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중에 로런스 스턴의 <감성 여행>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같은 저자의 대표작 <트리스트럼 샌디>야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어느새 번역서가 무려 3종이나 중복 간행되어 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지만, 어쨌거나 후속편이자 미완성작이기 때문에 비교적 주목도 덜 받는 <감성 여행>까지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조차 안 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트리스트럼 샌디>의 번역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소설 이론서를 뒤적일 때마다 파격적인 구성과 서사의 대표 사례로 언급되기에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브리태니커 그레이트북스의 영어판을 어찌어찌 한 권 얻어 놓고도 과연 어디서부터 파먹어 들어가야 할지 막막한 느낌에, 한동안 갖고만 있다가 문지 번역본을 구하고서야 처분했나 그랬다.


쉽게 말해 '라떼는' 제목만 들어 보았을 뿐, 번역서는 고사하고 원서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고전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톰 존스>며 <숫코양이 무어>며 하다못해 <소돔 120일>도 번역본이 여러 종이니 그저 격세지감일 뿐이다. 비록 완간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상황이기는 해도 <마하바라타>조차 원문 완역이 진행 중이니 정말 세상 참 좋아졌구나 싶다.


예전에 바깥양반이 주로 술자리에서 만나 친해진 철학과 교수님의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는데, 하루는 이분이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요놈들아, 이렇게 좋은 책을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인데, 왜 공부들을 열심히 안 하느냐'면서, 당신이 출근길에 교보문고 들러서 사온 책 한 권을 보여주시는데, 바로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 영역본이었다 한다.


그래서 바깥양반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궁금하기에 집에 오는 길에 교보문고 들러서 바로 그 책을 사왔는데, 어차피 자기 전공도 아니니 금세 관심을 잃어버렸다. 나귀님도 그간 발췌문만 접했을 뿐 비록 영역본이라도 전문은 구경도 못한 상태라 반가웠지만, 역시나 당장 긴요한 내용은 아니니 언젠가 읽어보려고 쌓아만 두었다가 세월만 흘러 먼지만 쌓였다.


지금은 <유일자와 그 소유>도 번역서가 2종이나 나왔고, 심지어 출간 당시의 논쟁에 대해서 저자가 직접 반박한 책까지 번역되었다니 또다시 격세지감이다. 대중적 글쓰기나 오만 데 나서기보다는 본인 전공 분야의 공부와 집필에만 전념하던 저 교수님도 정년 퇴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전해 들었으니, 새삼스레 인생이란 참 짧고 허무하구나 싶다.


그나저나 로런스 스턴의 대표작 <트리스트럼 샌디>와 <감성 여행>이 모두 번역되었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저 이상한 그림책도 다시 한 번 꺼내 펼쳐볼 만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그림책'은 에디시옹 장물랭에서 나온 <끝없는 여행>으로, <골리앗>과 <카프카와 함께 빵을>처럼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만화를 그린 톰 골드의 작품이다.


이 책은 형식부터 파격적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코덱스 형태가 아니라 낱장 카드 여러 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귀님은 알라딘 중고샵에서 저자 이름만 보고 무작정 주문했었는데, 별다른 사전 정보가 없었던 상태이다 보니 실물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상자를 열자마자 무슨 연필 케이스 같은 것이 나와서 '사은품인가' 싶었는데, 그게 바로 그림책이었다!


알라딘 서지정보에는 엉뚱하게도 가로세로 길이가 "165x840밀리"라고 잘못 나왔는데, 실제로는 일반적인 책갈피보다 살짝 넓은 가로 7센티에 세로 16.5센티의 카드 12장이 종이 상자에 들어 있다. 카드마다 앞뒤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딱히 순서라고는 없고 좌우에 어떤 카드를 놓더라도 배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진다.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에 발명된 이런 카드식 그림책을 '미리오마라'라고 하는데, 번역하자면 "수천 개의 풍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톰 골드의 <끝없는 여행>의 경우, 카드 12장 앞뒤로 24개의 장면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배열에 따라 무려 "479,001,600종"의 조합이 가능하다고 한다.(정확한 숫자인지는 나귀님도 직접 계산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형식도 특이하지만 내용은 더 특이한데, 왜냐하면 카드에 묘사된 장면이 로런스 스턴의 소설 속 내용이라기 때문이다. 제목에 "여행"에 들어간 까닭이었는지, 나귀님은 <끝없는 여행>이 <감성 여행>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가보다 착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살펴보니 <트리스트럼 샌디>를 비롯해서 스턴의 작품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망라한 것이라 한다. 


톰 골드가 저 소설가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 연구 단체인 '로런스 스턴 협회'에 먼저 연락해서 이런 책을 만들자 제안했다는데, 파격과 실험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니는 소설가임을 감안하자면 딱 어울리는 헌정품 같기도 하다. 다만 애초부터 스턴을 좋아하는 독자를 겨냥해 만든 물건이다 보니, 그냥 톰 골드가 좋아 이것까지 산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을 법하다.


나귀님조차도 구입 당시에는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은 지 워낙 오래이다 보니, 카드 속 장면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소설뿐만 아니라 스턴의 작품 전반에서 가져온 내용이라고 하니, 십중팔구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감성 여행>이나 다른 저술의 장면도 섞여 있다고 치면, 어쩌면 영영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일단 이처럼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의 책을 굳이 번역해서 나귀님의 '괴작' 컬렉션에 또 한 권 더해준 에디시옹 장물랭의 용기와 노력만큼은 칭찬하면서도, '이건 뭐, 갖고만 있지 이해는 불가능한 책 아닌가' 싶어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감성 여행>도 번역되었다 하니 이참에 스턴을 다시 읽고서 <끝없는 여행>도 다시 꺼내보아야 하나 싶은 것이다.


톰 골드 역시 파격과 신선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만화가인데, 아쉽게도 절판된 <골리앗>과 <달과 경찰> 같은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고독 묘사가 훌륭했다고 기억한다. <카프카와 함께 빵을>과 <24카툰>에서는 뛰어난 재치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새만화책>에 수록되었던 "왕국의 파수병들"처럼 단행본에 없는 인상적인 작품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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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우디의 유작으로도 유명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미사와 축성을 거행했다기에, 1882년에 시작되어 무려 144년째 공사 중인 저 거대한 건축물이 결국 완공된 것인가 싶어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알아보니 축성식은 이미 2010년에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거행했고, 성당 자체도 아직 완공은 아니라 한다.


이번 교황의 행차는 해당 성당의 주탑인 '예수 첨탑'이 완공된 것을 기념한 미사 겸 축복식이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전까지는 똑같은 높이의 첨탑 네 개가 전부였던 성당 한가운데 더 굵고 커다란 탑이 우뚝 솟아올랐다. 마치 凶자 형태로 뭔가 비어 보이던 성당 외관도 주탑이 들어서면서, 마치 幽자 형태처럼 짜임새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해야 할 듯하다.


다만 성당의 일부분은 여전히 공사 중이고, 가우디의 원래 설계대로라면 텅 비어 있어야 하는 광장 중 일부에 개인 소유 건물이 여럿 자리하고 있어서 그 철거 여부를 놓고서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니, 이래저래 완공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성가족성당이다. 어쩐지 스페인도 중국 못지않게 '만만디' 기질인 듯해서 감탄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만.


그나저나 주탑이 완성되었으니 기존 가우디 도록은 이제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 대대적 업데이트라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좌우 측면의 첨탑 네 개 위로 공사용 크레인이 우뚝 솟은 삭막한 모습이 전부였다면, 앞으로는 주탑을 중심으로 첨탑 네 개가 배열되어 더 멋진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친 김에 지금껏 모아 놓은 가우디 도록을 한 번 꺼내 일별하기로 했다. 딱히 어떤 계획에 따른 것은 아니고, 가끔 헌책방에서 눈에 띌 때마다 하나씩 주워 모은 자료들이다 보니 일관성도 통일성도 없지만, 이번 기회에 모조리 꺼내 놓고 대조해 보면서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해 볼 생각이었다. 아울러 도록 중 일부는 저자가 같더라는 특이성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서 말하는 저자란 스페인의 건축가 겸 교육자인 후안 바세고다 이 노넬(Juan Bassegoda i Nonell, 1930-2012)인데, 나귀님이 가진 도록 중에서 무려 3종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의 도록 1종을 나머지 2종이 그대로 베낀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바세고다는 가우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자인 동시에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아래 열거한 도록 (라)에 수록된 그의 약력을 보면 카탈로니아 종합기술대학 건축학과 교수 겸 가우디 대학원 학장, 카탈로니아 왕립 미술 아카데미 대표, 가우디 협회 회장이라고 나온다. 한 마디로 가우디 업계(?)에서는 최고 권위자인 듯하니, 1996년과 2000년에 한국에서 열린 가우디 전시회 도록 (라)와 (마)에 그의 인사말이 수록된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독일의 미술 전문 출판사 타셴(Taschen)에서 간행한 가우디 도록의 저자 라이너 체르프스트(Rainer Zerbst)도 (나)와 (다)에 수록된 '감사의 말'에서 바세고다의 저서가 없었다면 자기는 결코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시인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력을 실감할 만하다.(하지만 왜인지 체르프스트의 저서 참고문헌에는 바세고다의 저서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토록 영향력이 높았던 바세고다의 가우디 해설서가 스페인이 아니라 일본에서 최초로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체르프스트는 Gaudi: Arte y Arquitectura라는 책이 Rikuyo-sha라는 출판사에서 1978년(초판, 전2권)과 1985년(재판, 단권)에 간행되었다 썼으니, 어쩌면 일본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일본어와 스페인어 모두로 간행한 것 아닐까.


바로 그 자료를 번역한 책이 아래의 도록 중 (가)인 듯한데, 예전의 관행대로 번역 대본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판과 재판 중 어떤 것의 번역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일본 책 (카)의 참고문헌에 나온 <가우디의 작품: 예술과 건축(ガウディの作品: 芸術と建築)>(J. 바세고다, R. 로란, 이리에 마사유키 지음, 이시자키 유코 옮김, 六耀社)와 같은 책 아닐지.


아래에 열거한 도록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사진을 망라하기 때문에, 간혹 촬영 시기에 따라 달라진 모습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엘 공원의 기둥숲에 있는 천장 장식화 가운데 하나를 보면, 1970년대 사진인 타셴의 도록에서는 모자이크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2000년대 사진인 트라이앵글의 도록에서는 복원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성가족성당 주탑의 완공으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이 옛날 도록 중 일부는 나중에 가서도 자료 가치가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14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완공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저 거대한 성당처럼, 가우디의 건축물은 앞으로도 여러 번의 수리와 복원을 거치면서 보전되고, 또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게 될 테니...



나귀님이 갖고 있는 도록은 다음과 같다.(도판이 많지 않은 전기와 기타 편역서는 제외했다):


(가) Antonio Gaudi: Special Edition (Francois Rene Roland 지음, 이인환 옮김, 집문사, 1989). 번역 대본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속표지에 Gaudi: Arte y Arquitectura 라고 적힌 것으로 미루어, 일본의 리쿠요사(Rikuyo-Sha, 六耀社)에서 1978년(초판, 전2권)과 1987년(재판, 단권)에 간행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록 (카)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가우디의 작품: 예술과 건축(ガウディの作品: 芸術と建築)>(J. 바세고다, R. 로란, 이리에 마사유키 지음, 이시자키 유코 옮김, 六耀社)은 그 일어판으로 짐작된다. (가)의 표지에는 저자 이름 대신 번역자의 이름만 나오고, 판권면에도 Francois Rene Roland이 단독 저자인 것처럼 나와 있지만, "프랑소와 르네 로랑"(프랑수아 르네 롤랑)은 이 책 전반부 "주요 작품 도판"에 수록된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고, 후반부 "해설과 자료"는 "판 바세고다 노네르"(후안 바세고다 노넬)이 저술했기 때문에, 위에 나온 (카)의 참고문헌 표기처럼 바세고다와 롤랑의 공저라고 해야 맞겠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는 도판과 해설 모두 풍부하기 때문에 훗날 타셴 도록 (나)와 (다)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도록인 (라)와 (마)도 바세고다의 인사말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사진과 해설 모두 (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가)의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사진 중 일부는 이중 인쇄가 되거나 초점이 나갔으며, 건축물의 이름을 바꿔서 표기한 경우도 있다. 번역 자체도 일본어를 옮길 때에 흔히 나오는 고유명사 오기를 비롯해 갖가지 오류가 등장해서 읽기는 참 괴롭다. 다만 바세고다의 해설 자체는 매우 상세하고, 특히 (일본에서 자체 제작한 듯한) 흑백 평면도와 단면도가 여럿 들어 있어서 도움이 된다. 여하간 이 책의 명성과 영향력을 감안해 보면 번역본의 상태는 영 아쉬울 수밖에 없다.


(나) Gaudi: The Complete Works by Rainer Zerbst & Peter Goessel (Koln: Taschen, 1987; reissue 2022). 1987년에 나온 라이너 체르프스트의 저서를 2022년에 재간행하면서 페터 괴셀이 내용 증보를 담당했다고 나온다. ‘감사의 말’에서 저자는 리쿠요사에서 간행한 후안 바세고다 노넬의 <가우디: 예술과 건축>의 초판(1978)과 개정판(1985)을 크게 참고했다고 언급했지만, 도판은 (가)에서 가져온 것보다 최신 사진으로 교체한 것이 더 많다. 사진은 다양하고 선명하지만, 나귀님이 가진 2022년 재간행본은 B5 크기의 작은 책이다 보니 보는 재미는 살짝 떨어진다.


(다) Gaudi: The Complete Buildings by Rainer Zerbst (Koln: Taschen, 1988; reissue 2005). 같은 저자의 "작품 전집"(나)에서 건축물만 떼어 놓은 것인데, 역시나 (가)를 크게 참고했다고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리쿠요사의 판권 표시[(c) 1985 Rikuyo-sha Publishing, Inc., Tokyo, Japan]와 사진 작가 프랑수아 르네 롤랑의 이름까지 밝혀놓은 것으로 미루어, (가)에서 도판을 통째로 가져온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실제로 겹치는 도판이 많고, 편집 디자인까지도 유사하다). 결국 (나)와 (다)가 같은 저자(체르프스트)의 텍스트를 수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판만큼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째서일까? 나귀님의 추측에는 타셴에서 간행한 1987년의 "작품 전집"과 1988년의 "건축 전집" 모두 원래는 리쿠요사의 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가, 2022년에 (나)를 재간행하면서 내용 증보가 이루어지며 도판이 대부분 교체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도판 교체 전인 2005년에 재간행된 (다)는 여전히 1980년대의 리쿠요사 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하간 이 책은 B4 크기라서 (나)에 비해서는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


(라) Gaudi (후안 바세고다 노넬 지음, 조인자 옮김,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 1996). 1996년 10월 22일부터 10일간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 전시장에서 개최된 가우디 전시회의 도록으로, 당시 가우디 대학원의 학장 바세고다가 저자로 나오고 축사도 덧붙였다. 바세고다의 텍스트에 롤랑의 사진이 다수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고, 역시나 (가)를 크게 참고한 (다)와도 겹치는 도판이 많다. 명목상의 간행처는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이지만, 판권을 보면 미술 전문 출판사 예경이 편집, 제작, 판매를 대행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도판의 품질은 그리 좋지 않고, 뭔가 지나치게 불그죽죽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 Gaudi (경기도/조선일보사, 2000). 2000년 10월 20일부터 15일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전시회의 도록이다. 산업도서출판공사라는 곳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라)처럼 바세고다의 축사가 수록되었지만 (가)나 (라)와 유사한 도판까지는 아니다. 권말에 참고 문헌 16종이 열거된 것으로 미루어, 바세고다의 저서를 비롯한 다른 여러 자료에서 사진을 짜깁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바) Gaudi: An Introduction to His Architecture. Text by Juan-Eduardo Cirlot. Photography by Pere Vivas & Ricard Pla (Barcelona: Triangle Postals, 2001). '2002년 가우디의 해'(Gaudi International Year)에 맞춰서 나온 미니 도록(가로세로 각 16센티미터)이다. 아마도 관광객용 가이드북을 의도한 듯, 16종의 건축물을 소개하고 바르셀로나 지도까지 곁들여 놓았다. 저자 후안 에두아르도 시를로트(1913-1973)는 스페인의 미술 비평가 겸 시인이라고 하며, 1950년대부터 가우디 관련 저서를 내놓은 것으로 검색된다.


(사) Gaudi: Complete Works. Text by Juan-Eduardo Cirlot. Photography by Pere Vivas & Ricard Pla (Barcelona: Triangle Books, 2001). (바)과 같은 판형으로 역시나 16종의 건축물을 소개한다. 제목처럼 건축물 전체를 다룬 것은 아니고, (바)의 내용에 평면도와 단면도 등 추가 도판을 집어넣은 정도이다.


(아) 가우디: 예언자적인 건축가 (필립 티에보 지음, 김주경 옮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2, 2006). 작은 판형이지만 다양한 사진이 들어 있어서 간단한 입문용으로 좋다.


(자) 안토니 가우디 (마리아 안토니에타 크리파 지음,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6). 타셴의 '베이직북스'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인데, 수록된 도판은 (다)보다는 (나)에 가까워서 더 최신의 사진으로 이루어졌다. 


(차) 가우디: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김용대 지음, 미진사, 2012). 국내 저자의 저서인데, 스페인에 가서 직접 찍은 듯한 사진이 많아서 특이하다. 다만 판권면에 여러 저자 이름을 스치듯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참고 문헌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카) 안토니오 가우디: 지중해가 낳은 천재 건축가 (이리에 마사유키 지음, 김진아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17). 색다른 사진이 여럿 들어 있고, 특히 권말에 일본 쪽의 자료에 대한 참고 문헌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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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 광고에서 <정치의 서>라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서양의 마키아벨리, 중국의 한비자와 비견되는 니잠 알 물크에 의해 11세기에 집필된 이슬람 정치철학의 고전적 명저"라는데, 어째서 마키아벨리는 '서양'을 대표하는데 한비자는 '중국'만 대표하는지 살짝 의문이기도 하지만, 여하간 대단한 책이라는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옛날 페르시아 정치가라니, 혹시 중동 민담에 나오는 "세 친구"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진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민담의 내용에 따르면, 동문수학한 친구 세 명이 누구든 먼저 출세하는 쪽이 나머지도 출세하게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훗날 그중 한 명이 자국 총리대신이 되어 다른 두 친구를 수소문해 보았더니 양쪽 모두 도움을 거절했다.


한 친구는 학자이자 시인이 되어 출세를 멀리한 까닭이었고, 또 한 친구는 테러리스트로 전향하여 암약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자 겸 시인인 친구가 <루바이야트>의 저자 오마르 하이얌이고, 테러리스트인 친구가 악명 높은 암살단 아사신의 창설자 하산 에 사바흐이며, 먼저 출세해 총리대신이 된 친구가 이번에 나올 <정치의 서>의 저자 니잠 알 물크다.


구글링해 보면 "세 친구" 이야기의 원형은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처음 언급되었다고 하는데, 시기나 경력을 따져 보면 셋이 실제로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였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십중팔구 동시대의 유명인사 셋의 행적이 대조적이었음에 착안해 창작된 민담이 아닐까. 아민 말루프의 소설 <사마르칸트> 역시 이 민담의 내용을 소설화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나귀님의 기억으로는 중국인지의 민담에도 이와 유사한 "세 친구" 이야기가 있었던 듯하다. 역시나 동문수학한 세 친구가 재회했더니 하나는 관리, 하나는 도적, 하나는 신선이 되어 있었다던가.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인생의 묘미인 듯하니, 중동의 민담이건 중국의 민담이건 삶의 덧없음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목적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외대 이란어과 교수였던 김정위가 편역한 <페르시아어 시집>에 따르면, 과거 이란에서는 뉴스 시작 전에 아나운서가 코란이나 <샤나메>를 한 구절 낭송하곤 했다는데, 생각해 보면 페르시아/이란은 시문학 분야에서도 빛나는 전통을 지닌 나라이다. 여하간 여러 면에서 대단한 역사와 문화와 자원을 보유한 대국인데 어째서 지금은 동네북으로 전락했는지 의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도 페르시아 작품인데, 김정위의 지적에 따르면 오히려 해외의 인기 때문에 자국에서도 재평가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영역본을 옮긴 것이 여럿 나와 있고, 페르시아어 원문 번역본도 하나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 상태이다. 나귀님 기억에 가장 특이했던 것은 지질학자(!) 장기홍의 번역본이고.


이번 주엔가 서울국제도서전을 한다던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란 부스에서 <루바이야트> 다국어판(페르시아어 원문부터 번역본 20여 종을 하나로 엮었다)을 구입한 기억이 난다. 원래 전시용이라 판매불가라더니, 혹시 또 모르니까(?) 마지막 날 다시 와 보라고 해서 가 보니 슬그머니 내주더라. 나귀님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이란과의 불법(?)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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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의 <콘돌의 6일>(1974)은 냉전 시대 첩보 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분야의 고전인 이언 플레밍이나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주요 작품이 적국이나 테러리스트 같은 외부의 적에 맞서 싸우는 엘리트 스파이의 활약을 보여주는 반면, 그레이디의 작품은 누명을 쓰고 내부의 적과 싸우는 평범한 주인공을 등장시켰다는 점이 특이했다.


어느 날, 워싱턴 DC 소재 CIA 산하 조직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한다.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암호명 "콘돌")이 비상 연락망으로 피습 사실을 보고하지만, 상황을 수습하러 나타난 연락관은 오히려 그에게 총을 겨눈다. 가까스레 도망친 "콘돌"은 CIA 수뇌부가 자기네 부서를 숙청했음을 깨닫고, 조직의 추적을 피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분투한다.


충성을 바친 조직에게 갑자기 배신당해 고립되고 추적당하는 첩보원이라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오늘날 각종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숱하게 반복된 클리셰인 듯하지만, 사실은 <콘돌의 6일>이야말로 그 원형을 제시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실전 경험이 사실상 전무한 책상물림인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모습이 각별히 흥미와 공감을 자아낸다.


소설 <콘돌의 6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영화 <콘돌의 3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작의 "6일"을 "3일"로 압축하는 등 각색이 이루어졌지만, 시드니 폴락 감독에 로버트 레드퍼드와 페이 더너웨이 주연으로 1975년 개봉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에, 오늘날에는 "콘돌"이라면 소설보다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사실은 나귀님도 소설보다 영화를 더 먼저 봤다. 우리나라에서는 <콘돌>이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예술 영화 상영을 표방하던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했는데,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수입이 금지되어 제작된 지 15년이 지나서야 개봉했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물론 나귀님은 극장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토요명화>인지 <주말의 명화>인지로 봤지만.


그 즈음에는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로만 굳어버린 레드퍼드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도 특이했고, 더너웨이의 미모도 매력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역할의 막스 폰 시도("멀린!")였다. 물론 도입부에 레드퍼드의 애인(?)으로 나와서 한자를 써주며 꽁냥꽁냥하는 중국계(?) 여성도 기억에 남았지만.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CIA 산하 조직임을 자세히 설명하고 들어가는 반면, 영화에서는 피습 직후 비상 연락망 가동을 통해서야 주인공이 속한 사무실의 성격이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에 느낌이 많이 다르다. 즉 "3일"과 "6일"의 차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적에서 제법 차이가 있으니,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이라도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역시 흥미로울 것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제임스 그레이디는 1976년에 속편 <콘돌의 그림자>를 간행했고, 무려 40년 뒤인 2014년부터 "콘돌"이 등장하는 단편을 재발표하기 시작해 2015년에 장편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간행했다. 번역서로는 <콘돌의 6일>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단편 "콘돌의 다음날"도 수록)이 오픈하우스의 '버티고' 시리즈로 각각 간행되었다.


<콘돌의 6일>의 권말에는 저자가 작품 집필 과정과 후일담을 소개한 후기가 30페이지 넘게 수록되어서 흥미를 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속한 CIA 산하의 간행물 검토 부서는 저자의 순수 창작이었지만, 이 소설을 본 KGB에서 이를 실제라고 착각한 나머지 그 구조와 기능을 똑같이 모방한 부서를 만들었다는 후일담은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다.


단편 "콘돌의 다음날"과 <콘돌의 마지막 날들>은 "6일" 이후로도 CIA에서 일하다 퇴직한 주인공이 백발 노인이 되어 새로운 위협과 음모에 휘말리는 내용이다. 이미 깔끔하게 마무리된 "6일"에 덧붙인 사족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단편 말미의 "할란 엘리슨을 위해"라는 헌사를 보면 저자에게 "콘돌" 후속편을 독촉했던 사람들이 일반 독자 외에도 꽤 많았던 듯하다.


그나저나 오래 전 중고로 구입해 줄곧 묵혀 놓았던 이 책을 지금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역시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의 타계 소식 때문이다. 사실은 작년 가을에 마루에서 무너진 책더미를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는 '내가 이걸 왜 여기 두었나?' 싶어서 다른 곳에 정리하려고 빼 놓았는데, 희한하게도 바로 다음날에 타계 소식을 접했다.


폴 오스터 같으면 내친 김에 책이라도 한 권 썼을 법한 우연의 일치인데, 막상 레드퍼드에 대한 추모 글을 하나 쓰려다 보니 이후 다이앤 키튼이며 캐서린 오하라며 이순재와 안성기까지 국내외 영화배우 사망 소식이 줄줄이 이어지며 뭘 먼저 써야 하나 차일피일하다 말았다. 결국 "콘돌"도 꺼내만 놓고 해를 넘겨 버렸다가, 며칠 전에야 작정하고 읽어치운 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레드퍼드의 영화 중에 나귀님이 본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단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추억>(1973), <대통령의 사람들>(1976),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등이 떠오르는데, 하나같이 공동 주연들의 호연이 더 돋보이던 작품들이다 보니, 레드퍼드의 대표작이라 하기에는 오히려 힘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버나드 맬러머드의 소설을 각색한 <내추럴>(1984), 전성기의 데브라 윙어(!)며 초창기의 대릴 해나(!)와 함께 나온 <리갈 이글>(1986), 존 디디온과 존 그레고리 던이 각본을 썼지만 오히려 셀린 디온의 주제가가 더 유명한 <업 클로즈 앤 퍼스널>(1996)도 있지만, 흥행 성공과 별개로 레드퍼드의 연기가 돋보이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러니 나귀님으로선 거꾸로 <콘돌>(1975)을 보고 나서야 레드퍼드의 연기를 (물론 액션은 빼고) 진지하게 평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메릴 스트립의 경우에도 유명 흥행작들에서는 별 느낌이 없었다가, 뒤늦게야 <실크우드>(1983)를 보고 그 탁월한 연기력을 실감했던 것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물론 이때도 조연으로 나온 셰어의 연기가 더 돋보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레드퍼드의 영화와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 없는 나귀님이다 보니, 결국 "콘돌"을 핑계 삼아서야 간신히 그에 대한 추모글을 작성하게 된 셈이다. 물론 굳이 쓰려면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대통령의 사람들>, <내추럴>의 동명 원작이며 <스팅>의 원작인 <빅콘 게임>을 들먹였어도 상관없었겠지만, 그래도 아직 못 읽은 책은 바로 "콘돌" 시리즈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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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였나, 알라딘 첫화면에 두산 베어스 야구 선수 정수빈의 자서전인지 에세이인지의 광고가 나오기에 신기하다 싶었다. 혹시 은퇴했나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아직 현역이라기에 한층 더 신기했다. 나귀님이 알기로는 최근 들어 국제 무대에서 대활약한 것도 아니고, 국내 무대에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것도 아닌 선수인데 무려 책을 간행했으니 말이다.


기록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인기가 많은 까닭일까? 벌써 나이가 35세라니 은퇴를 염두에 두고 뭔가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온 책일지도 모르겠다. 정수빈은 '잠실 아이돌' 취급을 받고 특히 여성 팬이 많다고 들었는데, 한때 응원가로 사용했던 "서핑 유에스에이"를 남녀 파트로 나누어 쨍쨍대고 부르는 것이 상당히 특이했다고 기억한다.(역시 아가씨들 무서워...)


정수빈이라면 일단 잘 치고 잘 뛰고 잘 막는 선수로 기억하는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통산 기록 면에서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지만,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의 큰 경기에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고 나온다. 그러고 보니 두산 팬까지는 아닌 나귀님조차도 기억하는 그의 '흙투성이 유니폼' 모습은 십중팔구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 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두산 베어스에 대해서는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는 나귀님이다. 얼마 전 어떤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이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나귀님 역시 그때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서 가입한 것까지는 아니었고, 영등포 OB 맥주 공장까지 아버지에게 끌려 가서 가입한 거였다.


지금은 LG와 함께 서울을 연고지로 삼은 두산이지만,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충청도를 연고지로 삼았기에, 아버지가 당신 본적에 따라 OB 베어스를 응원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당신이야 예나 지금이나 야구에는 관심도 없고, 나귀님도 교회 선생님 따라 서울 운동장에 해태 경기를 보러 갔던 것을 빼면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당시 맥주 상자 싣고 오가는 트럭을 피해 공장 주차장 사무실쯤 되는 곳에 들어가,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가입서를 작성하고 기념품을 받아온 것으로 기억한다. 삼성과 롯데는 백화점에서 가입을 받고, MBC는 방송국에서 받았는데, OB는 술집에서 어린이 회원을 받을 수 없으니 공장에서 받은 것이 아닐까.(물론 삼미는 어디서 받았나 기억도 안 나지만).


OB 베어스는 어린이 회원 선물도 초라한 편이어서 딱히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삼성은 손바닥만한 지우개를 비롯해서 화끈한 선물이 나왔고, 롯데와 해태는 과자가 나왔고, MBC는 방송이 나왔고(?) 했지만, OB는 누르끼리한 더플백에 모자와 티셔츠 정도가 전부였다. 하긴 애들한테 맥주를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그래도 삼미보단 나았을 거다).


구단 마스코트도 당시에 술집마다 걸려 있던 OB맥주의 곰 마스코트를 재활용한 것이다 보니 (지금은 "을지오비베어"라는 유명 맥주집의 간판으로만 남아 있는데, 거기서 곰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야구 방망이로 바꾼 것뿐이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딱히 정이 갈 만한 모습까지는 아니었다.(물론 슈퍼맨이 빤쓰 바람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삼미보다는 나았지만).


그러다가 OB 베어스가 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덜컥 해버리는 바람에 두산그룹 계열사인 파카글라스에서 (이게 아마 '박가네 유리'라는 뜻이라던가) 우승 기념 유리컵을 1인당 5개씩 나눠주었는데, 아직 나귀님 집 찬장에 2개가 남아 있다. 40년도 넘은 물건이니 비싸면 중고로 팔아볼까 싶어 검색해 보니, 의외로 개당 5천 원쯤밖에 안 하는 것 같아서 포기해 버렸다.


딱히 열심히 응원하진 않았던 OB베어스였지만, 연고지 이전 이후로는 '치사하다' 싶어서 더욱 응원하지 않게 되었고, 훗날 각종 사건사고를 적립하며 '범죄두'라는 오명이 붙은 것을 보면서도 자업자득이니 쌤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프로야구'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박철순과 김경문 배터리며 김우열, 윤동균, 신경식 같은 원년 선수지만.


이처럼 애증의 OB 베어스이니, 관련 기념품이라곤 앞에서 말했듯 원년 우승 기념 유리컵과 원년 어린이 회원 가입 당시 받은 연필 중 세 개만 남아 있다. 비록 더 나중의 것이기는 하지만 OB 베어스에서 만든 책도 있는데, 바로 <야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메이저리그 명장 열전>(전2권, 레너드 코페트 지음, 이종남 옮김, OB베어스, 1995)이란 비매품 서적이다.


권두의 설명에 따르면, OB 베어스에서는 1988년부터 "챔피언 만들기"라는 시리즈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관한 책을 번역해서 비매품으로 간행했는데, 제4/5집 <야구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1995년 우승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번역자 이종남은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으로 재직하며 저술과 번역으로 단행본을 여럿 간행했는데, 이 역시 그중 하나인 듯하다.


"메이저리그 명장 열전"이라는 부제대로 1900-1980년대의 주요 감독들의 약전을 담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자료인 셈이다.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권당 1천 원씩에 집어들었는데, 지금 와서 구글링하면 이 책의 중고 가격이 오히려 원년 우승 기념 유리컵보다 더 비싼 듯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이미 30년 전 책이기는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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