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뷰 - 제1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우신영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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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메운 땅, 수많은 유물을 덮어버리고 높은 건물들을 지은 강남처럼 수많은 생명들을 덮어버리고 만든 도시. 그 곳은 화려하고 잘 짜여진 고급 태피스트리 혹은 휘황찬란한 샹들리제 같은 곳이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달빛을 가리고 공포를 이겨내는 탐욕을 쌓아가다 마침내는 가슴 내밀한 곳에 숨겨진 욕망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곳이라고나 할까.


처음부터 그런 곳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 로펌 대표 변호사이자 IMF 때 망한 부동산을 사들여 돈을 번 아버지와 무용을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우아한 어머니를 둔 수미 같은 사람. 그녀는 발레를 전공했고, 유학을 다녀왔으며, 지금은 의사 사모님으로 자신의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한다. 돈 걱정은 해 본 적도 없고, 할 일도 없을 사람. 오로지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한 사람. 자신의 지위, 자신의 재력, 자신의 외모가 자신감의 전부인 사람. 


수미의 남편은 섬에서 나고 자란 가난한 의대생이었다가 어엿한 의사가 된 석진이다. 그는 남자 신데렐라였다. 대형병원에서 솜씨 좋게 내시경을 하다가 처가의 재산 수억을 들여 자신의 병원을 개원한 남자. 등산을 즐겼고 탈모를 걱정하며 적당히 자신의 일 외의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 적당히 책임감 또는 죄책감이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두는 그런 사람. 하지만 가진 것이 부담스러워 적당히 자신을 낮추기도 하는 사람.


그에 반해 유화나 주니는 애초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유화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었고, 주니는 헬스장에서 회원들의 퍼스널 트레이닝(P.T)을 해주는 헬스 트레이너였다. 그런 그들이 모두 함께 살며 욕망을 불태우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화나 주니가 자신들의 처지를 달가워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처럼 수미는 '산다는 것의 맨얼굴'을 견디지 못했다.(p.216) 누군가의 삶이 수미에게는 견디기 힘든 맨얼굴인 것이다. 하지만 온갖 시술과 성형과 마사지와 운동으로 만든 몸은 '늙음'을 유예했을 뿐 없애지 못했다. 심지어 과도한 다이어트 및 운동 강박으로 인한 체지방 부족으로 폐경이 빨리 오고 갱년기가 빨리 찾아왔다. 수미는 자신의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젊은 남자의 생기를 빨아들인다고 젊음이 찾아질까. 


그에 반해 석진은 자신의 욕망을 유화에게서 보았다. 어딘지 자신과 닮은 듯한, 아니 자신이 내려다 볼 수 있는 처지의 여자. 가짜 산을 타는 그와는 다르게 진짜 빌딩을 타다 추락한 남자를 연인으로 둔 여자.


이들은 모두 '몸'으로 먹고 살면서 너무 달랐다. 수미와 석진은 몸으로 부와 명예를 얻었으니 몸을 잃으면 시선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유화와 주니는 몸을 잃으면 말 그대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자체가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강박과 취향이 한끗 차이라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한지 무서웠다. 출산을 위해 병원을 갈 때에도 힐을 신고, 가슴 성형을 하러 갈 때에도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레깅스를 입고, 가슴 마사지를 할 때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는 그 강박. 남에게 남보다 잘나보여야 하는 그 강박. 도대체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수미는 보여지는 몸을 위해 단 것을 멀리했지만 석진의 어머니는 먹지 못해 먹을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마침내 마음껏 단 것을 먹게 된 그녀는 마치 이 도시의 또 다른 면인 것만 같았다. 유화가 면도날을 삼키게 된 이유처럼, 공장 견학 때 철저하게 소독된 공간만을 보여주고 진짜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비위생과 냉방 때문에 철저하게 숨기는 것같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문득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에. 한가한 일요일 오후, 날은 춥지만 방은 따뜻하고, 고양이들이 옆에서, 발치에서, 머리맡에서 골골거리며 잠들어 있고, 좋아하는 원두로 내린 커피와 달콤한 롤케익 한 조각을 두고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석진은 자신이 꿈꾸었던 궁전에 대해 생각했다. 최고급 대리석이 깔린 미진 내과,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우아미 필라테스. - P228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수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선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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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1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어요, 꼬마요정 님. 책 읽기 전에 일단 꼬마요정 님 리뷰를 읽었습니다.훗.

꼬마요정 2024-10-22 01:10   좋아요 0 | URL
사셨군요. 다락방 님이 풀어주실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여기… 순대국밥 나와요. 연변 순대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먹어보고 싶습니다!!^^

희선 2024-10-22 0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2024년에 상을 두 가지나 받았군요 어린이문학상인 황금도깨비상과 혼불문학상... 작가는 2024년 잊지 못하겠네요 꼬마요정 님은 책을 보는 그 시간이 좋으셨군요 커피와 롤케이크 그리고 고양이가 있어서...


희선

꼬마요정 2024-10-23 23:39   좋아요 1 | URL
작가가 상을 두 개나 받았군요. 정말 2024년을 잊지 못할 듯 합니다. 저 책 읽다가 갑자기 문득 저들은 행복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저런 궁전 같은 집은 아니어도 책과 커피와 고양이가 있는 제 집이 무척이나 좋고 거기 있는 자체가 행복하더라구요. 참 좋았습니다.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
쥘리앙 보브로프 지음, 김희라 옮김, 이재일 감수 / 북스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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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책을 샀을까? 양자물리에 대해 알아서 뭐에 쓰려고? 사실은 정말로 이 책을 읽으면 수식 없이 술술 양자물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샀다. 그렇다. 나는 제목에 낚였다. 순진한 사람 같으니... 양자물리를 술술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양자물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구만. 내가 '술술' 이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사전도 찾아봤다. 내가 알던 뜻이 맞았다. 막힘없이 잘 나오든, 풀리든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이해는 못하겠는데 재미있는 그런 요상한 책이었다. 처음에 영화를 이야기 하다가 전자를 말한다. 전자는 희뿌연 구름 모양으로 보이지만 카메라로 찍으면 선명한 점을 볼 수 있다. 측정하기 전에는 희뿌연 구름 모양이지만 측정하는 순간 점 모양의 전자를 볼 수 있다. 계속 셔터를 누르면 위치는 바뀌어 있지만 점을 볼 수 있다. 이 사진들을 모두 겹치면 구름 모양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전자는 양자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파동함수' 개념도 알고 있으니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아니까. 그래서 웃으면서 이 정도면 나도 제법 잘 이해할 수 있겠는데 싶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1장의 내용이다. 그리고 2장에는 수식이 잠깐 나온다. 나는 알지 못하는 이 이상한 암호가 바로 슈뢰딩거 방정식이었다. 복잡한 수식을 통해 파동함수(ψ,프시)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아인슈타인은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파동함수는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없고, 최종 단계인 측정에서 우연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자의 에너지 값을 정하고 입자가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계산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값은 이후 실험을 통해 완벽히 확인된다(p.43)고 한다. 얻고자 하는 것을 잘 선택한다면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자나 원자 같은 양자적 개체는 측정되지 않는다면 파동처럼 움직인다. 이 입자 중 하나를 작은 상자에 몰아넣는다. 2022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윌슨 호 교수 연구팀은 이것을 실험했다. 금 원자를 검출해서 20개의 금 원자를 정렬해 서로 밀착시켰다. 물론 모든 과정은 극저온, 초고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이 만든 원자들의 나란한 줄은 완벽한 양자 상자다. 이 양자 상자 안에서 전자들의 속도를 측정했더니 측정치가 한정되어 있었다. 전자들은 파동처럼 생각해야 하고, 그것들은 특정한 형태만 취할 수 있으므로 특정한 속도만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양자화(quantification)이다. 상자 안에 갇힌 양자 입자는 '양자화'되고, 정확하고 구별된 값의 에너지만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즉 불연속적인 세계인 것이다. 이들 사이에 중간은 없다. 음악으로 치면 반음계가 없는 것이다. 


4장은 원자를 그려보고자 한다. 처음엔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수소 원자도 흐릿한 구름 형태로 그려지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그림들은 입체파 그림들 같다. 피카소가 떠올랐다. 


5장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한다. 원자 차원의 크기를 가진 물질을 측정할 때 위치를 알면 속도를 알 수 없고 속도를 알면 위치를 알 수 없는 원리다. 이 원리에 따르면 측정 순서가 중요한데, 측정은 사건들의 시간 순서에 영향을 받는 듯 하다고 한다. 이 원리가 현실 세계에 작동하는 것들이 있는데, 천체물리학에서 태양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태양은 생의 마지막에 온도가 낮아지고 중력이 우세해지면 스스로 붕괴할 것이고, 블랙홀이나 중성자별로 생을 끝낼 수도 있지만,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 태양의 경우 내부 압력이 충분해서(공간이 줄어들면 각 전자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 전자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벽을 밀어낼 정도는 된다고) 백색 왜성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르면 진공은 비어있지 않은 상태라고.


6장은 터널 효과를 설명한다. 입자가 에너지를 충분히 가지면 어려움 없이 장애물을 통과한다. 그런데 파동함수 일부는 장벽을 통과하고 일부는 튕겨 나온다. 파동함수가 둘로 나뉠 때 일부는 벽을 통과하고 일부는 튕겨 나오는데, 이는 입자가 둘로 나뉘는 게 아니라 입자는 측정되면 때로는 왼쪽에 때로는 오른쪽에 물질화되어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양자 입자가 가볍고 바르면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터널 효과'라고 하는데, 이는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마법 세계로 가기 위해 킹스크로스역 9번 플랫폼 벽을 향해 돌진하면 벽이 열리고 다른 세계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양자 세계에서라면 해리가 한 번은 통과하지만 한 번은 벽에 부딪혀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다. 이 터널 효과를 적용한 사례 중 하나가 터널 효과 현미경이다. 원자를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최초의 도구이다.


이 터널 효과를 이용한 도구의 쾌거를 알리기 위해 2017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가 세계 최초 나노 자동차 경주 대회를 조직했다. 이 대회에는 전세계에서 6개의 팀이 참가했다. 그들의 목표는 100나노키터 길이의 트랙을 가장 빨리 달리는 것이다. 이런 대회에 참가한 나라는 미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일본, 오스트리아라고. 이 대회의 우승자는 스위스 바젤 대학교 팀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대회에 참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초 과학이 발전하고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결국 모든 것은 기초에서 시작하니까.


그 뒤로 측정과 결잃음, 상태의 중첩, 얽힘을 설명하고 구별 불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페르미온 기체와 보손 기체를 설명하고 초전도성과 양자 컴퓨터를 설명한다. 


양자 측정은 여전히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모양이다. 가장 유명한 이론이 코펜하겐 해석과 파일럿파 해석, 다세계 해석이라고. 과학의 목표는 무엇보다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것이지 반드시 '왜'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p.134)


파동은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며 중첩 상태를 유지하는데 측정하려고 하면 간섭무늬가 보이고 정확히 어디를 통과했는지 확률로만 알 수 있다. 중첩 상태를 보호하려면 측정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나온다. 내 생각에 이 고양이 너무 불쌍하다. 나는 이 실험 반대요!!(물론 직접 실험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전자 두 개를 준비하자. 두 전자의 스핀이 반대가 되도록(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하면 두 스핀의 합은 0이고 두 전자가 연결되어 있는 한은 이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이 둘의 운명은 얽혔다. 미래에 한 스핀이 위를 항하면 다른 스핀은 반드시 아래를 향한다. 이 두 전자가 분리되어 있어도 얽혀있다. 이 전자를 다른 두 지점으로 보낸 뒤 한 전자의 스핀이 아래를 향한 것을 보면 반드시 다른 스핀은 위를 향하게 된다. 이 양자 얽힘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많은 시도를 했고, 나는 길을 잃었다. 양자 얽힘은 진짜였고, 나는 차라리 둘이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말하는 게 더 이해하기 쉽다고 느꼈다. 


아인슈타인은 두 입자가 멀리서 즉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 얽힘은 실재했고, 아인슈타인이 틀렸다. 얽힘에 관한 실험은 양자물리학이 '국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입자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다른 입자의 영향을 즉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별 불가능성은 입자들을 구별할 수 없도록 한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이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으니 이 입자가 이 입자인지 저 입자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보손은 정수이고 대칭적이며 페르미온은 반정수이고 반대칭적이다. 보손은 모여 있기 좋아하고 페르미온은 혼자 있기를(배타 원리) 좋아한다. 수소 원자는 전자 1개와, 쿼크 3개로 이뤄진 양성자 1개를 포함한다. 1/2스핀인 입자가 총 4개인데, 스핀의 총합은 반드시 정수이다. 그러므로 수소는 보손이다. 질소 원자는 1/2스핀인 기본 입자가 49개이며, 스핀의 총합은 반정수이다. 그러므로 질소는 페르미온이다. 모든 자료를 주고 더하기만 하는 거라면 나도 보손인지 페르미온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놀랍다.


이제 거의 다왔다. 보손 기체와 페르미온 기체를 지나 초전도성까지 왔다. 그리고 이는 양자컴퓨터로 연결된다. 나는 이미 길을 잃었으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초전도체가 어째서 나오기 힘든지 그게 상용화 된다면 얼마나 강력할 지는 알 수 있었다. 극저온이 아닌 상온에서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양자컴퓨터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지만 그만큼 많은 복제가 필요해서 여전히 사용하기 힘들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길을 잃었다. 차분히 계단을 밟아 올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계단이 끊기고 공간을 날아야 했다. 나는 고체라 기체로 승화할 에너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밑으로 떨어질 수도 없고 도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가상의 벽을 만들어 뚫기로 했다. 어떻게? 그냥 벽이 있다고 상상하기로 했다. 양자 세계라면 두 번에 한 번은 벽이 생기고, 두 번에 한 번은 벽을 뚫을 수 있겠지 싶어서.


양자물리학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다만 우리가 몰라서 모를 뿐이다. 이 마법 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텐데. 어렵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이제 나도 조금은 양자물리학을 알지 않을까. 



  



사실 내가 양자물리학에 반한 이유는 이 학문이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행으로의 초대‘다. 이 학문은 우리에게 특이한 산책을 제안한다. 마치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의 벽을 통과할 때 발견하는 마법 세계의 방식처럼 양자물리학은 모든 게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마력의 세계, 준엄하고 일관적이지만 완전히 엉뚱한 새로운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제시한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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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니 케이스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페르디난트 폰 쉬라흐 지음, 편영수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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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더 이상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필연적으로 사적제재 혹은 사적복수가 나타나지 않을까.


베를린에 있는 아들론 호텔 스위트룸 404호에서 한스 마이어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한스 마이어를 살해한 사람은 파브리치오 마리아 콜리니. 그는 마이어 회장을 총으로 쏘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발로 걷어차 뭉개버렸다. 잔인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콜리니는 자수했다.


라이넨은 변호사 자격증을 막 따낸 신참 변호사로 콜리니 사건을 맡게 되었다. 과거 마이어 회장과 친했던 그는 사건을 맡지 않으려 했지만, 변호사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로 이 사건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절대 살해 동기를 말하지 않던 콜리니에게 지쳐가던 라이넨은 그가 범행도구로 사용한 발터 P38을 보고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발터 P38은 루거를 대체한 나치의 총이었다.


우리나라도 친일매국노들을 다 처벌하지 못했다. 독일 역시 나치 부역자들을 다 처벌하지 못했다. '질서위반법 시행령' 때문이었다. 나치 범죄에서 나치 조력자들에겐 공소시효가 적용되었다. 콜리니는 한스 마이어를 법정에서 단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적 복수를 선택했다. 


콜리니는 아주 긴 세월을 기다렸다. 콜리니가 억울한 피해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한스 마이어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다. 그의 명예를 추락시키기 위해서, 그의 죄를 온 세상에 밝히기 위해서 콜리니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손에 피를 묻혔다. 법은 이 사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 법에 호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작가가 나치 부역자의 손자이기에 라이넨의 고뇌가 더 와닿았다. 이야기 속 라이넨은 한스 마이어의 손자는 아니지만 손자라고 해도 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그가 한스 마이어의 죄상을 법정에서 낱낱이 밝히는 장면은 작가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작가는 나치가 저지른 범죄, 홀로코스트라는 죄를 안고 태어난 독일인들의 과거 청산 딜레마를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냈다. 그렇게 전범국들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는 잊히지 않고 전해진다.   

"드러 법은 사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을 위한 소름끼치는 사면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법을 간단하게 다시 폐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법치국가의 기본원칙입니다. 범행이 공소 시효의 적용을 받으면, 그 판결은 절대 번복될 수 없습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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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9-27 0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이런 소설 쓰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썼네요 일본 사람이 쓴 소설에도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처럼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희선

꼬마요정 2024-09-30 00:11   좋아요 1 | URL
이 이야기가 실화 바탕이라는 게 놀라웠답니다. 그래서인지 더 비극적이었어요. 일본 사람이 쓴 소설에도 이런 느낌이 나는 게 있나 보네요. 일본 역시 전범 국가라 비슷할 수 있겠네요. 이런 소설 쓰기 힘들었을 거예요. ㅠㅠ

감은빛 2024-09-27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나치 부역자의 손자이군요.

국가, 권력, 폭력, 복수, 정의 등 고민할 일들은 언제나 많죠.
법치국가에서도 황당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죠.

저는 경찰들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용역 깡패들에게 맞은 적이 많고,
제 동료 활동가들은 심지어 맞아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만,
단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경찰이 용역깡패들을 현장에서 체포하는 경우는 못 봤습니다.
우리가 저 깡패들을 폭력 현행범으로 체포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무대응, 무표정으로 일관하더라구요.
우리가 당신들 월급주는 시민이라고, 저들을 체포하라고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평화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우리를 체포해서 가두더라구요.

꼬마요정 2024-09-30 00:18   좋아요 0 | URL
법치국가에서도 어이없고 억울한 일들이 많네요ㅜㅜ 용역 깡패는 저 유신 시대나 군부 독재 시대에나 있을 것 같지만 언제나 권력이 편하게 쓰는 도구가 된 것 같습니다. 감은빛 님 고생 많으셨어요ㅠㅠ

예전에 집회 나갔을 때 버스가 차벽 만드니까 정말 무섭던데 감은빛 님 존경합니다. 폭력에 저항하는 거 어려워요ㅠㅠ

언제쯤 저런 용역 깡패나 권력의 시녀들이 사라지고 시민들이 정부나 기업과 평화롭게 대화할 수 있게 될까요ㅜㅜ
 
박해로 오컬트 포크 호러
박해로 지음 / 북오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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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호러'는 호러의 서브 장르 중 하나이다. 민속이나 지역 전통문화를 광신적으로 믿는 폐쇄적인 집단이 광기로 극을 이끌어 간다고 한다. 거기에 오컬트까지 가미되면 민속 신앙의 주술이나 유령 같은 영적 현상은 그 광신적인 집단을 휘두르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영적 현상에 매달려 살아가게 된다. 


여기, 섭주가 그런 곳이다. 작가가 창조한 도시인 이 곳은 마천루가 즐비하고 야경이 사라지지 않으며 빠르게 돌아가는 그런 도시가 아니다. 이 곳에는 늘 지켜보는 눈이 있고, 조용하면서 음침한 이웃이 있고, 알 수 없는 규칙들이 있다. 


이 곳 섭주에는 터주신이 있다. 그 신은 악신일까. 그 신은 자신이 숭배받기 위해 사람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폐쇄적인 곳에서는 목소리가 나오기 힘들다. 간혹 의문을 표하거나 규칙을 어기면 어느새 생을 마감하게 되거나 악귀가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까.


조선시대 때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 며느리의 삶은 얼마나 척박했을까. 정조를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싸운 것은 어느새 독하고 못된 행실로 변해 버린다. 그저 며느리 배에서 아이가 나오면 되는 것일까. 핏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어이가 없어질 즈음이면, 저주 받은 그 별당이 가진 가슴 아픈 사연을 알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부모와 시부모에게 휘둘리던 그녀는 얼마나 갑갑하고 억울했을까. 그래서 서양에서 마녀로 재판 받고 억울하게 죽은 그녀와 감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죽은 뒤 열녀비가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 열녀비는 열녀 본인에게 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마지막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당에게 찍혀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형과 형의 희생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동생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염전이나 어딘가에서 진짜 있을 법하기도 한 이 이야기를 보다보면 저 악독한 무당에게 얼른 신벌이든 천벌이든 내리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왜곡된 신앙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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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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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만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있다면, 나는 그 장치를 사용할까? 이런 장치가 있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을 진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늘 노을이 진 모습을 볼 수 있고, 야외 수영장이 딸린 집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 마당에 수영장이 있는 것처럼 꾸밀 수도 있다. 집 벽지 색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음식의 색을 더 선명하게 바꿀 수도 있다. 실제 대통령은 누구인데 내가 보는 세상 속 대통령은 내가 지지하던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다. 자신의 주름이 싫다면 피부과를 가는 대신에 남들이 자신을 더 젊고 머리숱도 풍성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 마치 핸드폰에서 사진을 찍을 때 필터를 씌우는 것처럼 말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냈다. 과연 이런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아니면 모래성일까. 지금도 알고리즘이 나를 확증편향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데, 저런 세상에서 나의 선호는 과연 정말로 내가 원하던 바가 맞을까? 하지만 내용 중에 이거 하나는 갖고 싶은 능력이었다. 무장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나를 경호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 어떤 세상이든 약자에게만 강해지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첫 번째 이야기가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세상의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이야기인 <당신은 뜨거운 별에>는 한 개인이 개인적인 친밀감과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교묘하게 숨겨진 거대 기업의 만행을 세상에 까발리는 내용이다. 물론 통신이 끊긴 상황에서 우주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대적 고독의 순간은 덤이고 말이다. 거창하게 인류를 위한다거나 대의를 위해서라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저당잡힌 채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에, 자신의 선택마저 자신의 의지가 아닐 거라는 두려움에서 우러나온 구조 요청이었다. 개인은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 앞에 늘 불리하기 마련이다. 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성 탐사를 위해서는 탄산음료 회사와 무인 자동차 회사 중 한 군데를 선택해야만 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유인 우주탐사 계획은 동력을 잃었고, 미국 항공우주국은 민영화된 뒤 부문별로 분리되어 탄산음료 회사와 무인 자동차 회사에 팔렸기 때문이다. 기업은 기업윤리보다는 이윤극대화를 더 좋아하기에 비인간적인 비용 절감을 승인했다. 그 비용 절감의 방식 때문에 수정은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한 딸인 마리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순간, 세상에 혼자만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겪어내며 수정은 딸인 마리를 생각했다. 늘 자신의 관점에서만 마리를 보았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리는 수정의 메시지를 이해했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고, 엄마를 구하기로 했다. 지독한 고독의 순간, 수정은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리만큼 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던 마리를 떠올리며 힘차게 달린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자, 서로를 구원하는 존재이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생각나게 했다.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내용일까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이히만 재판 다음해인 196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 박사가 기억 세포인 '디그램 세포'를 발견하고 그 작동원리를 규명했다. 이 디그램 세포로 만든 체험기계는 대상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기계였고, 알래스카 내의 이스라엘, 미국 내 유대인들의 자치구인 앵커리지에 아이히만과 체험기계를 취재하기 위해 선별된 기자들이 도착했다. 아이히만의 동의 아래 나치에게 탄압 받은 유대인 한 명을 선발해 그의 기억을 아이히만에게, 아이히만의 기억을 선발한 그 유대인에게 이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발된 유대인은 에밀 벤야민으로 그는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와 딸을 잃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체험하는 건 어떨까.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같은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느끼는 바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죽을만큼 힘들고 아팠다는 경험을 그대로 이식받는 건 형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은 개인 본연의 것이니까. 역지사지도 정도껏이지, 이 정도의 극공감이 결코 좋게 보여지지만은 않았다. 


때론 범죄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전부를 이식하는 건 피해자에게 또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히만이 벤야민의 기억을 이식받으며 느낀 고통은 본인이 겪은 고통보다 클까, 적을까. 가해자가 나도 죽을만큼 힘들었다고 한다면 피해자의 고통은 상쇄되는 것일까. 또한 가해자의 고통을 이식받은 피해자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을 더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네 번째 이야기인 <나무가 됩시다>는 짧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예전에 광합성 인간을 이야기한 소설이 있었다. 결국 빙하기가 와서 광합성 인간들은 광합성을 할 수 없어 죽었다로 끝난 이야기였다. 다행히 이 이야기에서는 대안들이 있었고, 빙하기도 오지 않아 괜찮아 보였다. 나무가 되면, 다이어트 걱정은 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인간이란 참 쓸데없고 헛된 걱정, 망상을 하며 쓸모있고 실재하는 생명체들을 괴롭히는 존재인가 보다. 그나마 기술이 발전하여 그런 인간의 행동을 줄일 수 있다면 이건 좋은 방향으로의 미래가 아닌가 싶다.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어쩌면 누구나 겪을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내가 중학생 때 처음 캔커피를 마셨는데, 그 날 밤을 꼬박 샜더랬다. 그 뒤로 카페인 신봉자가 되었다. 이제는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 잠들 수 있다. 처음 커피를 마시고 한동안 커피는 최고의 각성제였다. 집중도 잘 되고, 잠도 안 오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효과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난 커피의 노예가 되었다. 기생충이 뇌를 조종한다는 헤어밴드는 각성제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인간은 어째서 스스로의 힘으로 뇌를 완전히 동원하지 못할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뇌가 활성화 되어 모든 인간이 뇌를 완전히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사람은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었을 때에야 진정으로 자신이 해낸 것이라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과 끈기 있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헤어밴드가 뇌를 자극하여 써낸 글은 누구의 글일까?


<아스타틴>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 <햄릿>, <멕베스>, <리어왕>의 글귀들을 인용했다. 진짜 이름이 없어 원소의 주기율표에 따라 란타넘족 원소로 이름 지어진 아스타틴 후보들은 서로가 남매인 동시에 경쟁자이면서 부활을 기다리는 자로 시민이 아닌 자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아스타틴은 시대정신이었다가 독재자였다가 초지능을 얻은 자이다. 아스타틴은 DNA 복제로 만들어진 후보들 중 하나를 정해 부활 기계에서 아스타틴머신과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기억과 경험이 이식되면 그는 이전과 동일한 존재인가 하는 철학적 의문이 남지만, 이곳 목성권과 토성권에서는 사회적 부활로 인정된다. 뇌와 새로운 육체가 부활하면서 그는 여전히 아스타틴이다. 


아스타틴 후보이자 부활 대상자인 사마륨은 남다른 행보를 했다. 마치 만들어질 때 케첩 한 방울이라도 맞은 것마냥. 자신의 유전자에 딱 맞춰진 에오스를 만나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왕좌(아스타틴좌)를 두고 형제자매들과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지만 그는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인간은 감정들로 이성을 마비시킨 후 몰락한다. 질투에 눈이 먼 오셀로는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였다.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삼촌의 범죄를 인지한 햄릿은 머뭇거리다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 마녀의 예언으로 가슴 속에 자리한 탐욕을 분출한 뒤 타락한 멕베스는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온 맥더프에게 죽임 당한다. 아첨을 좋아하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 진심을 보지 못한 리어 왕은 온갖 모욕을 당한 끝에 사랑하는 딸 코넬리아를 지키지도 못하고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간다. 같은 유전자여도 경험은 개별적이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감정 또한 제각각이다. 초지능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이 개별적인 경험으로 얻은 것들은 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마륨에게 기회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움'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적막한 우주의 공허함을 헤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까.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기술 발전이 별점이나 사주점의 자리마저 빼앗은 것만 같은 이야기이다. 오늘의 운세나 델포이 신탁이나 사주, 혹은 MBTI로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형태나 예측 분석 알고리즘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고 만나는 형태나 다를 게 무엇일까. 너는 양자리니까, 너는 INFP니까 이렇게 행동할 거고 결국 우리는 안 맞을거라고 말하는 것과 예측 분석 알고리즘에 따르면 너랑은 오년 이상 만날 확률이 10%라고 결국 우리는 안 맞을거라고 말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마치 신탁의 저주처럼 그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어떤 행동이든 결론을 정해두지 않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믿어줄 부분은 믿어주고 고칠 부분은 고쳐가며 상대를 만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는 어떠하니까 반드시 이럴 것이라고 결과를 정해버리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확장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할 다른 무한한 경험들과 기쁨들을 미리 차단한 채 하나의 결론만으로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면 너무 불행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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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9-24 0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더 안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9-25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이런 세상은 너무 왜곡된 세상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일테니까요. 과학 기술이 사람을 어디로 어떻게 데려갈 지 무섭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