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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인도vs일본 미인도 [778]
22763 | 2005-07-17
추천 : 4  | 조회 : 240258  | 스크랩 : 129
단아한 차림의 한국 미인과
화려하게 단장한 일본 미인, 둘 다 아름답죠?
 
한국 미인도는 동양화가 주민숙씨의 그림입니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단아하고 정숙하다는 느낌입니다.

다음은 일본의 기모노 전문화가 하루요 모리타씨의 그림입니다. 하루요 모리타씨는 특히 기모노 디자인에 정통한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때문인지 섬세하고 강렬한 원색의 기모노가 단연 눈길을 끕니다.   --엠파스 eminum2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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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1 2005-07-1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서 보았었는데...개인적으로 화려한 것보다 은은한 것을 좋아해서 한복이 더 좋아요. 일본그림..순간적으로 눈을 사로잡긴 하는데 좀 쉽게 질리는 느낌이라서요.(그런데 일본그림 꼭 환타지 같지 않나요? 너무 서구적으로 생겨서리..)

꼬마요정 2005-07-2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그네들이 서양인을 동경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하지요... 한복은 수수하지만 정감이 가서 좋아요. 기모노는 원래 장식적인 의미가 강해서인지 무지하게 화려하구요... 그래서인지 더더욱 한복이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송현숙<9획> 2002, 캔버스에 템페라, 150x120cm,
개인 소장
 
어머니의 장맛이 그리울 때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 난다”는 속담이 있지요. 음식 맛은 어머니 손맛이고 어머니 손맛은 바로 장맛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거나 그리울 때는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또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먹게 되면 불현듯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 싶어지지요. 그 그리움의 맛이 바로 장맛입니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장맛이지요. 우리 음식이 다른 나라 음식과 차이나는 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조리 과정에서 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1766년 간행된 ‘중보산림경제’에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해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기록된 데서 알 수 있듯 장은 영양과 미각의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매우 중요한 먹거리였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보니 장을 담글 때는 택일을 하고 고사를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담근 장을 귀신이 먼저 먹지 못하도록 금줄을 치고 장 위에 숯이나 고추를 띄웠습니다. 장 담글 때 여인들은 외출도 삼가야 했고 부부관계도 피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 입을 창호지로 봉하기도 했지요. 장을 담근 후에는 삼칠일 동안은 상갓집에도 가지 않았고 해산을 했거나 달거리가 있는 여인은 장독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장맛이 어머니의 손맛인 것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성을 먹으며 살았기에 빈한한 상차림도 늘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충만했습니다. 음식은 맛과 영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성과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임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갖 장은 대대로 내려온 한반도 어머니의 이 속 깊은 정성과 사랑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음식물인 것입니다.


30년 넘게 독일에서 활동해온 화가 송현숙의 장독 그림들을 보노라면 그 옛날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시나브로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그림이라고 해야 달랑 장독 하나 그린 것이 전부이지만, 그 장독으로부터 우리는 힘겨웠던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가족을 향한 그분들의 애틋한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타국에서 살면서 고이 간직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급속한 세태의 변천으로 오히려 고국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옛 감성을, 화가는 이 원형적인 장독에 아름답게 담아놓았습니다.


보여지는 이미지뿐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송현숙의 그림은 매우 간단합니다. 한 가지 색으로 채색된 화포 위에 몇 번 그은 붓질이 다입니다. 그의 작품 제목이 <9획> 같은 형식으로 돼 있는 것도 그가 얼마나 단순한 절차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잘 말해줍니다. ‘9획’인 작품은 실제로 아홉 번의 붓질로 완성한 그림입니다. 장독의 형태에 맞춰 붓을 아홉 번 그어 장독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지요. 서양화의 재료와 형식을 이용해 그린 그림임에도 동양화의 ‘일필휘지’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 어머니들이 장을 이런 태도로 담그셨을 겁니다. 따지고 분석하거나 이것저것 재서 장을 담근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된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명필이 붓을 휘두르듯 맛의 핵심으로 곧장 나아가셨을 겁니다. 거기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정성이었던 거지요.


사실 일필휘지의 근본 태도는 정성입니다. 그냥 붓을 휘두른다고 일필휘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랜 경험과 기량의 바탕 위에 정신을 모으고 정성을 다 쏟아 부을 때 붓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폐부까지 상쾌함을 느끼지요. 잘 묵은 장 맛은 그렇게 우리의 혀를 지나 영혼 속까지 깊고 진정한 만족감을 가져다줍니다. 영혼을 위로해 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어머니의 장맛만큼 깊은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세상에 그만한 예술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그 장맛이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그 정성이 고맙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형식의 작품이지만, 그런 만큼 세상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과 형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다 하지 않는가. 그의 예술이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바, 결국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 그리는 예술가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작품이 단순할수록 더 강한 느낌을 준다.”


그처럼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깊은 정서적 충족감을 준다. 그 충족감의 강도만큼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의미란 전일적인 관념으로 종착되지 않는 것이라는 앞에서의 언급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의 작품은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다. 가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의미 있는 만큼, 그 가치 있는 만큼, 그의 작품은 하나의 명료한 문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그의 화포에서 보는 것은 나무막대기나 하얀 천, 기와, 장독 등이다. 그러나 그것만 본다면 그것은 표피적인 바라봄일 것이다.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그의 그림은 순수하고도 추상적인 붓질이다. 나무막대기도, 천도, 기와도, 장독도 모두 붓질에 불과하다. 선 하나를 그으니 그것이 막대기가 됐고, 또 선 하나를 그으니 그것이 천이 됐다. 항아리는 여러 개의 선을 순서대로 돌려 그린 것에 불과하다. 선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그의 그림은 그래서 페인팅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담스럽다. 비록 페인팅 안료를 사용했을지 모르나 그의 그림은 엄밀히 말해 드로잉이다. 선 그림인 것이다.


이렇게 선으로 모든 것을 처리했으되 그것이 뚜렷하고도 친숙한 공간 이미지를 자아내는 까닭에 우리는 그것을 집이라고도 부르고 항아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재료의 내용과 절차를 감추려 드는 서양의 페인팅과 달리 이미지와 병행해 재료의 내용과 절차를 또렷이 드러내는 그의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예술이 대상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붓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선명히 보여준다. 이를 그는 “붓질과 대상(성)의 양립”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고루 드러냄으로써 그림의 의미가 이미지에만 있지 않고 재료와 과정에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관념은 곧 회화를 둘러싼 다른 다양한 가치의 양립에 대한 생각들을 유도한다. 그림은 그것이 평면 위에 그려짐에도 (많은 경우) 사실 공간의 재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평면과 입체의 양립이며, 대상을 빌어 화가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객체와 주체의 양립이며, 사실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끝내는 안료의 뒤범벅이라는 사실에서 환영과 물질의 양립이다. 이런 모든 양립 관계를 붓질과 대상(성)의 양립으로 함축해 보여주는 송현숙의 그림은 결국 의미가 눈에 드러나는 곳에 종착되고, 드러나는 것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이나 보는 이 모두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자신 본 모습을 만날 때 얻어지는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와 같은 궁극적인 의미는 현실 세계에서는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송현숙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양립의 수수께끼’를 가까이 전해 주고 싶다. 양립은 마치 수평선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 같다.”


사실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의 수평선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수평선. 우리는 경계일 뿐 경계 밖의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 경계가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포획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하나의 이것이거나 저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경계는 수평선처럼 눈에는 보이되 결코 잡히지 않는 선이다. 우리는 의식과 물질을 가르며, 주체와 객체를 가르며, 영원과 유한을 가르는, 그럼으로써 잇는 하나의 수평선이다. 송현숙의 그림은 그런 우리의 초상화이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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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5-06-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이 단순한 것처럼? ^^
 







유근택<바닥-길버트 그레이프> 2004, 종이에 수묵채색, 190x180cm,
작가 소장
 
늘 어지럽히는 아이들로 인해 짜증이 날 때

‘꾸러기’란 잠이나 심술 같은 명사 뒤에 붙어 ‘그 사물이나 그런 버릇이 많은 사람’이란 뜻을 지닌 접미사입니다. 잠꾸러기, 심술꾸러기, 장난꾸러기, 욕심꾸러기, 말썽꾸러기 같은 말이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이렇게 꾸러기로 지칭되는 사람은 대체로 아이들입니다. 어른들은 체면이나 남의 시선을 고려해 그렇게 드러내놓고 심술이나 욕심을 부리지 못하지요. 아이들은 심술을 부리면 끝까지 심술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면 끝까지 말썽을 피웁니다. 그래서 꾸러기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들이 집안을 어지럽힐 때는 끝까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끝없이 집안을 어지럽힙니다. 아무리 열심히 뒤치다꺼리해도 소용이 없지요. 가뜩이나 다른 집안 일도 많은데 이렇게 어지럽히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아직 철모르는 아이에게 그런 습관을 들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어른도 제대로 치울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아이들의 환경이 너무 깔끔한 것보다는 다소 어지러운 편이 정서 발달에 좋다는 전문가의 견해도 있고 보면 무작정 깔끔한 아이로 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말로만 “정돈 좀 하고 살아라” 하고 넘어가다 보면 방금 치운 집안도 금세 다시 어지러워지는 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됩니다. 작은 허드렛일이라도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면 무기력증 속에 삶이 소진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한국화가 유근택이 그린 <바닥-길버트 그레이프>는 자잘한 사물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마루바닥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잔뜩 어지럽혀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난장판이 된 집안을 치우려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입니다.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널브러진 물건들이 아이들 장난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크기만 작지 소파나 서랍장 같은 것도 보이고 심지어 불타는 집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장난감과 더불어 장난감만큼 작아진 현실의 사물들이 바닥에 함께 내던져진 초현실적인 풍경인 것입니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요?


제목에 ‘길버트 그레이프’란 말이 들어 있는 걸 보면 이 작품은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 같은 내 인생’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라세 할스트룀 감독의 성장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무기력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희망도 기쁨도 없이 살아가는 한 청년의 삶을 조망한 영화입니다. 아버지가 자살한 뒤 폭식증에 걸려 비대해진 어머니, 정신지체인 남동생 아니, 노처녀 누나와 반항아 여동생 등 길버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동시에 그의 삶을 갉아먹는 존재들입니다.

그 울타리 속에서 별 변화 없이 체념하며 살아가던 길버트에게 어느 날 베키라는 캠핑족 소녀가 나타납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길버트는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다가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만, 결국 가족의 연에 이끌려 되돌아오고 말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거구의 어머니를 장의사에게 맡겨 이웃의 놀림거리가 되기 싫었던 가족들은 집째 불태워 어머니를 화장합니다. 그리고는 길버트와 베키는 아니와 함께, 누나는 여동생과 함께 각각 새로운 삶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림 왼편 상단의 불타는 집은 영화에서 어머니를 화장하기 위해 태운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른쪽 하단의 세 사람은 길버트와 베키, 아니를 연상시키고요. 그 사이에 수많은 물건들이 지난 세월에 대한 상념인양 널브러져 있습니다.


가족은 희망이고 기쁨이면서 또 짐이고 업보입니다. 자식을 기르는 일은 무한한 행복감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과 피로감을 동시에 가져다주지요. 아이들이 천사같이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것은 분명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사실 아이들이 물건을 어지럽히면 아이가 그걸 치우게 하거나 부모가 직접 치우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가정의 불화나 기타 아이가 지기엔 버거운 짐으로 아이의 영혼이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다면 그것은 다시 정돈하기가 쉽지 않지요.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더더구나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영혼이 맑고 밝기만 하다면 까짓 것 좀 어지럽히며 놀면 어떻습니까? 집안이 어지럽지 않은가보다 아이의 영혼이 어지럽지 않은가를 먼저 살피는 현명한 부모가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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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뤼동<죄를 쫓는 정의와 신성한 복수> 1808, 캔버스에 유채, 244x29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이에게 양심과 공의에 대해 가르쳐줄 때

히브리 속담에 “한 가지 거짓말도 거짓말이고 두 가지 거짓말도 거짓말이나 세 가지 거짓말은 정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점을 일깨워주는 속담인데요, 우리 정치판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그런데 정치가 잘못 돌아가면 흔히 정치인만을 탓하지만 사실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정치가 부패한 것은 부패한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했기 때문이요, 부패한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국민이 부패한 까닭이다”라는 영국 속담이 이를 잘 말해주지요. 사실 우리 사회는 아직 부패하고 비합리적인 구석이 많습니다. 식민지 경험과 동족 상잔 등 불행했던 근대의 경험에 압축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갖가지 부작용이 더해져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거나 심지어 양심을 저버리고 공의를 외면하는 사태까지 심심찮게 발생하지요.


이런 사회에서 자녀를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 정의 관념과 이타적인 희생정신이 충만한 인간으로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편법과 탈법이 판을 치고, 극단적인 경쟁심과 이기심이 옹호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자칫 양심이나 정의 관념 같은 것은 고리타분하고 무기력한 가치로 내침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삶이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그런 삶을 살았고 또 돌아보면 지금도 우리 주위의 적지 않은 이웃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폴 프뤼동은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든 정의는 지켜져야 하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지녔던 화가입니다. <죄를 쫓는 정의와 신성한 복수>는 그의 그런 믿음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걸작입니다.


달이 구름에 걸터앉은 깊은 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쓰러뜨리고 옷과 귀중품을 빼앗아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쓰러진 남자는 지금 치명상을 입고 생사가 경각에 달린 것 같습니다. 작은 이득을 위해 다른 인간의 생명조차 아무렇지 않게 해치는 범죄자는 희생자의 그런 처지에 전혀 동정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음험한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고 죄 없는 희생자는 밝은 빛에 처연히 몸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중에는 이 살인자의 행위를 목격하고 그를 잡으려는 두 명의 여인이 떠 있습니다. 왼쪽의, 횃불을 들고 있는 여인이 정의입니다. 그녀가 든 횃불은 진실의 횃불이지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리 어둠 속에 죄를 숨기려 해도 그녀가 끝내 드러내 놓고 말 것입니다. 정의의 손이 벌써 범죄자의 머리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 옆의 여인은 신성한 복수입니다. 오른손에 든 것이 검, 왼손에 든 것이 저울입니다. 신성한 복수는 죄인의 죄를 저울에 매달아 그 정도를 따져 거기에 맞게 칼을 들어 심판할 것입니다. 결코 봐주거나 속아넘어가지 않고 양심을 판 대가를 철저히 캐물을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보고 혹자는 정의와 양심에 대한 신념은 가상하지만 과연 현실이 얼마나 이런 신념과 가깝겠는가 하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양심의 가치는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 수용되느냐로 따져지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믿음처럼 그것은 무엇보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정의와 양심은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지 그것의 현실적인 가치나 이득을 보고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따질 일은 아니지요. 성경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아무 유익이 없어도 정직은 생명을 구한다”(잠언 10장 2절)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삶다운 삶을 사는 것, 곧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겠지요. 다른 많은 인류의 경전들도 한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정의와 양심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는 일은 삶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는 일이 되겠지요.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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