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에 "콜더컷" 어쩌구 하는 북펀드 광고 문구가 나오기에,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이다 싶어 뭔가 궁금해 눌러보니, 유명한 어린이 그림책 제작자인 "칼데콧"을 말하는 거였다. 어째서인가 궁금해 구글링해 보니 "콜더컷"(Caldecott)이 정확한 발음이라는데, 지금껏 우리나라에선 "칼데콧"으로 썼으니, 올바른 표기가 오히려 낯설어 보일 수밖에.


그런데 알라딘 검색창 광고에서는 얼마 전까지 "콜더컷"이라 하다가, 최근 며칠 사이엔 "최고의 그림책 칼데콧상"이라는 문구를 써서 해당 북펀드 페이지로 유도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짐작컨대 "콜더컷"이라고 정확한 발음대로 표기했더니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바람에, 알라딘도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잘못된 표기 "칼데콧"으로 돌아간 셈이려나.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만 해도 외국 인명을 일본어식이나 영어식으로 표기하던 관행이 있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가급적 원래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으로 지침이 바뀌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고종석이 지적했던 것처럼, 아무리 한글이 뛰어나다 한들 세상 모든 발음을 정확히 적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니 한계도 불가피하다.


이미 여러 번 지적했듯 깡길렘/깡기옘, 리파드/리퍼드, 크레리/크래리, 스크루턴/스크러턴/스크루튼/스크러튼처럼 책마다 저자명 표기법이 제각각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언젠가 논란이 된 오렌지/아륀지 발음의 사례처럼, 무작정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도 달성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으니 차라리 실용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검은 오렌지건 하얀 오렌지건 쥐 잘 잡는 오렌지가 좋은 오렌지라고 생각하는 나귀님의 입장에서야, 오히려 사소한 인명 표기에 골몰할 시간에 차라리 오역이나 줄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장 '콜더컷'인지 '칼데콧'인지의 대표작을 모은 <칼데콧 컬렉션>만 해도 오역투성이였으니 말이다.(이제는 그 책 제목도 <콜더컷 클락숀> 정도로 바꿔야 하려나?)


북펀드 광고 문구에서 "콜더컷"이 "칼데콧"으로 대체된 것을 보면, 일단 알라딘도 "칼데콧"을 포기하고 "콜더컷"으로 돌아설 마음은 없는 듯하다. 당장 "콜더컷"으로 검색하면 국내도서 2건뿐이지만, "칼데콧"으로 검색하면 저서뿐만 아니라 "칼데콧상" 수상작을 비롯해 국내도서 334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일단 "칼데콧"의 판정승이라 해야 하려나.


이와 관련해 황당한 일화도 생각난다. 예전에 한 번은 테즈카 오사무 만화책을 검색하다 보니, 테즈카/테스카/데즈카/데스카 등 출판사마다 표기가 제각각이라 한 번에 검색되지 않았다. 그래서 알라딘에 하나로 통일해 달라고 건의했더니만, 저자 약력에 "이 작가의 이름은 테즈카/테스카/데즈카/데스카로 모두 표기된다"고 적어 놓았다. 그 뜻이 아니잖아!


출판사마다 인명 표기가 제각각이니 알라딘에서만큼은 넷 중 무엇을 검색해도 다른 이름까지 검색되도록 조치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지들이 국립국어원이라도 되는 듯 판결을 내리니 우스울 수밖에. 어쩌면 칼데콧/콜더컷에 대해서도 조만간 알라딘 저자 약력에 "이 작가의 이름은 콜더컷이 맞지만 칼데콧이라 써도 무방하다" 정도 구절이 추가되지 않을까. 


물론 저 그림책 작가야 자신의 이름이 정확하게 발음되고 표기되기를 당연히 바라겠지만, 외국에서 문화적 차이로 인해 본인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하면, 딱히 그걸 가지고 불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을 법도 하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출신 감독의 이름 표기를 놓고 설왕설래하자, 영어식인 "거스"로 하자고 본인이 직접 제안했듯이.


작가 "로알드 달"은 북구 혈통을 감안해 "루알 달"로 불러주기를 바랐다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한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 그 소원을 이루지는 못한 듯하다. 본인은 "유진이"로 불리기를 원하지만 세상 모두가 "안유진"으로 불러 좌절한 댕댕이도 있고, 그럼 자기는 "나오이 레이"로 해 달라다가 일이 복잡해진다며 국민 MC에게 제지당한 사례도 있다.


사실은 나귀님도 이름 때문에 오랜 세월 억울함을 겪어 온 사례다. "나귀님" 자체가 닉네임이니 존칭을 붙이면 "나귀님님"이라 불려야 맞겠지만, 다들 초면부터 "나귀님"이라며 반말짓거리를 일삼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나귀님이 "메이저메이저"마냥 알라딘에서 댓글도 친구 신청도 외면하고 숨어다니며 지적질만 일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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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예전에 사다 놓았던 책들을 줄줄이 다시 한 번 꺼내 봐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책장을 뒤졌다. 그러다 보니 원래 찾으려던 책은 못 찾고, 오히려 있는 줄도 몰랐던 책을 찾아내기만 했다.(업다이크의 "메이플 부부 연작 단편집"인 <벌거숭이들>이 원래 목표였는데, 결국 찾기는 찾았다, 엉뚱한 곳에서!)


특히 놀랐던 것은 예전에 사다 놓았던 <제5도살장>과 <제일버드>의 이본이었다. 전자는 김종운 교수의 을유문화사 번역본이 최초였다고 알고 있는데, 나귀님이 관심을 갖게 되었을 즈음에는 이미 절판되어 아쉽던 차에 청량리 어느 헌책방에서인가 (예전에는 낯선 동네를 버스 타고 지나가다 헌책방이 보이면 얼른 내려 들어가 보곤 했다!) 다른 번역본을 구입했다.


<빌리 필그림과 함께 여행을 떠납시다>(커어트 보네거트 지음, 정환호 옮김, 오른사, 1980)라는 책인데, 이후 재간행된 김종운 번역본을 구입하면서 버린 줄로 알았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던 셈이다. 반면 <제일버드>(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일충 옮김, 세광공사, 1980)는 이게 최초이고, 웅진 포스트모던 선집 번역본이 나중이다.


<제5도살장>은 처음 읽었을 때에만 해도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요소에만 집중했었는데, 이후 저자의 발언을 감안해 보면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참사에 대한 여론 환기를 의도한 면이 더 컸던 모양이다.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독일의 피해에 대해 연합국이 침묵하는 것이 괘씸한 모양이지만, 여차 하면 전범국에 면죄부를 줄 여지도 있으니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사례로 바꿔 말해 보자면, 과연 일본이 핵폭탄에 두 번이나 얻어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무작정 피해자 행세를 할 수 있느냐는 의문과도 비슷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인명 피해야 물론 안타깝지만, 그런 비극을 초래한 근본 원인은 미국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에게 있으며, 또한 일본에게 피해를 입은 주변국의 입장에서야 쌤통이니까.


또 하나 의아한 부분은 <제5도살장>이 미국에서는 청소년 유해 도서로 종종 지정되는 악명 높은 책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별다른 논란 없이 판매되어 왔다는 점이다. 언젠가 김훈의 소설이 일부 내용 때문에 외설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재간행된 보네거트의 소설에 대해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것을 보며 아이러니한 느낌이 있었다.


<제일버드>는 SF의 요소가 빠진 세태 풍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닉슨 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다시 들춰보니 실제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나귀님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미처 몰랐던 잔재미가 더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독서에도 다 때가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이번에 업다이크 책을 뒤지다가 발견한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있었던 책들' 중에서도 가장 희한했던 것은 바로 <대서양횡단실기>(찰스 린드버그 지음, 박상용 옮김, 수도문화사, 단기 4288[1955])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전에 헌책방 고구마에 갔다가 사장님이 창고를 새로 얻었다기에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히 보고 깜짝 놀라 잽싸게 구입했던 책이다.


제목 그대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 체험기인데, 원제인 "스피리트 오브 세인트루이스"는 당시에 그가 몰았던 비행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살짝 의외이긴 하지만, 츠루타 겐지의 만화 <스피리트 오브 원더>의 제목이 린드버그의 이 비행기/책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후일담도 있다. 여하간 별 걸 다 갖고 있었구나 싶어 스스로가 기특하고도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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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서 한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막말의 부재였다. 거대 양당 후보부터 애시당초 망언집이 하나씩 나올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입조심을 했던 까닭인지 정작 토론회에서는 본격적인 막말이 나오지는 않았고, 엉뚱하게 이준석이 갑툭튀해 부적절한 발언을 내놓는 바람에 비난을 독점하고 말았다.


다만 이준석은 다른 사람의 막말을 가져왔을 뿐이니 일단 독창성 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발언 상대와 타이밍 모두가 어긋난 까닭에 본인의 성급함과 치졸함만 만천하에 드러냈으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폭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부정적인 여론만 늘어났고, 두고두고 따라다닐 족쇄를 찼으니 향후 전망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그나저나 나귀님이 하나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은 이준석의 부적절한 발언을 '성희롱'이라고 단정한 일각의 주장이었다. 물론 내용만 살펴보면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게 이준석 본인의 주장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즉 당선이 유력해 보이던 다른 후보의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의 발언을 인용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성희롱일까?


물론 이준석을 두둔할 이유까지는 없는 나귀님이지만, 타인의 성희롱 발언을 인용하는 것조차 성희롱이 된다는 주장은 뭔가 불합리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 해 보는 말이다. 그렇다고 치면, 이준석의 발언을 재인용한 언론 보도 역시 성희롱이 된다고 봐야 할까? 이때에는 내용의 적절성과 부적절성뿐만 아니라, 발언의 의도와 맥락도 따져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 논리라면 어떤 창작물의 성폭력 묘사를 언급한 것 자체도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니, 예를 들어 포크너의 소설 <성역>의 줄거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나귀님의 글도 결국 2차 가해가 되는 걸까? 또는 (피해자를 폄하할 생각이야 전혀 없지만) 자타가 겪은 성폭력을 고발하는 책을 내놓은 저술가도 일종의 2차 가해를 하는 셈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최근 들어 이른바 '성-인지-감수성'이 강조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언제부턴가 정확한 기준 없이 여혐이다 성폭력이다 여론몰이를 하는 사례가 늘어나다 보니, 오히려 부조리를 낳음으로써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나 하는 의문도 종종 떠오른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에 나오듯, 신중하지 못한 고발은 결국 역풍만 불러올 수 있으니까.


나귀님이 최근의 이런 추세며 사례에 대해서 예민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마침 존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이 완간되었기에 그 내용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 번 써 볼까 싶었는데, 저 미국 작가로 말하자면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가 특징인 풍속 소설로 유명해졌던만큼, 나귀님 글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차마 안 나올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말을 인용한 이준석도 욕을 먹는 판이니, 나귀님이 업다이크를 인용했다간 자칫 특검 조사와 관세 협상을 비롯한 각종 이슈를 압도하는 초대형 '게이트'로 발전하지 않을까. 뭐든지 하나 걸리면 작살나는 사회 분위기상, 나귀님은 살처분, 알라딘과 문학동네는 (이왕이면 글항아리도!) 압수 수색, 알라딘 회원들도 참고인으로 줄줄이 소환되지 않겠는가.


<성역> 리뷰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여차 하면 포크너(Faulkner)의 노벨문학상을 취소하고 포크(fork)도 쓰지 말자는 국민 청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케이크를 젓가락으로만 집어먹고 스파게티를 숟가락으로만 집어먹는 일이 한두 달쯤 지속되면, 최근 종이 빨대에 들끓었던 여론과도 비슷하게 포크도 포크너도 슬그머니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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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지락실 3>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은 이른바 '전남친 토스트' 퀴즈였다. 인터넷 밈의 일종이라는데, 그 명칭을 이미 아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이영지는 영 생소했던 모양인지 '이걸 모든 사람이 다 아느냐', '내가 지금 당장 라이브 진행해 확인해 보겠다', '전남친이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전남친 토스트냐' 하고 노발대발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본 장면을 새삼스레 상기한 까닭은 알라딘의 광고 중에 "김혜순, 아시아 최초 국제문학상 수상"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최근 다양한 수상 실적을 내는 작가이니 뭔가 또 받기는 받았겠구나 짐작하면서도, 솔직히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국제문학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영 감감하기만 했다. 혹시 남들은 다 아는데 나귀님 혼자 모르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나귀님은 저 김혜순이라는 시인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글은 이미 한 번 쓴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이번 사안과 마찬가지로 그가 수상한 해외 문학상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알라딘의 오락가락 행태만 봐도 '뭔지 모르지만 칭찬하자'는 속물근성이 드러났기 때문이고.


지난번에는 김혜순이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s)을 수상했다며 알라딘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는데, 알고 보니 명칭이 유사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s)을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나귀님이 지적한 한강의 "부커상 수상"과 살만 루시디의 "부커상 3회 수상"처럼 명칭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오류가 반복되었던 셈이다.


결국 모두들 그 상이 무슨 상인지도 모르면서 추켜세웠던 셈이니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다. 물론 상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니 널리 알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정보를 유포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식이라면 10년 쯤 뒤에는 한강이 실제로는 '부커상' 본상을 받은 적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 노벨문학상 음모론을 주장하는 '한진요'도 등장할 만하지 않겠나.


이번에 김혜순이 받은 문학상을 알라딘에서는 "2025 국제문학상"이라고도 지칭했는데, 이렇게 하면 실제로 "국제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국제적인 문학상"을 탔다는 건지 헛갈린다. 구글링해 보니 정식 명칭이 "국제문학상"(Internationaler Literturpreis, ILP)인데, 종종 뒤에 "세계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이 붙는 모양이다.


주한 독일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설명에 따르면, "세계 문화의 집"은 1988년 설립된 독일 정부 기관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비유럽 (즉 영미유럽권 이외의?) 국가의 여러 분야 예술을 독일에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바로 이 기관에서 2009년부터 제정한 "국제문학상"은 독일어로 처음 번역 소개되는 해외 산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듯하다. 


따라서 정식 명칭은 "국제문학상"이라도,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언론에서 쓴 것처럼 "세계 문화의 집 국제문학상"이라고 적어 주든가, 아니면 "독일 국제문학상"이라고 적어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수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게 도대체 무슨 상인지 알아보려고 나귀님처럼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한강의 "말라파르테상" 수상 실적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도, 정작 저 문학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는 그 연원인 독일계 이탈리아인 작가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단적으로 알라딘에서도 "추천도서" 메뉴의 "해외문학상" 항목에 "말라파르테상"을 집어넣었지만, 수상작이라곤 역시나 한강의 책 하나뿐이다.


알라딘의 다른 "해외문학상" 항목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한국 작가나 작품이 수상한 경우에만 추가되다 보니 정말 너무 생소한 상들도 많고, 그나마도 완전하거나 충실한 목록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부커상"과 "부커상 번역 부문"을 줄곧 (심지어 기꺼이!) 혼동했던 것처럼, 마치 국내 작가의 수상 실적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이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 모두의 무지와 편견을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솔직하고 편리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미 널리 알려진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이외의 수상 실적은 모조리 '기타 등등'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겠다. 전미도서상이건 전미비평가협회상이건, 말라파르테상이건 말레피센트상이건,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고 알고 싶은 사람도 없어 보이니...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 표지 하단 (띠지인가?) 노란색 바탕에 적힌 수상 실적 가운데 "2019 미국 최고 번역도서상"이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것 역시 생소한 명칭이어서, 도대체 뭐를 가리키는 건지 궁금해 구글링해 보았다. 알고 보니 미국 로체스터 대학(University of Rochester) 산하의 온라인 문학 잡지 스리퍼센트(Three Percent) 주관으로 2008년부터 시상한 '최우수 번역도서상'(Best Translated Book Award, BTBA)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위에서 설명한 내용대로 주관사 이름을 넣어서 '스리퍼센트 최우수 번역도서상'이라고 해야 적절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막상 위키피디아의 해당 도서상 항목에 들어가서 2019년 시 부문 수상자를 살펴보니 김혜순이 아니라 브라질 시인 힐다 힐스트라고 나온다. 알고 보니 김혜순은 그해의 최종 후보 5인에 들었을 뿐이었는데, 표지에는 마치 그 문학상을 실제로 수상한 것처럼 착각하게끔 적은 것이다. 차라리 "도서상 후보작"이라고 썼다면 모를까, 무작정 "도서상"이라고 해 놓으면 그 위의 다섯 가지 수상 실적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수상작"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발 양보해서 "문학상 후보작"이라고 홍보하더라도, 전미도서상이나 퓰리처상처럼 훨씬 더 권위 있는 문학상을 제외하면 "후보작" 이력까지 홍보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듬해인 2020년까지만 시상하고 결국 중단된 '스리퍼센트 최우수 번역도서상'의 인지도에 비해서는 뭔가 좀 과도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김혜순이 이번에 수상했다는 '독일 국제문학상'의 2017년 "후보작" 가운데 하나였지만, 정작 해당 작가나 작품의 정보에서는 그와 같은 이력이 굳이 강조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아니, 이건 거꾸로 '독일 국제문학상' 측에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이력이 아닐까.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자기네가 더 일찍 주목했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뛰어난 눈썰미를 입증한 셈이니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수상 실적 홍보 자체는 나쁠 게 없지만, 이 과정에서 부정확한 정보를 유포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심지어 저자에게도 누가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 해 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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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사후에 간행된 무명 시절의 파리 체류기 <가변 축일>을 보면, 하루는 선배 작가 포드 매독스 포드와 함께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수상해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화가 소개된다. 포드는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1870-1953, 영국의 작가 겸 정치인)인데, 방금 눈이 마주쳤지만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거라고 '쎈척'을 한다.


그런데 그날 늦게 다른 친구와 어울리던 헤밍웨이 앞에 또다시 대머리 남자가 지나가게 된다. 아까 들은 정보를 토대로 헤밍웨이가 '저 남자가 힐레어 벨록이라던데' 하고 말하자, 함께 있던 친구가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저건 악마숭배자 알레이스터 크롤리(1875-1947, 영국의 오컬트 연구자)잖아. 자칭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 말이야.'


크롤리를 벨록으로 오인한 포드의 발언은 물론이고, 이를 답습한 헤밍웨이의 발언도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헤밍웨이로선 이 일화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당시 집필 중이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원고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똑같이 재현했다고 전한다.(물론 완성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전하지만).


20세기 초에 활동한 오컬트 연구자 알레이스터 크롤리는 여러 가지 기행을 벌였고, 급기야 앞서 소개한 일화에서 헤밍웨이의 지인이 언급한 것처럼 다채로운 악명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오늘날은 신지학이며 오컬트며 하는 영성 연구 자체를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는 것이 대세이지만, 크롤리를 대마법사로 추앙하는 소수의 추종자도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오히려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사례가 헤비메탈 가수 오지 오스본의 노래 "미스터 크롤리"이다.(노래에서는 "크라울리"라고 발음한다). 사실은 나귀님도 이 노래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한 셈이었는데, 당시에는 헤비메탈 가수마다 악마, 마법, 해골 같은 음산한 상징을 앞다투어 차용하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했었다.


오지 오스본이 한때 몸담은 밴드 블랙사바스도 그 이름이며 외관에서 풍기는 불길한 이미지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사례라고 하던데, 솔로 시절의 오스본은 한 술 더 떠서 다양한 충격적 기행을 시도하며 악명을 쌓아 올렸다고 전한다. 급기야 미국의 보수 기독교계며 학부모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에 성공했으니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악마주의'라기보다는 '상업주의'의 산물에 불과했지만, 나귀님도 교회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행동이 곱게 보일 리 없어 한동안 외면했었다. 한 번은 동네 작은 '음악사'에 <스피크 오브 더 데블> 음반이 전시된 것을 보고 기겁한 적도 있는데, 지금 다시 봐도 징그러워선지 최근 발매반에서는 원래의 표지 이미지를 축소해 집어넣은 듯하다.


이쯤 되면 "미스터 크롤리"도 저 오컬트 연구자를 추앙하는 내용인가 싶지만 (심지어 저 노래와 동명인 국내 유일의 크롤리 전기도 이 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로는 당신 과대망상 아니냐며 조롱이며 비아냥을 날리는 내용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귀님처럼 오지 오스본의 노래를 통해 크롤리를 알게 되는 사례가 여전히 많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이렇게 악명 높던 오지 오스본도 나이가 들면서 '어둠의 군주'(악마)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고, 급기야 식구들을 출연시킨 <오스본 가족>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나오며 '쎈척하는 할배'로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개인적으로는 그의 명곡 "크레이지 트레인"을 스윙재즈 스타일로 편곡해서 무려 팻 분(!)이 부른 그 주제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지 오스본이 어제 76세로 사망해서 뉴스에까지 나왔다. 마침 월초에 있었던 고별 공연 영상에서는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이 살짝 측은하기도 했었다.(몇 년 전에 조니 미첼도 비슷한 모습으로 골골대며 공연하는 모습이 나오기에, 한동안 싫어했던 마음이 싹 녹아버렸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지난번 프린스의 타계 직후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추모 열기가 뜨거운 것에 놀란 까닭은 그가 생존 시에 종종 논란을 몰고 다녔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오지 오스본의 타계 직후 반응도 비슷한 느낌인데, 비록 기행을 벌이기는 했어도 결국 노래가 좋았으니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셈이려나.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크롤리도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만...




[*]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 회고록은 1970년대 휘문출판사의 <헤밍웨이 전집>에 수록된 것으로 처음 접했는데, 지금은 2000년대 들어 새로 나온 번역본만 해도 서너 가지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힐레어 벨록의 저서 번역본도 두 가지나 되고, 심지어 알레이스터 크롤리의 저서 번역본도 있다! 사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중에도 여전히 추종자가 있는 것을 보면, 크롤리의 인기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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