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죽음을 안전가옥 쇼-트 21
유재영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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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복수 혹은 사적 정의실현은 정당한가란 질문은 잠시 묻어두자. 죽어 마땅한 사람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죽여도 될까. 정당방위도, 법 집행도, 전시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일말의 찝찝함을 속여가면서까지도 이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옥상에서 밀었으면서도 증거나 증인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해도 처벌하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해도 처벌하지 못하고, 유부남이면서 미혼인 척 미혼 여성을 꼬드겨도 처벌하지 못하고… 법이 존재하지만 내밀한 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할 수 없거나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한 증거나 증인을 요구하는 때에는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삶이 그런거지라고 넘기기엔 피해자의 눈물이 가슴 아프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오은수는 물리적인 힘을 기르고 책략을 연구한다. 설희는 그런 오은수의 무대에 감응하고, 둘은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에서 유디트를 보고 홀로페르네스를 본다.

수혁은 작가이고 설희가 사서로 있는 도서관에서 강의를 진행하며 설희와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혁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설희는 그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설희는 한 때 사랑했던 이의 추악한 민낯을 보는 것이 괴로웠고 화가 났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를 깨달았다.

사적 복수는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내 원수가 죽어 자빠져 강을 따라 떠내려올 수 있는 건 누군가가 죽였기 때문이다. 자, 그 죽음은 누가 내릴 수 있는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유디트는 어떻게 내리쳤을까. 팔 근육은 어떻게 키웠고 어떤 칼을 사용했을까. 그보다도 아무리 악인이라도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을까.

지금도 수많은 유디트들이, 설희들이, 오은수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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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08 0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설희가 나오다니... 언젠가 다른 데서도 이 이름 본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언젠가 설희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지만 이름이 같아서, 이 책과 상관없이 조금 반갑기도 하네요

이수혁이 아주 나쁜 사람인가 싶기도 한데, 어떨지... 법이 있다 해도 벌을 주지 못하거나 주지 않을 때도 있군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희선

꼬마요정 2024-02-08 22:17   좋아요 1 | URL
오오 희선 님 어디선가 설희란 이름을 쓰셨군요? 설희란 이름 참 예쁘지 않나요? 저는 강경옥 님 만화에서 본 적 있어요.

이 책 얇지만 재미있게 봤어요. 살짝 스포하자면 이수혁이란 사람 참 추잡합니다. 사실, 법이 또 다른 피해자를 낳으면 안 되는 건 맞지만 때론 야속하기도 하네요. 부디 억울한 사람이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2024-02-08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8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2-09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곧 음력으로도 새해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까치 설날이네요 설날엔 추웠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그렇게 춥지 않겠습니다 이번 겨울 별로 춥지 않아서 벌써 깨어난 개구리도 있다고... 걱정되는군요 그 개구리 추위 왔을 때 죽지 않았을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개구리 작은데도 오래 살아요

꼬마요정 님 한번 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4-02-11 20:59   좋아요 1 | URL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엄청난 한파가 한 번씩 오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올 겨울은 평년기온이 높다고 하더라구요. 개구리가 부디 잘 살아남으면 좋겠습니다.ㅠㅠ 이상기후로 고통받는 생명체들이 많네요ㅠㅠ 인간이 잘못했는데 모두가 고통받습니다....

호시우행 2024-02-09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각 행세하면서 유부녀 따먹고도 멀쩡하게 오히려 상대 여배우를 마약쟁이로 몰고가며 뻔뻔하게 장기 재판으로 끌고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대방을 지치게 만들어 재판을 포기하게 만든 악질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 칩니다.이런 사기꾼이 대통령 후보까지 되는 나라, 이게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꼬마요정 2024-02-11 21:02   좋아요 0 | URL
뭐 정치판에 제대로 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ㅠㅠ 죽은 사람이 당선되기도 하고, 온 가족이 범죄를 저질러도 당선되기도 하고, 불륜을 저질러도 당선되기도 하고, 독재자의 딸이 당선되기도 하고, 가정폭력을 저질러도 후보가 되기도 하고, 인권변호사를 가장해도 후보가 되기도 하고, 허위 학력을 가져도 후보가 되기도 하고... 민주주의가 자리잡기가 참 힘든가 봅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질지도 모릅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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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의 조각이 어떻게 암살자 조각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10대의 그녀는 타고난 기민함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근육을 키우고 사람의 급소를 파악하며 순식간에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훈련을 받는다. 류는 때론 무자비하게 때론 무심하게 그녀를 대하며 아주 가끔 한 조각의 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 인간을 죽이기 전에는 살아나올 수 없고, 마주한 상대를 죽이기 전에는 방 밖을 나올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을 살아가야 할 삶을 선택한 그녀는 그렇게 조각이 되었다. 누구보다 냉철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법을 배우며 말이다. 일단 마음 먹고 칼을 집었으면 무얼 찔러야 할까. 이는 비단 조각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악연을 만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며 누군가에게 나쁜 기억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조각처럼 감정없이 순식간에 그 일들의 급소를 쳐 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살벌하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훈련을 하는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드는걸까. 아마 실제로 죽이거나 하는 장면이 안 나와서일지도 모른다. 작고 여린 그녀가 훈련을 하는데 어떻게 팔을 뻗고 어떻게 공간을 파악하는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그 훈련의 궤적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삶은 고독한 거라고. 


잠깐 엿본 삶의 한 조각이 씁쓸한 건 그녀가 선택한 삶이 외롭고 잘못된 길이어서일까, 선택할 길이 없어보여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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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06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조각처럼 살지는 않겠지요 어딘가에는 조각처럼 사는 사람이 있을지도... 누군가를 죽이는 삶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에 나오는 아오마메가 생각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2-07 23:00   좋아요 1 | URL
<1Q84>에 조각 같은 인물이 있나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흥미가 생기네요. 떠밀려서 조각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요? 슬픕니다ㅠㅠ

희선 2024-02-08 01:32   좋아요 1 | URL
아오마메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해요 그게 생각났네요 잊어버렸는데 그 일뿐 아니라 다른 일도 했더군요


희선

꼬마요정 2024-02-08 22:21   좋아요 1 | URL
<1Q84> 읽어보겠습니다!!^^
 
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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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여자 암살자. 소재가 너무 멋졌다. 책 초반에 나오는, 헬스장에 가면 트레이너가 이 연세에 이런 근육 어쩌고 저쩌고, 고객님(혹은 어머님) 연세의 다른 분들은 근육이 없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어서 안 간다고 하는 부분에서 울컥했다.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왔으니 그 때 60대 여자들은 자신의 근육을 만들 기회가 있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인 '조각'처럼 그런 직업을 갖지 않는 한 말이다. 반복되는 집안일이나 직장에서 하는 반복되는 노동, 출퇴근길에 하는 저강도 걷기는 근육을 키우는 데는 효과가 없다고 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젊을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고 단백질을 먹어주고 해야 유지할 수 있는 게 근육이니, 정말 흔하지 않았겠지.


냉장고에 덩그러니 들어있는 갈변한 채 뭉크러진 복숭아에서 시작됐다는 이 이야기는 생생하던 시절의 색을 잃고 탱탱한 속살은 질퍽거리게 되어도 신선의 과일이라는 복숭아는 그 의미를 잃지 않았다. 아무리 반짝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빛을 잃게 되듯이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서 젊음을 유지하는 건 없다. 하지만 젊지 않다고 하여, 빛나지 않는다고 하여 생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켜켜이 쌓은 시간이 한 인간의 감성을 피어나게 했다. 생명을 앗아가면서 사랑과 같은 감정을 가지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언제나 감춰야만 했던 감정의 파편들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강박사의 모습에서 과거의 류를 발견한 것일까.


어수선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들 속에서 조각은 과거의 자신이 한 일들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투우의 존재는 어쩌면 조각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보내야 했던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조각과 함께하는 무용은 행복했을 것이다. 활자들 사이에서 그 잔잔한 행복이 느껴졌다. 영화 <존 윅>의 시작은 개의 죽음이었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아 좋았고 따뜻했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작을지라도 따스한 온기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의 기억, 약속,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것.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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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06 0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오고 열해가 흘렀다니... 그때 읽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달라진 건 없을 듯합니다 지금은 60대를 그렇게 나이 든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지...


희선

꼬마요정 2024-02-07 23:10   좋아요 2 | URL
정말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저는 이제 읽었지만 희선 님은 벌써 10년 전에 읽으셨네요. 그래도 지금은 60대를 청춘이라고 하는 걸요. 주변에 60대 분들 예전에 비하면 다 젊어보이고 활동도 많이 하시더라구요. 저도 나이가 들어도 근육을 유지하고 싶어요^^

감은빛 2024-02-08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0대 여성 암살자라니, 정말 독특한 이야기일 것 같아요.
구병모 작가의 책은 아주 오래전에 한 두권 읽었던 것 같아요.
이 책과 그 뒤에 올리신 [파쇄]까지 같이 읽어보면 재밌겠네요.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4-02-08 22:25   좋아요 0 | URL
정말 독특한 소재였어요.
구병모 작가 책은 <파과>와 <파쇄>만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파과>와 <파쇄>가 감은빛 님 마음에 드시면 좋겠습니다^^

 
오피스 괴담 안전가옥 FIC-PICK 8
범유진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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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상용근로자든 일용근로자든 사업소득자든 어떤 이름이든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기도 하며 일정 경력을 쌓은 뒤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도 한다. 영업직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기술직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공무원이 되는 사람도 있고 자영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일까.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괴담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괴담으로만 볼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많았다.


첫번 째 이야기인 <오버타임 크리스마스>는 범유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수빈은 면접을 보러 간 회사에 큰 창문이 있고 팀장이 야근 절대 금지라고 해서 입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첫 출근날 보니 창문은 늘 잠겨있고, 야근은 뭐가 나온다고 하지 말라고 하며, 회사 싱크대에 가득한 설거지 때문에 여자를 뽑았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자신의 자리라고 준 책상 위에는 죽은 것 같은 선인장까지 있었고 로그아웃이 되지 않는 메신저가 있었다. 심지어 수빈을 제외한 회사 직원 7명은 모두 남자인데, 인플루언서 아리의 남자친구인 회사 대표의 지인들이었다. 그들은 오후 3시에 비싼 케이크를 간식으로 즐기면서 계약직인 수빈에게는 비싼 간식을 줄 수 없다고 따돌린다. 게다가 수빈이 기획안을 제출해서 일을 따 내려하자 치사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훼방을 놓고 팀장이란 놈은 싫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 귀 못알아먹고 더듬기나하는 그 놈에겐 케이크도 가당찮다. 반죽이나 되어버려라. 공모자들 모두 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모르고, 피해자는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피해자들이 위안을 얻으면 좋겠다.


두번 째 이야기는 최유안 작가의 <명주고택>이다. 고택은 옛스럽지만 고상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정갈하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데, 이번 괴담의 무대가 된다. 이 이야기는 오피스에서 일어나는 괴담은 아니지만 직장인이라면, 그 직장이 일반 회사든 학교든 관공서든 상관없이 겪을만한 압박감과 '집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납기 내에 일을 마무리해야 하고, 정해진 기간 내에 기획안을 제출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프레젠테이션을 해야만 하는 그 압박과 집착 말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압박 속에서 영혼마저 묶여버린 것은 아닐까. 죽어서도 해내야만 하는 일은 없을텐데 말이다. 일을 잘 하든, 관계가 좋든, 편견을 가지고 있든, 인맥에만 치중해서 일을 하든 상관없이 살아남지 못할 것인가. 고택으로 불어드는 스산한 바람이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세번 째 이야기는 김진영 작가의 <행복을 드립니다>이다. 코로나 기간 뿐 아니라 IMF 이후 늘어난 계약직은 늘 불안에 시달린다.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진짜 집이 없다는 불안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추운 겨울, 어린 나이에 진짜 집이 갖고 싶었던 아이들은 옷장 안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그 소망과 한이 가구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편화된 세상에서 나만이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일까. 하지만 개인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워야만 하는걸까. 그래서 개인은 또 다른 개인에게 그 짐을 떠넘기는 것일까. 더 이상 성장 동력이 없는 세상에서 회사라는 실체 없는 실체가 개인을 소모품으로 이용하고, 그 속에서 개인은 또 다른 약자를 찾아가는 것 같다. 윤미의 입장에서 그 개진상 고객보다는 경준 팀장이 더 미웠겠지. 아니면 더 만만하든지.


네번 째 이야기는 김혜영 작가의 <오피스 파파>이다.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민정이 안타까웠다.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민정은 폭력과 폭언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빠의 폭력을 피해 작은 광고 회사에 취직하였지만, 상사로 만난 강성필 팀장은 늘 민정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모욕을 줬다. 그러던 차 민정은 어느 쓰레기통 회사로 외근을 갔다가 쓰레기를 '소실'시켜주는 쓰레기통을 체험하게 된다. 주인이 쓰레기라고 인식하는 것을 '소실'시켜주는 쓰레기통이라니. 만지면 금이 되는 마이더스의 손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지만, 민정은 몰랐고 대가는 참혹했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 성취감을 기반으로 좀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을텐데 불행히도 민정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겨우 손에 넣은 평화는 봄이 오기 직전의 빙판 같기만 했다. 조급함과 불안함은 나쁜 선택의 지름길일까나.


다섯 번째 이야기는 전혜진 작가의 <컨베이어 리바이어던>이다.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았다. 계속 문제 되는 물류센터 직원들의 과로(사), 식품회사에서 일어난 절단 사고, 제조 회사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망 사고 등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걸까. 어쩌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 교묘해지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이란 구렁텅이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빚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곳에 매몰되어 흔적조차 없어질수도 있다. 누군가는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계 그 자체일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한 번의 실패가 생애 전체의 실패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붙들린 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사연일 것이고, 눈물일 것이다. 여전히 개개인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또 개개인들의 힘이 모이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좋겠다. 더 이상 이런 현실 같은 괴담이 퍼지지 않도록,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실체가 묻히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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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23 0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담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말하기도 하네요 거기에 괴담이라는 말을 넣은 것뿐이군요 한사람만 따돌리다니, 그런 일이 그때 한번이 아니었군요 때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걸 모르기도 하죠 늘 제대로 생각하려고 해야겠죠 누구나 가해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1-31 10:11   좋아요 1 | URL
정말 괴담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들이었어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 딱 맞는 것 같아요. 제대로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은빛 2024-01-24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현실을 담은 소설집인 것 같네요. 이런 글을 읽고 책을 안 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꼬마요정 2024-01-31 10:12   좋아요 0 | URL
정말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현실이에요. 귀신같이 약자를 알아보고 착취하는… 안타깝지만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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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무척이나 무모했던 것 같다. 초2 때, 키가 1미터가 조금 넘었는데 작아서인지 괴롭힘을 좀 당했었다. 내 기억으로 그 애는 아주 컸는데,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기에 나는 그 애에게 방과 후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결과는 웃프다고 해야하나. 처참하게 얻어 맞고 다음 날부터 나는 괴롭힘에서 해방되었다. 그 때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얻어 맞고 울고 돌아오자 그제야 심각함을 느꼈던 엄마가 학교에 갔으니까. 솔직히 심하게 맞았고, 그 남자애는 선생님께 혼났고, 사과를 받았는지 어떤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더 이상 나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이 일은 흑백영화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운동장 모래와 주변 아이들의 소음, 죽여라 외치던 내 목소리가. 20대 중반까지는 모든 걸 명확히 기억한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들이 희미해지거나 기억이 안 나거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그랬다. 그것은 성장의 한 부분일걸까. 모든 일들이 나를 자라게 했지만, 필연적으로 지워지고 마는 걸까.


첫번 째 이야기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를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자라게 한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일들이 남긴 감정들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어릴 때 저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던 것 같다. 나를 도와주는 건 나밖에 없다고. 그보다 더 어릴 때 엄마를 잃어버리고 어떤 언니의 도움으로 파출소에 가서 집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엄마를 찾았는데, 그 때 파출소에 있던 나보다 더 덩치 큰 남자애는 내가 집에 갈 때까지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울고만 있었다. 그렇다. 세상은 일단 내가 한 걸음 나아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는 걸 아주 조그마할 때 알았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내 인생이 막 도전적이고 그렇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한없이 힘들고 작아질 때 속절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었고, 결국 관계가 틀어졌다. 자라지 못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원했고, 그 누군가들은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도 안 도와준다고 그들을 원망했으니까. 여기 이 이야기의 알파와 오메가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성인식을 치를 때 하나로 합쳐진다면 어떨까. 반듯하고 모범적인 알파와 모나고 반항적인 오메가는 서로의 정체성을 잃기 싫어 성인식을 거부한다. 하지만 알파의 할머니는 그런 그들을 나무라지 않고 지켜봐준다. 때론 충고도 하면서. 십여 년을 다른 몸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건 어떤걸까. 지금은 좀 덜하지만, 사춘기 때를 돌이켜보면 하루에 마음이 수십 번도 바뀌고, 이상한 행동도 많이 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의욕적으로 공부하다가도 어떤 때는 세상이 나만 미워하는 것 같고 억울해했다. 그런 마음들은 따로가 아닌 모두 다 나의 마음들이었다. 이 알파와 오메가도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들을 다 겪고 받아들이며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들 역시 그러하리라.


두번 째 이야기는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이다. 아즈깔이란 풀이 있고, 이 풀 때문에 사람들은 '각성'을 하기 시작한다. 각성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모든 생과 살아갈 모든 생을 알게 되는데, 각성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바를 토대로 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선한 일'을 하는 것에는 큰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 '선한 일'이란 것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보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일까. 각성자들은 일어났던 일들과 일어날 일들을 아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행동은 정해진 것일까. '각성'이란 것은 '깨달음'과는 비슷하지만 달라 보였다. 결국은 그 인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일까. 그런 그들에게 '감정'은 무엇일까. 앞의 이야기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의 알파와 오메가처럼 수많은 삶을 살았고 살아갈 '나'는 결국 그 모든 삶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수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생각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 사람을 살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가 또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을 다 알 수 있다면,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각성'인 것일까.


세번 째 이야기는 <긴 예지>이다. 이 이야기는 <초월하는 세계의 사랑>에도 실렸던 단편이다. 효주는 '볼볼볼'이란 게임 때문에 센터로 가게 된다. 수많은 예지자들이 예지를 하게 되면 다수결처럼 우세한 예지가 미래가 된다고. 점점 예지자들의 예지는 세계의 종말을 향하고 있었고, 최초의 예지 인공지능 '레마'의 베타버전이 가동되려 하고 있었다. 레마의 예지는 중첩된 예지들의 최종본 같은 것이라 그것이 곧 미래라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효주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생각했고, 종말을 막기 위해 레마를 통해 과거의 삶들을 보려 했다. 과거가 있어서 현재가 있고 현재를 통해 미래가 구현된다는 건 3차원적인 생각일까. 사실 모든 시간은 다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그 시간을 재생하는 것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 재생 시점을 과거로 돌려 무언가를 바꾸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 바뀌는 무언가가 있을까.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나를 반성하고 바꾸면 미래도 바뀌는 건 아닐까. 나는 우주의 일부이자 하나의 우주이고, 내가 바뀌면 우주도 바뀌는 것일까.


네번 째 이야기는 <기도는 기적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는 <바우키스와 필레몬>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세상은 탐욕에 눈이 멀어 눈 앞에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메시아 유리가 나타난 건 그럴 때였다. 탐욕스러운 다국적 회사들은 석유든 무엇이든 자원을 추출하고, 바다를 오염시켰다. 개발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사람들은 땅과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정작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없앴다. 기록적인 폭우는 그렇게 이상기후라는 이름으로 찾아왔고,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고립된 사람들은 아기 '유리'에게서 희망을 보고 살아남았다. '기도하는 아기'라는 이름으로, 유리가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은 동영상은 세계 곳곳으로 퍼졌으나 그 뿐이었다. 그 후 유리는 '메시아 유리'가 되어 지극히 낮고 어려운 곳에 임했다. 하지만 '메시아'의 재림은 더 이상 기적이 될 수 없었다. 탐욕은 탐욕을 불렀고, 유리는 지쳤다. 그리고 마지막 내기에 응했다. 탐욕이 없는 곳이 있을까.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이 있을까. '신'은 단 한 사람의 한 순간의 선행으로도 지상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그 선행이 바로 '신'이 아니었을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이 기계의 먹이가 아니라 새로운 인류를 위해 요람의 인류를 만들었다는 것. 결국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요람 속의 인류를 만들었고, 그들은 가상 세계를 살아간다. '매기'라는 AI 혹은 시스템이 '요람 안 인간'을 '키우고', 레오처럼 '세계를 의심하고 세계를 부순 자'는 요람을 나갈 수 있다. '혜경'은 어느 날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는다. 전자적인 방법이 아닌 어딘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 편지를 쓴 이는 '승용'이다. 혜경이 처음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요람 밖을 기억하는 그 존재는 매기 안에서 '승용'을 보았고 '승용'에게 이입됐으며, 급기야 '승용'이 되었다. '승용'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탐구했다. 그 욕망이, 그 생각이 '나'의 것인지, 알고리즘화 되어 세뇌된 것인지, 혜경이 불어넣은 것인지... 내가 가진 욕망은 나의 것일까. 작가는 나의 생각과 욕망이 정말 오직 나로부터 비롯한 고유한 것일까 자문했다고 한다. 정말 나의 욕망은 오롯이 나의 것일까. 나의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람은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앞선 사람들의 생각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동물들이나 길에 핀 꽃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처음부터 처음인 생각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마지막일 생각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면 결국 모든 것은 모두로부터 기인하면서 오롯이 나로부터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주가 나이고 내가 우주가 되는 것일까. 나를 깨닫게 해 줄 '검은 개'는 어디 있을까.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야 가장 밝은 시간을 만날 수 있고, 해가 지면 밤이 오고 다시 새벽이 오는 법이다.

각성자들이 이생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깨고 구태어 누군가를 돕는 것, 그리고 때로는 명백히 도울 만한 관계의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86

우리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 P278

매기를 다루는 방식을 사고와 신경을 조작하는 원천 기술로 사용하는 인간은, 또한 종이 가진 신체 매커니즘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중일까요?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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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22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깨달으시다니... 저는 그런 생각은 못했지만, 혼자 하려고 했던 것 같군요 자신은 자신밖에 구하지 못한다는 말은 나중에 안 듯해요 그래도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살면 좋겠네요 여전히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한 적 없고 어른이 아니다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그냥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자신이 생각하는 거여도 그게 다 자신이 생각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1-22 16:12   좋아요 1 | URL
어릴 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사실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 싶었는데 부모님이 화를 많이 내셔서 저희집 삼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했어요. 그것도 좋아요, 지금 삼남매 사이가 정말 좋거든요. ㅎㅎㅎ 어른이 되었다는 건,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죠. 미성년자일 때는 강매를 당해도 벗어날 수 있었는데, 대학을 가니까 제가 계약한 건 유효하더라구요. 갓 신입생 때 뭐 모르고 무슨 영어교재 강매 당한 거 진짜 겨우 해지한 기억이 납니다. 정말 무서웠어요ㅠㅠ 그 때 저 혼자 하다하다 못해서 아빠가 해 주셨는데, 엄청 혼났어요. 엄마가 어찌나 뭐라하시던지... 그래서 부모님께 안 알리고 해결하고 싶었더랬죠. 울타리가 있으면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어른이 되기 좀 더 쉬울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거여도 다 자신이 생각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