즉 지는 굳은 뼈요, 수는 살결이요, 화는 맥박이요, 풍은 호흡이라 인간의 생체구성 과정을 따라서 그렇게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것은 인간 구성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놈이 있어 너 나를 구분하므로 죽고 싶은 생각이 나고 감정과 감정이 대립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색도 인연이니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인연이니 색과 다르지 않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은 수·상·행·식이 아니고는 인식될 수 없고, 수·상·행·식은 색이 아니고서는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로 형태만 달리하여 나타나고 숨은 것에 불과하므로 그의 본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불생불멸이란 법체(法體)의 영원성을 말하고, 불구부정은 법체의 청정성을 말하며, 부증불감은 법체의 원만성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 그것을 운용하는 마음이 어떻게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 부증불감하는가는 물 하나의 예로서도 능히 증명할 수 있다.

가령 여기 병이 있는데 15℃ 때 그 병 속에 3㏄의 물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 병에 100℃의 열을 가하면 그것은 얼마 있다가 모두 수증기로 변하고, 또 그것을 식혀 차게 만들면 다시 3㏄의 물이 된다. 그것을 또 냉동고 속에 넣어둔다면 금방 얼음이 되고 만다.

이렇게 모양은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그 습기(H2O)는 변치 않으므로 부증불감인 것이다.
또 더럽고 깨끗한 것에 대하여서도 물이 입을 통하여 들어갈 때는 깨끗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 있다가 방광을 통하여 나오면 더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 물 자체는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 또 그 물은 개울에 있다고 해서 적고, 바다에 들어간다고 해서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증불감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 있지 않다. 그래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한 것이다.

우지(愚智) 득실(得失)이 없는 세상, 이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불교에서는 이같은 무고안은(無苦安隱)이란 세상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이 열반의 마음은 부처와 중생이 똑같아 언제나 깨어있는 것이므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다. 일체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마음, 이 마음이 정등정각이요, 도일체고액하여 무지역무득한 열반적정심 그 마음이 무상정등정각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반야심(般若心)이라 하는 것이며 정각심(正覺心)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반야심을 이룬 자며 정각심을 행한 자이다. 나와 네가 혼연일체의 세계,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닌 대동법계(大同法界)야 말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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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인생이란 얼마나 길까?"

"50년이오."

"아니다."

"40년." , "30년?"

"아니다. 아니야!

 다 틀렸어."

"그럼 얼마나 되나요?"

"사람의 생명이란 한 번 호흡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지금 자기 주변의 아름다운 사물을 체득하는 마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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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저 말이.. 요즘은 조금씩 알 것 같다.

사람이.. 들이쉰 숨을 내뱉지 못하면 죽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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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야사야(生也死也), 본래 한 물건이 없는데 무엇이 생(生)하고 또 무엇이 죽는단 말인가?
서산(西山)대사의 게송(偈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닭소리를 들으니 장부 하는 일을 모두 마쳤도다.”
이 장부의 일이란 바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이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生)이고 사(死)냐. 내 몸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분명 나는 아니다.

다만 나라고 생각할 뿐, 먼저 나를 밝히자. 무엇인가 나의 몸을 끌고 다니는 것, 그것이 어떻게 생긴 물건이냐.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종하처거(死從何處去)오.”

생(生)이 온 곳이 있다면 가는 곳도 있을 터, 생이란 허공에 뜬구름과 같다고 했다. 항상 뚜렷이 드러나는 한 물건, 그것은 허공에 뜬구름과는 다르다.

맑고 깨끗해서 생사에 따르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다만 없는 생사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원래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해와 달과 별도 인간이 그렇게 불러서 있는 것이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물건의 이름조차 없다. 무릇 삼라만상의 이름을 생각으로 지었으니까 그 생각이 끊어지면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이 주장자 소리나 똑같은 것이다.

“이차문래(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하라.”

생각을 내지 말라. ‘나’라는 물건을 쥐꼬리만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자기인식의 확립이 선이요, 그 선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불교다.

데카르트의 명제와는 정반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텅 빈 것인가? 생각 않는 자체란 생각 이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본성이 여기에 있다.

티끌 하나 하나가 묘체(妙體)를 지니고 있으며, 마땅히 다 구족되어 있다고 한 조사의 말과 같이 삼라만상의 이름은 각각이 그 본성은 똑같은 것이다. 즉 생각이 비어 있다는 것은 대우주와의 동일체(혹은 통일체·전일체·순일체라고도 한다)화된 것의 이름이다.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끊으면 된다.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끊느냐. “이 뭣고?” 생각이 꽉 막히고 커다란 의심덩어리를 끌고 들어갈 때에는 벌써 하나의 원점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이다. 이 원점을 마음이니, 부처니, 진여·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
대우주와 하나가 되었을 따름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입을 안 열고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다. 영산회상에 앉아 1천2백 대중을 향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부처님에게 염화미소(捻花微笑)를 했다는 마하가섭존자처럼 말이다.

내가 주장자를 들어 보이는 것과 2천여 년 전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인 것은 같은가, 다른가. 삼라만상은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했다.

그러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어느 제자가 조주스님에게 불었을 때, 조주스님은 무(無)! 라고 대답했다는데 이때의 ‘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서구 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이다. 이 속에서 모든 사상과 주의가 다 나왔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본령인 인본주의 사상은 공산주의라는 사회혁명과 자본주의라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커다란 사회 변천이 가져다 준 것은 인간의 기계화와 이로 인한 윤리도덕의 타락이다. 천륜이 끊어진 상태에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영리주의가 판치는 물질문명은 공해라는 새로운 대적을 만들어 냈으며 인간성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은 입으로는 세계평화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가공할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신이 깊다. 대자연과 함께 살자는 명제 아래 탈취당한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고 나선 젊은이들 사이에 동양의 선사상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선은 불교의 전용물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누구나 다 반성하고 ‘생각을 쉰다’
는 소승선(小乘禪)의 경지까지는 들어간 셈이다.

“만법이유심조(萬法而唯心造)이다.”

시공(時空)조차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동서남북이 다를 뿐더러 백 사람이 무지개를 보고 느끼는 감각 또한 각각 다른 이유다.

“아유필유 아멸필멸(我有必有 我滅必滅)이다.”

내가 없어지면 우주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몸 속에 매달렸던 무거운 돌로 꽉 막힌 그 자리에서 문득 깨달았다는 대법안(大法眼)의 일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며 ‘심즉불 불즉심(心卽佛 佛卽心)’을 금과옥조로 삼던 그 제자 현축도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 스승의 깨우침에 무릎을 꿇었다지 않던가.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곧 불교요, 선의 본지이다. 나를 내 마음속에 끌고 다니지 말고 환경에 집착하지 말라. 그래야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는 법.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움질을 하게 되고 정상화가 안 되는 것이다.

견해를 버리면 즉 ‘나’라는 것을 없애면 대자연의 파괴도 아니하게 되고 세계평화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출처 : 참선도량화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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