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햇볕도 괜찮아 보이고 비 예보도 없기에 시트 한 장 손빨래 해서 옥상에다 널었더니 십 분도 안 되어서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걷으러 올라갔다가 물에 빠진 나귀님이 되어 내려왔다.


그래도 소금 가마 짊어지고 나가지 않은 것이 어디냐고 나름 럭키덩키를 시전하다 보니, 마치 언제 그랬느냐고 약올리는 듯 구름이 싹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면서 햇볕이 다시 쨍쨍해진다.


문득 며칠 전에 읽은 로렌 레드니스의 책 제목처럼 "아주 기묘한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같은 작가의 <방사성>을 구입하고 호기심이 생겨 덩달아 구입한 책이었다.


두 권 모두 그래픽노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만화책의 형식보다는 오히려 그림책의 형식에 더 가까워 보이므로, 차라리 성인용 그림책이라고 분류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기묘한 날씨>는 제목에도 드러난 것처럼 추위, 비, 안개, 바람, 열, 하늘, 일기예보 등 날씨와 관련된 주제에다가 다양한 일화를 곁들여서 쓴 개별적인 에세이를 총12장에 걸쳐 수록했다.


감성적인 내용 대신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여러 사람과 사건의 흥미로운 면모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나귀님 구미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웃음기를 뺀 빌 브라이슨이라고나 할까.


<방사능>은 "마리와 피에르 퀴리의 사랑과 결별"이라는 부제로 알 수 있듯이 퀴리 부부의 전기이며, 그 사이에 원자폭탄이며 체르노빌 같은 다른 여러 사건들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는 방식이다.


두 권 모두 말미에 인용 출처를 정확히 표시하고 추가 설명까지 덧붙인 것을 보니, 차라리 저자가 뛰어난 글재주를 살려 본격 논픽션에 집중하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귀님이 보기에는 그림책 두 권 모두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그림'이란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럭키로렌쯤 되면 비난이 아니라 극찬이라는 것을 알아듣고 좋아하지 않을까...



[*] 그나저나 <방사성>은 오타도 있고 오역도 있다. <아주, 기묘한 날씨>는 번역이 무난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 약력에서 저자의 전작 두 권의 제목과 부제를 뒤섞어서 <세기의 소녀, 도리스 이턴 트래비스의 생애>, <방사능과 지그펠드 폴리스의 마지막 살아 있는 별, 마리와 피에르 퀴리>, <낙진과 사랑 이야기>라고 마치 세 권처럼 옮긴 황당한 오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자세히 뜯어 보면 또 뭐가 나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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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에서 미쉬나 번역서를 부록 포함 전7권으로 간행한다기에 신기한 일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다시 검색해 보니 유대교 연구자인 백석대학교 변순복 교수의 미쉬나 번역서가 역시나 부록 포함 전7권으로 간행된 상태였다. 그것도 후자는 올해 4월 출간, 전자는 8월 출간이라 불과 4개월 사이에 번역본이 2종이나 나오는 셈이다.


한쪽은 단독 번역이고 다른 한쪽은 공동 번역이지만, 애초에 아무나 쉽게 읽을 수 없는 원저의 특성상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뚝딱 작업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고, 최소한 수년의 노력이 들어갔을 법하다. 그러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지, 아니면 나귀님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알 길 없는 학계의 어떤 경쟁의 결과물인지 궁금해진다.


이미 갖고 있는 허버트 댄비와 제이콥 뉴스너의 영역본을 꺼내 뒤적여 보니 양쪽 모두 900페이지와 1100페이지에 달한다. 히브리어 원문까지 덧붙이면 충분히 지금처럼 전7권 3천 5백 페이지, 또는 전7권 5천 2백 페이지에 달하는 번역본이 나올 법도 해 보인다. 미쉬나만 이 정도이니 게마라까지 합치면 수십 권에 달할 듯하다.


생각난 김에 정리하자면 (나귀님도 종종 헛갈리는데) 토라(오경)에 포함되지 않은 랍비들의 구비 전승, 즉 구전 토라가 미쉬나이고, 이 미쉬나에 대한 주석이 게마라이다. 예를 들어 미쉬나에서 어떤 규례가 나오면 게마라에서는 그 규례에 대한 여러 랍비의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된다.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탈무드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탈무드>라고 하면 마빈 토케이어라는 미국인 랍비가 저술한 책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일본에 오래 살았던 저자의 경력을 감안하면 원저 자체가 일본어로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 수록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아마 탈무드 가운데 게마라에 나온 일화에다가 기타 전승의 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어 몸이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를 알려면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뿌리고 반응을 살피라는 우화를 보자. 탈무드 게마라에는 장자 대속의 규례와 관련된 예제로 샴쌍둥이에게 한 사람 값을 받을지 두 사람 값을 받을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만, 정작 뜨거운 물을 뿌린다는 내용까지는 없다.


반면 탈무드의 기반인 미쉬나는 다양한 규례를 모은 것이다 보니 배경 지식 없는 일반 독자로서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토케이어의 책 같은 재미를 기대했다면 더욱 실망하지 않을까 싶다. 앤 카슨이 인용한 "워낙에 좁아서 여러 번 해도 늘 처음 같은 암컷 영양의 음문" 비유도 미쉬나가 아니라 게마라에만 나온다.


미쉬나 자체는 여섯 권, 심지어 영역본의 경우처럼 단권에 담을 만큼 분량이 적은 편이지만, 게마라까지 합치면 상당한 분량이어서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빌려달라는 이방인 친구에게 "자동차를 가져와서 싣고 가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탈무드 자체가 서적 수십 권 분량이라, 그 무게만 해도 수십 킬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랍비만 읽는 전문 서적이다 보니, 이방인 중에는 탈무드를 일종의 마도서로 착각한 경우도 있었다. 최근 나온 나치 시대의 일상사 가운데 하나에도 '유대인은 탈무드라는 악마의 책을 본다'는 독일인의 증언이 나와서 쓴웃음을 자아내는데, 따지고 보면 탈무드를 처세서로만 여기는 우리나라의 통념도 오해이긴 마찬가지다.


탈무드를 익힌 유대인 랍비의 뛰어난 언변에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혀를 내두른 바 있다. 한 번은 그가 대중 강연을 마치자마자 젊은 보수파 유대인 랍비 둘이 찾아와 다짜고짜 물었다. "전기는 불입니까?" 유대교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에 불 사용이 금지되었으므로, 전기가 불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답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과학에 전통을 맞춰가는 대신 전통에 과학을 맞추려는 대놓고 시대착오적인 태도에 흥미를 느낀 파인만이 이런저런 질문으로 상대방을 모순에 빠트리려 시도했지만, 두 랍비는 수천 년의 전통을 무기 삼아 마치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잘도 빠져 달아났다고 전한다. 결국 파인만도 랍비 앞에서는 꼼짝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하던가.


그나저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로 논란이 지속되는 지금, 유대교 랍비 전통의 정수인 미쉬나가 간행된다는 점은 살짝 아이러니하다. 결국 미쉬나란 기존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할 수 없는 각종 돌발 상황을 가정하고 유연한 해결을 모색한 결과물인 듯한데, 어째서 지금 이스라엘은 맹목적인 원칙만 고수하는 것일까.


유대인의 이방인 혐오증은 구약성서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었지만, 이와 반대로 미쉬나에는 평화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가난한 이방인에게도 배려하라는 등의 유연한 조언들(예를 들어 나쉼/기틴 5.8)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이스라엘이 드러내는 오만과 탐욕이라면 미쉬나가 아니라 하느님이 와도 못 말릴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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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김민기 타계 소식을 접했다. 대학로 학전 소극장 폐관을 둘러싸고 연초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더니만, 이미 그때부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 언론 보도에서 '아침이슬의 김민기' 대신 '학전의 김민기'라고 나오는 것이 낯설기도 했다. 내가 처음 접했던 시절만 해도 차마 제목을 말할 수 없었던 그 노래의 지은이로 통했으니까.


일설에는 자신의 다양한 행보가 무시되고 오로지 그 노래의 작자로만 기억되고 평가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고도 하던데, 어쨌거나 간에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이미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나저나 뭐든지 웬만하면 책으로 때우는 나귀님이다 보니, 김민기도 음반은 갖고 있지 않은 대신 책은 하나 갖고 있다. 그의 노래와 극본을 한데 엮은 <김민기>(김창남 엮음, 한울, 1986)이다.


김민기의 노래를 비롯한 당대의 금지곡 대부분이 풀려난 것은 딱 1년 뒤인 1987년의 6/29 선언 직후였으므로, 이 책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정작 거기 수록된 노래 대부분은 여전히 금지곡이었다.


편저자 서문을 봐도 이 책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음반 대신 노래책의 형태로 사실상 구전되던 김민기의 작품의 정확한 악보와 가사를 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첫 음반이 복각되고, 새로운 음반이 녹음되고, 새로 작곡한 곡들이 발표되는 등의 변화도 있었는데, 그런 내용은 초판으로부터 무려 35년 뒤인 2020년에 간행된 증보판에 반영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노래보다도 오랜 세월 지켜 온 그의 침묵에 대해 더 관심이 가는데, 과연 사후에 가서는 과도한 정치색이 배제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지 기다려 보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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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야기>의 최초 원문 완역인 이미숙 번역본이 서울대출판부에서 1-2권만 간행되고 절판되어 아쉽더니만, 3-6권이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로 속간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절판된 1-2권을 외면하고 3-4권부터 간행하며, 소명출판 번역 총서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는 까닭에 판형과 표지도 싹 달라졌다는 점이다.


알라딘 포함 주요 서점에는 판형 정보도 잘못 기재된 것처럼 보인다. <겐지 이야기> 3-4권은 152x223cm라고 나오지만, 기존 총서 디자인을 따랐다면 152x232cm일 것이다. 소명출판 총서로 나온 <역주 악서 6>은 152x232cm, <알무타납비 시 선집>은 152x223cm라고 나오지만, 나귀님이 직접 재 보니 양쪽 모두 152x232cm였기 때문이다. 


서울대출판부의 <겐지 이야기> 1-2권이 152x223cm이니, 소명출판의 <겐지 이야기> 3-6권과 나란히 꽂으면 높이 차가 1센티미터나 되고, 디자인도 달라 상당히 볼품없어질 것이다. 예전의 학술진흥재단(한국연구재단의 전신) 번역 총서는 출판사가 달라도 판형과 표지를 통일시켜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출판사마다 제멋대로다.


이런 식의 일관성 없는 총서/전집 간행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예를 들어 지난번에 나귀님이 언급한 정암학당의 플라톤 전집을 보라) 이번 사례는 총서/전집도 아닌 작품 하나를 쪼개면서도 들쑥날쑥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을 만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에서 이런 사례가 처음까지도 아니란 점이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스펜서의 <선녀 여왕> 전6권도 1-2권이 나남, 3-6권이 아카넷에서 나오면서 판형과 표지가 달라졌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짓펜샤 잇쿠의 <동해도 도보 여행기> 1-2권도 실제로는 원저 3-8권만의 번역이고, 원저 1-2권은 해당 번역자가 소명출판에서 먼저 간행한 <짓펜샤 잇쿠 작품 선집>에 있어서 따로 사야 한다.


물론 번역자의 사정이며 출판사의 사정이며 기타 등등의 사정으로 인한 변경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관계자 누구도 독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았다는 점은 꽤나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운동화 한 켤레를 주문했는데 제작사의 사정으로 사이즈와 디자인이 변경되었다며 짝짝이 물건이 도착하면 기분이 어떻겠나?


어떤 면에서는 한국연구재단 번역 총서가 이름 그대로 상업 출판이 아니라 세금 먹는 묻지마 출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즉 지원금을 받은 대가로 결과물을 내는 것이 우선이지, 번역이나 편집의 품질이라든지 나귀님 같은 하찮은 독자놈의 기분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봐야 맞을 것도 같다는 거다.


그렇다면 나귀님으로선 책을 이따위로 망쳐 놓은 관계자들에게 부디 평생 쇼핑 망하라는 악담이나 남기고 싶다. 예를 들어 운동화 한 켤레건 양말 한 켤레건 간에, 사는 물건마다 항상 짝짝이로만 배달되길 기원하고 싶은 것이다. 기껏 책을 사고도 볼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독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 정도는 겪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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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카프카 100주기라고 해서 번역이며 평론이며 심지어 만화까지 이것저것 많이 나오며 떠들썩했는데, 그 사이에 체홉 번역서도 몇 가지 더 나온 것을 보고 희한하다 싶어 무슨 영문인가 알아보니 마침 7월 15일이 체홉 120주기였다고 한다.


카프카에 이 정도로 떠들썩했다면 체홉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는 떠들썩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막상 당일이 지나도록 체홉 평론이나 만화는 나오지 않은 듯하고, 심지어 알라딘의 알량한 창립 25주년 이벤트한테도 밀리고 만 듯하다.


나귀님이야 러시아 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책 몇 권 읽은 것뿐이니 딱히 말할 자격이야 없겠으나, 나름대로 최근 수년 사이에 많이 관심이 갔던 저자가 바로 체홉이었던 관계로 아쉬운 마음에 그간 뒤적인 내용을 토대로 몇 가지 적어볼까 한다.


체홉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볼 결심을 한 것은 2020년의 코로나 대유행 시작 즈음이었다. 부득이하게 며칠 집에 박혀 있으면서 이번 기회에 못 읽은 책이나 읽어치우자 싶어 꺼낸 것이 오래 전에 사다 놓은 범우사의 다섯 권짜리 체홉 선집이었다.


체홉이라면 보통 단편부터 접하기 쉬울 터인데, 나귀님 역시 풍자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그의 초기 단편을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생계를 위해 저술했기에 오늘날에는 문학적 가치가 덜하다는 박한 평을 받는 작품들이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대략 "꽁트"에 해당하는 짧은 이야기들인데, 그중에는 인생과 인심의 여러 단면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것들이 있어서 각별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귀님이 특히 재미있게 읽은 것은 "뚱뚱이와 홀쭉이"와 "카멜레온"이란 작품이다.


"뚱뚱이와 홀쭉이"는 8급 공무원 홀쭉이가 옛 친구인 뚱뚱이를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친근하게 너나들이를 하지만, 뚱뚱이가 무려 3급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홀쭉이가 갑자기 태세전환하며 비굴한 언행을 보인다는 내용이다.


"카멜레온"은 경찰서장이 거리에서 사람을 문 개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당장 개를 혼내라고 언성을 높이다가,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저건 모 장군님 댁 강아지 같다'고 말하자마자 역시나 태세전환하며 오히려 물린 사람을 나무란다는 내용이다.


범우사의 체홉 선집은 1-2권에 단편, 3-4권에 중편, 5권에 희곡을 모아 놓았는데, 해학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나귀님이다 보니 구입 이후에도 1-2권만 완독하고 나머지 작품은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가, 코로나 덕분에 나머지 책들도 읽게 되었다.


다만 범우사의 체홉 선집은 편집이 영 좋지 않다. 오타는 기본이고 오역도 있는데, 예를 들어 희곡에서 한 명이 하는 대사를 오독해 두 명이 하는 대사로 (즉 "이씨: 어이, 김씨, 이봐"를 "이씨: 어이"와 "김씨: 이봐"로) 나누어 버린 경우가 그렇다.


여하간 체홉은 가볍고 해학적인 경향의 꽁트를 쓰며 문단에 나왔으나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좀 더 진지한 작품을 쓰라'는 선배 작가의 충고에 심기일전해서 본격적인 소설을 발표하는데, 그중 하나가 선집 3권에 수록된 중편 "초원"이다.


나귀님으로서도 처음 읽는 셈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중 몇 가지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이한 작품이었다.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취학 연령이 된 소년이 삼촌을 따라 초원을 가로질러 대도시까지 먼 길을 떠나면서 겪는 사건이다.


삼촌은 중도에 어딘가 다녀와야 한다며 소년을 초원에서 마주친 상인들의 무리에게 맡기고, 이후 상인들을 따라 여행하던 소년은 갑작스러운 폭우를 겪고, 일행 가운데 고참과 신참 상인의 주먹다짐을 목격하는 등 새로운 세상을 연이어 경험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괴롭힘을 참다 못한 신참이 고참에게 대들었을 때, 심지어 소년까지 분개해 주먹을 움켜쥐고 덤비자, 방금 전까지 악역이었던 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어디 때려 봐라' 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대목이다.


적어도 아이에게까지 야박하지는 않은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걸까? 여하간 소년은 다시 삼촌과 만나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초원에서 겪은 갖가지 경험의 후유증 때문인지 이후 며칠 동안 끙끙 앓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초원"을 읽고 나서 새삼스레 체홉의 진지한 면모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겼고, 특히 그의 생애에서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이었다던 사할린 여행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는데, 정작 그 기행문은 뒤늦게야 구입한 관계로 아직 읽지 못했다.


이러구러 단편과 중편을 섭렵하는 과정에서도 제5권에 수록된 대표 희곡만큼은 유난히 손이 가지 않았는데, 체홉이 소설가 못지않게 극작가로도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귀님의 편향된 독서 습관은 상당히 부당한 처우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 마침내 체홉의 희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단첸코의 회고록이었다. 그는 스타니슬랍스키("노력! 분발!")와 함께 모스크바 예술극단을 이끌며 <갈매기> 재공연에 성공하여 극작가로서 체홉의 명성을 굳혀준 은인이기도 하다.


단첸코의 회고록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일어 중역본이다 보니 고유명사 표기부터 (예를 들어 "빌헬름"을 "비르헤르므"라고 쓰는 등) 완전 엉터리인데,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니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다.


이 회고록의 전반부는 체홉의 말년을 서술하는데, 기존의 유행과 다른 사실주의 희곡인 <갈매기> 초연이 관객의 몰이해로 대실패하며 크게 좌절했다가, 수년 뒤의 재공연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비로소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일각의 증언에 따르면 <갈매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동물 이름 대기' 부분에서 관객이 웃음을 터트린 것이 초연 실패의 원인이라는데, 시공사에서 나온 <체호프 희곡 전집>에는 어째서인지 거기 나오는 동물 이름 가운데 하나가 빠져 있었다.


여하간 <갈매기> 재공연이 큰 호응을 얻으며 체홉은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같은 대표 희곡을 계속해서 저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같이 몰락이라는 소재를 담담하게 풀어 나가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법하다.


단첸코의 회고가 워낙 흥미진진한 까닭에 읽어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귀님의 구미에 딱 맞는 희곡들은 아니었다. 츠게 요시하루의 "리얼리즘 여관"에 나오는 대사처럼 '이 정도로까지 리얼리즘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도 들었으니까.


체홉의 희곡이 높은 평가를 받는 까닭은 오늘날에는 흔해진 이런 일상적인 내용을 최초로 시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첸코에 따르면 체홉은 연습 중인 배우들에게 사실적인 연기를 주문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체홉 본인도 몰랐다 한다.


단첸코의 회고록에는 고리키와의 만남과 인연도 서술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요양 중이던 체홉을 만나러 갔다가 저만치서 오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어보았더니, 마침 그 사람이 방금 체홉을 만나고 나오던 고리키였다는 신기한 일화도 있다.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를 덩달아 읽은 것도 단첸코의 회고록 덕분인데, 이것저것 사다 놓고서 아직 읽지 않았던 각종 장편과 단편과 회고록과 전기까지를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훑어보려 작정하다가 코로나 대유행도 그만 끝나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 중에는 범우사의 체홉 선집과 다른 여러 출판사의 단편선에 나온 소설들만 모조리 읽고 나서 일종의 번역 작품 목록을 작성해 보는 것도 있었는데, 코로나 대유행 초기의 혼란이 지나며 시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중도작파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수년 전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영역본 체홉 단편 선집(THE TALES OF ANTON CHEKHOV, 13 vols., trans. by Constance Garnett. New York: Ecco, an imprint of HarperCollins Publishers, 2006) 박스세트를 구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3권 권두의 해설에 따르면 체홉의 생전에 전집에 수록된 단편은 240편이며, 사후에 추가로 수집된 단편은 196편이었다. 가넷의 이 번역본은 앞의 240편 가운데 198편을 수록하고, 뒤의 196편 가운데 13편을 수록해서 모두 209편을 수록했다.


누락된 작품은 짧은 스케치, 또는 돈벌이용 글이어서 가치가 덜하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니, 비록 편수로는 절반 미만이지만 대표적인 작품은 대부분 들어갔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법해서, 영역본 제목 기준으로 번역본 서지를 작성하려던 것이었다.


번역 작품 목록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단편집에 중복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겹치는 작품들을 살펴보고 나면 가장 적은 권수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도출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만 가넷 번역에 대해서는 나보코프가 톨스토이에 관한 글에서 혹평한 바 있어서 살짝 긴가민가 싶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저 러시아 출신 망명 작가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아무러면 어떠겠나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체홉을 모파상에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저 프랑스 작가를 폄하하지만, 단첸코의 증언에 따르면 체홉은 평소에 모파상을 무척 좋아하고 높이 평가했다니, 여기에서만큼은 나보코프가 틀린 셈이다.


우습게도 나보코프의 소설 <세바스찬 기사의 참인생>에는 이와 유사하게 제목에 나오는 망명 작가의 행적이며 성향에 대해서 함부로 넘겨짚는 돌팔이 비평가들에 대한 야유가 잔뜩 등장하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닐까. 


심지어 나보코프는 체홉을 추켜세우기 위해 고리키를 깎아내리는데, 아무리 그래봤자 체홉이 생전에 교우했던 사람은 나보코프가 아니라 고리키였으니 이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여하간 나보코프의 말은 제법 할인해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귀님도 고리키라면 볼셰비키 정권에 동조했으니 기회주의자이자 관변 작가가 아닌가 하는 인상도 없지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휴머니스트인 관계로 여차 하면 소련의 양심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만 좌절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는 모양이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보면 스탈린의 백해 운하 건설 당시 강제 노동하던 죄수들이 고리키의 방문 소식에 '그라면 이곳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줄 것이다'라고 기대하고서, 그의 시선을 끌려고 일부러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었다고 나온다.


역시나 그 모습을 본 고리키가 선뜻 다가와서 '이보시오, 왜 당신은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는 거요?'라고 물었지만, 감독관인지 당국자인지가 동행한 까닭에 노동자는 가혹한 현실을 차마 제보하지 못했고, 의아해 하던 고리키도 떠났다 한다.


물론 이제 와서 스탈린의 폭정과 소련의 실패 모두를 고리키의 (또는 동시대의 사회주의 동조자들의) 탓으로 돌릴 수야 없겠지만, 독재 치하의 휴머니스트였던 그가 과연 어디까지 인식했고 어디부터 침묵했는지는 솔직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랜 우상인 톨스토이를 직접 만나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고 느꼈다고 말한 것이라든지, 톨스토이보다는 오히려 악녀 취급 받는 부인에게 오히려 공감했던 것을 보면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니 말이다.


다시 체홉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의 생애나 작품을 자세히 소개하는 우리말 연구서가 없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체호프의 시대>라는 책이 있지만, 전공자만 독자로 상정했는지 "스쩬까"와 "스까즈"라는 용어가 설명 없이 등장해 황당했다.


구글링해 보니 "스쩬까"는 결국 스케치(sketch), 즉 단편보다도 짧은 글을 가리키고 "스카즈"는 구술 형식(oral form of narrative)으로서 레스코프의 작품에서처럼 등장인물의 구어체를 최대한 그럴싸하게 재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내친 김에 <러시아 현대비평이론>에 수록된 보리스 에이헨바움의 "스까즈의 환상"이라는 짧은 글까지 찾아 읽고 나니, 이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렵다는 점까지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음역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싶다.


여하간 의욕만 있었고 성과는 없었던 나귀님의 체홉 읽기였지만, 120주기를 무심히 보내기 아쉬워 몇 가지만 대강 적어 본다. 부디 130주기에는 좀 더 관심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도 들지만, 결국 카프카 110주기에 또 밀릴 건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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