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뮤다(Bermuda)의 삼각지대

 
버뮤다의 삼각지대


 아름다운 버뮤다 섬의 해변

'마(魔)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머뮤다 삼각지대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버뮤다, 푸에르토리코를 잇는 3각형 모양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
대략 북위(北緯) 20도에서 40도까지, 서경(西經) 55도에서 85도에 이르는 4백만㎢의 면적을 차지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을 통과하는 많은 선박과 항공기들이 괴현상을 보거나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록은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워드 로젠버그는 1973년 U.S. Coast Guard는 지난 세기 동안 8,000건의 조난 신호와 50척 이상의 배와 20대 이상의 비행기가 버뮤다 지역에서 사려졌다고 한다.


이 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가설들이 나왔는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으로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매 20~25만 년마다 자장이 바뀐다.

현재도 자장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자기적인 지진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대표적으로 자장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공간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대비책을 세울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론들로는 아틀란티스의 침몰지점, 외계인의 지구인 납치설, 4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 바닷속의 메탄 가스설(oceanic flatulence: 바닷속의 메탄 가스가 갑자기 위로 솟아나와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는 주장)등이 있다.


 메탄 가스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스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 지역의 교통량은 매우 많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난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미국 해안경비대 당국에 따르면 연간 버뮤다 삼각지대 부근에서 구조를 요청해오는 배는 그곳을 항해하는 약 15만 척의 선박 중 1만 척 정도인데 그 중에서 실종되는 배는 극소수라고 한다.

더불어 1975년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연안에서 소식이 두절된 배는 21척이며, 그 가운데 삼각해역 안에서 사라진 것은 4척이었다. 그리고 76년에는 사라진 28척 중 6척이 그 지역에서 사라졌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 한창 절정에 이른 1977년 여름, 미 해군은 소련 함대와 협력하여 '포리모오드 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목적은 서부 대서양 해역의 자기 이상 유무, 불규칙한 해류와 파랑(波浪)효과, 해중의 음향전파 경로, 돌발적인 자기(磁氣), 태풍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 결론은 한마디로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였다.


 침몰된 선박

이 괴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를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불리게 된 원인은 빈센트 가디스가 대중 잡지인 '아고시(Argosy)'의1964년 2월호에 게재된 "죽음의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기사에서 시작 되었다.
이 기사를 참조한 챨스 베리츠는 1974년의 베스트 셀러인 '버뮤다 삼각지대'를 썼다.

이로써 버뮤다 삼각지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 후에 많은 책과 기사와 TV 프로그램이 이 버뮤다 삼각지대를 다루게 된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이목을 모으는데 이보다 좋은 소재가 있을까?

 
버뮤다 삼각지대에서의 사고들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여기에 실린 사고들에 관해서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로렌스 쿠시는 전면 재검토를 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고들에 대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인을 상정해볼 수 있었다.
아래에 열거된 사건들 가운데 *표가 붙어 있는 항목은 후일 다른 사람에 의해 이론이 제기 된 것이다.



 버뮤다 삼각지대 상공에서 훈련배행 도중 사라진 아벤저 뇌격기 편대
1. 로절리 호(버려진 배)* 1800년, 좌초됐으나 선원은 구조됐다.
2. 메어리 셀레스테 호(버려진 배) 1872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3. 애틀랜타 호(소식이 끊긴 배)* 1880년, 심한 폭풍에 의함.
4. 엘렌 오스틴 호(버려진 배)* 1881년, 이야기의 출처가 불분명.
5. 프레이어 호(버려진 배) 1902년, 태평양의 해저지진으로 침몰.
6. 조슈아 슬로검 호(선원이 증발)* 1909년, 질병의 만연 또는 배의 전복.
7. 사이클로푸스 호(해군의 수송선) 1918년, 악천후.
8. 캐럴 A. 디어링 호(버려진 배) 1921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9. 라이후쿠마루(소식이 끊긴 화물선) 1925년, 악천후.
10. 고토파쿠시 호(화물선) 1925년, 기록적인 폭풍우.

11. 사다후코 호(괴물에게 잡혀먹혔다는 화물선) 1926년, 엔진 폭발.
12. 존 앤드 메어리 호(버려진 스쿠너) 1932년, 엔진 폭발.
13. 라 다하나 호(바닷속에서 나타난 '유령선') 1940년, 침수로 조정불능.
14. 글로리아 코리타 호(버려진 스쿠너) 1940년, 폭풍우에 의함.
15. 크로테우스 호와 네레우스 호(형제선) 1941년, 어뢰로 침몰.
16. 루비콘 호(버려진 화물선, 개가 살아 있었다) 1944년, 폭풍우에 의함.
17. 제 19비행중대(행방불명이 된 5대의 폭격기)* 1945년, 단순한 항법 실수.
18. 시티 벨 호(버려진 수쿠너)* 1946년, 악천후.
19. 스타 타이거(사라진 여객기) 1948년, 의문의 실종.
20. 엘 스나이더(사라진 조타수) 1948년, 기록적인 돌풍.

21. DC-3(사라진 비행기) 1948년, 조종 실수.
22. 스타 에어리얼(사라진 여객기, 19번과 자매기) 1949년, 미해결.
23. 샌들러 호(사라진 화물선) 1950년, 폭풍우로 인함.
24. 요크 트랜스포트(군사 수송기) 1953, 악천후.
25. 수퍼 컨스텔레이션(미해군기) 1954년, 미해결.
26. 서전 디스릭스 호(해군 화물선) 1954년, 폭풍우.
27. 콘네마라 4세 호(버려진 요트) 1955, 허리케인에 의함.
28. 해군의 정찰폭격기 1956년, 폭발.
29. 레바노크 호(사라진 요트) 1958년, 폭풍우로 인함.
30. KB-50(사라진 공군기)* 1962년, 미해결.

31. 마린 설펴 퀸 호(화물선)* 1963년, 여러 가지 자연적 원인으로.
32. 스노포이(사리진 낚시배) 1963년, 악천후와 화물 과적.
33. 2대의 KC-135(공급 급유기)* 1963년, 공중 충돌.
34. C-119 '플라잉 복서'(공군기) 기술적 결함.
35. 체스 YC122(수송기) 1967년, 기체구조의 결함.
36. 비치크라프트 보난자(경비행기)* 1967년, 엔진 고장.
37. 파이퍼 아파치(경비행기) 1967년, 악천후 또는 엔진 고장.
38. 위체클라프트 호(순양함)* 1967년, 폭풍우로 인함.
39. 스코비온(원자력 잠수함) 1968년, 구조적 결함.
40. 테인마우스 일렉트론(버려진 세계일주 요트) 1969년, 자살.

41. 파이퍼 코만치(경비행기)* 1970년, 비행사 실수로 인한 엔진 고장.
42. 엘 칼리브 호(사라진 화물선) 1971년, 공중납치로 보인다.
43. V.A. 포그호(사라진 유조선)* 1972년. 폭발.

『미스터리 세계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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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Hagia Sophia)


 ★ 하기아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내부구조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간에 기둥을 받치지 않고 올린 중앙 돔의 높이가 55.6미터에 이르는 이 성당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질 만큼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성되었다.

소피아 성당은 당시 세계의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등장했다.
돔 양식의 건축물은 소피아 성당이 최초였으며, 이후 이스탄불의 주요 사원은 모두 소피아 사원 양식을 모방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소피아 성당은 중앙에 있는 황금으로 덮어 찬란하게 빛나는 황제의 문과, 금으로 된 천장의 화려한 모자이크, 중앙 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면 더욱 찬란하게 미소 짓는 예수의 얼굴 모자이크, 그리고 정교한 코린트식으로 장식된 측면 원형의 기둥과, 황금의 제기가 있는 화려한 성당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 성당이 완성된 후 '솔로몬이 이룩하지 못한 것을 짐이 완성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소피아 대성당은 건축의 웅장함이 주는 장중함 뿐, 내부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내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이스탄불에 입성한 십자군 대장 단도로는 이 성당 안에 있는 집기를 모두 약탈하고, 여인을 불러 주연을 즐기는 등, 소피아 사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황제의 문에 있는 금도 모두 벗겨 냈다.

이후 오스만튀르크의 정복 왕 술탄 메흐메트가 소피아 성당에 왔을 때 그는 소피아 성당의 화려함에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 제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4개의 날개를 가진 천국을 지키는 천사가 8면을 지키고, 성스러운 마리아가 탄생 예수를 안고 있는 찬란한 모자이크도, 천장 가운데 있는 예수의 성스러운 모자이크도 모두 회칠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477년 간 회교 사원으로 쓰이던 성 소피아 사원은 아타투르크가 박물관으로 지정한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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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틀란티스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35년경 플라톤의 저서<대화편>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라는 철학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플라톤은 <대화편>을 집필하는데 있어,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라서 어느 것이 플라톤의 것이며, 어느 것이 소크라테스의 것인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유명한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은 이집트의 고도(古都) 사이스의 사제로부터 아틀란티스 대륙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 인 크리티아스에게 들려주었다.
이 크리티아스와 이름이 같은 그의 손자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며,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9,000년 전에 아주 강력한 고대 국가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 국가였다.
아주 예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 동쪽 끝에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뒤편에 큰 섬이 있었다.
이 큰 섬을 아트란티스 대륙이라고 불렀는데 이 섬을 지배하던 나라는 동서로 리비아에서 이집트 접경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유럽의 티레니아(이타리아 중북부)까지 통치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해협에 위치한 지역도 점령하였다. 그러자 그리스에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그리스 전체를 총괄하는 동맹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맹군 간의 이해가 서로 엇갈려 모두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그리스 혼자만 싸워 승리자가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단 하루의 밤과 낮 사이에, 그리스의 전사 모두가 땅 속에 묻혔고 아틀란티스 대륙 역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사라진 섬과 유적들이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배가 항해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침몰한 섬이 남긴 많은 이토(泥土)가 배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리스 정치가 솔론이 사이스의 사제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하였던 대륙인가? 존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인가?


플라톤 이후 아틀란티스 대륙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했고, 이에 관한 책도 무려 5,000권이 넘는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대서양이나 지중해에 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 한복판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많은 탐험가들이 대서양을 진지하게 탐사했었고,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자, 이곳은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아틀란티스 대륙을 전설이나 플라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향으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은 1871년 독일의 슐레이만의 트로이 유적 발견과, 1901년 아디 에반스가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관심이 고조되었다.

19세기 말 정치가이면서 학자인 이그나티스 도넬리는 50줄의 나이에 <노아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를 출간했는데 이 책들은 1963년까지 50회 이상 재판(再版)됐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심한 지진과 홍수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다'라는 플라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세계에 퍼져있는 홍수전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기원전 9800년(플라톤이 말한 연대)보다 이전에 대서양 한가운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매우 진보된 금속 문명, 문자의 발명, 나침반의 발견, 항해술의 발전, 화약, 종이 등 모든 분야가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각 대륙에 퍼져있는 피라미드, 미라의 보존기술, 태양력, 그리고 대홍수의 전설 등을 예시 했다. 즉 아트란티스 대륙이 대홍수로 가라앉은 후 두 문화권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제각기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넬리의 가설은 해저의 팽창이나 대륙이동설, 혹은 다른 분야의 과학의 진보에 의해서 대부분 부정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두 대륙이 하나(아틀란티스)에서 출발했다면 고대 문명에서 사용되었던 바퀴와 가축들이 왜 신대륙에는 사용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1909년 K.T 프로스트는 타임지에 '아틀란티스의 파괴는 고대 지중해를 석권하였던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과 인근에 있는 산토리 섬의 화산 대폭발(기원전 15세기경)과 관련되어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1969년 J.V.라스도 같은 맥락의 '재발견된 아틀란티스'라는 제목으로 다시 언급했다. 그들은 솔론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로 간주하고 철저히 분석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청동기 시대에도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스의 사제가 솔론에게 해준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크레타 섬이 아틀란트스 대륙이라면 그리스 인들이 보아서 '서쪽에 있었던 섬'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이 제기 되었다.

그 후, 프로스트 가설를 강력히 지지하는 증거가 나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산토리 섬의 화산은 기원전 15세기경 폭발하였는데 그때 함께 일어난 해일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은 물론, 훨씬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967년부터 마리나토스는 산토리니 섬을 발굴하여 1m 두께의 화산재 아래에서 고대 문명의 도시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산토리니의 재난이 있기 전에 크레타는 매우 번영하였던 섬나라로 지중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때,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산토리니 화산이 터지기 전은 기원전 1600 ~ 1500년 전후가 되는데 그 당시 이집트에는 고대 문명이 발달했을 때이므로, 크레타와 이집트는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토리니 화산이 터져, 그 영향은 이집트까지 미쳤고, 그 후에 크레타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자, 산토리니 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집트 인들 사이에 전해 오다가 솔론이 알 게 되어 플라톤까지 이어지고, 플라톤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책으로 남긴 것이 아닐까? 더구나 산토리니 섬의 멸망과정과 발굴된 후의 모습은 플라톤이 묘사한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이제 아틀란티스의 비밀이 밝혀진 듯 하였으나 1977년 필힐러와 시링크라는 두 독일 과학자는 화산의 분출물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산토리 섬의 폭발은 크레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이 폭발한 후 거의 100년이 지난 기원전 1380년까지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기록된 9,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먼저 플라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 9000년 전이라고 했는데, 산토리니 화산 폭발은 1600 ~ 1500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위치가 너무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가설이 나왔는데 당시 이집트 인들은 해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잘못 알았으며, 플라톤이 말한 9000년 전이라는 것은 실제로 900년을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는 산토리니 섬과 크레타 섬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공의 대륙으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청동기 시대의 크레타에서 번성한 미노아 문명의 영화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출처 : 시화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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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사(Pisa)의 사탑

 
피사의 사탑


  피사의 사탑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사 대성당(Duomo di Pisa)의 부속건물(대성당, 세례당, 종탑)중 3번째이며 마지막 구조물로써, 중세 도시국가 피사가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워진 종탑이다.

흰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꼭대기 종루를 포함해 8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는 55.8m, 무게는 14,500t 이나 된다.
탑내부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을 통해 종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걸려있다.

1174년에 착공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 천재건축가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따라 탑을 만들어가던 중, 3층까지 쌓아올렸을 때 공사관계자들은 지반 한쪽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책임 기술자였던 보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350년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물론 건축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탑을 세운것은 아니다.

1년에 1mm정도 기울어지는 미세한 자연 현상이 누적되다보니 오늘날과 같이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다.

현재는 탑의 기울기가 멈춘 상태다.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토질 기계학과 존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은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만에 이룩한 개가"라고 말했다.

사탑이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천년 동안 용케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적당히 기울어진 사탑


피사 시당국은 지난 93년 사탑의 수직기울기가 5m나 되는 것을 감안할 때 2050년경이면 붕괴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자 부를랜드 교수에게 매달렸다.

특히 지난 89년 3월 파비오에 있는 8백년된 탑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너지는 사고까지 난 터라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를랜드 교수의 처방은 의외로 간단했다. 탑의 기초를 강철 케이블로 묶어두고 콘크리트로 기초를 보강하는 한편 탑이 기울어지는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쌓아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1년이 안되는 사이에 탑꼭대기가 약 5cm 정도 되돌아섰다.
문제는 탑을 어느 정도까지 바로 세우느냐다.

전세계 토목전문가들로 구성된 '피사탑 국제위원회'는 현재 10도 정도의 기울기를 약 1도 정도만 되돌려 꼭대기가 수직선에 4.5m정도에서 고정시키기만 해도 사람이 올라가더라도 사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피사 사람들이 사탑 붕괴 다음으로 절대 원치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똑바로 선 모습이 아닐까?

피사의 탑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유럽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건축물 중 하나가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하게 기울어진 채 영원히 서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사탑은 알고 나 있는지. 


바로서는 피사사탑


내년 5월 새단장 공개

보수공사를 위해 10년 전 폐쇄된 이탈리아 피사사탑이 내년 5월 초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보수공사 책임 기술자인 미첼레 자미올코브스키씨가 16일 밝혔다 .

자미올코프스키 기술진은 지난 2월 이후 58.5m 높이의 사탑 기울기를 13㎝나 바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 사탑은 이미 130년 전의 기울기 상태로까지 회복됐는데 자미올코프스키씨는 내년 중반 현재의 보수공사가 끝날 때쯤이면 26㎝를 더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중반에는 이 사탑의 기울기가 300년 전과 같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탑의 기울기가 바로잡히고 지난 800년 동안의 때를 말끔히 씻고 개장하면 이를 축하하기 위한 특별 파티가 내년 6월14일 거행될 예정이다.

2000.06.18 [피사=AFP연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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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 앙코르(ANGKOR)의 유적을 찾아


  
코르의 유적을 보기 위해 시엠립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하는 여행자는 이곳이 과연 연간 백만의 관광객을 수용하는 국제공항일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청사의 모습에 다소 의아하게 된다. 일년 내내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공항 내에는 단 한 개의 작은 에어컨조차 찾아볼 수 없고 커다란 선풍기 두어대 정도만이 붕붕 소리 내며 무더운 바람을 되새김 질 할 뿐이다. 자국 내 캄보디아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여행자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소위 어라이벌비자(Arrival Visa)라 불리는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따라서 비자가 발급되는 반 시간 동안은 별수 없이 공항의 무더움을 인내하는 훈련부터 감수해야 한다. 물론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갖추지 않은 공항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캄보디아의 경제적인 현주소는 공항에서부터 웅변해준다.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를 연상케 한다.


시엠립은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약 330km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약 6만명 정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연간 백만이상이 된다고 한다. 시엠립이라는 말은 100여년 전 현재 태국의 시암족이 앙코르를 침공했을 때 용감히 싸워 이민족을 물리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으로서, 시엠립은 '시암족을 물리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곳의 주민들은 원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관광이 개방된 1993년도 이후부터는 80%가량이 관광업에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이 있는 지역은 완전한 평지처럼 보이는 거대한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지역으로서, 해발 150미터 정도되는 언덕 위에 조성된 프놈바껭 사원 이외의 모든 유적은 평지에 조성되어있다. 앙코르는 800년경 자야바르만 왕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기 전, 그러니까 6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현재 라오스의 남부지역 참파삭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에는 그 옛날 크메르인들이 힌두교를 받아들여 시바신을 숭앙하며 둥지를 틀고 도시국가를 건설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크메르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남하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현재의 앙코르 유적이 있는 곳에서 왕성한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곳은 또한 800년대 초부터 이곳은 무역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있으면서 많은 상인들이 오가다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상업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앙코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근에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 '톤레삽'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앙코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도읍을 뜻한다. 앙코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앙코르톰'이라는 지역을 들어가야 하는데, 앙코르는 도읍(都邑)을 뜻하고 '톰'은 '크다'는 뜻을 나타내므로 직역하면 대도시 혹은 대왕도(大王都)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도읍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 경 왕국의 수도로서 조성한 것으로서 각 변의 길이가 3km에 달하는 정사각형의 모양을 성벽이 둘러싸고 그 중앙에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바이욘 사원을 높이 건축하였으며 동서남북으로는 2개의 추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게 하도록 하였다. 두 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지점에는 왕도의 문이 4개, 그리고 왕궁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 석상의 열을 난간으로 한 다리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있는데, 중앙의 바이욘 사원은 그보다 반세기 전에 조성된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돋보인다.


앙코르 왕국의 초기인 8세기에는 앞서 받아들인 힌두교를 중심으로 사원과 주요 건축물들이 조성되었으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앙코르의 역사상 이 자야바르만 7세가 통치하던 12세기와 13세기가 가장 전성기로서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100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숫자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암족, 참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하고, 더구나 왕실 내에 현재의 나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크메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타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사실, 그토록 융성했던 앙코르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정글 속으로 몇 백년동안이나 사라져 잊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확실한 해답이 없는 상태이지만, 시암(Siam)족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이라기 보다는 앞서 언급한 전염병의 창궐 때문이라는 설이 한층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1860년 발견될 때까지 이 거대한 유적군은 수 백년간 정글에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1856년부터 1953년까지 거의 100년간 프랑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 백년간 숲속에 파묻혔었다는 증거는 타쁘롬이라는 사원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마치 석조의 유적들이 거대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 감기고 덮여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모든 영화가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또한 느끼게 한다.

아무튼, 앙코르 문화의 초기인 9세기와 10세기의 건축물에는 벽돌문화가 도입되었고 11세기 초기에 이르러 석조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주로 사용된 돌로는 사암(沙岩)과 수성암(水性岩)이었다. 사암은 황토색과 분홍색 등 파스텔 색상의 돌로서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고 습기에 강하므로 외벽의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많이 애용되었으며, 수성암은 매우 부드럽지만 일단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매우 단단해 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기초나 장식이 필요치 않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위에 목조문화가 첨가됨으로서 보다 완벽하게 예술성이 가미된 구조물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목조 기둥과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것들을 받치거나 고정했던 구멍들만이 돌 위에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암은 이곳으로부터 약 60km 떨어진 프롬끌렌 산으로부터 톤레삽 호수에 뗏목을 띄워 운반하였고, 평지에서는 통나무를 바퀴 삼아 코끼리로 하여금 끌어 운반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축조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암의 조형물과 건축물에는 일절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사암의 조형물 중 걸작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진 바이욘 사원으로서, 1281년에 완공된 불교사원을 들 수 있다. 이 사원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으로 앙코르톰의 각 변에서 정확히 1.5km 지점의 정 중앙에 주 탑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54개의 주탑(主塔)이 있었으나 현재는 37개만이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하나의 거대한 완성품을 위해 쌓아진 돌의 규격이 모두 틀리다는 점이다. 돌들은 접착제 없이 모두 지그재그로 쌓아져 있는데, 돌과 돌 사이에 원래는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조립되었고,
그 후에 조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쌓았었다는 증거는 역사적인 연대가 이를 증명한다. 만일 틈이 있었다면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공기가 들어가게 됨으로써, 따라서 자연히 이끼가 끼고 벌레가 들어가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틈이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800여년 이라는 세월동안 이렇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탑(主塔)으로 오르는 계단들은 무척 가파르고 보폭이 좁게 건축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오르내리게 하기 위한 계단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계단이라는 의미로서 신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의미로 설계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얼듯 보면 힌두교의 신들의 조각들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이욘사원이 불교사원이라는 것은 다시말하면 앙코르의 유적은 불교와 힌두교, 또는 반대로 힌두교에 불교가 가미된 그러한 믹스된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거의 모든 앙코르의 유적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아무튼 앙코르의 유적 중 자야바르만 7세의 40년 재임기간 중 가장 많은 불교사원이 지어지게 되었다.


앙코르톰의 남문을 나와 1.5km를 내려가면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거대한 유적, 세계적인 불가사의라 불리는 앙코르와트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사원이나 궁전을 조성할 때는 풍수지리적인 방향을 무척 까다롭게 따져보았는데, 동쪽은 창조를 뜻하고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쪽은 자연을 나타내고 북쪽은 희망을 상징했다. 북쪽이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는, 당시 앙코르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시바신이 살고 있는 곳이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칼리아사 산(우리말로는 수미산이라 한다)이고, 이 영산은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모든 사원은 창조나 자연을 나타내는 동쪽 혹은 남쪽으로 정문을 내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었지만, 앙코르와트는 유일하게 죽음을 나타내는 서쪽에 정문을 냈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은 당시 왕의 권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은 신과 동격이었고 신으로 불리었으며, 죽어서도 왕이고 싶은 사후의 사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왕의 기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이름 수리야바르만을 보면, 수리야는 힌두교의 태양신 '수르야'를 바르만은 '나중의 보호자'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왕은 자신의 이름대신 수리야바르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격화된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서쪽 정문으로만 유일하게 석조의 다리를 놓은 것이 앙코르와트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리의 전면 양쪽으로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득도했다는 뜻의 상징적인 보리수가 두 그루 놓여 있다. 사실 이 사원은 원래 힌두 사원으로서, 힌두교의 신 비슈누와 자신의 합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힌두 사원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이 신상들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으로서 얼핏 보면 힌두 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건축양식과 부조, 그리고 건물을 치장한 장식들은 완벽한 힌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 m 남북 1,300 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 m의 해자를 건너면 3개의 탑(塔)과 함께 날개모양의 회랑이 있으며,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470 m쯤 가면 사원의 본전에 다다르게 된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 m)이 4m, 제2회랑(115×100 m)이 12m, 제3회랑(60×60 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 즉 시바의 산 카일라사는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 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건축양식은 얼핏 보면 인도의 영향을 받아들여 지어진 듯이 보이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 760 m에 이르는 제1회랑 벽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 압사라와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코브라, 그리고 마치 주판알을 붙여 놓은 듯 한 창문 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 밤에는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약탈로 인해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 난 채 나뒹굴고 나중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버렸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혹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인도의 건축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모든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의 국민들은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암울하고 뼈아픈 상처를 가진 민족이라 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식민지시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찾아 정비하기도 전인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킨 론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엇다. 당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하누크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시하누크는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루주의 폴포트와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외국에 있고 캄보디아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은 주공의 명에 따라 폴포트에 적극 협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75년에 론놀을 축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자연히 실권은 폴포트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고, 시하누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루주'는 붉은 색을 의미하므로 크메르루주는 붉은 크메르군이라는 뜻이 된다. 아무튼 정권을 장악한 폴포트는 캄보디아를 명실 공히 자신의 수중에서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비롯한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킬링필드라 불리는 시절 15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로 사라져갔다. 단 한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혹은 단지 안경을 쓴 모습이 지식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외없이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시하누크는 이번에는 하는 수없이 베트남의 호치민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호치민은 이를 수락하여 월맹군을 급파하여 크메르루주와 대항하게 되었다.
1979년 결국 폴포트의 군대는 북쪽 정글 속으로 물러나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월맹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20년 가까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유엔의 개입으로 월맹군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오랜 내전과 많은 지식인의 학살로 생활은 궁핍할 때로 궁핍해지고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게 되었다. 1993년부터 관광이 개방되고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월맹군에 의해 매설된 수많은 지뢰로 인해 많은 농민과 아이들이 장애자로 바뀌고 있으며,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짓게 한다. 아직도 이들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이곳의 아동병원이나 사원들의 입구에는 이러한 지뢰에 희생되어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의 불쌍한 모습이 눈에 띄어 가슴을 메이게 한다.


쁘레아칸 사원 역시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조성된 불교사원으로, 쁘레아칸은 '신성한 도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이전 앙코르제국을 창시했던 자야바르만 2세가 신비한 효험을 지닌 보검을 지니고 있던 것을 자손인 자야바르만 7세가 이곳에 보관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이 사원은 특히 다른 보통 사원들과는 달리 앙코르톰이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도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서 넓은 부지와 견고한 회랑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보검과 주요 유물들은 1860년 프랑스인에 의해 발견되면서 대부분 도굴되어 버린 듯 하다.
앙코르 왕조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왕의 이름은 자야바르만 7세로, 그는 최초로 불교를 도입하였으며, 사원을 많이 지었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극대화 함으로써 역대 왕 중에서 백성들이 숭배하는 유일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팔 걷어 부치고 이 말을 음미해보면 이렇게 많은 사원들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필요했었을까. 즉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왕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폭정에 시달렸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자야바르만 7세가 다른 왕들보다도 폭군이 아니었을까하는 다소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 뿐일까.

앙코르에는 유적이 많다. 수정이라는 뜻을 가진 따께오 사원은 언뜻 보면 경주의 다보탑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부의 벽에 부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에서는 앙코르의 대부분 조각들이 조각을 먼저하고 쌓은 것이 아니라 벽돌이나 돌을 먼저 쌓은 다음 조각을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몇 개의 부분적인 유적밖에 남아있지 않은 바푸온 사원은 11세기 중반 유다야티다야 왕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사암과 벽돌, 그리고 수성암이 혼합된 앙코르 문화의 전형적인 중기의 사원이다. 피메나카스 사원은 뱀의 여인에게 바쳐진 사원으로서, 대부분 수성암으로 지어진 초기의 앙코르문화를 대변한다.
1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외벽에는 정교한 조각이 없고, 평범한 돔과 붉은 색의 수성암, 그리고 검은 색의 사암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밤이 되면 아리따운 여인으로 둔갑하는 이 뱀의 여인은 왕이 아내와 동침하러 가기 전에 반드시 들러서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무서운 신이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용(龍)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여기의 뱀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로 그 용을 상징하는 것인데, 용은 신이고, 따라서 왕의 몸에는 항상 신성한 신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로서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니핀 사원의 경우, 규모는 작지만 히말라야의 정상인 수미산(카일라사)과 그 밑에 있는 아나바타파 호수를 의미하는 우주의 정상과 치료에 효험있는 신비한 온천수가 4대 강으로 흘러내려가 네 개의 호수를 이루고 있는 구조의 형태로서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형상을 수사학적으로 해석하여 조성해 놓은 사원으로, 중앙의 탑은 수미산을 나타내고 주위의 호수 4곳은 바로 그 4대강으로부터 흘러내려 만들어진 삼라만상의 호수를 의미한다. 다른 사원들과는 판이한 색다른 구조의 형태로서, 우기 철에는 물에 잠기게 되어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인 '닉핀'은 또아리를 튼 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법에 의하면 법장 보살은 과거의 부처이고 석가모니는 현재의 부처이며 아미타불은 미래의 부처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말의 석상은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가 물에 빠진 상인들을 구하기 위해 변신했던 말 '발라하'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람 석상은 보살을 의미하며, 사자는 보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앙코르의 유적들이 여행자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앙코르의 유적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스케일면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비록 오랜 세월 방치되고, 상당부분 도굴당하고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앙코르의 유적은 과거의 웅장함과 영광을 말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일한 언덕인 쁘놈바껭 사원에서 동쪽의 앙코르와트와 서쪽의 지는 해를 동시에 바라보면, 한때를 풍미했던 모든 영광과 권력도 결국은 덧없는 한 순간의 꿈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된다.

이정식,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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