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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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별을 품은 평균 온도 270의 우주는 뜨거운가, 차가운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밝은가, 어두운가. 수묵화의 주인공은 붓으로 그린 부분인가, 여백인가. 기쁘면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은 기억되는 게 좋은가, 지워지는 게 좋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진 많은 것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모두 품는다.

소설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아픈 기억에 대한 상반된 질문에 답을 건네준다. 각기 다른 마음의 얼룩을 품은 이들이 세탁소 사장인 지은을 통해 치유를 받는 에피소드들이 담긴다.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 몽환적인 느낌이다. 얼핏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아픔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다큐멘터리랄까.

현실과 비현실이 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널린 빨래의 표면에서 반복되는 증발과 응결을 떠올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에서 눈에 보이는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수시로 상태가 변하는 물방울의 정체성이 소설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주인공 지은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실현 능력을 잘못 발휘한 소녀는 한순간에 가족을 잃는다. 가족을 찾기 위해 수 세기를 넘나들다 치유 능력을 발휘해야 실현 능력이 발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세운다. 제공한 옷을 입은 손님의 상처가 얼룩으로 드러나면 세탁을 해주거나 주름을 펴고 위로의 차를 만들어 건네주는 게 주인의 역할이다.

드러나는 상처는 제각각이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어머니가 일을 나갈 때마다 느꼈던 외로움을 지닌 재하, 사랑의 얼룩에 아파하는 연희, 인플루언서로 살던 삶을 지우고 싶은 은별, 상처를 기꺼이 안고 가겠다는 재하의 어머니 연자,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던 과거와 인정을 받아야 안도했던 날들과 가족들 때문에 생긴 시간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싶다는 영희.

그들의 얼룩을 지워주는 지은의 얼룩은 항상 입고 있는 검은 바탕의 붉은 꽃무늬로 형상화되어있다. 세탁소 주변에서 따스한 김밥을 건네주는 분식집 사장과 지은의 눈물을 목격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해인이 온기 어린 울타리로 등장한다.

 

마음이 아프면 꺼내어서 얼룩을 지우고 다려서 펴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된다니! 눈물이 마음으로 흘러들어 심장에 얼룩으로 남는 장면을 상상한다. 심장의 얼룩이 다시 마음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상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시각화한 문장을 보니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등장인물들의 눈물이 말라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덩달아 개운해진다.

주인공을 통해 건네는 위로가 따뜻하다. 문제를 끝까지 피하지 않고 겪어낼 것,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낯선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주라는 것,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는 뇌를 속여보라는 것,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나를 모욕한 감정이나 언행을 택배처럼 반품하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손님들을 치유하며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을 깨달은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상처를 치유 받는다. 마음 안 날씨는 나의 것이며 오늘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것. 윤정은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둠이 품은 빛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각기 다른 상황에 위로를 건네는 장면에 봄빛이 맴돈다. 절대적인 능력의 보유자인 지은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도 깔끔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상처가 조명이 되어 나의 상처를 비춘다. 깊은 곳에 숨겨둔 상처, 떠올릴 때마다 매번 울컥한 상처, 시간이 연고가 되어주던 상처. 깊고 얕은 상처들이 얼룩처럼 마음의 바다를 유영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내용은 재하의 어머니 연자가 상처를 대하는 태도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얼룩을 지우지 않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가장 기구한 삶으로 보이는 그녀는 살아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름만 조금 펴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함과 뭉클함이 여운으로 남는다.

컬러링북을 연상시키는 송지혜 작가의 세세한 그림도 좋다. 표지에는 세탁소의 전경을 그리고 본문에서는 중간중간 에피소드가 바뀌는 장면에서 건물의 부분 부분을 다르게 끼워 넣은 발상이 신선하다.

사소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마음이 세탁되는 과정을 묘사한 문장들이 다소 반복되는 듯하다는 거다. 신선한 발상이나 반복된 서술이 이어지니 임팩트가 희석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소설의 전개가 다소 식상해지는 느낌이랄까.

 

프렌치 메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능력이 특별한 전유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마음이 믿는 대로 살아간다면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햇살인 듯 자연스레 마음의 꽃을 피워주리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는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가 담긴 농담 말이다. ‘1단계, 냉장고 문을 연다. 2단계, 코끼리를 넣는다. 3단계, 냉장고 문을 닫는다.’이다. 마음을 꺼내는 데 이 비법을 적용해본다. 마음의 문을 연다. 얼룩진 상처를 꺼낸다. 토닥토닥 말린다. 잘 말린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다만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문을 열고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당신은 무엇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가. 나는 마음이 색채를 잃거나 사막을 품을 때면 글을 쓴다. 빈 문서 1에 내가 정한 크기로 마음을 담은 발자국이 걸어간다. 내가 원하는 속도만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모니터에 펼쳐진 마음을 바라본다. 시린 마음을 덜어낸 자리는 종종 뜨끈해진다. 그 순간, 온기가 심장을 향해 흘러든다. 하얀 바탕 위의 글씨들이 마음의 얼룩인 듯 출렁거린다.



p39, 밑에서 4째줄: 돌아가가면 돌아가면

p130, 밑에서 5째줄: 첫사랑 과 첫사랑과

p139, 13째줄: 세 사람을 ~

p169, 2째줄: 안 가겠더라고요 안 가겠다~

p264, 9째줄: 곁은 지키는 이들 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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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 -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의 유쾌한 반전 라이프
김한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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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나 어둠을 덜어내는 방법이 있다. 글이나 그림 혹은 음악 등 예술로 표현하는 거다. 대상을 꺼내어 눈앞에 놓는다는 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이지 않던 빛이 거리 사이로 스민다. 계속 빛을 쪼이면 어느 순간 발화점에 도달하여 사그라들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가 위로로 다가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의 어둠과 비슷한 색채를 발견하면 물끄러미 시선이 간다. 응시하다 보면 내 심장을 꺼내어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금의 거리두기만 이루어져도 그 틈으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스며든다. 마음을 다독인다.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은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의 유쾌한 반전 라이프 에세이다.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이 된 이야기, 빛을 잃어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빛을 품을 때까지의 여정이 김한솔만의 빛깔로 담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사람이다. 너무 유쾌하고 밝은 모습이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결국 그의 채널을 구독한 나의 눈앞에 이 책이 있다. 띠지에 보이는 햇살 닮은 웃음이 청량하다. “우리는 분명 좋은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라는 문장과 겹친다.

 

멀쩡한 눈을 가졌으니 나는 객관적으로 그보다 낫다. 스스로 묻는다. 과연 나은 상황인가. 자신하기 어렵다. 무슨 생각이 그의 심장에 담겨있길래 사진 속에서 저리 그늘 없는 웃음이 배어 나올까. 슬픔을 원샷하기까지, 매일 맑은 날을 만들기까지 작가가 건너온 시간의 색채가 궁금해진다.

슬픔에 빠져 있던 시절엔 / 누구라도 내게 /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 누군가 나의 슬픔을 먼저 / 알아봐준다면, // 누가 그 문을 살짝만 열어준다면 / 반갑게 나가서 이야기할 텐데. // 그런 내게 어느 날 문득 말을 걸어온 건 / 어둠. // 긴긴 어둠의 / 터널을 지나 // 빛으로 한 걸음, / 한 걸음 걸어 나오며 / 나는 알았다. // 그 시간이 /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 / 무엇인지, // 우리에게 주어진 / 당연하지 않은 선물이 얼마나 많은지. // 이 책은 / 그 긴 이야기의 시작이다. // 이젠 내 삶에 / 어떤 일이 닥쳐도 좋다. //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 두렵기보다 오히려 기대된다. // 또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해도 / 엔딩은 내가 바꿀 거니까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하다. 뭉클한 마음이 정갈해진다. 적절한 그림과 함께 지나니 거대하고 서늘한 숲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벽을 숨 쉬는 나무로 만드는 사람이구나.

 

그의 문장을 빈 종이에 수시로 옮겨 적는다. 눈으로 문장을 좇으며 나에게 말을 건네듯 마음속으로 천천히 따라 읽는다. 계속 걸어가는 사람, 삶이 늘 어둡지만은 않으며 늘 밝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임을 느낀다.

시력 검사용 판에서 가장 큰 글자도 안 보이던 시절이 떠오른다. 30대의 라식 수술로 이후 10여 년은 선명한 세상에서 지낸다. 갱년기를 건너는 요즘 근시 증상이 급격하게 찾아와 진행 중이다. 흐릿하고 갑갑해지는 시야처럼 마음도 덩달아 흐릿해지던 차이다.

여전히 가진 게 많다는 사람, 남은 감각이 네 개나 있다는 사람이다. 그는 목소리와 향기와 발소리 등 가능한 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상대방을 파악한다. 더는 가지지 않은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나의 삶을 반성한다.

이제껏 나는 어떤 감각으로 타인을 파악해왔던가. 눈만 뜨고 있으면 빛이 알아서 들어오니 너무도 쉽게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았던가. 당연하듯 보이는 장면을 마땅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누리고 얼마나 감사함을 품어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나온 삶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찾아가는 열정을 본다. 덩달아 마음이 들썩여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때가 언제더라. 시간은 흐르고 스스로 선택의 폭을 점점 좁히면서 내가 만든 테두리 안에서만 서성이며 살아온 건 아닐까.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람이다. 갑자기 변화된 세상에 빨려 들어간 그는 이유가 아닌 방법을 찾는다. 매일 적응하며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배려가 부족한 세상에 개선이 필요함을 당당하게 외친다.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거리의 점자 블록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점자 수업 선생님이 된 이야기를 읽다 책장을 넘기자 뜬금없이 밤하늘에 벚꽃잎인 양 흩날리는 별 사진이 등장한다. 별들이 점자처럼 보인다. 희망처럼 빛나는 별을 보다 점자를 처음 만든 이가 궁금해진다. 이름 모를 그는 자신이 만든 점자가 장애인의 눈이 되어 별처럼 반짝이기를 바랐으리라.

겉표지 왼쪽에 세로로 나열된 각기 다른 점들을 왼쪽 검지로 느리게 훑는다. 무슨 글자인지 읽고 싶다. 언어 감각도 없을뿐더러 외국어라면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학습 부진 학생의 퀄리티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점자를 배우고 싶다.

 

감각 기관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입구이다. 우리에게는 그 입구가 다섯 군데나 있음을 언제부터 잊고 살아왔을까. 세상과 타인을 인지하는 방법이 이리도 다양한 것을. 하나의 입구만이 막힌 그는 나머지 네 개의 문을 열어 환한 세상을 받아들인다. 삶에 지쳐가는 요즘 유튜브에서 그의 영상을 종종 찾아본다. 마음에 스며든 어둠을 지우개인 듯 지워나간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사람과 무얼 하든 함께하고 싶어 하는 그는 계속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무심하게 휘두르는 섬세한 칼날에 이제는 상처받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듯하다. 책 중간중간에 꾹꾹 눌러쓴 한솔의 글씨처럼 삶을 향해 꾹꾹 내딛어왔을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미래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에 덩달아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마지막 사진이 잔상으로 남는다. 강아지풀을 향해 오른손을 뻗은 한솔씨가 환히 웃고 있다. 손으로는 털의 까슬까슬한 감촉을 느끼고, 코로는 초록의 냄새를 맡으며, 피부로는 부드러운 햇살을 느끼고, 귀로는 살랑살랑 바람 소리를 들었을 그는 네 가지 감각으로 풍성한 세상을 보고 있었으리라. 빛이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빛을 보는 방법을 찾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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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핸드셰이크 -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버네사 우즈 지음, 김진원 옮김 / 디플롯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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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가 뭐예요?”

요즘 읽는 책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직장 동료가 묻는다. 난감하다. 보노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 침팬지스러운데 아주 다른, 몸집이 작은 유인원이라네요.”

빙산의 일각 같은 답을 하면서 영상으로도 본 적 없는 이 작은 동물에게 미안해진다.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설파하고 싶건만 표현력의 한계에 갇힌다.

보노보 이름인가. 서문의 전 장에 말루를 위하여라 적혀있다. 반은 맞았다. 저자의 남편이 아끼던 보노보 이름이면서 저자의 딸 이름이라고 한다.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이길래 딸에게까지 이름을 붙였을까.

다른 동물의 삶을 통해 인간은 어떤 의미를 찾고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사람과 닮은 점이 매우 많다는 이 유인원의 삶이 궁금해진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보노보의 성적 행동을 의미한다. 보노보는 타자를 환대할 때 흥분 상태에서 이런 행동을 보인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진화인류학자인 저자 버네사 우즈가 보노보의 삶을 연구하면서 겪은 체험담이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첫째, 실험으로 밝혀낸 보노보의 삶이다. 같은 진화인류학자인 남편 브라이언 헤어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잔인성에 회의를 느끼다 보노보 연구를 시작한다. 저자와의 만남도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남편과의 만남을 계기로 연구에 동참한 저자의 삶이 보노보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둘째, 콩고 내전이다. 보노보는 특이하게도 콩고민주공화국에서만 산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한 보노보 보호구역인 롤라 야 보노보를 찾아간다. 여러 보노보와 보노보를 돌보는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콩고의 상황이 세세히 묘사된다.

셋째, 저자 개인의 삶이다. 이 책은 함께 진화인류학을 연구하는 부부의 고군분투기이다. 보노보 연구 과정을 배경으로 서술되는 수필이 경쾌하고 소박하다.

 

동물 실험을 통해 인간이 이루어낸 성취는 어마어마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의 몸짓을 분석하여 패턴을 찾아내고 미래의 행동을 예측한다. 다양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침팬지와 보노보의 차이점이 기술된다. 심리학적인 변화를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한다는 건 어찌 보면 무모하지만 그런 시도라도 해보려는 인간의 지적 욕구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평화롭게 방아를 찧는 토끼 문신을 새긴 위성, . 평생 지구에서 떠나지 않는 이는 달의 뒷면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가 같아 한쪽 면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연구의 잔인한 이면을 보며 보름달을 떠올린다. 이제껏 나는 고개만 까딱 들고 달을 바라보며 달 표면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는 인간이지 않았을까.

의료 분과와 현장 분과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실태를 보며 과학적인 연구에 회의를 느낀다. 인간에게 다른 생명을 좌지우지하거나 해할 권리가 있는가. 해부나 동물 실험을 당연하게 여기던 지난날이 밀물인 듯 마음을 철썩철썩 두드린다.

 

침팬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실험 과정을 보는 브라이언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는 철창과 우리라는 공간의 관점이 아니라 선택의 관점에서 대상의 삶을 바라본다. 실험동물들은 학자들이 설계하고 의도한 대로 움직임을 제한당한다. 스스로 갑갑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할까. 동물이 인간보다 하등하거나 둔감하리라 여기는 건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내리는 지극히 편한 가정이 아닌가.

누군가 결정을 해주면 정말 편할 텐데.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던 예전의 나는 종종 이런 바람을 갖는다. 실험 과정에서 선택의 자유를 억압받는 침팬지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참 행복한 고민을 했던 걸까. 나의 바람은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거나 선택지가 둘 다 열려있을 때 할 수 있는 종류의 고민이었음을. 스스로 다시 묻는다. 누군가 결정을 해주는 삶은 누군가의 삶인가, 나의 삶인가. 답은 하나이며 당신의 답과 나의 것은 같다.

갇혀있는 인간은 정상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 가둬놓고 진행하는 동물 대상 실험 결과의 대다수가 혹시 이런 변인 통제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을까.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기 어려우리라.

 

유인원을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 역시 보노보 실험을 하면서 그 종이 인간과 다른 길을 걸어간 이유를 깊이 사유한다. ‘어떤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났을까? 어떤 변화가 나머지 모든 변화로 이어졌을까? 언어였을까? 문화였을까? 지능이었을까?’ 저자의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며 덩달아 생각해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이 침팬지나 보노보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고 그들보다 우수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수함이 잔인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손가락 끝이 잘린, 음경이 잘린, 사타구니 살이 잘린 침팬지들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두 딸의 인육을 먹어 치웠다는 군인들의 행위를 알리고 죽은 자이나보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침팬지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실험 결과와 자이나보의 일화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인간이 드러내는 무자비한 야생성은 본성인가 후천적인가. 인간의 잔인성은 어느 만큼의 한계를 지니는가. 한계가 있기는 한가. 둥둥 떠다니는 물음표에 숨이 턱 막힐 듯 답답하다.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저자의 남편 브라이언은 지극히 자발적인 협력에 초점을 둔다. 이유 없는 관대함이 내포된 행동이다. 그들 부부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침팬지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사람에 가까운 관대함과 협력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실험 결과를 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침팬지는 보노보보다 덜 관대할까? 서로 싸우고 죽이기 때문에 편협함을 배우는 걸까? 아니면 편협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까? (중략)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까? 선천적인 면도 후천적인 면도 조금씩 있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선택지처럼 결론 내리기 모호하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감정생활 비교 실험을 보며 동물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한다. 보노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전쟁에서 자행되는 폭력성에서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을 바라본다. 숭고한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 변질되는 건 뿌리 깊게 놓인 본성 때문일까. 약탈을 일삼는 군인들에게서 핏빛의 비릿함이 훅 끼얹어진다. 후텁지근한 땀 냄새가 섞인 장면을 연상하니 동물과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저자가 실험을 시작한 이유는 유인원과 사람의 차이점을 알기 위함이다. 사람이 그토록 똑똑해진 계기를, 침팬지보다 인간의 본성과 더욱 가까워 보이는 보노보에게 어떤 점이 부족하길래 결정적으로 진화의 가지가 갈라졌는지 궁금해서이다.

결과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고 어느 만화가가 말했다던가. 보노보는 저자에게 훨씬 폭이 넓고 깊은 문제를 안겨준다.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이다. 인간에게는 뛰어난 지능과 찬란한 문명이 있지만, 저자는 보노보에게서 가장 귀중한 걸 발견한다. 평화이다. 콩고 내전을 포함하여 지역만 달리할 뿐 지구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의 참상을 겹쳐보며 깨닫게 된 결론이다.

우리가 과연 보노보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처럼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 말고 하루 10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함께 아우를 때 말이다.

 

보노보를 돌보고 함께 하며 보노보의 삶을 들여다본 저자가 오랜 난제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깔끔하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하는 건 우리다. 하지만 환경이 우리를 빚기도 한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항상 선천적인 동시에 후천적이다.’

애초에 선택형이 아니었던 거다. 여성도 부신과 난소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소량 분비한다지 않은가. 환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생명체는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지니게 되는 것을. 비율의 차이로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이라면 실험을 통해 보였다는 침팬지의 잔인성도 100% 신뢰할만한 결과는 아니리라. 자유로운 자연이 또 다른 변수가 되었을 것이므로.

방사는 모든 보호구역의 꿈이라고 한다. 보호구역에 오는 보노보들은 한결같이 어미 잃은 새끼들이다. 꺼져가는 생명을 돌보는 사람들은 보노보를 보살펴 태어난 숲으로 돌려보내려는 바람을 지닌다. 자연의 일부인 생물을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희망일 터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처럼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지켜지기를 바란다.

 

세상에 독립적인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 드러나는 단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콩고 내전을 묘사한 문장을 따라가며 반성한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오던 전쟁이 원인을 거슬러 가면 나와도 닿아있음을 깨닫는다. 무심코 하는 나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영향을 받는다. 나의 배부름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굶주리는 한 아이의 기아와 무관하지 않듯이.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도 당연히 이어져 있을 터이다. 자연에서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일까. 몇몇 이들은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존재이고, 이는 우리만이 진정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라 여긴다고 한다. 동료 보노보를 잃었을 때 죽은 생명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행동에서 인간의 오만한 선입견을 본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저자의 문장이 짐짓 날카롭다.

저자는 끝내 침팬지도 사랑하게 된다. 그 고집과 힘을 그대로 인정하는 현명한 시각을 갖는다. 보노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보노보와 교감한 결과이다.

 

동물과의 교감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책의 뒷부분에 실린 사진 속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보노보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저자의 곁에 앉아 그녀의 팔을 붙들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동물의 온화한 표정을 응시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화는 여정이다. 아주 작은 변화가 다음 변화로 이어진다.’ 진화인류학자의 관점이 담긴 문장을 지나며 생명을 다시 바라본다. DNA를 통해 물질뿐 아니라 본성까지 전달된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보노보가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고 여기던 이타주의를 지녔음을 입증한 실험 결과를 보며 생명의 신비와 경이를 느낀다. 생명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자연에서 우월한 삶은 없다.

여전히 나는 보노보를 정의하기 어렵다. 고작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감사의 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기억으로 선물을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보노보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삶이 조심스러워졌음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의 무게가 이리도 무거움을 새삼 깨달았다고 천천히 숨을 쉬며 적을 뿐이다.

 

 

p201, 2번째 단락 4째줄: 라돈다 라돈나

p248, 10째줄: 콩코 콩고

p356, 밑에서 8째줄: 못을 못할

p356, 밑에서 4째줄: ‘카카caca 카카caca’

p368, 11째줄: 첨지 참지

p403, 4째줄: 모르다.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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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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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가 보통명사인 듯 회자 되는 삶은 얼마나 뭉클한가. 이름이 포함된 정체성에는 사회적 인정이 담긴다. ‘혜자스럽다는 말이 실물로 구현된 도시락의 출시 소식을 듣는다. 텅 빈 뱃속보다 마음이 더 시린 이들에게 온장고에서 막 꺼낸 양 따끈한 온기를 전해주리라. 만 원을 주고도 한 끼 식사가 만만치 않은 요즘이다. 3,900원짜리 혜자 도시락이 그 탄생 배경만큼이나 특별한 이유다.

TV 프로그램 <유퀴즈>‘김혜자 편의 단편 영상을 본 건 우연이건만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행동과 감사가 묻어나는 말투는 몇 분 동안 많은 메시지를 건넨다. 결국 전체 영상을 찾아 정독하듯 시청한다. 오랜만에 코끝 찡한 시간을 보낸다. 배우 김혜자의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하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생에 감사해는 배우 김혜자의 에세이다. 읽지 않아도 무슨 느낌일지 벌써 알 것 같다. 천천히 산책하듯 걸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한다. 출연작을 중심으로 배우로 살아온 소회와 삶에 대한 열정이 담긴 책이다. 신기한 건 문장을 따라 음성 지원되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습이 책 표지가 되는 사람, 존재가 곧 명함인 사람, 눈가의 주름조차 장면으로 만드는 사람, 표지만 들여다보아도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녀 삶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주어가 김혜자인 추천사. 저자를 스케치한 문장들을 보고 책이 곧 사람임을 깨닫는다. 만남 자체가 선물이 되는 사람이라니!

<유퀴즈>에서 한 말이 대본처럼 고스란히 서술되어 있다. 직접 겪고 느낀 일을 말할 때는 마음에 대본이 새겨지는 걸까. 언제 말하든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연기를 못했던 시절의 회상 장면에서 나는 빙산을 연상한다. 잘함은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며 거대한 아래에는 서투름이 있다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순간 잘함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코오롱스포츠 <오로라>CF 영상을 찾아본다. 자연스러운 몸짓도 진한 감동을 전할 수 있구나. 백상예술대상의 수상소감 영상도 찾아본다. 솔직한 마음이 말간 백자를 보듯 고스란히 화면에 투영된다. 갑작스러운 수상 발표에 당황하는 모습에서, 작품 속 명대사가 적힌 대본을 찢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는 표정에서 소녀 같은 순수와 진심을 본다.

 

간지처럼 중간중간 수록된 사진도 참 좋다. 해맑게 웃는 표정이 많다. 얼굴의 주름이 미소와 함께 아름답다. 배경보다 인물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배우다. 풍부한 표정 자체로 많은 말을 건네기에 한 페이지의 글을 읽고 난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작가 조세현의 사진은 편안하고, 홍장현의 그것은 고혹적이다. 조세현이 담은 표정이 더 끌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표정은 영화 <마더>의 촬영 장면이다. 허허벌판에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어머니. 환하게 웃는 표정보다 허무가 뿜어져 나오는 표정이 강렬하다. 허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시각화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순간 가슴이 턱 막힌다.

종종 나를 따라다니던 허무의 시간을 기억한다. ‘죽고 싶다는 문장을 떠올리던 순간이 조용히 부유한다. <마더>에서의 그녀의 표정을 보며 당시의 마음을 스스로 오역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음을. 질식할 것 같은 잿빛이 버겁다고 간절하게 외치고 싶었음을. 짙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심장을 폭 감싼다. 어떤 감정은 사람의 심장을 몰랑해지게 만든다. 결이 고운 흙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와 심장을 어루만진다.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나서 연기하는 게 전혀 모르고 연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문장에서 글쓰기를 떠올린다. 모든 글이 다큐는 아니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글은 없다고 본다. 경험의 정도에 따라 감정의 깊이 역시 달라지며 어느 순간 살아있는 글이 태어난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에서 작가를 떠올린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몸으로 하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배우의 관점에서 하는 말을 작가의 관점으로 겹쳐 읽는다. 문장을 따라가는 길이 뜨끔하면서 설레고 뜨거워진다.

힘을 뺄 때 의외로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수영이라든지 이 책에서 언급된 연기라든지.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힘을 빼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울림이 큰 문장이 꽃처럼 피어나리라.

좋은 문장은 읽는 사람을 악기로 만든다. 독자의 눈으로 들어온 문장이 손가락이 되어 연주하듯 마음을 울린다. 삶을 노래로 만든다.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싶다. 어정쩡한 일렁임 말고 뭉클에 어울리는 감정의 일렁임을 듬뿍 선사하는 나비종스러운 문장을 꽃인 듯 피우고 싶다.

 

 

p247, 밑에서 5째줄: 것이었습다. ~습니다.

p301, 밑에서 7째줄: 아이였습니 ~.

p301, 밑에서 2째줄: 홀리해성 ~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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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jinjin 2023-04-1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3-04-16 19:00   좋아요 0 | URL
잔잔한 문장만큼 중간에 수록된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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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꿈꾸는 잿빛 시간은 탄성력을 지닌다. 심장을 향해 오가는 파도처럼 철썩이며 굳어가는 심장을 할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결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반복된 생각 끝에는 매번 마침표 대신 도돌이표가 찍힌다.

미래가 올까.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시간을 가늠할 때마다 생각했다. 정말 미래가 올까. 나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가 있을까.

저녁이면 거울 앞에 돌아와 선 누이가 되어 보글보글 된장찌개에 풋고추를 찍어 먹으며 지나온 낮의 이야기들을 액션영화 리뷰하듯 주절거리는 삶. 평범한 저녁의 풍경이라 여기는 일상이 실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비범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삶은 좀 더 진하고 보다 징하다. 거울 앞의 민낯처럼 지질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실이다.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시간을 건너는 인간의 삶에 관한 통찰이 담긴 이야기이다. 2014년부터 2022년까지 문예지 등에 발표한 8편의 단편이 수록된 모음집이다.

소설집을 접할 때면 종종 시간을 거슬러 발표 순서에 따라 작품을 읽는다.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어서이다. 작품마다 색상과 채도는 다르지만, 공통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삶을 숙고하는 시간을 건넨다. 삶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번 책은 전반적으로 평소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야기를 꾸역꾸역 따라가느라 힘이 든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다소 밍밍한 게 종이 씹는 맛이 난다. 찢어진 종이의 절단면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낭떠러지를 만난 기분이다. 모든 수록작을 한데 묶어 결론을 내리는 듯한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만 좋았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독자의 세상은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다. 책 속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향수처럼 마음에 묻어 코팅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을 때 이런 현상은 특히 두드러졌다.

이 소설의 주제는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직접적인 사례로 도박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계속 지면서도 자신의 선택지를 고집한다. 기대하는 미래가 다가올 확률을 예측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만든다. 강하게 공감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 책에서 언급된 메시지의 흔적을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한다. 삶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시점으로 해석되니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 심장 속 메아리처럼 둥둥 울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이 해결책을 알려준다.

 

다소 몽환적으로 전개되는 <재와 먼지>라는 SF소설이다. 동반자살을 결심한 두 남녀가 자살하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다시 체험한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이 시간 여행을 계기로 세 번의 삶을 공유하게 된다.

첫 번째는 그들의 삶이 동시에 끝나기까지의 삶이다. 삶을 사랑으로 도치해도 맥락은 이어진다.

두 번째 삶부터가 환상특급이다. 동반자살을 시작으로 그들의 시간은 날마다 하루씩 당겨진다. 함께 한 경로를 거슬러 간다. 따로 걸어온 시공이 겹치는 첫 만남에 이를 때까지. 내일이 과거이므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삶이다. 최초의 시점에 다다른 두 사람은 서로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는다.

세 번째 삶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른다. 두 번째 삶을 통해 가장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알게 된다.’ 그들의 미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흐르리라.

 

세 번의 삶이 문신처럼 심장에 각인된다. 상상이지만 얼마든지 상상으로 실현이 가능한 삶이다. 현실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이 최근에 런칭한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에 에세이를 업로드하는 분이다.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이 딱 내 취향이다.

식물을 심어 판매하는 일을 하는 이분의 꿈은 제주에서의 삶이다. 꿈이야 누구나 꿀 수 있으며 많은 이들의 로망이 제주이니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다. 평소처럼 글을 읽다가 나는 독특한 작품을 발견한다. 제주에서의 삶이 펼쳐지는 미래를 상상하며 쓴 단편소설이다. 작가의 아바타인 듯 묘사되는 에세이 형식의 글이 꽤나 구체적이다. 작은 충격이었다. 미래를 당겨와서 살아가는 삶이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것만 같은 상상에 덩달아 설렜다.

 

어제는 김연수 작가가 제시한 방법을 따라 해본다.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행동을 한번 해보세요. (중략)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그의 문장대로 일상이 흘러갈까.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려고.”

집에 내려온 아이들을 역까지 배웅하고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온다고 말하는 당신.

그 순간에 작가의 문장을 떠올린 나는 잘 다녀와요.”같이 갈까요?”로 바꾼다.

아이들이 올라가면 커피숍에서 글을 쓰려던 참이다. 계획적인 J가 갑작스레 뛰어든 일정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신과 함께 할 시간이라는 점이다.

 

타이밍은 절묘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시골은 결혼하기 전에 들르던 장소다. 산소로 가는 길은 미래를 알고 두 번째 삶을 사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따사로운 언덕 아래 포슬포슬한 바닥에서 절을 하며, 가는 길에 사 간 막걸리를 단비 드리듯 봉분에 뿌리며, 몸을 일으키다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연둣빛 손톱만 한 새싹을 바라보며, 언덕을 내려오다 누군가 쌓아놓은 흙더미를 보며 순식간에 삼십여 년 전으로 타임슬립을 한다.

인근의 시골집에도 들른다. 여전히 햇살 같은 표정으로 해물짬뽕과 탕수육을 맛깔스럽게 만들어주시는 이모님들 앞의 남녀는 이십 대로 돌아간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 끄트머리에 조는 듯 앉아있는 고양이 위로 옥상에서 빨래 걷는 할머니와 대화하던 수줍은 예비 손주며느리가 겹친다.

쭈그려 앉은 화장실에서 무릎관절염을 실감할 때까지 곳곳에 묻은 흔적들이 새싹인 듯 튀어나온다.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에서 즐겨보는 작품을 읽다가 알게 된 영화가 생각난다. 미래를 알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SF영화이다. 테드 창의 소설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는 영화 <컨택트>에는 7개의 다리를 가진 외계인 헵타포드가 등장한다.

그들의 시간은 지구인의 개념과 다르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전 생애를 볼 수 있다. 삶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과정을 알고 시작하는 삶이다. 마지막이 예정된 삶은 시한부 환자의 애틋한 나날처럼 매 순간 소중하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기에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세 시간 동안 미래의 시점에서 시간을 거스른 듯 시골을 다녀오며 삼십여 년을 압축하여 돌아본다. 출렁이는 파도에 가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을 기억해낸다. 붉은색과 흰색의 양면 패딩에 머리 묶은 여자와 그녀의 눈동자에 환한 햇살을 품게 해주던 남자. 마주 선 두 사람이 미소 짓는 풍경이다.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김연수가 언급한 바다를 떠올린다.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당신과 대화하다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았나. 눈을 뜨면 굽이굽이 산길이, 다시 눈을 뜨면 잔잔한 강물이, 또다시 눈을 뜨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왼쪽에서 느껴지는 온기 너머로 잔잔한 봄의 바다가 펼쳐진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평범한 대화였다. 당신도 역시 그 고양이를 보았구나. 할머님의 무덤 주변에 돋아난 새싹을 보며, 막걸리를 뿌리며, 흙더미를 보며, 같은 짬뽕을 먹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두 사람의 마음이 정오의 시곗바늘인 듯 겹친 평화로운 오후 시간, 두 번째 삶 너머로 세컨드 윈드가 따스하게 불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세 번째 삶이 평범한 미래를 향해 흐른다는 신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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