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전쟁 트로이...
눈 먼 시인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거대한 나라의 낙일(落日)을 주제로 한 영화가 바로 트로이이다. 에릭 바나, 브래드 피트, 올란도 블룸, 다이앤 크루거, 피터 오툴 등이 등장하여 각기 맡은 역을 충실히 연기한 결과,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내내 울었다.
원래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장 부각되는 부분이 트로이 전쟁이다. (빈곤한 로마의 문화를 살찌워주는 역할을 하므로) 그래서 트로이 전쟁이 있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서두로 나선다.
먼저 테티스와 제우스의 관계. 헤라클레스에 의해 해방된 프로메테우스가 감사의 표시로 제우스가 사랑하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장차 제우스를 밀어내는 영웅을 낳음을 알려준다. 덕분에 제우스는 테티스를 다른 남자 (뛰어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인 펠리우스와 결혼시킨다. 테티스가 반항해봤자 제우스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여기서 남성적,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을 잠깐 엿볼 수 있다. 어쨌든 테티스는 펠리우스와 결혼한다. (펠리우스와의 결혼에서 아킬레우스가 태어나는데, 인간 남자와의 사이에서도 그런 영웅이 태어났는데, 하물며 제우스의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다음 두번째로 테티스와 펠리우스의 결혼식장. 이곳에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한다. 그 결과 화가 난 에리스는 그들에게 불화를 선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황금사과. 모두가 잘 아는 이 황금사과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황금사과 겉에 쓰여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는 헤라, 아네테, 아프로디테의 허영심을 자극한다. 이 세 여신은 자신들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주장하며 제우스에게 심판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 꼬시는 것 만큼이나 정치적인 계산이 빠른 제우스는 이 심판을 양치기 소년 파리스에게로 넘겨버린다.
세 번째. 파리스는 누구인가.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막내 아들이다. 헤카베가 파리스를 임신했을 때 신탁이 내려졌다. 만약 아들을 낳으면 그가 트로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프리아모스는 파리스를 산에 버린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그랬듯 살아남아서 양치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훤칠하고 잘생긴 그는 달음박질과 활쏘기의 명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제우스가 심판을 맡긴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제우스의 정치적 계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창 신들과 인간들과의 사이에서 영웅들이 탄생되고 있던 이 시기에 신의 자리를 넘보는 그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일부러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이러한 심판을 맡기지는 않았을까. 의심해볼만한 문제이다. 어쨌든 파리스는 그 판결을 해야만 했다.
네 번째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 헤라는 권력을, 아테네는 지혜와 용맹을, 아프로디테는 세계 최고의 미인을 약속했다. 파리스는 미인을 선택했고, 그 결과 헤라와 아테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 때 세계 최고의 미인은 제우스의 딸인 헬레나였다.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메넬라오스의 부인이었던 그녀를 데려오려면 파리스에게 왕자의 자리를 찾아줘야 하는데,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자 자리를 찾게 되고, 헬레네를 유혹하여 트로이로 데려온다. 열 받은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 및 예전의 헬레네 구혼자들과 트로이를 공격하고자 한다. 헬레네가 미인인 만큼 처녀적 구혼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오디세우스도 있었는데, 오디세우스가 제안하여 누가 헬레네와 결혼하든 나중에 헬레네에게 문제가 생기면 연합하여 도와주기로 협약했었다. 그래서 그리스는 그러한 구혼자의 약속 이행 및 아가멤논의 야망, 메넬라오스가 느낀 모욕감 등으로 뭉쳐져 트로이를 공격하려고 한다.
트로이 영화에서는 신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테티스가 군더더기로 출현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신인들 별 수 없다. 어쨌든 영화는 보다 현실적으로 전개된다. 철부지 파리스가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려온 것은 그 일이 메넬라오스를 자극하고 ,아가멤논의 야망에 불을 붙이고, 그리스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할만하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헬레네가 파리스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메넬라오스의 소유물을 파리스가 훔쳐갔다는 그 시대의 가치관이다. 이 전쟁의 원인은 가부장적 사회의 확장이다. 그리스보다 모계사회에 가깝던 트로이가 완전한 가부장적 사회인 그리스에 의해 멸망하는 것은 모계사회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제 전쟁으로 들어간다. 참전을 거부하던 아킬레스가 전쟁 영웅으로서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픈 유혹을 참지 못하고 결국 트로이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아가멤논의 질투에 의해 자신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긴다. 여기서 자존심을 다친 아킬레스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아킬레스는 인간이 아닌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 전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헥토르의 지휘로 승전하는 트로이군에 맞서 패주하는 그리스군들이 아킬레스를 필요로 하면서 브리세이스가 돌아오고 아킬레스는 처음으로 안정을 향한 갈망을 느낀다. 가정을 꾸려서 오래 살고싶은 마음. 브리세이스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본인은 모르지만) 그는 그리스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신화에서 혹시 애인이 아니었을까로 추측하는 파르토클레스가 헥토르에 의해 전사하자, 분노로 제정신을 잃은 아킬레스는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 헥토르와 일 대 일 대결을 펼치고, 결국 헥토르를 죽인다.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인 후 밧줄에 매달아 전차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시체를 욕보이고, 이에 프리아모스는 목숨을 걸고 아킬레스를 찾아간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장한 대목이 아마 이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늙은 왕 프리아모스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며 잠재되어 있던 아킬레스의 인간성에 호소하는 모습. 이 영화에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이다. 피터 오툴의 생생한 감정 연기, 아킬레스가 느낀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던- 휴머니즘의 존재 , 그로 인해 그가 받은 충격, 죄책감, 두려움을 브래드 피트는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막바지로 치닫는다. 꾀돌이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헥토르의 장례를 위한 12일 동안 거대한 목마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 장수들이 숨어있다. 그리스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배를 대 놓고 숨어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는 파리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화에 보면 여기서 라오콘이 등장한다. 목마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다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 의해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까지 모두 죽어버려 트로이인들은 그 목마를 도성으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트로이는 멸망한다.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브리세이스를 구하고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 건을 맞아 죽는다. 인간성을 회복한 그를 기다리는 건 유한한 삶의 끝. 바로 죽음이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런 아킬레스를 화장시키며 조용히 말한다. 내가 여기 있었음을 기억해달라. 헥토르와 같은 시대에 살았음을. 아킬레스와 같은 시대를 풍미했음을. 영화의 끝이다. 영화는 트로이가 멸망된 이후의 일(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과 그리스군들이 돌아가는 일(오디세이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안드로마케나 파리스, 헬레나가 무사히 트로이를 빠져나갔을 거라는 암시만 풍긴다. 물론 신화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헥토르였다. 현명한 장수이자 용맹했던 그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적이면서 용감하고 명예를 알며, 지혜와 용맹, 미모까지 갖추었으니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닌가.
그런 그가 동생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에 비겁하게 적을 찌르는 모습은 너무나 비통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렌을 돌려보내려고 했을 때 파리스가 삐지자 헥토르는 이야기한다. "사람이 죽는 걸 봤느냐? 사람을 죽여봤느냐? 나는 죽음을 보았고 죽였다. 인간이 죽는 일에는 아름다움도 영광도 없다."
자신의 동생 파리스가 불러 온 재앙으로 트로이가 멸망할 것을,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트로이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힘껏 싸웠던 그가 영화에서 보여줬던 당당함과 번민은 나를 울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헥토르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헥토르의 모습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143분이라는 긴 시간에도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고 영화에 집중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난 아직까지도 트로이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remember 트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