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집, 여성 -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엘리자베스 개스켈 외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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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다른 고딕 소설과 중복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모르는 이야기도 있어서 즐겁게 읽었더랬다. 읽은 지는 제법 오래됐는데 리뷰도, 페이퍼도 아무것도 안 썼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딕 소설은 음침해서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닮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사람은 선한 면도 가지고 있지만 나쁜 면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 같다. 


엘리자베스 개스캘의 <회색여인>은 가부장적 질서에서 빠져나온 여자들이 살아가려면 또 다른 가부장 남자에게 의탁하거나 남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아망트는 인물 성격이 매우 극적으로 변하는데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런 것일까,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신분이 뒤바뀌는 것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하녀가 가부장을 담당하고 영주 부인이었던 마님은 보호받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님은 회색여인이 되어 기록을 남겼다. 


버넌 리의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 역시 <회색여인>과 마찬가지로 흄세로 이미 만났었다. 앨리스라는 여인, 대를 이어 온 저주 같은 사랑,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하지만 무기력했던 앨리스들. 기회가 오자 남장을 한 채 총을 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화가는 이야기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결국 파멸한 이는 영국 남성의 전형인 윌리엄 오키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비밀의 열쇠>는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한 남자가 두 여자와 결혼하여 두 여인과 각각의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정형화된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심지어 이 남자는 이 얽힌 실타래를 풀 방법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이런 무책임한 남자가 결혼을 두 번이나 하다니... 하지만 이 인연을 푼 것은 다름아닌 트레블린 부인에게서 은혜를 입은, 또 하나의 자녀인 헬렌의 사촌 폴이다. 폴은 의도를 가지고 트레블린 부인에게 접근했고, 사촌 헬렌의 신분을 회복시키려 했고, 트레블린 부인에게 입은 은혜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메리 셸리의 <변신>은 마법 같은 이야기이다. 난쟁이와 몸이 바뀐 귀도는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귀도는 재산을 탕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받아 준 약혼녀 줄리엣마저 배신한다. 그리고 난쟁이와 몸을 바꾸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난쟁이를 저주한다. 도플갱어 단편선 <나의 더블>에 실렸어도 어울렸을 법한 작품이다. 귀도와 난쟁이 둘은 결국 도플갱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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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 부인 정탐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1
정명섭 지음 / 언더라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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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일까, 넷일까 고민했다. 별 다섯을 준 이유는 김금원과 <호동서락기>의 존재를 알려준 것과 오가작통법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사형 집행 방식, 다모가 수사하는 방식을 여타 다른 소설보다 더 자세하게 알려줘서이다. 읽는 동안 관노인 다모 박순애의 활약과 '삼호정 시사'를 만든 김금원과 함께 시를 즐기는 이운초, 임혜랑, 박죽서의 기개와 재치가 멋졌다. 


여기 나오는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조선 시대 때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한다. 역시 실제 사건이 가장 험악하고 잔인한 듯 하다. <사라진 신부>의 은월이 겪은 기가 막힌 사건이나, <며느리의 죽음>의 박아지가 죽은 사건은 모두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거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졌다. 그래도 인과응보, 일벌백계가 이루어진 것은 좋았으나, 또한 그 안에서도 희생된 이들이 있었다.


김금원이 금강산, 제천 의림지 등을 여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면, 은월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들어 온 새어머니의 핍박에 운신이 어려웠다. 여인의 몸가짐 운운하는 것도 은월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박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속적삼을 입은 채 죽어 있었기에 정말 친한 이의 소행으로 용의자가 좁혀지는데,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바깥 출입도 잘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밖에 나오면 행실이 좋지 않다고 소문난다고. 


그나마 이 때 여자에게도 재산이 상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한결 나았다. 여자를 경시하고 여자의 활동을 싫어하는 사회였기에, 관노에게 수사권을 준 것 역시 이해가 되었다. 양반 여자가 권력을 가지는 게 싫었을 테니까. 심지어 경국 대전에는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사족 부녀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는 부녀자 여행 금지 법안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영향으로 부녀자들이 외출을 곧잘 했다고 하는데, 세종 때 이래서는 안 된다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갑갑한 세상 속에서도 힘들지만 자신의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다모인 박순애도 김금원도 은월도 모두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낸 멋진 여자들이었다. 


"세상은 고용한데 죽음은 끊이지 않는군."(p.190)

 

그러니 삼호정 시사 다섯 여인과 박순애는 약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으니. 그들을 응원하며 다음 권이 나오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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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픽션 나이트
반고훈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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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공포란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무섭고 두렵게 하는 것일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치솟는 금리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묻지 마 폭행 같은 것들이 있겠지.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벗어나서 좀 더 비현실적인 눈으로 본다면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체가 없는 존재들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어서 무섭다. 내가 알지 못하니까. 인간은 잘 모르고 잘 알지 못하고 자신과 다르면 타자화해서 배척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실체가 없는 존재- 귀신은 이전에는 인간이었다. 인간이 죽어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귀신의 행동은 살이있을 적 행동이랑 별 다를 게 없을 것이고, 오랜 시간 귀신으로 있었다면 명상이나 수행 같은 것을 했다면 성질 좀 바뀌어서 부드럽고 다정한 귀신으로 성장했을테고, 분노와 원한과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다면 소위 말하는 악귀가 되어 있겠지. 아, 죽어서도 노력해야 하다니, 뭔가 서글프다.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이 다 맞다니까. 멕시코 인들은 죽으면 영화 '코코'에 나오는 사후세계로 가고, 우리는 죽으면 영화 '신과 함께'의 사후세계로 간다고.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자라면 내 마음이 지옥이 된다. 그런 마음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할 뿐이니 그런 마음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 혹은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해서 점점 고립되고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술에 의존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 하기도 한다. 자포자기하여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분노를 약자에게 표출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한 단편인 <과거로부터의 해방>이 안타깝지만 좋았다. 알콜 의존증인 '나'는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기억 그대로 엄마의 뱃속으로 돌아갔다. 인생 2회차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로또를 사지도 않았고, 친구를 아주 많이 사귀지도 않았다. 인생을 크게 바꾸기보다는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것들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기는 길을 택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고, 작지만 따뜻하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진 삶이 아름답게 보였다. 인생은 좋은 것들로만 채워질 수 없지만, 좋은 것들을 추억하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첫 번째 이야기인 <당신과 가까운 곳에>와 마지막 이야기 <귀신은 있다>가 더 안타까웠다. 소중한 걸 알아보고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데, 사람은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늘 같이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집을 나설 때, 친한 이와 만나고 헤어질 때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사 다투고 난 뒤라도 화해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움은 후회를 낳고 후회는 미련을 남기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좀 더 사랑을 담아야 할 것 같다.


<벽 너머의 소리>는 마치 평범한 영웅의 이야기를 보는 듯 했다. 평범함과 영웅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모두가 처음부터 용감하고 영웅이었던 것은 아니니까. 두렵지만 목소리를 내고, 그 용기를 본 누군가가 다시 용기를 내고, 그렇게 용기는 퍼져 나가게 된다면 이 사회는 약자를 위해 힘을 쓰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 같다. 굳이 초능력이 없어도 용기는 낼 수 있으니까. 진아가 그랬던 것처럼.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이 생각나는 이야기이다.


<시체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흥미진진한 스릴러이다. 사실 우연이 불러 온 결과라고 한다면 그렇겠지만, 또 그럴싸하지 않은가. 익명성이 가져 온 허세는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꿨다. 학교에서도 버려진 건물 화장실, 그 곳은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었고, 두 사람은 싸인펜으로 벽에 글을 써 가며 대화를 나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죽이면 되지', '죽였는데 시체를 어떻게 하지?', '토막내서 묻어' 이런 허세 가득한 대화 말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상대의 말에 일주는 비웃으며 이러면 내가 쫄 줄 알고? 나도 스릴러나 추리물을 많이 봤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린 것이다. 화장실 벽을 빼곡하게 채운 무시무시한 살인 방법이나 시체 처리의 방법들은 곧 일주를 두렵게 만들었고, 사건은 이상하게 흘러간다. 때때로 인생은 별 것 아닌 일로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뒤덮이기도 한다. 


<검은 짐승들>은 옛날 사람들의 탐욕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늙지도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상태가 좋은가 보다. 치러야 할 대가가 어마어마한데 말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희생시켜 얻은 청춘은 아름다운가. 


<제3의 종>은 환경 오염으로 변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변이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서로 다른 종들끼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는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이고, 이미 다른 생명체들은 아주 많이 희생당했고 희생될 것이다. 


삶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간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뜻대로 하고 싶어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 싶어하고, 후회하며 돌이키고 싶어한다. 뜻대로 안 된다면 뜻을 바꾸기도 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가만히 쳐다보기도 하고 후회할 일들 사이 사이 좋았던 일들을 추억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딱히 미래를 바꾸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인생이었기에 가능하면 내가 기억하는 모습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설거지하면서 부르던 엄마의 노랫소리나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아빠의 방귀소리, 따뜻한 할머니 냄새와 상냥했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유치한 농담들 모두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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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하였으니 - SF작가들의 유사과학 앤솔러지
문이소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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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과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이 책 제목처럼 평평한 지구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먼저 방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철썩같이 믿어서 방문 열고 선풍기를 틀고 자거나, 방문을 못 열면 선풍기를 끄고 잤다. 덥다고 선풍기를 켜도 엄마가 들어와서 끄고 가기도 했다. 이런 유사과학에 희생된 사람이 바로 나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개벽>이다. 정보라 작가가 문을 열었는데, 유사과학이 과학보다 얼마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 윤 씨가 개벽(사전적 의미 :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힘) 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나 할까. 한 사람의 세상을 뒤집기 위해 외계인까지 등장할 일인가 싶다가도, 불안은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도 말이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절박하거나 외롭거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공짜를 좋아하면 빠져들기 쉬운 게 도박, 다단계, 사이비 종교일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윤 씨가 외계인을 창조주로 모시는 숯과 소금을 팔아먹는 다단계 단체에 어떻게 빠져들게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정보라 작가답게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도 꼬집어주고, 인종차별적 발언도 짚어준다. 사실 속이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속는 사람은 죄가 없다. 도박 같은 범죄가 아닌 이상,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잃게 되는 것들은 바란 것에 비해 너무 과하다. 전세사기도, 다단계도, 사이비 종교도 모두 없는 사람들 상대로 참으로 나쁜 짓인 거다. 거기다 사이비 종교가 말하는 깨끗함과 더러움은 무엇일까. 그 말도 안 되는 이분법이 세상을 절망으로 가득차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만든 건 다 팔아먹기 위해서인게지.


두 번째 이야기는 <소같이 풀을 먹는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다. 이산화 작가의 이야기로, 많이 웃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예수님이 백인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것도 충격일텐데, 장박사가 주장하는 바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까 싶었다. 게다가 그 참신함이라니!! 나 같으면 '처녀수태'에서 '처녀'라는 말을 차라리 젊은 여자로 바꿨을텐데 말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켈레음벰베'는 마치 '네스 호의 괴물'을 떠오르게 한다. 어릴 때 진짜 네스 호에는 괴물이 산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인간의 뇌는 신기하여 어떤 순간에는 생각한 대로 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물에 뜬 통나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존재로 변주되는가. 그리고 강한 신념은 고립도 불사한다. 자신은 순교자라고 믿고 있을테지.


세 번째 이야기는 <유사 기를 불어넣어드립니다>로 최의택 작가의 이야기이다. 공무원 실수로 혜수가 아닌 해수가 되어버린 외계인 김해수. 외계인을 차별하는 큰 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내려 온 해수는 우연히 살려 준 복순 씨 덕에 마을에서 적당히 잘 지내게 된다. 인간보다 체온이 높아서인지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 뭔가 기가 불어넣어진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을 할머니들이 찾아와서 여기 저기 주물러 달라고 해서 해수가 사는 방은 늘 북적북적하다. 사실은 접촉과 정이 그리웠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저 먼 안양에서 온 젊은 여자와 아이가 해수의 마음을 흔든다.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아 걷지 못하는 박미서의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아이를 돌보는 박미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돕는답시고 훈수 두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해수도, 박미서도, 아이도 모두 소수이자 이방인이었다. 외계인을 차별하는 세상이니 얼마나 더 많은 차별들이 있을까. 그런 차별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따뜻하게 살 수 있을까, 해수를 응원하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는 <비합리적 종말점>으로 이하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읽는 내내 곽재식 작가의 <토끼의 아리아>가 생각났다. 거기서도 조사관이 나오는데, 정말 슬픈 사연을 가진 술 마시는 조사관이라고나 할까. <비합리적 종말점>에서는 억 단위의 지구인들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죽어나가는 세상에서 정부든 세계기구든 누구든 이 기생충이 어떤 경로로 감염이 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역학조사관은 감염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사탕을 주목하고 추적하는데...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결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가장 일어날 법한 일일지도 모른다. 검증도 없고 윤리의식도 없는 과장 광고에 현혹되지 말자라는 교훈을 얻었으며, 절대로 대가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되새긴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뇌 역시 노력하여 얻은 도파민에는 내성도 없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광고하는 성관련 증진제, 먹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 약물, 머리 좋아지는 약 따위에 흔들리지 말자. 약물로 만든 근육은 심장을 멈추게 하고, 식욕억제제는 호르몬 불균형을 가져오고, 오남용한 비아**는 저승 구경을 쉽게 하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자. 그리고 노력을 비하하지 말고 노력이 남긴 땀방울을 사랑하자. 그 땀방울이 어제의 나보다 훨씬 멋진 나를 만들어줄테니.


다섯 번째 이야기는 <운명의 수레바위는 멈추지 않아>로 유사과학의 대표적 사례인 점성술이 등장하는 전혜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유사과학 혹은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빙자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그 사랑을 찾기까지 하율이 잃은 게 너무 크기는 하지만 말이다. 절박함은 때론 이성을 마비시키고, 살고자 하는 일이 이상하게 죽음을 부르는 결과가 되는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의 탓만은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덮쳐오면, 가진 것 없는 개인인 우리는 그저 견디고 버틸 뿐이니까. 다 지나갈 것을 믿으면서.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듯이 그렇게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동앗줄이 되어줄테니. 그렇게 사람은 살아가겠지. 


여섯 번째 이야기는 <엑소더스>로 손지상 작가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란 질문을 되새김질했다. 인정을 받으면 행복할까, 무리에 속하면 행복할까,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면 행복할까, 남이 정한 잣대를 만족시키면 행복할까. 그렇다면 다르면 행복하지 않을까? 다른 것은 정복해야 할까, 계급은 늘 존재해서 밑에 있는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할까, 장애는 왜 하등하다 생각할까. 어머니와 상툼은 정말 이툼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툼은 이제 진짜 행복해졌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전쟁과 피를 부르는 신을 섬기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로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일까. 결국은 눈 감고 귀 막은 채로 그렇게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인간의 환경 파괴로 거대해진 바다코끼리와 두려우면 갈비뼈가 튀어나오는 알비노 펭귄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정기유의 화양연화>로 문이소 작가의 이야기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노래도 있듯이, 불안에 먹히면 서서히 침몰하는 배처럼 끝없는 나락에 있는 것만 같아진다. 그래서 끝없이 안 좋은 생각을 하고, 모든 불행이 나를 덮치는 것만 같아서 종교든 과학이든 유사과학이든 붙드는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럴 때 햇빛을 쬐면 좀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이건 과학이다. 실제로 햇빛은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시킨다고 하니 말이다. 요거트를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장이 건강하면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하면 뭐라도 해낼 의지가 생길테니까. 그러면 어느 순간 걷기라도 할테고 그러다보면 뛸 수 있을테지. 그렇게 불안과 우울에서 빠져나온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내 사주든 성격유형이든 운명이든 그게 아무리 좋고 커다랗다 하더라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가능한 인간성은 버리지 말아야겠지, 극한에 몰리더라도 아무리 어려워도. 


여덟 번째 이야기는 <해상도의 문제>로 이주형 작가의 이야기이다. 대기업의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운 좋게 당첨된 화성 여행권으로 화성을 갈 수 있게 된 수진과 동영. 그들은 팩스 텔레포트라는 방법으로 화성에 갈 것이었다. 팩스는 Formation After eXtinguishment의 약자로 소멸 후 형성이란 뜻을 갖고 있고, 이는 분해 후 재구성이란 말과 같다. 어릴 때 '울트라맨'이란 만화영화를 봤는데, 거기서 딱 이런 식으로 악당이 한 외계인(?)을 사라지게 했다, 나타나게 했다 하면서 협박했었다.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해가 쉬웠다. 분자 형태로 사람을 분해했다가 다시 재구성하면 그 사람은 분해 전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테세우스의 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격유형검사, 그것도 최근 수년간 사회생활로 만들어진 성격유형검사 결과를 토대로 인간의 성격이 그 유형에 따라 편향될 수 있을까. 너는 그런 유형이니 그렇게 행동할거라는 말에 휘둘리는 것은 아닐까. 에디슨 사의 행태는 충분히 있음직해서 무서웠고, 진짜 '나'는 무엇일까란 생각이 들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인 것 같아 신기했다. 그런데 MBTI랑 혈액형별 성격유형은 참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번째 이야기는 홍준영 작가의 <그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이다. 시작부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언급하는데, 소수자이자 이방인이자 철저하게 배척당한 '괴물'과 '메이저 영감'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동물농장에서 따온 이름으로 살아가는 메이저 영감은 과학자를 가장한 테러리스트이다. 대한민국에서, 돼지열병으로 돼지를 산 채로 묻어버리고 축산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자 한 축산인이 죽은 돼지들을 약물로 일으켜 청와대로 행진하게 했다. 그 후 그는 '메이저 영감'이 되었다. 인터폴이든 FBI든 수배를 당한 그가 갑자기 범국가적 범죄자 추적 비밀결사(N.W.O)에 자수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괴물을 없애기 위해 북극으로 갔다. 메이저 영감은 왜 N.W.O의 앨리스에게 자수했으며 또 어디로 갈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기로 했다는 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열 번째 이야기는 <유사과학소설작가연맹 탈회의 변>으로 홍지운 작가의 이야기이다. 못생긴 창조주, 인간을 버린 창조주 때문에 유사과학소설을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켜야 했던 한 작가의 웃지 못할 사과문이며 비장한 연설문이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프리메이슨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우리 사회 곳곳에 뿌려진 음모론이 어쩌면 이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해봤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를 죽이기도 하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도 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덮고, 그럴싸한 의식의 흐름을 믿으면서 비논리도 논리적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비굴하게 행동하지만 또 누군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유사과학이 비록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랜 시간 인간이 의지해 온 것들도 있고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도 있으며 불안을 잠재워준 것도 있다. 그렇기에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런 순진하고도 오래된 의지처를 악용해서 사람들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것들은 꼭 벼락 맞았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도 유사과학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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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0-23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선풍기 괴담은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영향을 미친건지?! 저도 어릴 때 그거 믿었거든요. 진짜 오래간다 ㅋㅋㅋ 요즘 어린 친구들마저 들어봤을지도...

꼬마요정 2023-10-23 16:40   좋아요 1 | URL
선풍기가 나왔을 때부터 믿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고 밀폐된 방에서는 못 틀게 한 걸수도 있어요. ㅋㅋㅋㅋ 잘 때 밤새 틀면 전기요금 많이 나오잖아요.(옛날 생각에) 이거슨 완전 도시 괴담 수준이라니까요. 아니, 선풍기 틀고 자면 왜 질식해서 죽냔 말이에요.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해요!!!!! 아, 너무 흥분했어요. 흠흠

다락방 2023-10-26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꼬마요정 님, 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책들을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이 책도 그렇고 호러 픽션 나이트도 그렇고 저는 꼬마요정 님 덕에 이 책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꼬마요정 2023-10-26 22:50   좋아요 0 | URL
정보라 작가님 덕분에 이 책은 흥미가 생겼었는데, 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요즘 제가 굉장히 관대하고 모든 것에 감탄하고 있어서 지금 읽는 족족 별 다섯이거든요. 일단 지금 제 상태로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생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호러, sf 쪽 한국 작가들한테 요즘 푹 빠져 있어서 그런가봐요. 장르 소설은 읽는 사람만 읽잖아요^^

다락방 님께도 좋은 독서가 되면 좋겠는데 ㅎㅎㅎ
 
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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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중국 전설 시대부터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한 무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전체 형식으로 써 내려간 역사서이다. 사마천 자신이 생각한 역사의 기원을 신화 시대까지 끌어올린 것을 보면, 황제 헌원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헌원은 덕치로 세상을 다스렸는데, 사마천은 사기 본기에서 덕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헌원은 신화에서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이 아닌 자들을 중용하고 본인 역시 신과 같은 모양이나, 여기서는 한낱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본기 12편 중 1편은 오제 본기이다. 오제란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등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다섯 제왕이다. 치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로마의 오현제 같다고나 할까. 어디에도 유적이나 증거가 없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현명한 사람을 계승자로 삼았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안정시켰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사마천도 태사공왈 하면서 남아있는 기록이 있어 적으니, 전부 허황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못 배운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 증거가 없으니 이거 진짜야!라고 하기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 때 학자들이 적어둔 게 있으니 진짜라고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오제가 토벌하려고 하는 축융이나 공공, 도철, 궁기 등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들은 전설 속의 흉 또는 흉수인데, 인간의 역사 속에 넣어두려니 뭔가 위화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순 임금의 부인은 신화 속에서는 요 임금의 두 딸로 아황과 여영이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녀들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으니 서운하기도 하다. 어쨌든 사마천은 이 전설의 오제 시기를 인간의 역사 속으로 편입하면서 시기도 한참을 앞서고 영토도 아주 넓어지게 되었다.


2편은 하 본기이다. 하나라 왕은 우로 시작한다. 우 임금은 치수에 성공한 임금인데, 현대도 마찬가지로 치수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편 역시 전설 시대의 일이니 아주 재미있다. 우 임금 때부터 구주(九州)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 같다. 우 임금은 구주를 다스렸는데, 앞선 오제 시기에는 열 두주 였던 것이 구주로 정착한 것 같다. 


3편은 은 본기이다. 은 왕조는 구체적으로 고증된 왕조다. 이 편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17대 주왕에 이르기까지 은나라 600여 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은'이란 지명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의 수둔촌을 말하는데, 실제로 은나라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이 편은 은의 시조인 설()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간적이 알을 삼켜 설을 낳고, 순 임금은 설을  상나라에 봉하고 자씨를 성으로 내렸으며, 설이 죽자 아들 소명이 즉위하고,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가 즉위하고,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이 즉위하고,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가 즉위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즉위하고 하다가 주계가 죽어 아들 천을이 즉위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성탕이다. 성탕은 덕을 잃은 하나라 걸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덕을 잃고 온갖 폭정을 가한 끝에 주나라 무왕에게 망한다. 사마천은 은 본기에서도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다.


누가 신묘한 영능으로 태어나고 그의 자손들이 태어나고 죽으면서 공적을 쌓고 결국은 중요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마천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고려 왕건이나 태조 이성계를 보면, 이들의 조상을 기술할 때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4편은 주 본기이다. 주나라 8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주시대와 춘추 전국시대를 포함한다. 주로 서주의 역사에 중점을 두었고 평왕이 동천한 이후 각 제후들의 세가도 잘 드러나 있다. 주나라는 후직(요 임금 때 농업의 스승)이 선조인데, 그 때문인지 농업을 중시하고 공유나 고공단보 등의 업적 역시 농업과 관련되어 있다. 주나라의 경우, 앞선 나라들과 달리 남아 있는 기록들이 많기 때문에 사마천은 기록에 입각하여 주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주나라는 무왕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기와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이후 257년의 서주 시기와 평왕이 동천한 이후 동주 시기와 원왕 이후의 전국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동주 시기는 춘추 시대, 원왕 이후의 시기는 전국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주나라 876년의 역사는 덕으로 다스리던 시기에서 힘으로 다스리는 시기로 넘어가며 진(秦)나라에게 천하를 넘겨주게 된다. 


주 본기 마지막은 이러하다. "동주와 서주는 모두 진나라에 편입되고, 주나라는 망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p.164) 흥망성쇠란 이토록 허무한 것일까 싶은 문장이었다. 그래서일까, 태사공은 한(漢)나라가 일어나고 나서 90여 년 후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주자남군'이란 칭호를 내렸고, 이는 열후와 지위가 같아 비로소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마무리한다. 


5편은 진(秦) 본기이다. 진나라는 전욱제의 후예인 여수가 선조라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족보를 잘 기록하고 간수했는지 신기할 따름이긴 하다. 은 시조인 설이 알에서 태어났고, 주 시조인 기가 거인의 발자국으로 인해 태어난 것과 유사하게도 여수는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을 낳았다. 진 본기도 읽다보면 아주 재미있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진나라 역시 부침이 많았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진시황이 진시황이 되기까지 역시 온갖 역경과 고난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진나라 왕 정은 자리에 오른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하여 서른여섯 개의 군을 만들었으며, 호칭을 시황제라고 했다. 시황제가 죽고 아들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고, 환관 조고가 이세를 죽이고 자영을 자리에 올렸다. 그리고 진나라는 멸망했다.


사기 본기는 신기한 편이 몇 편 있다. 오제 본기도 신기한 편이지만, 진시황 본기가 별도로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항우 본기도 있고, 여 태후 본기도 있다. 사마천은 진시황이란 인물을 보다 깊이 파헤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항우의 경우, 사마천은 항우를 영웅으로 본 듯 하다. 본기는 제왕들의 전기인데 여기에 항우를 포함시킨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목상 황제는 의제였으나, 항우는 스스로 서초 패왕이 되어 제후를 임명하는 등 실질적 황제였다. 여 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여씨 천하를 만들어 실질적 황제 노릇을 했으니까. 이렇게 본다면 사마천이란 사람은 참 재미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6편은 진시황 본기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을 이룩한 황제이다. 출신성분이 불분명하고, 어린 나이에 볼모 생활도 하고, 후계 구도 자체에 들지 않았으나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누구보다 권력의 힘을 잘 알았고, 권력을 잘 휘둘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고, 도로를 닦았다. 하지만 아방궁을 짓고 분서갱유를 일으켰으며 가혹한 법치주의를 실시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불로장생에 현혹되었고 마침내는 애써 일군 나라의 기틀을 무너트렸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보면서 계속 떠오른 사람이 바로 일론 머스크였다. 두 사람이 무언가 성향이 비슷해 보였기 때문인데, 아마 냉혹한 결단력과 추진력, 불로장생이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7편은 항우 본기이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며 패왕이었다. 장기에 나오는 초와 한은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다. 진나라의 폭정으로 우후죽순 반란이 일어날 때 항우 역시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 사람들을 모았다. 뛰어난 장수였으나 생각이 좁았고, 책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의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했고,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했다. 진나라를 멸망시켰고, 천하를 손에 거머쥘 순간이 눈 앞에 있었으나 유방에게 패했다. 사면초가 이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신화에 보면 순 임금은 눈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주생(사마천이 알고 지낸 유학자)이 항우 역시 눈동자가 둘이라고 들었다 한다. 아무 세력이 없던 항우가 패왕이 되기까지 순 임금과 같은 천명을 받았으나 스스로를 꾸짖지 아니하고 덕이 아닌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 했기에 천명을 잃은 것일까. 


8편은 고조 본기이다. 고조 본기는 읽다보면 하늘의 뜻이란 게 진짜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유방은 평민 출신의 건달이었다. 항우에게 계속 패했으나 결국 뜻을 이뤘고, 중국이란 나라의 기틀이 되는 한나라를 세웠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고, 능력 있고 어진 사람을 적재적소에 썼으며, 쓴소리라도 잘 받아들였다. 하지만 권력욕도 굉장해서 자신의 권력을 넘볼 것 같으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자신이 제일 중요했기에 항우로부터 도망칠 때 부인과 자식을 몇 번이나 마차에서 밀어 떨어트렸고, 여인 2천 명에게 갑옷을 입혀 내보낸 뒤 도망치기도 했다. 여색을 밝혔고, 술 먹고 빚을 지고 거짓말 하고 허세를 부리는 등 건달이 하는 짓은 다 했다. 하지만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 사마천은 한 고조가 겉으로는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속은 좁고 치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또한 그가 세운 한나라가 하, 은, 주의 병폐와 그 병폐를 다스리는 식의 통치의 순환을 이어갔다고 평가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그 병폐를 다스리지 않고 형법으로 가혹하게 통치했으니, 한나라가 병폐를 계승하기는 했어도 이를 개혁해 백성들을 곤하지 않게 했으니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말이다.


9편은 여 태후 본기이다. 사마천은 고조 본기 이후, 한 고조 사후 즉위한 혜제 본기가 아닌 여 태후 본기를 배치했다. 실질적으로 황제 노릇을 한 것은 여 태후라고 본 것이다. 여 태후는 이름은 치이며 고조 유방의 정식 황후이다. 유방이 죽은 후 자신의 아들인 유영이 즉위했는데, 그가 혜제이다. 여 태후는 황로 학설을 신봉하여 도가의 무위를 통치의 근본으로 생각했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고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이는 한나라 이전에 횡행했던 법가의 가혹함을 생각하면 백성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공로를 인정했다. 하지만 또한 여 태후의 전횡으로 유씨 일족을 내쫓고 공신들을 모욕해서 쫓아낸 후 여씨 천하를 만든 것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정적이자 연적이었던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어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다. 결국 명분은 유씨에게 있었기에 여 태후 사후 여씨 일족은 몰락하지만, 여 태후란 존재가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듯이, 한 고조 유방의 곁에 여 태후가 있었기에 한나라가 설 수 있지 않았을까.

 

10편은 효문 본기이다. 효문제 유항은 유방의 넷째 아들이다. 유방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황제가 된 것은 그에게 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마천은 말한다. 효문제는 주발 등이 여씨들을 평정하고 난 후 황제에 즉위해 2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사마천이 성군이라고 칭송하는 황제로 덕치를 보여 준 황제이다. 황제는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겼고 늘 백성을 생각했으며 덕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불합리한 법령을 없애려고 했는데, 제나라 태창령 순우공이 죄를 지어 처벌받게 되자 막내딸 제영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자신이 노비가 되어 아비의 죄를 갚겠으니 아비를 용서해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천자는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부터 가하니 그 형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부도덕한 것인지 안타깝다면서 육형을 없애도록 했다. 제영의 효심은 오늘날 경극의 주제로도 널리 공연될 정도로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11편은 효경 본기이다. 효경 본기는 사기 본기 중 가장 짧다. 목록만 있고 내용이 없으며 <한서> 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다. 위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 역시 없으므로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12편은 효무 본기이다.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그 한무제가 효무 본기의 주인공이다. 한(漢)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이고 업적 또한 어마어마한 황제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업적은 잘 안 보인다. 눈에 잘 보이는 것은 무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계속 신선을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인 '효무'를 붙인다든지, 문장이 처음 60여 자를 제외하면 <봉선서>와 완전히 일치한다든지 하는 점 등 때문에 위작 시비가 있는 편이다. 정말로 사마천은 무제를 폄하하고 그의 업적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무제는 다른 어떤 중국의 제왕보다도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제후국들이 천자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것을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진시황이 했던 생각과도 비슷한 듯 한데, 무제는 자신이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토목 공사나 흉노 원정 등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화려한 제국을 위해 백성들의 피땀이 동원된 것이다. 또한 마음에 안들면 가족에게까지 가혹하여 무고(巫蠱)의 난 같은 참혹한 일도 일으키면서 한나라가 전한, 후한으로 나뉘고 또다시 중국이 쪼개지는 원인이 되었다. 어떤 학자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유사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을 들어 실제로 사마천이 한무제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한다.

  

역사서를 읽다보면 하늘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치가 있어 그 이치에 합당하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가진 것도 다 버리고 스스로 희생하기까지 하는 반면, 누군가는 가진 것에 더해 더 큰 것을 바라고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킨다. 큰 권력은 베풀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작은 권력까지 빨아들여 결국 혼자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나라의) 기계가 휴읍을 제나라에 바친 것에 대하여 <춘추>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췄다.

-반고의 <전인>에서 - P280

주9) 치사(致師)를 번역한 것인데 치사란 전쟁을 하기에 앞서 소수의 날랜 군사들을 적진에 보내 약을 올리며 싸움을 거는 것을 말한다.

(주 본기 중에서)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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