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Generation (1859-1931)
2nd Generation (1933-1950)
3rd Generation (1855-1990)
4th Generation since 1991
1895-1995 A HUNDRED YEARS OF HISTORY
1995년을 맞이하여 라바짜사(Luigi Lavazza S.p.A.)는 창사 백 주년을 맞이 하였다. 네 세대를 거쳐 현재에 이른 라바짜사는 창업자인 루이지 라바짜(Luigi Lavazza)에 의해 통일된 이태리의 수도였던 토리노(Turin)의 작은 식료품점을 그 시작으로 현재의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베페(Beppe)와 페리클(Pericle) 라바짜의 사업가적 기질과 안목에 힘입어 회사는 날로 성장해 갔고, 오늘날 에밀리오(Emilio)와 알베르토(Alberto) 라바짜에 의해 그 혁신과 국제적인 성장이 꽃을 피워 이태리의 맛과 향, 그리고 스타일을 가장 잘 대변하는 기업으로 평가 받고 있다.
TURIN, 1894...
1859년 4월 24일 이태리 북서부의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근처의 무리센죠(Murisingo)라는 작은 마을에서 라바짜 가문에 루이지라는 소년이 태어났다. 수 년후 그는 오늘날 전세계 커피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바티스타 라바짜라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곧 입맛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카리주아노 왕자의 포도주 저장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왕자의 까다로운 커피 맛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었다.
COFFEE
커피의 기원은 역사의 시초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는 이디오피아의 카파(Kaffa) 지방으로부터 유래된 식물의 열매로 그 후 예맨, 아라비아, 이집트로 전파되었다. 이 붉은 열매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800 BC이전인 것은 틀림이 없으며, 11세기 초 아랍의 한 의사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열매를 굽고, 갈아서, 뜨거운 물에 타서 음료수로 먹는 방법도 아랍인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6세기경, 유럽 여행자가 “이슬람의 포도주” 또는 “아랍의 포도주”라고 불리우던 커피를 발견하였고, 1592년 베니스의 한 식물학자가 처음으로 녹색의 커피를 베니스로 가지고 들어왔다. 1615년 커피가 베니스로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매우 높은 가격으로 팔리었다. 그 후 1640년경에는 베니스 시내에만 커피하우스의 숫자가 2백여 군데가 넘을 정도로 커피의 인기는 상승하였다. 이러한 “커피 버릇”은 빠른 속도로 구대륙으로 번져 나갔으나 한 때는 “악마의 음료”라 하여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커피에 대한 욕구는 날로 커져만 갔고 루이 14세에 의해 설탕을 타먹는 방법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태리의 경우 1895년경에는 커피의 수요는 높은 가격으로 인해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품격 있는 음료로 인식되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나 판매하는 사람들은 위신 있는 사람들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때에 루이지는 커피 판매를 간절히 원했으며 이를 위해 각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루이지의 노력과 예견은 적중하여, 1900년 이후 커피의 수요는 급증하였으며 주간 매출이 1,400리라(현 시가 14,000달러)에 달했다. 이듬해에는 종업원수를 6명으로 늘렸고 커피의 대량 공급업체로서 토리노 외의 지역에도 커피를 공급하게 되었다.
BLENDED COFFEE IS BORN
1910년 루이지 라바짜는 그의 회사에 무언가 더욱 독특한 회사 특성을 부여해야만 사업을 확충하고 회사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특한 특성을 갖추기 위해서 루이지는 많은 것을 연구, 개발하였다. 즉, 새로운 로스트(roast) 커피 즉 독특하고, 쉽게 다른 것과 구분되는 그러한 커피를 제공하고자 원산지가 서로 다르고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커피를 섞어서 같이 볶아낸 커피를 발명하였다. 이것은 이전에 누구도 시도해 보지않은 새로운 개척이었다. 블랜드(blended) 커피라 불리우는 이 커피는 변함없는 맛과 또한 생산자의 확실한 신용을 보장하게 되었다. 그 후 세계 대전으로 인한 징용으로 인해 직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루이지는 자신의 가족을 동원하여 전시중이라 할 지라도 그 이전과 같은 생산 능력을 보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전쟁 직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회사는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1922년 이후 빠른 경제 성장으로 서서히 회사는 그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라바짜 일가는 기름, 설탕, 로스트 커피에 계속해서 집중하면서 발전해 갔고 Eureka Twelve Model이라는 새로운 커피 볶음 기계를 구입함으로써 굉장한 생산력을 가진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혁신으로 커피의 신선한 향과 맛을 몇 일간 지속할 수 있는 “펄가민(Pergamin)”이라는 포장의 개발로 시장이 상점만이 아닌 가족들에게 까지도 확장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해 내었다. 1927년 7월에 라바짜 일가는 자본금 1.5백만 리라(현 시세1백만 달러)의 “De Facto”라는 회사를 창립하였다.
이와 같이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차분하게 성장을 계속하던 라바짜사는 1931년 회사의 물류 시스템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즉 배달용 밴(van)을 구입하여 거리에 상관없이 직접 잠재 고객을 찾아 다니고 물건을 배달하며 수금도 동시에 하여 신선한 커피의 공급과 현금의 원활한 유통으로 놀라운 성장을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되었다.
PASSING ON THE FLAME
1933년을 기해 루이지 라바짜는 74세를 맞게 되었고 그는 그간 자신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오고 기여해 온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상황은 커피의 수입에 대한 규제, 즉 세 달간 120,000kg 만을 수입할 수 있다는 무역 규제와 이에 더해 1935년에는 이태리가 이디오피아를 침공하였고, 1939년에는 독일군이 유럽을 침공함으로써 커피의 수입이 전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라바짜사는 회사의 가동을 포기하지 않고 남아있는 물자를 이용해서라도 교역을 계속하는 끈기를 보였다. 라바짜사는 행정은 마리오(Mario), 상업은 베페(Beppe), 공장과 생산은 페리클(Pericle)이 나누어 맡았고, 전쟁이 끝난 직후 그들은 회사의 복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복원 작업은 파괴된 공장과 건물의 복원 뿐만이 아니라 공급자, 임원, 은행 등과의 관계의 복원도 포함하였다. 또한 이 당시 커피에 관한 법적, 재정적 규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원자재, 즉 커피의 부족으로 이어져 사업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라바짜사로 하여금 커피, 기름, 비누에만 집중하여 생산에 주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불황은 1946년 커피의 수입이 용이해지면서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1946년에 124,000kg의 커피를 구웠으며 1947년에는 그 수치가 거의 배에 달하는 발전을 맞게 되었다.
이때, 당시 보통의 커피 판매는 커다란 컵으로 퍼서 파는 방식이었으나 라바짜사만은 로스트 커피를 라바짜사의 로고가 새겨진 백에 담아 판매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것은 근대의 고유 상표 부착 판매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로고가 담긴 포장은 회사 상호의 인식과 갓 구워낸 커피라는 보증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자연히 생산자는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생산에 임하게 되었고, 이것은 라바짜사로 하여금 더욱 많은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브랜드 로열티를 창출하고, 수요를 증가시켰으며, 생산 범위를 확대시켰고, 배포와 상업 시스템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라바짜사는 극심한 경쟁과 상인들의 새로운 판매 시스템 개발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고 급속한 확장을 하게 되었다. 라바짜사는 토리노 외의 지역으로 그 판매망을 넓혔으며 커피가 바(bar)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하는 점을 고려하여 공급망을 넓히려고도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판매망은 이태리 전역으로 확장되었으며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견으로 라바짜사는 회사의 자본을 두 배로 확장하게 되었다. 1949년 라바짜사의 첫번째 지사가 밀라노(Milan)에 문을 열게 되었고 의욕에 가득찬 네 명의 직원이 그 곳에 파견 나가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8월, 루이지 라바짜는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Lavazza paradiso in tazza - 천국의 컵 -은 회사의 첫번째 슬로건으로 1950년 당시 TV가 없던 시대에 라디오나 신문 등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이태리는 산업화되어 그 발전 속도가 매우 빨랐으며, 임금 수준이 높아졌고 투자가 많았으며 인플래이션이 낮은 좋은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이태리의 인구는 4천 7백만 명에 달했으며 라바짜사는 1,900톤의 로스트 커피를 판매하였다. 또한 회사 내에서는 사원들간의 우정과 애사심이 매우 두터웠으며 이러한 것은 2년 후 50명의 대리인과 24명의 판매 허가자, 15개의 창고를 소유하게 되는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1954년에는 2,500톤이 넘는 로스트 커피가 판매되었고 이러한 판매량의 증가는 그 당시의 커피 흉작으로 인한 두 배가 넘는 커피 가격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1955년 2,800톤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1954년과 1955년 두 해는 회사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이 되었으며 이 해에 현재의 본사인 토리노에 위치한 코르소 노바라(Corso Novara)를 구입하게 되었다.
AN INDUSTRTY IS BORN
한편 라바짜사는 계속 성장을 하여 이태리의 가장 큰 로스트 커피 회사가 되었지만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회사의 팽창에 따른 인한 부적절한 관리, 회사 이미지의 상실, 과도한 부채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경쟁사와의 경쟁력도 저하시켜 확장을 멈추고 회사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고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보다는 보다 공격적이고 빠른, 앞서나가는 회사의 전략을 바탕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더욱 지배적이어서 라바짜사는 코르소(Corso)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며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회사 창설자이며 아버지인 루이지 라바짜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 가족들은 회사의 지분을 제 3자에게 양도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라바짜의 상속자들은 라바짜사에서 일하여야 하며 다른 경쟁사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도 관여할 수 없다고 가족들간의 동의도 있었다.
1957년에 가동을 하게 된 대규모의 코르소 노바라 공장은 기존의 수평적 공정이 아닌 건물 상하로 이동하는 수직적 공정 관리 체계를 도입해 기술적인 획을 긋는 대규모 로스트 커피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당시 이러한 생산 공정을 도입한 공장은 이태리 내에 없었으며 수직적 생산 공정은 그 효율성과 원가 절감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이 외에 라바짜사에서는 로스트 커피의 신선도를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진공 포장을 개발하여 오랜 기간의 저장과 운송을 가능하게 하여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이태리의 경제는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라바짜사는 이 시기에 회사의 광고의 필요성을 느껴 이태리인들에게 라바짜사의 새로운 사업, 신상품, 새로운 배포 방식, 서비스의 확대 등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 캠패인 활동을 벌였다. 1958년에는 아르만도 테스타(Armando Testa)와 동업 관계를 형성하여 I.B.C.(Instituto Brasiliero do Café)라는 커피의 최고 품질을 보증하는 인증을 획득하게 되었고, “폴리스타(Paulista)”라는 신상품을 선보이게 되었다. 라바짜-테스타의 동업 관계는 양측에 있어서 매우 이익이 되는 관계로 평가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폴리스타는 진공 포장되어 판매되었는데 이 것은 라바짜사로 하여금 새로운 영역의 시장을 점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총매출의 4%를 투자한 TV광고 캠패인도 폴리스타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60년에는 최초로 오토바(Autobar), 즉 밴에서 커피를 직접 판매하면서 홍보의 역할도 병행하는 판매전략을 이용하였으며 또한 디카페인(decaffein) 커피 공장을 본사 근방에 설립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1962년 들어 이태리에는 인플래이션과 경제 침체로 인해 모든 분야의 성장이 느렸으나 라바짜사는 계속해서 광고 활동을 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1965년에는 새로운 공장을 준공하였고, 700여 사원의 도움으로 8,000톤에 이르는 로스트 커피를 생산하였다. 1966년에는 무역 규제가 완화되어 커피의 수입이 용이하게 되었고, 1970년에는 급성장하는 이태리 식품업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유럽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이태리에 진출하였다.
1960년대 까지 라바짜사는 커피 업계의 선두로서 성장을 계속해왔으나 1970년 들어 1,000톤에 가까운 판매 감소가 있었다. 이러한 판매 감소는 경쟁사가 개발한 새로운 포장 용기로 인한 것이었으나 라바짜사는 곧 더욱 진보된 형태의 알루미늄 용기를 업계 최초로 선보여 경쟁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라바짜사는 계속해서 신상품을 개발하고 상업 전략망, 로고, 배포망 등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고 새로운 로스팅 생산 라인을 개발하는 등 회사 발전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THE MORE YOU DRINK...
1970년대의 경제는 각계각층의 유명인사의 납치와 테러로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을 맞았다. 따라서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라바짜사도 원자재 수입액의 50%에 달하는 금액을 이태리 은행에 예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커피의 흉작과 달러 환율의 변동으로 인한 그린 커피 즉 커피 원자재의 가격상승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가격상승은 2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6배에 달할 정도로 상승했으며 다행히도 1974년 가격상승이 멈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라바짜사로 하여금 커피의 품질을 저하시킨다든가 또는 이익율을 저하시키는 영향은 미치지 못했으며, 이태리 내부의 커피 소비의 감소로 라바짜사는 수출을 위한 조직의 재구성 및 재구축이 이루어졌다. 1977년 한 해에만 테러가 전 세계적으로 2,000여건에 달하는 등 좋지 않은 정치, 경제 상황으로 인해 라바짜사의 총매출은 16,400톤으로 감소하였다.
컬러 TV의 등장은 라바짜사에게도 이점이 되었다. 여러 유명 배우들의 등용을 통한 광고 캠패인은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결국엔 총매출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979년에는 26,100톤에 달하는 커피를 판매하게 되었다. 또한 에스프레소 문화의 국내외적인 확산을 위하여 라바짜사는 거액의 투자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홍보에의 투자는 1980년 이사회에서 라바짜사를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요인으로 결론지어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한편 시장의 성격도 상당히 변화하였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 전통적 커피 소매점의 감소와 대규모 수펴마켓의 등극 등은 생산자와 배포자의 경영전략에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1980년 들어 라바짜사는 커피 사업에 계속 충실하면서 차나 우유 등과 같은 음료 사업을 추진하여 사업의 다양화를 모색하였고 유럽과 그 외의 국외로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보여 1982년 파리의 외곽 지역에 첫번째의 종속회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태리의 경제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983년에 들어서야 커피의 소비가 전 년도에 비해 4%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바짜사는 타 회사에 비해 많은 시장을 점유하게 되어 더 큰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국외 시장의 침투에 있어서 기존의 다국적 대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85년 라바짜사는 경영진의 리더쉽을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사무실도 현대화하여 더 많은 발전의 틀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Crema e Gusto”라는 새로운 블랜드 커피의 시판은 1986년 이태리 시민의 커피 소비의30%에 달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라바짜사는 베니스시의 공식적인 후원자가 되었고 에밀리오 라바짜는 유럽 커피 협회(EUCA)의 회장직을 맡는 등 회사의 대외적인 입지를 한 층 높이게 되었다. 또한 세계 알파인 스키컵의 공식 후원자가 되어 회사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좋은 이미지를 남김으로서 대외 홍보에 있어서 매우 성공적인 경영 전략을 시행하였다.
DEVELOPMENT ABROAD
북미 대륙으로의 진출을 즈음하여 라바짜사에서는 1989년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 스키 챔피언쉽을 후원하였고, 1987년 독일에도 진출하였으며 다음해에 뉴욕과 비엔나에 첫 발을 디뎠다. 1988년 라바짜사는 최상급 “라바짜 클럽(Lavazza Club)”이라는 블랜드를 출시하고 피에드몬트(Piedmont)내의 커피바의 주공급원이었던 DL사를 인수하였다. 이러한 인수는 지방의 여러 작은 공급원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장을 점유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커피바를 그 주요 목표 시장으로 한 “톱 클래스(Top Class)”를 시판하였고, 코인카(Coinca)라는 바 블랜드 커피 생산업체를 인수하여 그 생산 라인을 내수와 수출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라바짜사의 전략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라바짜사는 소매와 식료품 분야 이외에 우노퍼(Unoper)사를 인수함으로써 자동판매기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인수 이후 라바짜사는 투자와 개발을 계속하여 커피의 맛과 향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에는 전통적 라바짜 생산품과 인수 회사의 시장 판매를 합하여 순이익이 천 2백만 달러를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투자와 발전은 계속되어 런던에도 진출하게 되었고 이태리 내수 시장의 느린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출의 성장으로 인해 1991년에는 70,000톤 이상의 커피가 거래되었다. 같은 해에 라바짜사는 다양한 회사로 구성되어 있는 아이파스(Aipas) 그룹을 인수하여 생산 공정의 수직 관계를 더욱 용이하게 하였고, 프랑스의 홀퍼(Holper)사도 인수하여 회사의 규모는 날로 커져만 갔다.
1992년 커피 거래량은 80,000톤에 달하였고 수출은 11.6%로 성장하여 총매출의 22%를 차지했으며 라바짜의 트래이드 마크는 유럽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50개의 상표 중 하나로 부상되었다.
1994년 백주년을 맞이한 라바짜사는 총매출이 6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이 중 수출의 비중이 26%였다. 순이익은 천 3백만 달러, 순자산은 2억 6천만 달러, 직접 고용인 1500명으로 엄청난 규모의 기업이 되었다. 공장은 모두 5군데에 있고 라바짜사의 “품질 관리 시스템”은 SGS-ICS에 의해 인증되었다. 이태리 내에서 라바짜사는 44%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해 최고의 커피 생산업체가 되었고,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의 에스프레소 분야에서도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하여 가장 인기 있는 커피가 되었다.
오늘날, 라바짜사는 로스트 커피의 생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회사 중의 하나로 이끌고있으며, 토리노의 세티모 공장은 커피 산업 분야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된 공장일 뿐만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공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1956년 창사이래 라바짜사의 자본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모두 그 가족에게 속해 있는 상태이다.
또한, 라바짜사는 새로운 제2세기를 맞이하여 블루(Blue)로고와 이미지(Segno Lavazza)를 바꾸며 젊은 수요층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있으며, 1일 평균 커피 생산량 340톤을 기록한 1996년 이태리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서며 새로운 시장으로의 영업에 박차를 가하며 세계인을 대상으로 라바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일에 많은 노력을 쏟고있다. 1998년에는 프랑스 월드컵의 공식 커피 및 후원사 였으며, 많은 문화사업에도 지원을 많이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설립한 트레이닝센터를 통한 바리스터 교육으로 완벽한 에스프레소를 즐길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오늘도 세계 각지의 커피원두 재배업체는 자신들이 생산한 커피를 라바짜사로 보내 테스트를 통과하여 사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