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살구나무가 있어 여름마다 공짜 살구가 잔뜩 생긴다. 작년에는 살구청을 담그고 재작년에는 살구잼을 만들었는데 올해는 그냥 도토리 까먹는 다람쥐처럼 서너 개씩 틈틈이 씻어 먹고 있다.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중략)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김소연 <경배> 중에서


나 역시 살구를 먹는 동안엔 살구를 경배하고


내 살과 피를, 생명을 경배한다.


살리는 살, 죽이는 殺.





잊을 수 없는 살구 이미지를 남겨준 리베카 솔닛의 글. 

애증의 관계였던 어머니가 죽은 후 남겨진 살구나무에서 수확한 살구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나 역시 작년과 재작년에는 살구잼과 살구청을 만들겠다고 욕심을 한껏 부리는 바람에 그 엄청난 살구들에 질렸던 경험이 있다. 검은 씨를 빼낸 자리는 꼭 눈알을 파낸 것 같아 무서웠고 단번에 처리하지 못해 며칠간 유예된 살구들에서는 고름같은 진물이 흘렀다.


육박해오던 살구들.


윽박지르던 살구들.


재촉하고 회유하려 들던 살구들.


















뭔가 음산하면서도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혜미의 시 <살구>를 옮겨본다. 

메모했던 것을 보고 옮기느라 행갈이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기다렸어 울창해지는 표정을

매달려 조금씩 물러지는 살의 색들을

우글거리는 비명들을 안쪽에 감추고

손가락마다 조등을 매달아

검은 씨앗을 키우는 나무가 되어

오래 품은 살殺은 지극히 향기로워진다

뭉개질수록 선명히 솟아나는 참담이 있어

마음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나무는 침대가 되고

어떤 나무는 교수대가 된다

열매들이 다투어 목맨 자리마다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매일밤 들려와

나무들이 개처럼 죽은 개처럼

허공을 향해 짖어대는 소리가

구겨진 씨앗을 입에 물고 웃는다

과육은 핑계였지

깨어져야만 선명해지는 눈동자들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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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는 매력적인 게 없다. 숲속에는 귀여운 게 없다. 올빼미도 귀엽지 않다. 우유뱀도 귀엽지 않고 거미줄의 거미도 줄무늬농어도 귀엽지 않다. 장난감들은 귀엽다. 하지만 동물들은 장난감이 아니다."

"귀엽다, 매력적이다, 사랑스럽다 같은 말들은 잘못됐다. 그런 식으로 지각되는 것들은 위엄과 권위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발치에는 양치식물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예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우리의 정원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된다. 자연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조그마하고 무력한 것들로 가득하다면 누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를까? 우리다! 우리가 부모고 통치자다."

"인간과 호랑이, 호랑이와 타이거 릴리(참나리)가 다르면서도 얼마나 흡사한지 보라! 삶은 나이아가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 나는 풀 위로 머리를 내민 백합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내 심장의 줄기로부터 즐거운 인사를 보낸다. 모두가 야성적이고 용감하고 경이롭다.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 이 문장 너무 좋다. 오직 여자들만이 자매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남자들은 도와주고 가르쳐주고 지켜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는 있지만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형제가 되어주겠다는 표현은 잘 안 하지 않나? 아무튼 자매라는 표현은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임스 조이스의 <Dubliners>를 원서로 읽고 있다. 요즘에는 남자 작가들의 책이 영 재미가 없는데 그냥 집에 있어서 읽어치우고 버리려고 읽기 시작했다. 이 단편집에 실린 첫 단편은 <The Sisters>이다. 화자인 소년 '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신부가 죽었고 '나'는 숙모와 함께 신부의 집에 문상을 간다. 신부와 동기간인 자매들이 두 사람을 맞이하고 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He was too scrupulous always. The duties of the priesthood was too much for him. (중략) It was that chalice he broke. That was the beginning of it. Of course, they say it was all right, that it contained nothing. But Still... poor James was so nervous."

 

꼼꼼한 성격인 제임스 신부는 어느 날 실수로 성배를 깨뜨렸고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성배는 비어 있었고 다들 괜찮다고 말했지만 신부는 그 이후로 점점 더 망가졌던 것 같다. 그런 신부를 보며 두 자매는 서로 안타까운 눈빛을 교환하고 한숨을 쉬거나 낮은 목소리로 근심을 나누었겠지.

 

자매들이라고 다 살가운 사이인 것만은 아니라고 들었다. 나의 언니는 내가 초등학생 때 죽어서 나에겐 자매 로망이 좀 있다. 주변에 있는 의 좋은 자매들을 봤을 때 그들의 핵심은 나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매들은 옷을 나눠 입고 화장품을 나눠 쓰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나누거나 늙은 부모에 대한 봉양 책임을 나눈다.

 

 

 

 

 

 

 

 

 

 

 

 

 

 

 

 

이디스 워튼은 상류사회 출신인데 어찌된 게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 이 책 <버너 자매>는 물론이고 <여름>이나 <이선 프롬> 같은 작품도 상류사회 이야기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너무나 자족적인 삶을 누리던 두 자매가 갑자기 어디서 굴러들어온 별 시답지도 않은 사내자식 때문에 둘 다 인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이야기다. 착한 여자들이여, 제발 좀 현명하게 굴자. 당신들의 착함이 너무나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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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아, 뿌리는 다른 생명의 꽃인지도."


꽃이 뭐 대수라고. 


비 온 뒤 풀 뽑기 좋은 땅이라고


엉겁결에 엉거주춤 제초에 동원된 데 심통이 나서 중얼거린다.


꽃인 게 무슨 벼슬이냐.


색이라는 옷을 벗으면 너희도 별 거 아냐.



<긴 호흡>에서 메리 올리버는 에드나 밀레이의 여동생 노마 밀레이와 살았던 경험을 풀어놓는다. 


"거기서 나는 비서, 조수, 말벗이라는 안전하고 모호한 공적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언니의 문학적 재산의 집행자로서 맡게 된 임무들과 힘이 영광인 동시에 짐이기도 한 까다롭고 자기중심적인 여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어렸고 시인의 유품들이 남아 있는 그 집에서 산다는 게 몹시도 감격스러웠다."


에드나 밀레이의 시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에드나 밀레이가 누군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에 등장하는 이름이 아닌가. 















망할 후레자식 로버트슨 선생이 키팅 선생 코스프레를 하며 에이미에게 "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을 때, 순진하고 어린 에이미는 두피가 홧홧해질 정도로 당황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대머리 족제비 같은 로버트슨 선생은 이렇게 대꾸한다. "나라면 배우라고 말했을 거야. 아니면 시인이나."


"그러자 에이미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침대 밑 구두 상자에 넣어둔 시에 대해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몇 년 전에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들을 외운 것을, '가을날 아침이면 오, 세상아, 아무리 너를 바짝 끌어안아도 부족하구나' 라고 읊조리며 희망에 부풀어 학교로 걸어갔다가 '그치지 않는 비처럼 슬픔이 내 가슴을 후려친다' 라는 시구에 실의에 빠져 지친 발을 끌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걸 아는 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걸 몰랐던 에이미는 이날 이후로 그만 로버트슨 선생에게 홀딱 빠져버리고 말지. 메리 올리버가 에드나 밀레이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감격도 끝까지 지속되지는 않았고 에이미가 로버트슨 선생에게 느꼈던 '특별한 인정의 짜릿함'도 끝이 좋지는 않았다. 끝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살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 상황에서, 몇 번이나 뿌리칠 수 있었느냐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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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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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 내가 세계를 언어 속에 욱여넣고 주물거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불러주는 정보들을 놓치지 않고 정서를 한다." 순순히 받고 받아적고 성실하게 베끼고 베껴쓰고 맘에 안들면 고치고 고쳐쓰고...그렇게 살면 되는거야. 바틀비 식으로. 싫은 건 좀 싫다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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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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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저지르는 계절. 범람하는 초록 물결을 다 무찌를 것처럼 호기를 부리지만 정작 수습할 때가 되면 사뭇 초라하다. 그렇게 암팡지게 짜증을 부리던 채리티가 갈 곳이 결국 로열 씨 품밖에 없었다는 건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이지만 너무 초라해서 안쓰럽다. 여름엔 조금 낮아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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