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안전가옥 오리지널 27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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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예전에 커다란 곰인형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 곰인형은 나만큼이나 컸고(물론 나보다 작았지만) 냥이들이 머리를 베고 잘 수 있게 다리를 내 주는 듬직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세탁기에도 들어가지 않아 더러운 채로 방 한 켠에 놓여있었고, 결국 커다란 쓰레기 봉지에 넣어 버려야 했다. 


사실 알고보면 그 인형도 어느 영혼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음, 그러면 이야기는 아마 처키 같아졌겠지. 건전지를 넣지 않아도 눈을 움직이고 말을 하며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대던 그 미친 인형 말이다. 


이 이야기는 야무시라는 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두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야무시에서 가장 돈 많고 명예가 높은 곳, 씨더뷰파크 야무.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도하가 살던 곳이다. 이 최고급 아파트의 대척점에 있는 가장 낡고 폐허같은 레인보우 아파트에는 화영이 살고 있다. 


씨더뷰파크 야무에 이사 온 어떤 사람이 독이 든 이사떡을 집집마다 돌렸고,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이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 때문에 화영은 그 곳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엄마를 잃었고, 도하는 아빠와 엄마, 잘난 사촌형을 잃었다. 그리고 화영과 도하, 도하와 도현 사이에 남은 해피 스마일 베어 곰인형. 화영은 떡을 싫어하는 엄마가 떡을 먹었을 리 없기에 야무시 최고 권력자인 한정혁이 엄마를 죽였을 거라고 믿었고, 떡 돌린 범인의 자살쇼에서 만난 청부살인업자의 말을 듣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한다. 사람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 청소년 할인가 2천만원. 그리하여 화영은 낡고 더러운 레인보우 아파트에서 영진 무리에 끼여 생활을 하며 학교도 그만둔 채 가짜 이력서로라도 정직한 알바를 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야무시 최대 권력자 한정혁의 아들 한도현은 잘난 아들이었다. 한정혁의 동생 한윤혁의 아들인 도하는 언제나 도현의 그늘 아래 살아야 했다. 도현보다 못하기에 늘 아버지에게 비교 당했고, 늘 위축됐다. 그래서 화영과 만난 옥상은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고, 해피 스마일 베어 눈 붙이기는 도하의 위축된 마음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도하는 화영을 모른 채 했고, 화영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도하의 가족이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


억울하게 많은 사람이 죽은 곳에 변변찮은 위령비조차 세우지 않고 묻어버린 자는 언제나 오만했고,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이 진실이라 생각했고, 자신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하의 영혼이 해피 스마일 베어에 들어갔다. 화영은 그 곰인형을 주웠고, 둘은 핏빛 복수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나 빛날 것 같지만 점점 그 빛은 꺼져가고 있을 수도 있고, 순식간에 불로 화해 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약한 촛불이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은은하게 빛날 수도 있다. 두 아이의 연대는 애처롭지만 따뜻했고 인간적이었다. 도끼를 든 어깨가 터진 곰인형과 깡말랐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은 아슬아슬한 듯 해도 든든했다. 


둘 모두를 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한 믿음 또는 추억이 아니었을까.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 받지만 또한 사람에게 구원 받는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이나 사람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란 질문은 또한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끝끝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좋겠다. 어린 나이에 추악한 사회의 모습을 본 아이들이 그래도 사회의 좋은 모습도 겪으면서 살아가길 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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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진 소녀
악시 오 지음, 김경미 옮김 / 이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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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에서 심청이는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였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심청이가 도착한 곳은 용궁. 심청이의 효심을 높이 산 용왕의 도움으로 연꽃을 타고 왕궁으로 가게 되고 왕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청이는 연회를 열어 맹인들을 불러 모았고, 아버지는 청이를 만나고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책 <바다에 빠진 소녀>에서도 바다의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매년 가장 어여쁜 소녀를 용왕에게 시집보낸다. 용왕의 신부가 된 소녀들은 바다에 던져졌고, 마을은 평화를 기대했다. 그런데 어째서 신부일까? 신랑은 안 될까? 용왕이 남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아,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때문일까? 미나는 언제나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를 듣고 믿으며 자랐다. 옛날에 용왕은 황제를 형제처럼 사랑했고 황제가 죽자 분노하여 폭풍을 멈추지 않는다는, 잊혀진 신이 가장 무섭다는. 하지만 어떻게 신이 남자일까. 강해서? 신이라서? 아니면 남자여야 소녀들을 바다로 던질 수 있어서? 신이 여자여도 소녀들을 던질 수는 있을텐데. 소년들을 던질 수는 없었을까? 신이 남자라 하더라도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여기서 신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미나는 바다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미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오빠인 준의 연인인 심청을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만약 오빠인 준이 제물이었더라도 미나가 뛰어들었을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인간을 돌보지 않는 신을 원망하는 미나는 용왕을 만나 칼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신(god)과 혼령들과 다른 신(god)들과의 이야기는 사랑스러우면서 낭만적이었다.


미나의 조력자들이나 연인이나 용왕이 생각보다 더 쉽게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알면서도 이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미나는 영웅의 공식대로 이세계로 들어섰다. 일명 죽음의 세계로 들어섰고, 목소리와 혼을 잃었고,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목소리와 혼을 되찾고, 운명을 깨달아 얽힌 운명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선택을 했다. 


이제는 황제가 와도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수 있을만큼 성장한 미나는 과연 자신의 연인을 만날 수 있을까. 영웅의 서사에서 두 사람은 역경을 딛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로맨스의 서사로 돌아나올 수 있기를. 

내가 무모하다는 것을 안다. 남기와 기린은 자신들로 인해 내 목숨이 위험해지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무모한 일을 벌인다. 어떤 이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심청을 대신해서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내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사랑하는 이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다친다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집에 머물렀다면, 준 오빠를 쫓아가지 않았더라면,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내 가슴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무력감으로 텅 비었을 것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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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04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청이를 대신해서 바다에 빠지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네요 한국 사람은 이걸 보고 심청전을 떠올리겠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이젠 소설도 한류... 다른 나라에 이름이 알려진 한국 작가 아주 없지는 않겠습니다

남은 사람은 잘 살아갈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미나가 돌아오고 나서는 괜찮았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3-04 10:13   좋아요 1 | URL
다른 나라 사람도 많이 읽었나보군요.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하긴 해요. 추천사 중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는 글이 있었는데 이해는 가지만 기분은 그렇게 안 좋긴 했구요. 확실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긴 하네요. <파친코>도 그렇고 <작은 땅의 야수들>도 그렇고 <호랑이가 눈뜰 때>도 그렇고 점점 미국에 사는 한국인 2세나 한국인들이 활약을 하나봅니다.

미나는 돌아오고 나서 괜찮을 거예요. 성장했으니까요. 그쵸?^^
 
은하환담 - 아홉 작가의 한국 설화 앤솔러지
곽재식 외 지음 / 달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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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있는 김녕굴엔 전설이 있다. 김녕사굴이라고도 불리는 그 곳은 말 그대로 뱀 요괴가 있던 곳이었다. 거대한 뱀은 마을의 신으로 군림하며 산제물을 받아먹다 한양에서 내려 온 관리에게 격퇴당하고 만다는 이야기인데, 제주처럼 바다와 같은 자연의 힘이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곳이라면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다. 그래서 기이한 굴에서 굴 안이라 기이한 소리가 나는 것을 신령한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믿음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금기와 함께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괴력난신보다는 현실의 삶에 초점을 맞춘 공자의 가르침을 숭상하는 관리가 봤을 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고, 모든 화는 자신이 받을 것이라 장담하며 뱀을 물리쳤다.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곽재식 작가의 <토지정신>이 빌려 온 설화이다. 고조선 중엽의 사람인 남사는 어찌어찌해서 아주 살기 좋다는 '심혈성'이란 곳에 가게 된다. 그는 지방을 돌며, 정확히는 섬을 돌며 중앙정부의 위엄을 보이고 법을 알리는 관리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한 일일 것이라 생각해 도망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심혈성은 듣던 대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했는데, 그 이유가 '정신'이 이 곳 심혈성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도대체 그 '정신'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 '정신'을 숭배하는 것인지 남사는 궁금했고 이유를 찾으려 했다. 


때론 사람에겐 '사실' 보다는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살이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란 것이 있을까. 나의 상황과 너의 상황이 다르고 내가 속한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타인이 속한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다를 테니, 잣대는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무언가에 의지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그것이 거짓이니 내 살길만을 챙기는 것 중 어느 쪽이 옳다고 할 것인가.


백두산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산이다. 우리의 기원이기도 하고, 영산(靈山)으로 수많은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 '천지 속의 용궁'이나 '용을 동여맨 돌기둥'이나 ''천지를 기운 돌바늘'이나 '천지(天地) 이야기' 등이 유명하다. '천지 속의 용궁'은 형인 장우가 아우인 바우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 하던 중 붉은 잉어를 구해주는데, 그 잉어가 장우를 용궁으로 안내하여 약을 주어 동생 바우의 병을 고치게 하여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용을 동여맨 돌기둥'은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말썽을 피우는 흑룡을 백두산 천지로 유배 보냈는데 흑룡이 죄를 뉘우치지 않고 계속 백두산 생명들을 해치자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고 온 지상총감에게 잡혀 돌기둥에 묶여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김설아 작가의 <거울 세계>는 이 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두산 어느 곳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장우와 바우 형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바우는 몸이 약했고, 장우는 그런 바우를 보살피느라 늘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와 먹을 것들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우는 잉어를 구해주고 용궁에 가게 되었고, 선물을 받아왔다. 하지만 바우는 잠깐 좋아지더니 다시 상태가 나빠졌고, 장우는 다시 용궁에 가기 위해 천지에 가지만 이번에는 흑룡이 사는 용궁에 가게 된다. 


어머니가 미쳐서 폭포에 몸을 던진 후, 장우는 동생의 눈에서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검은 이채는 무엇이었을까. 바우의 눈에 비친 장우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미치광이풀에 취한 형이었고, 장우의 눈에 비친 바우는 늘 골골하며 아픈 동생이었다. 어쩌면 타인과 교류하지 않은 채 아픈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둘만 살아가는 삶이 장우를 미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서로를 도와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등장하는 장면은 여지껏 나온 등장 장면 중에서 손꼽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영화 중반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수양대군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자가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될 자로구나 싶어서였을까. 수양에게 양위하고 결국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귀양 갔던 단종은 노비의 손에 목이 졸려 죽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단종대왕신이라는 설화를 만들어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왕에 대한 슬픔의 발로일까. 세 번째 이야기 김성일 작가의 <단동이>는 이렇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종 폐위는 역사적 사실이라 의문점이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을 비추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아파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양이인 '단동이'는 그 동네 대장 고양이였고, 친위대를 거느렸다. 반면에 단동이와 같은 무늬로 단동이의 삼촌 고양이인 세동이는 비쩍 마른 채 단동이가 남긴 밥을 먹었다. '나'는 세동이가 불쌍해서 세동이의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힘이 생긴 세동이와 세조가 겹쳐지고, 친위대인 종냥이와 사육신이 겹쳐지고, 세동이를 따라다니는 맘 바뀐 냥이는 신숙주일테고, 비닐이 목에 감긴 단동이는 단종이겠거니.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소원을 들어주는 건 사랑받았기 때문일까.


선녀와 나무꾼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날개옷을 되찾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간 뒤 나무꾼도 하늘로 간다. 하지만 나무꾼은 노모가 보고싶어 천마를 타고 내려왔다가 뜨거운 밥국을 흘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하늘로 돌아가지 못해 '밥국', '밥국' 하다가 뻐꾸기가 되었다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걸까, 사소한 실수가 운명을 바꾼다는 걸까. 나무꾼에게 은혜 갚은 노루는 선녀의 분노를 샀으니 말로가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하나의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너와 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인 이경희 작가의 <파종선단>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얼개만 딴 새로운 이야기이다. 쇠락해가는 은하연대에서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개조해야 했고, 그 결과 하나 둘 유전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었다. 더는 인류라는 종을 분류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를 위기 속에서 인류를 존속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를 만들었던 이에게만 중요했다. 처음 인류를 존속시키고자 은하 연대 미래학자들 모두가 동의했을 때, 생식이 불가능해진 두 인간종 사이에 '미싱링크'를 만들어 생명의 고리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이 프로젝트가 바로 '유전자 징검다리'였다. 하지만 선녀는 자신의 이상형을 만들어 '웅'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단'이었다. 


선녀가 남긴 편지에는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드는 자신이 만든 단짝 유전자에 대한 사랑과 자식을 바라보는 사랑이 가득했다.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고 증오하는 인류가 과연 그런 편견과 혐오를 극복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선녀조차 자신이 만든 유전자의 후손들에게 빠져드는 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나라 설화 중 가장 기이한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여우누이전>이다. 살육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여우누이.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그는 왜 그런 살육을 벌이는 것일까. 본능인 걸까, 인간에 대한 혐오인걸까. 다섯 번째 이야기인 소렐 작가의 <매구 호텔>은 <여우누이전>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때 독일인 부부에게 입양된 동혁과 호정. 그들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을까. 서양인과 생김새도 생각도 다른 그들은 정말 자신들을 입양한 부모를 배신한 걸까. 아니면 그저 값싼 동정심으로 데려와 아래로 보는 이들에게 복수한 것일까. 이래저래 풀기 어려운 문제인 듯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매국노들 간이나 빼먹으렴.


여우와 관련된 설화 중에 좀 야한 것들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여우구슬'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양반집 도령이 멀쩡하다가 시름시름 앓길래 알고 보니 매일 밤 웬 처녀와 입으로 구슬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도령의 구슬 내지는 생명을 차지하기 위한 하루를 남겨두고 여우는 스님이 써 준 부적 때문에 도망을 갔고 도령은 건강을 되찾았는데,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여우의 모습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우귀신의 모습인가 싶었다. 여섯 번째 이야기가 송경아 작가의 <여우 구슬>인데 이 이야기는 입으로 왔다 갔다하는 구슬만 모티브로 삼고 있다. 24억 년 전쯤, 앙클레인들은 퀘이사 3C 273에 관측용 나노머신 발사기를 설치했고, 퀘이사가 방출하는 에너지를 타고 수많은 나노머신이 우주를 떠돌다 행성에 정착했다. 생체형 안드로이드 3641과 9217은 그렇게 지구에 도착했고, 지구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성체 문명이 나타나길 기다렸고, 인류 문명이 우세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나면서 둘은 이 행성과 이 행성의 우세종에 대해 토론했고, 결국 아무리 봐도 지구인의 생태는 알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토론을 끝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드로이드 3641이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의문을 던졌고, 9217은 이해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체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며 이상한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여우 구슬'이 등장한다. 자기공명 가속기록장치를 지구인들의 몸에 넣어 뇌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내 저장했는데, 이 장치를 몸에 넣는 방식이 바로 타액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수 억년의 세월을 지구와 함께 한 안드로이드들이 서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고, 인간들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다른 지성체들은 더 발전된 과학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좋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지만 때론 자연을 정복했다고 교만해지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이중성이 어쩌면 이런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구를 누비고 있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겸손해지고 삶의 지혜를 배워야겠지.


장영실은 뛰어난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조선 태종, 세종 대에 활약했으며,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파직되었다. 신립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패해 죽었다. 이 때 신립이 귀신에게 원한을 사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신립이 젊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산을 헤매다 어느 기와집에서 신세 지게 되었는데, 이 집에는 고운 처녀 한 명만이 있었는데 사연인즉 종놈 혹은 황금 닭이 처녀를 노리고 온 가족을 해치고서는 오늘 밤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신립은 그 종놈 혹은 황금 닭을 죽인 뒤 처녀를 두고 떠나려 하자 처녀가 자신도 데리고 가 달라고, 은혜를 갚게 해 달라고 했지만 신립은 거절했다. 그러자 처녀는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신립이 집에 돌아와 장인에게 말하자, 장인이 나무랐다고. 생각해보면 꼭 결혼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살 길을 열어줄 수 있었을텐데 신립이 너무 융통성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신립은 그 처녀의 아버지로 분한 원혼이 알려준 계책대로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며, 해학이 넘치는 정승이었다. 담대하여 귀신의 한을 풀어줬다는 말도 있고,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이한 작가의 <구서담(舅壻談)>이다. 장인과 사위가 서로 골탕먹이는 민담과 신립의 민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야기는 신립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데, 황금 닭은 또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고, 요물인 줄 알았던 구슬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립이 아니었으니, 장인인 권율이나 사위인 이항복이나 서로를 놀리는 재미가 톡톡한 이야기였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모두가 알테다. 소를 치는 견우와 베를 짜는 직녀는 서로 너무 사랑해서 일을 소홀히 하였고 옥황상제의 분노를 사 둘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지게 된다. 이를 불쌍히 여긴 까치와 까마귀가 다리를 놔줘서 둘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일을 하지 않으면 벌이가 없으니 살아가기 힘들다는 교훈을 주는 건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면 독립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천상 세계에서는 집도 주고 먹을 것들도 풍부할테니 그들이 일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설마 천계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해야 하거나, 배급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일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터인데, 노동의 가치가 점점 희석되는 현대사회에 울림을 주는 건 어떤 부분일까. 여덟 번째 이야기는 문녹주 작가의 <견우도 직녀도 아닌>이다. 이 이야기를 보다보면 견우와 직녀는 반체제 인사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미래의 어느 날, 세상은 쪼개져서 도시들이 연합하고 도시 밖은 위험하며 도시 안에서 모두는 평등한, 그런 미래의 어느 날 현우는 옆집 이웃인 견에게 납치 당한다. 식량 생산기 때문인데, 이 시대 '밭'을 하늘로 올려 식량 생산에 성공한 도시는 이 식량 생산기로부터 도시민들의 먹이를 얻는다. 정확히 신분이 이번 회기 기술위원회 대표 정치위원인 현우는 신분이 생산시설분과 시설관리실 소속 기술위원인 박견에게 납치된다. 박견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표현되는 도시가 싫어 비정상이 난무하는 도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식량 생산기를 훔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자면 모든 차별의 철폐가 어쩌면 이미 차별이 이루어진 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들은 모두를 그저 다를 뿐이며 차별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까마귀는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일까. 얼굴에 반점이 있고 흉터가 있으면 그것을 지우고 치료하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냥 두면 큰일나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사는 도시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래도 모든 것에 편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린 것일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견우와 직녀 아니 현우와 견은 해냈다.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재벌집 아들 혹은 딸이 상속권을 포기하고 가난하지만 당찬 연인을 따라간다고나 할까. 약물로 감정을 제어해서 편견이 없는 것이라면, <1984>와 다를 게 무엇일까. 제일 앞서 나왔던 <토지정신>과도 닿아있는 이야기 같아서 흥미로웠다.


단양 죽령에는 산신당이 있다. 이 산신당은 죽령산신을 모시는데, 죽령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산적이 출몰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자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 소굴에서 산적들이 다 자면 '다자구야' 외치고, 안 자면 '덜자구야'라고 외치기로 관군과 짰다. 산적 두목의 생일날 산적들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쳤고, 산적들은 소탕됐다. 그 이후 나라에서는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인 전혜진 작가의 <내가 만난 신의 모습은>은 이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 배경은 6.25 전쟁 때였고, 전쟁이 발발할 당시 열 다섯이었던 삼준은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끔찍한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적'은 누구인가. 당연히 인민군, 중공군이겠지만, 때론 국군의 총부리는 그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쌀을 준다기에 가입한 보도연맹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열 살짜리 소년은 정말 빨갱이였을까.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이 없는 가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해방 이후 우리네 역사는 피가 가득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을 수색하기 위해 막사를 지은 마을에서 삼준이 속한 부대는 먼저 도착해 막사를 지은 어린 소대장과 병사 두어 명을 만났다. 류 중사와 소령은 자주 부딪쳤고, 류 중사는 계급을 무시했다. 삼준이 속한 부대에 있던 류 중사는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고, 수틀리면 사람을 죽여댔다. 그런 그에게 보도연맹원들 사살 명령은 좋은 구실이었다. 보도연맹과는 상관없는 사람을 죽이고서는 빨갱이로 몰았는데, 소령이 뭐라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있는 암자의 공양주라는 할머니가 나타났다. 신은 피아(彼我)가 없었고, 죄 없이 내몰린 생명들을 가엾게 여겼다. 곽재식 작가의 <멋쟁이 곽 상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 앞에 개인은 제대로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개인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것이 신의 도움이든 인간의 도움이든.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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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3-0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를 가도 그곳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분명 그때의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인 것 같은데 요정님이 말씀하신대로 인간에게 잘 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예요^^

꼬마요정 2024-03-01 22:10   좋아요 2 | URL
그쵸? 설화들이 재미있는 이유가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우리가 아는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근데 옛사람들 상상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놀라워요^^

2024-03-01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4-03-01 22:11   좋아요 1 | URL
정말 한국의 기담 설화 무궁무진, 흥미진진해요 ㅎㅎ 봐도봐도 모르는 이야기들이 꼭 한 둘씩 나온단 말이죠. 이번에 저도 백두산 설화 하나 알아가네요. ㅎㅎ 곽재식 작가의 포부 응원합니다^^

희선 2024-03-03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우누이전, 여우 구슬은 모르는 이야기네요 아는 이야기도 그렇게 많지 않군요 옛날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고양이로 역사 이야기를 하다니 대단합니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밥국 밥국 하다가 뻐꾸기가 됐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약속 잘 지키기가 아닐지...


희선

꼬마요정 2024-03-03 18:05   좋아요 1 | URL
여우누이전은 정말 기괴하고, 여우 구슬은 좀 야하죠? ㅎㅎㅎ 아마 희선 님도 아주 오래 전에 다 들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젠 잊어버리신 걸지도. 저도 그런 이야기들이 좀 있더라구요. 이번에 또 보면서 아, 맞아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지 했어요. 저도 길고양이의 무리 생활로 역사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워낙 판본이 많아서 나무꾼이 뻐꾸기가 되었다, 두견새가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들도 있더라구요. 약속을 잘 지켜야죠, 맞아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14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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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 영웅의 여정은 고통스럽지만 결국 개인을 초월하는 것이며,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 창조자‘가 만들어 창조자의 의도는 가려진 채 영웅에 의해 움직인다. 내 안에 우주가 있고 우주가 곧 나이며 나의 삶과 영웅의 삶은 다르지 않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은 다르지 않고 깨닫지 못한 나는 아직 장막을 걷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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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2-24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님 번역인데 출간일자가 2018년이라서 찾아보니, 개정판인가봐요.
고대 신화 이야기는 문화별로 다른 점이 있지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 것 같아요.
꼬마요정님, 오늘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해 되세요.^^

꼬마요정 2024-02-24 23:24   좋아요 1 | URL
개정됐다고 하더라구요. 개정판이라도 번역이 그다지 바뀐 게 없고 가격만 올랐다는 말이 있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서니데이 님, 행복하고 좋은 일 가득한 한 해 보내세요^^
 
좀비 낭군가 - 제7, 8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6
태재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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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아포칼립스 문학 공모전인 ZA 문학상 7, 8회 수상작품집이라고 해서 나도 모르게 읽게 된 이야기였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니... 세상에 좀비가 출몰하면 한국인은 좀비떼를 헤치며 출근할 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까 궁금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태재현 작가의 <좀비 낭군가>이다. 조선 구전 민요인 <진주 낭군가>를 비틀었는데, <진주 낭군가>는 남편 없이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던 아내가 첩을 끼고 내려오는 남편을 보고 목을 매어 죽는다는 내용이다. <좀비 낭군가> 역시 한양으로 관직을 얻으러 간 남편을 기다리며 시집살이를 하는 부인 윤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관직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이 첩인 매향을 끼고 오는 것까지는 같은데, 이 남편의 상태가 이상했다. 어딘가 살아있는 시체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알고보니 산 사람을 먹이로 삼는 좀비가 된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먹어치우고 첩인 줄 알았던 매향은 비상 식량이었다. 윤이는 시집살이를 하며 추잡한 소문에 휩싸이면서도 활 쏘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윤이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좀비가 된 낭군을 처리하기 위해 빨래방망이를 잘 휘두르는 매향과 함께 좀비 퇴치가를 몸소 실현하려 한다. 자신에게 가혹한 세상 앞에서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윤이는 용감했고, 자신의 인생이 나락을 떨어진 것 같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매향이도 용감했다. 세상은 결코 친절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야기는 최영희 작가의 <침출수>이다. 마을에 세상 유해한 인간인 양승태가 오토바이와 함께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본 도아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저 나쁜 쓰레기 때문에 도아는 늘 망치를 베개 밑에 넣어두고 선잠을 자야 했다. 양승태는 노인들에게 욕을 해대기도 하며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양아치였다. 하지만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도아는 계속 양승태가 마음에 걸렸는데, 마을 사람들은 아직 양승태의 소식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마을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와서 무슨 바이러스 이야기를 하며 시신에만 발병하는 전염병이 있다고, 약이 곧 나오니까 집에만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그리고 양승태의 시신이 사라졌다. 마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한이 어디까지 사무친 것일까.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도아는 온 힘을 다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살아서 양아치였던 양승태는 죽어서도 쓰레기 짓을 하니 사람은 안 변하는 것인가.


세 번째 이야기는 서재이 작가의 <메탈의 시대>이다. 아주 참신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였고, 웃기면서도 씁쓸한 이야기였다. 건강식품 박람회에서 나온 코랄 오일이 산 사람을 좀비로 만든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전에 밸지는 좀비가 되었다. 베이스를 담당했던 그녀는 겨우 잡은 공연을 앞두고 홍대에서 밴드와 연습 중이었다. 좀비에게 물렸고, 심지어 감전까지 당했다가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좀비가 된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메탈을 향한 투혼은 좀비인 그녀를 지배했고, 그녀는 자신이 공연할 공연장까지 좀비 밴드를 이끌고 가기로 했다. 


'메탈이 세상을 구원한다!!'


과연 그녀는 군인과 좀비떼들을 피해서 공연장까지 가서 공연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밸지가 좀비가 되어서라도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좀비일지도 모르겠다. 밸지는 좀비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아는 좀비인 것이고.


네 번째 이야기는 정예진 작가의 <삼시세킬>이다. 좀비 전염병이 만연한 사회에서 격리를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일을 하고, 마트를 간다. 하지만 점점 문을 닫는 가게가 늘어나고 거리에는 사람이 없으며 식자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 보배는 전업주부로 이런 상황에서도 남편의 끼니를 챙겨주며 매일 마트에 가서 식자재를 구입해온다. 남편은 소파에 붙어 유튜브나 보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60이 넘은 보배는 그동안 꾸준히 해 온 운동을 바탕으로 좀비를 때려눕히면서 거리를 활보한다. 때론 그녀의 활약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기도 하는데, 무지몽매한 남편은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던 차 마트에 식자재를 구하러 간 사이 남편은 아파트에서 마련한 공항행 버스에 혼자 몸을 싣게 되는데...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보배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다니는 요가원에 관장이 바뀌면서 어떤 때는 복싱을 하고, 그러다가 관장이 바뀌어 주짓수를 하고 이런 식으로 꾸준히 관장이 시키는 것보다 더 열심히 운동을 한 덕에 그녀는 소위 '고수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나도 꾸준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경민선 작가의 <화촌>이다. 이 이야기는 SF 이다. 연차를 썼지만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외근을 가게 된 구대리는 두 개의 터널 사이에 끼인 휴게소인 화촌 휴게소에 갇히게 된다. 터널이 두 개 다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이상한 벌거벗은 좀비들... 휴게소에 갇힌 사람들은 과연 탈출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시간대는 어디인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역인 키사라기 역 괴담이 생각나는 이야기였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효원 작가의 <제발 조금만 천천히>이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조금만 뒤처지면 한없이 도태될 것만 같은 그런 나날들 속에서 어느 날 세상이 이상해졌다. 세상은 너무 빠른 사람들과 너무 느린 사람들로 나뉘었고, 그들은 서로와 소통할 수 없었다. 소통이 어려워지자 서로를 배척하기 시작했고 빠른 인간 즉 속인들은 느린 인간인 완인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세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구원은 없는 것일까. 김초엽 작가의 단편 소설인 <캐빈 방정식>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장아미 작가의 <각시들의 밤>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잘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를 희생시킬 것인가. 자신이 가리킨 이가 제물이라는 것을 몰랐다가 알게 되었을 때, 그 지목한 이는 그 결과를 떠안을 수 있을까. 제물의 피붙이들인 7명의 여사제들은 어떻게 그 결과를 감당하면서 살아갈까. 잘못된 사랑을 품은 산이와 허세 가득한 무율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때론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나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부수겠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바꾼다. 그리고 그 의지는 때가 되어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비밀은 오래 가지 못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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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2-23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비가 나타나면 참 무서울 것 같습니다 살아 있다 해도 좀비처럼 사는 사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좀비가 나타나지만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게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천천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잖아요 소설에서는 좀 무섭게 나타냈지만... 늘 열심히 운동한 보배 대단합니다

꼬마요정 님 주짓수 즐겁게 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4-03-01 22:17   좋아요 0 | URL
아닛, 희선 님 제가 이 댓글을 이제 봤어요!! 눈이 어디 아픈가봐요. ㅠㅠ

좀비 나타나면 무서운데 뭔가 신기할 것도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사람들은 참 다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구나 싶습니다. 보배는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도 열심히 주짓수 하겠습니다. ㅎㅎㅎ

희선 님도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