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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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 때 책장을 덮으며 든 생각은 ‘이게 왜 고전이지?’ 였다. 모르는 게 없다는 학자가 젊어지자 하는 일이라고는 그레트헨을 꼬셔서 임신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질 않나, 저승에 가서 제일 예쁘다는 헬레네를 꼬셔서 놀아나질 않나, 사기꾼처럼 속여서 한 나라의 부를 갈취하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거지? 난봉꾼에게 관대한 신이라… 세상 참 불공평하다 느꼈다.

그리고 한참 힘들 때, 서른이 넘어 다시 읽었다. 너무 새로웠고, 놀라웠다. 여전히 이해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파우스트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부족하다 여긴다는 것이, 그리고 그가 하는 선택들이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방황하는 존재이고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존재지. ‘완벽’은 환상일 뿐이다. 의인화 된 ‘메피스토펠레스’나 ‘신’은 다름아닌 자신의 모습들일 것이다.

<파우스트>하면 그 불굴의 의지를 빼 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난 또 한 명의 파우스트인 ‘하우케’가 떠오른다. 슈토름의 <백마의 기사> 속 그 ‘하우케’ 말이다. 죽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무엇에 대한 열망, 집착… 그런 것을 ‘의지’라고 한다면 괴테의 파우스트와 슈토름의 하우케는 정말 의지가 대단한 인물들이다. 내 눈엔 오만함과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보이지만.

그리고 이 책, <파우스터>. 굉장히 재미있고 즐겁게 읽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소설, 영화, 드라마보다 더 뻔뻔하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니까.

인생은 야구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야구와 파우스트를 절묘하게 엮어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후원을 넘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설계하고 좌지우지 하는 프로그램이라니... 인간이 얼마나 오만하면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라면 너무 끔찍하지 않을까. 내 부모님이 나의 진로나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무 상관 없는 남이 돈이 많다는 이유로 내 삶을 결정한다는 건 정말 비인간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이저리그가 꿈인 야구 선수 박준석은 어느 날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의 머리속에 작은 기계가 있고 그 기계를 통해 돈 많은 늙은이가 자신의 삶을 해킹한다는 이야기. 자신이 노력해서 일구었다고 생각한 일들이 사실은 누군가가 조종한 것이라는 이야기. 그 늙고 돈 많은 누군가는 파우스트라 불리고, 삶을 빨아먹히는 자신 같은 존재는 파우스터라고 불린다는 이야기.

도대체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으며 준석은 최경과 함께 이 일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최경은 준석이 사랑했던 지수를 파우스터로 둔 파우스트 최회장의 딸이며, 지수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조사하던 중 이 조직을 알게 된 것이었다. 최경은 아버지와 지수의 복수를 위해, 준석은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돈과 권력으로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통제하고 시간을 거슬러 젊음을 탐하는 파우스트들을 보며 그들의 비인간성에, 오만함에, 잔인함에 치가 떨렸고, 결코 가지지 못할 것을 탐하는 모습은 가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야기는 놀라울만큼 흡입력 있었다. 준석은 메이저리그를 갈까? 메피스토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경이가 임실장에게 주짓수를 배우는 장면은 반가웠다. 초크는 걸리기만 한다면 체구가 작아도, 힘이 약해도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다. 걸기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요즘 읽는 책들에서 주짓수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결국 유한한 인간의 몸은 온갖 부와 명예와 권력을 둘러도 서서히 시들어간다. 흐르는 시간을 부여잡고 영원을 탐한다 한들, 어딘가 망가진 채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오히려 <구운몽>처럼 모든 것이 한낱 꿈인 것을 깨닫고 영혼을 갈고 닦는 게 훨씬 이로울 것 같다. 욕망은 채운다 한들 채워지지 않는 것이니 밑빠진 독에 백날 천날 물을 부어봤자 콩쥐의 두꺼비가 누구나 도와주는 것은 아니니까.


"잊지 마세요. 놈들은 강합니다. 주짓수야말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기술이에요."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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