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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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노볼의 눈처럼 쏟아지는 별밤을 구경해야지. 몽골의 밤하늘이 그렇게 장관이라던데. 인터넷 사진들 말고 눈으로 사진을 찍는 풍경을 꿈꾼다. 퇴직 이후 스스로 선물하는 이벤트를 상상할 때마다 세렝게티를 누비는 야생마라도 될 듯 설렜다. 체력을 키워야 하니 가끔 등산이라도 가야겠어.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다녀올 때면 찌든 피곤도 가벼워졌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인생은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 일이 닥친다. 순간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 서서히 진행되던 과정이 결과를 드러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리라. 작년 가을부터 슬금슬금 무릎이 삐그덕거린다. 동네 병원에서 물리 치료와 주사를 몇 번 맞고 그럭저럭 잊은 듯 지내온다. 드디어 임계점에 도달한 걸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큰 정형외과를 방문한다. MRI 사진을 찍고 3차 대학병원의 상담까지 받는다. 양쪽 슬개골 중앙 부분의 연골이 모두 닳아있다는 현실을 마주한다.

뼈다귀의 선천적 기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부분이 편평하여 둥그스름한 무릎뼈 가운데 부위의 마찰이 지속된 결과라나. 젊었을 때는 근육의 힘으로 지탱하다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 듯하다. 퇴행성 관절염은 노화가 데려오는 인지상정의 현상이다. 문제는 인공관절을 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다.

 

밭일 하셨어요?” 벌써 무릎이 아프다는 말에 친한 지인이 농담을 건넨다. “제조사에 AS 신청해야겠네.” 남편이 농담으로 위로한다. “내일 가서 컴플레인 넣을까.” “..? 50년 쓰고 컴플레인이라뇨, 고객님..” 큰 딸의 단톡방 멘트다. 그래, 반백 년 넘게 사용했으면 많이 사용한 거지. 제각기 가벼운 농담으로 건네는 위로들로 잠시 스노볼 속 눈인 양 마음이 들썩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선고라도 받은 듯 우울감이 마음 전체를 잠식한다.

병원에서 관절염의 근본적 원인 치료제와 골관절염에 좋은 영양제 6개월 치를 준다. 쭈그려 앉기, 양반다리 금지. 10배 정도의 충격을 감당해야 한다니 계단 이용도 자제한다. 한 층을 오르내릴 때도 엘리베이터를 탄다. 학교의 것은 장애인용이라 엄청 느리다. 게다가 틈새를 노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는 녀석들로 인해 더욱 느려터진다. 기다리다 속도 터진다. 마음으로 몇 번이나 왕복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또기다리고다시기다린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업무기동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일도 하기 싫고 근육을 키우라는 운동도 하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뭐든 하기 싫어진다. ‘철학의 위안은 개뿔. 지금이 고고한 형이상학을 논할 때인가? 재생도 되지 않는다는 연골이 무로 돌아간 이 마당에? 형이하학으로 둘러싸인 무연골인의 감성은 온통 삐죽투성이다. 독서 모임만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책을 기대 없이 펼친다.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등 학창 시절 교과서를 한창 누비며 이름깨나 날리던 철학자들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생소하다. 요약본의 업적만 가물가물 기억나는 정도다. 철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들의 철학서에 제대로 접근한 경험이 없다.

철학의 위안위안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자 6명의 사상을 정리한 에세이이다. 건조하고 심오하리라는 편견이 앞섰기에 설마 철학책이 지금의 나를 위로해줄 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저자의 깔끔한 서술과 각기 다른 관점에서 철학자들이 건네는 위로에 마음이 차츰 정돈된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내 실제 사이의 간극이 어느 만큼인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위한 비물질적 요소를 강조한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 줄 누군가의 우정과 자유와 사색을 둘러본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두려워하는 것만큼은 아니라는 세네카의 말에 울컥한다. 어떤 사건들을 바꿀 만한 힘은 없더라도, 사건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주어진다는 말에 큰 위안을 받는다.

신을 죽인 인간으로만 알고 있던 니체에게서 의외의 따뜻한 촌철살인의 관점을 발견한다. 완성된 삶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어려움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던 나는 몽테뉴를 지나면서 이성적 인간 모드가 된다. 학문과 지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평이한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창작은 인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서열이 높다는 말을 깊이 담는다.

사실 여러 책과 화려한 인물들의 말을 인용하는 글을 볼 때마다 내 지식의 초라함을 내려다보곤 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만으로 글을 구성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눅이 들었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몽테뉴의 말에 힘을 얻는다. 내가 쓰는 문장들은 내가 최초이므로 당당히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이 화하게 번진다.

쇼펜하우어는 생에 대한 의지로 이성에게 눈이 멀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언급한다. 세상만사 다 잿빛일 것 같은 철학자가 상심한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뜻밖이다.

이 많은 분량이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이라니! e북 쿠폰으로 구매한 <수상록>의 두께에 압도당했던 나에게 니체의 사상은 희망을 준다. 알랭 드 보통은 이와 관련하여 빽빽한 수정의 흔적들이 보이는 <수상록> 원고 사진을 싣는다. 책이 태어나기까지 치러야 했던 수많은 첨삭과 퇴고를 발견해야 한다는 문장을 곁들인다.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10여 년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니체의 문장은 도전 의지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토닥토닥 책이 건네는 위로는 마음을 덮는 이불인가. 세월을 거슬러 온 말들이 나를 위로한다. 위로의 방식 역시 제각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신문지를 떠올린다. 스스로의 온기로 몸을 데우는 셈이지만 노숙자에게 신문지는 건조하면서 따뜻한 이불로 더없이 뭉클한 존재 아닌가.

알랭 드 보통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불안한 존재들을 위해 6인의 철학자와 이들의 생각을 엮은 작가. 담담한 위로는 지금의 나에게 더없이 적절한 방식이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을 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기로 한다. 잃어버린 관절 말고 얻은 것과 얻을 것을 헤아린다. 계단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장애인의 어려움을 깨닫는 시간을 갖는다. 나와 함께 먼 길을 돌아 걸어주는 동료의 마음을 본다. 내 몸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치킨을 통해 골격 구조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인간과의 유사성에 놀라는 학습자로 빙의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근육운동이다. 내 안에 있어야 하는 줄도 모르던 대퇴사두근과 빗내측광근을 키울 기회를 얻었으니.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지는 못할지라도 근육질녀가 되는 미래가 온다면 몽골의 별밤이 몽골몽골 피어오르는 날도 가능하지 않을까.

 

 

p14, 1째줄: 불안해해거나 불안해하거나

p14, 2째줄: 내비치치 내비치지

p86, 밑에서 7째줄: 상활 상황

p126, 마지막줄: 받을∨∨것이고 받을것이고

p284, 6째줄: 표현했다)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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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2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육운동 꾸준히 하셔서 몽골 초원의 별밤은 꼭 보러가셔야죠!
응원하겠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들에게서도 위안을 받으셨다니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나비종 2023-05-29 17: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리 펴기 운동하면서 감격 중입니다.
보다 많은 내용이 펼쳐져 있지만 다리 병자의 눈에는 온통 다리 병자와 연관된 문장만 눈에 쏙쏙 들어오던 지라. 실제로 읽어보시면 저의 리뷰와 느낌이 많이 다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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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별을 품은 평균 온도 270의 우주는 뜨거운가, 차가운가.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밝은가, 어두운가. 수묵화의 주인공은 붓으로 그린 부분인가, 여백인가. 기쁘면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때가 있다. 아픈 기억은 기억되는 게 좋은가, 지워지는 게 좋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진 많은 것이 모순되는 두 가지를 모두 품는다.

소설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아픈 기억에 대한 상반된 질문에 답을 건네준다. 각기 다른 마음의 얼룩을 품은 이들이 세탁소 사장인 지은을 통해 치유를 받는 에피소드들이 담긴다.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 몽환적인 느낌이다. 얼핏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떠오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아픔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다큐멘터리랄까.

현실과 비현실이 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널린 빨래의 표면에서 반복되는 증발과 응결을 떠올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체에서 눈에 보이는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수시로 상태가 변하는 물방울의 정체성이 소설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주인공 지은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두 가지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실현 능력을 잘못 발휘한 소녀는 한순간에 가족을 잃는다. 가족을 찾기 위해 수 세기를 넘나들다 치유 능력을 발휘해야 실현 능력이 발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세운다. 제공한 옷을 입은 손님의 상처가 얼룩으로 드러나면 세탁을 해주거나 주름을 펴고 위로의 차를 만들어 건네주는 게 주인의 역할이다.

드러나는 상처는 제각각이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어머니가 일을 나갈 때마다 느꼈던 외로움을 지닌 재하, 사랑의 얼룩에 아파하는 연희, 인플루언서로 살던 삶을 지우고 싶은 은별, 상처를 기꺼이 안고 가겠다는 재하의 어머니 연자,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던 과거와 인정을 받아야 안도했던 날들과 가족들 때문에 생긴 시간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싶다는 영희.

그들의 얼룩을 지워주는 지은의 얼룩은 항상 입고 있는 검은 바탕의 붉은 꽃무늬로 형상화되어있다. 세탁소 주변에서 따스한 김밥을 건네주는 분식집 사장과 지은의 눈물을 목격하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해인이 온기 어린 울타리로 등장한다.

 

마음이 아프면 꺼내어서 얼룩을 지우고 다려서 펴고 햇볕에 널어 잘 말리면 된다니! 눈물이 마음으로 흘러들어 심장에 얼룩으로 남는 장면을 상상한다. 심장의 얼룩이 다시 마음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상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시각화한 문장을 보니 마음이 보송보송해진다. 등장인물들의 눈물이 말라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덩달아 개운해진다.

주인공을 통해 건네는 위로가 따뜻하다. 문제를 끝까지 피하지 않고 겪어낼 것,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낯선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주라는 것,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는 뇌를 속여보라는 것,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 나를 모욕한 감정이나 언행을 택배처럼 반품하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손님들을 치유하며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을 깨달은 주인공은 결국 스스로 상처를 치유 받는다. 마음 안 날씨는 나의 것이며 오늘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것. 윤정은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둠이 품은 빛을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각기 다른 상황에 위로를 건네는 장면에 봄빛이 맴돈다. 절대적인 능력의 보유자인 지은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도 깔끔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상처가 조명이 되어 나의 상처를 비춘다. 깊은 곳에 숨겨둔 상처, 떠올릴 때마다 매번 울컥한 상처, 시간이 연고가 되어주던 상처. 깊고 얕은 상처들이 얼룩처럼 마음의 바다를 유영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내용은 재하의 어머니 연자가 상처를 대하는 태도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얼룩을 지우지 않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가장 기구한 삶으로 보이는 그녀는 살아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주름만 조금 펴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단단함과 뭉클함이 여운으로 남는다.

컬러링북을 연상시키는 송지혜 작가의 세세한 그림도 좋다. 표지에는 세탁소의 전경을 그리고 본문에서는 중간중간 에피소드가 바뀌는 장면에서 건물의 부분 부분을 다르게 끼워 넣은 발상이 신선하다.

사소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마음이 세탁되는 과정을 묘사한 문장들이 다소 반복되는 듯하다는 거다. 신선한 발상이나 반복된 서술이 이어지니 임팩트가 희석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소설의 전개가 다소 식상해지는 느낌이랄까.

 

프렌치 메리골드의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능력이 특별한 전유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마음이 믿는 대로 살아간다면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햇살인 듯 자연스레 마음의 꽃을 피워주리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는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가 담긴 농담 말이다. ‘1단계, 냉장고 문을 연다. 2단계, 코끼리를 넣는다. 3단계, 냉장고 문을 닫는다.’이다. 마음을 꺼내는 데 이 비법을 적용해본다. 마음의 문을 연다. 얼룩진 상처를 꺼낸다. 토닥토닥 말린다. 잘 말린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다만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문을 열고 상처를 들여다보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당신은 무엇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가. 나는 마음이 색채를 잃거나 사막을 품을 때면 글을 쓴다. 빈 문서 1에 내가 정한 크기로 마음을 담은 발자국이 걸어간다. 내가 원하는 속도만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모니터에 펼쳐진 마음을 바라본다. 시린 마음을 덜어낸 자리는 종종 뜨끈해진다. 그 순간, 온기가 심장을 향해 흘러든다. 하얀 바탕 위의 글씨들이 마음의 얼룩인 듯 출렁거린다.



p39, 밑에서 4째줄: 돌아가가면 돌아가면

p130, 밑에서 5째줄: 첫사랑 과 첫사랑과

p139, 13째줄: 세 사람을 ~

p169, 2째줄: 안 가겠더라고요 안 가겠다~

p264, 9째줄: 곁은 지키는 이들 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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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 -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의 유쾌한 반전 라이프
김한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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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나 어둠을 덜어내는 방법이 있다. 글이나 그림 혹은 음악 등 예술로 표현하는 거다. 대상을 꺼내어 눈앞에 놓는다는 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이지 않던 빛이 거리 사이로 스민다. 계속 빛을 쪼이면 어느 순간 발화점에 도달하여 사그라들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가 위로로 다가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의 어둠과 비슷한 색채를 발견하면 물끄러미 시선이 간다. 응시하다 보면 내 심장을 꺼내어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금의 거리두기만 이루어져도 그 틈으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스며든다. 마음을 다독인다.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은 시각장애인 유튜버 원샷한솔의 유쾌한 반전 라이프 에세이다. 후천적인 시각장애인이 된 이야기, 빛을 잃어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빛을 품을 때까지의 여정이 김한솔만의 빛깔로 담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사람이다. 너무 유쾌하고 밝은 모습이 작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결국 그의 채널을 구독한 나의 눈앞에 이 책이 있다. 띠지에 보이는 햇살 닮은 웃음이 청량하다. “우리는 분명 좋은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라는 문장과 겹친다.

 

멀쩡한 눈을 가졌으니 나는 객관적으로 그보다 낫다. 스스로 묻는다. 과연 나은 상황인가. 자신하기 어렵다. 무슨 생각이 그의 심장에 담겨있길래 사진 속에서 저리 그늘 없는 웃음이 배어 나올까. 슬픔을 원샷하기까지, 매일 맑은 날을 만들기까지 작가가 건너온 시간의 색채가 궁금해진다.

슬픔에 빠져 있던 시절엔 / 누구라도 내게 /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 누군가 나의 슬픔을 먼저 / 알아봐준다면, // 누가 그 문을 살짝만 열어준다면 / 반갑게 나가서 이야기할 텐데. // 그런 내게 어느 날 문득 말을 걸어온 건 / 어둠. // 긴긴 어둠의 / 터널을 지나 // 빛으로 한 걸음, / 한 걸음 걸어 나오며 / 나는 알았다. // 그 시간이 /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 / 무엇인지, // 우리에게 주어진 / 당연하지 않은 선물이 얼마나 많은지. // 이 책은 / 그 긴 이야기의 시작이다. // 이젠 내 삶에 / 어떤 일이 닥쳐도 좋다. //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 두렵기보다 오히려 기대된다. // 또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해도 / 엔딩은 내가 바꿀 거니까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하다. 뭉클한 마음이 정갈해진다. 적절한 그림과 함께 지나니 거대하고 서늘한 숲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벽을 숨 쉬는 나무로 만드는 사람이구나.

 

그의 문장을 빈 종이에 수시로 옮겨 적는다. 눈으로 문장을 좇으며 나에게 말을 건네듯 마음속으로 천천히 따라 읽는다. 계속 걸어가는 사람, 삶이 늘 어둡지만은 않으며 늘 밝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임을 느낀다.

시력 검사용 판에서 가장 큰 글자도 안 보이던 시절이 떠오른다. 30대의 라식 수술로 이후 10여 년은 선명한 세상에서 지낸다. 갱년기를 건너는 요즘 근시 증상이 급격하게 찾아와 진행 중이다. 흐릿하고 갑갑해지는 시야처럼 마음도 덩달아 흐릿해지던 차이다.

여전히 가진 게 많다는 사람, 남은 감각이 네 개나 있다는 사람이다. 그는 목소리와 향기와 발소리 등 가능한 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상대방을 파악한다. 더는 가지지 않은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나의 삶을 반성한다.

이제껏 나는 어떤 감각으로 타인을 파악해왔던가. 눈만 뜨고 있으면 빛이 알아서 들어오니 너무도 쉽게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았던가. 당연하듯 보이는 장면을 마땅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누리고 얼마나 감사함을 품어야 하는지 모른 채 지나온 삶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찾아가는 열정을 본다. 덩달아 마음이 들썩여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때가 언제더라. 시간은 흐르고 스스로 선택의 폭을 점점 좁히면서 내가 만든 테두리 안에서만 서성이며 살아온 건 아닐까.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람이다. 갑자기 변화된 세상에 빨려 들어간 그는 이유가 아닌 방법을 찾는다. 매일 적응하며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배려가 부족한 세상에 개선이 필요함을 당당하게 외친다.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거리의 점자 블록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점자 수업 선생님이 된 이야기를 읽다 책장을 넘기자 뜬금없이 밤하늘에 벚꽃잎인 양 흩날리는 별 사진이 등장한다. 별들이 점자처럼 보인다. 희망처럼 빛나는 별을 보다 점자를 처음 만든 이가 궁금해진다. 이름 모를 그는 자신이 만든 점자가 장애인의 눈이 되어 별처럼 반짝이기를 바랐으리라.

겉표지 왼쪽에 세로로 나열된 각기 다른 점들을 왼쪽 검지로 느리게 훑는다. 무슨 글자인지 읽고 싶다. 언어 감각도 없을뿐더러 외국어라면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학습 부진 학생의 퀄리티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점자를 배우고 싶다.

 

감각 기관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입구이다. 우리에게는 그 입구가 다섯 군데나 있음을 언제부터 잊고 살아왔을까. 세상과 타인을 인지하는 방법이 이리도 다양한 것을. 하나의 입구만이 막힌 그는 나머지 네 개의 문을 열어 환한 세상을 받아들인다. 삶에 지쳐가는 요즘 유튜브에서 그의 영상을 종종 찾아본다. 마음에 스며든 어둠을 지우개인 듯 지워나간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사람과 무얼 하든 함께하고 싶어 하는 그는 계속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무심하게 휘두르는 섬세한 칼날에 이제는 상처받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듯하다. 책 중간중간에 꾹꾹 눌러쓴 한솔의 글씨처럼 삶을 향해 꾹꾹 내딛어왔을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미래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에 덩달아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마지막 사진이 잔상으로 남는다. 강아지풀을 향해 오른손을 뻗은 한솔씨가 환히 웃고 있다. 손으로는 털의 까슬까슬한 감촉을 느끼고, 코로는 초록의 냄새를 맡으며, 피부로는 부드러운 햇살을 느끼고, 귀로는 살랑살랑 바람 소리를 들었을 그는 네 가지 감각으로 풍성한 세상을 보고 있었으리라. 빛이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빛을 보는 방법을 찾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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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핸드셰이크 -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버네사 우즈 지음, 김진원 옮김 / 디플롯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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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가 뭐예요?”

요즘 읽는 책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직장 동료가 묻는다. 난감하다. 보노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 침팬지스러운데 아주 다른, 몸집이 작은 유인원이라네요.”

빙산의 일각 같은 답을 하면서 영상으로도 본 적 없는 이 작은 동물에게 미안해진다.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설파하고 싶건만 표현력의 한계에 갇힌다.

보노보 이름인가. 서문의 전 장에 말루를 위하여라 적혀있다. 반은 맞았다. 저자의 남편이 아끼던 보노보 이름이면서 저자의 딸 이름이라고 한다.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이길래 딸에게까지 이름을 붙였을까.

다른 동물의 삶을 통해 인간은 어떤 의미를 찾고 무엇을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사람과 닮은 점이 매우 많다는 이 유인원의 삶이 궁금해진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보노보의 성적 행동을 의미한다. 보노보는 타자를 환대할 때 흥분 상태에서 이런 행동을 보인다. <보노보 핸드셰이크>는 진화인류학자인 저자 버네사 우즈가 보노보의 삶을 연구하면서 겪은 체험담이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첫째, 실험으로 밝혀낸 보노보의 삶이다. 같은 진화인류학자인 남편 브라이언 헤어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잔인성에 회의를 느끼다 보노보 연구를 시작한다. 저자와의 만남도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남편과의 만남을 계기로 연구에 동참한 저자의 삶이 보노보와 연결되기 시작한다.

둘째, 콩고 내전이다. 보노보는 특이하게도 콩고민주공화국에서만 산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한 보노보 보호구역인 롤라 야 보노보를 찾아간다. 여러 보노보와 보노보를 돌보는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콩고의 상황이 세세히 묘사된다.

셋째, 저자 개인의 삶이다. 이 책은 함께 진화인류학을 연구하는 부부의 고군분투기이다. 보노보 연구 과정을 배경으로 서술되는 수필이 경쾌하고 소박하다.

 

동물 실험을 통해 인간이 이루어낸 성취는 어마어마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의 몸짓을 분석하여 패턴을 찾아내고 미래의 행동을 예측한다. 다양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침팬지와 보노보의 차이점이 기술된다. 심리학적인 변화를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한다는 건 어찌 보면 무모하지만 그런 시도라도 해보려는 인간의 지적 욕구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평화롭게 방아를 찧는 토끼 문신을 새긴 위성, . 평생 지구에서 떠나지 않는 이는 달의 뒷면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다.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가 같아 한쪽 면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연구의 잔인한 이면을 보며 보름달을 떠올린다. 이제껏 나는 고개만 까딱 들고 달을 바라보며 달 표면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는 인간이지 않았을까.

의료 분과와 현장 분과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실태를 보며 과학적인 연구에 회의를 느낀다. 인간에게 다른 생명을 좌지우지하거나 해할 권리가 있는가. 해부나 동물 실험을 당연하게 여기던 지난날이 밀물인 듯 마음을 철썩철썩 두드린다.

 

침팬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실험 과정을 보는 브라이언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는 철창과 우리라는 공간의 관점이 아니라 선택의 관점에서 대상의 삶을 바라본다. 실험동물들은 학자들이 설계하고 의도한 대로 움직임을 제한당한다. 스스로 갑갑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할까. 동물이 인간보다 하등하거나 둔감하리라 여기는 건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내리는 지극히 편한 가정이 아닌가.

누군가 결정을 해주면 정말 편할 텐데.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던 예전의 나는 종종 이런 바람을 갖는다. 실험 과정에서 선택의 자유를 억압받는 침팬지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참 행복한 고민을 했던 걸까. 나의 바람은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거나 선택지가 둘 다 열려있을 때 할 수 있는 종류의 고민이었음을. 스스로 다시 묻는다. 누군가 결정을 해주는 삶은 누군가의 삶인가, 나의 삶인가. 답은 하나이며 당신의 답과 나의 것은 같다.

갇혀있는 인간은 정상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 가둬놓고 진행하는 동물 대상 실험 결과의 대다수가 혹시 이런 변인 통제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을까.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기 어려우리라.

 

유인원을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저자 역시 보노보 실험을 하면서 그 종이 인간과 다른 길을 걸어간 이유를 깊이 사유한다. ‘어떤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났을까? 어떤 변화가 나머지 모든 변화로 이어졌을까? 언어였을까? 문화였을까? 지능이었을까?’ 저자의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며 덩달아 생각해본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이 침팬지나 보노보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고 그들보다 우수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수함이 잔인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손가락 끝이 잘린, 음경이 잘린, 사타구니 살이 잘린 침팬지들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두 딸의 인육을 먹어 치웠다는 군인들의 행위를 알리고 죽은 자이나보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침팬지가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실험 결과와 자이나보의 일화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인간이 드러내는 무자비한 야생성은 본성인가 후천적인가. 인간의 잔인성은 어느 만큼의 한계를 지니는가. 한계가 있기는 한가. 둥둥 떠다니는 물음표에 숨이 턱 막힐 듯 답답하다.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저자의 남편 브라이언은 지극히 자발적인 협력에 초점을 둔다. 이유 없는 관대함이 내포된 행동이다. 그들 부부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침팬지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사람에 가까운 관대함과 협력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실험 결과를 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침팬지는 보노보보다 덜 관대할까? 서로 싸우고 죽이기 때문에 편협함을 배우는 걸까? 아니면 편협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걸까? (중략) 선천적일까, 후천적일까?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까? 선천적인 면도 후천적인 면도 조금씩 있는 걸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선택지처럼 결론 내리기 모호하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감정생활 비교 실험을 보며 동물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한다. 보노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전쟁에서 자행되는 폭력성에서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을 바라본다. 숭고한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 변질되는 건 뿌리 깊게 놓인 본성 때문일까. 약탈을 일삼는 군인들에게서 핏빛의 비릿함이 훅 끼얹어진다. 후텁지근한 땀 냄새가 섞인 장면을 연상하니 동물과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저자가 실험을 시작한 이유는 유인원과 사람의 차이점을 알기 위함이다. 사람이 그토록 똑똑해진 계기를, 침팬지보다 인간의 본성과 더욱 가까워 보이는 보노보에게 어떤 점이 부족하길래 결정적으로 진화의 가지가 갈라졌는지 궁금해서이다.

결과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고 어느 만화가가 말했다던가. 보노보는 저자에게 훨씬 폭이 넓고 깊은 문제를 안겨준다.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이다. 인간에게는 뛰어난 지능과 찬란한 문명이 있지만, 저자는 보노보에게서 가장 귀중한 걸 발견한다. 평화이다. 콩고 내전을 포함하여 지역만 달리할 뿐 지구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의 참상을 겹쳐보며 깨닫게 된 결론이다.

우리가 과연 보노보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처럼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 말고 하루 10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함께 아우를 때 말이다.

 

보노보를 돌보고 함께 하며 보노보의 삶을 들여다본 저자가 오랜 난제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깔끔하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하는 건 우리다. 하지만 환경이 우리를 빚기도 한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항상 선천적인 동시에 후천적이다.’

애초에 선택형이 아니었던 거다. 여성도 부신과 난소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소량 분비한다지 않은가. 환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생명체는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지니게 되는 것을. 비율의 차이로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이라면 실험을 통해 보였다는 침팬지의 잔인성도 100% 신뢰할만한 결과는 아니리라. 자유로운 자연이 또 다른 변수가 되었을 것이므로.

방사는 모든 보호구역의 꿈이라고 한다. 보호구역에 오는 보노보들은 한결같이 어미 잃은 새끼들이다. 꺼져가는 생명을 돌보는 사람들은 보노보를 보살펴 태어난 숲으로 돌려보내려는 바람을 지닌다. 자연의 일부인 생물을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희망일 터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처럼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지켜지기를 바란다.

 

세상에 독립적인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 드러나는 단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콩고 내전을 묘사한 문장을 따라가며 반성한다.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오던 전쟁이 원인을 거슬러 가면 나와도 닿아있음을 깨닫는다. 무심코 하는 나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영향을 받는다. 나의 배부름이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굶주리는 한 아이의 기아와 무관하지 않듯이.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도 당연히 이어져 있을 터이다. 자연에서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일까. 몇몇 이들은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존재이고, 이는 우리만이 진정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라 여긴다고 한다. 동료 보노보를 잃었을 때 죽은 생명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행동에서 인간의 오만한 선입견을 본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저자의 문장이 짐짓 날카롭다.

저자는 끝내 침팬지도 사랑하게 된다. 그 고집과 힘을 그대로 인정하는 현명한 시각을 갖는다. 보노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보노보와 교감한 결과이다.

 

동물과의 교감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책의 뒷부분에 실린 사진 속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보노보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저자의 곁에 앉아 그녀의 팔을 붙들고 머리칼을 쓰다듬는 동물의 온화한 표정을 응시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진화는 여정이다. 아주 작은 변화가 다음 변화로 이어진다.’ 진화인류학자의 관점이 담긴 문장을 지나며 생명을 다시 바라본다. DNA를 통해 물질뿐 아니라 본성까지 전달된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보노보가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고 여기던 이타주의를 지녔음을 입증한 실험 결과를 보며 생명의 신비와 경이를 느낀다. 생명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자연에서 우월한 삶은 없다.

여전히 나는 보노보를 정의하기 어렵다. 고작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감사의 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기억으로 선물을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보노보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삶이 조심스러워졌음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의 무게가 이리도 무거움을 새삼 깨달았다고 천천히 숨을 쉬며 적을 뿐이다.

 

 

p201, 2번째 단락 4째줄: 라돈다 라돈나

p248, 10째줄: 콩코 콩고

p356, 밑에서 8째줄: 못을 못할

p356, 밑에서 4째줄: ‘카카caca 카카caca’

p368, 11째줄: 첨지 참지

p403, 4째줄: 모르다.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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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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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가 보통명사인 듯 회자 되는 삶은 얼마나 뭉클한가. 이름이 포함된 정체성에는 사회적 인정이 담긴다. ‘혜자스럽다는 말이 실물로 구현된 도시락의 출시 소식을 듣는다. 텅 빈 뱃속보다 마음이 더 시린 이들에게 온장고에서 막 꺼낸 양 따끈한 온기를 전해주리라. 만 원을 주고도 한 끼 식사가 만만치 않은 요즘이다. 3,900원짜리 혜자 도시락이 그 탄생 배경만큼이나 특별한 이유다.

TV 프로그램 <유퀴즈>‘김혜자 편의 단편 영상을 본 건 우연이건만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행동과 감사가 묻어나는 말투는 몇 분 동안 많은 메시지를 건넨다. 결국 전체 영상을 찾아 정독하듯 시청한다. 오랜만에 코끝 찡한 시간을 보낸다. 배우 김혜자의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하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생에 감사해는 배우 김혜자의 에세이다. 읽지 않아도 무슨 느낌일지 벌써 알 것 같다. 천천히 산책하듯 걸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한다. 출연작을 중심으로 배우로 살아온 소회와 삶에 대한 열정이 담긴 책이다. 신기한 건 문장을 따라 음성 지원되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모습이 책 표지가 되는 사람, 존재가 곧 명함인 사람, 눈가의 주름조차 장면으로 만드는 사람, 표지만 들여다보아도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녀 삶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주어가 김혜자인 추천사. 저자를 스케치한 문장들을 보고 책이 곧 사람임을 깨닫는다. 만남 자체가 선물이 되는 사람이라니!

<유퀴즈>에서 한 말이 대본처럼 고스란히 서술되어 있다. 직접 겪고 느낀 일을 말할 때는 마음에 대본이 새겨지는 걸까. 언제 말하든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연기를 못했던 시절의 회상 장면에서 나는 빙산을 연상한다. 잘함은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며 거대한 아래에는 서투름이 있다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순간 잘함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코오롱스포츠 <오로라>CF 영상을 찾아본다. 자연스러운 몸짓도 진한 감동을 전할 수 있구나. 백상예술대상의 수상소감 영상도 찾아본다. 솔직한 마음이 말간 백자를 보듯 고스란히 화면에 투영된다. 갑작스러운 수상 발표에 당황하는 모습에서, 작품 속 명대사가 적힌 대본을 찢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는 표정에서 소녀 같은 순수와 진심을 본다.

 

간지처럼 중간중간 수록된 사진도 참 좋다. 해맑게 웃는 표정이 많다. 얼굴의 주름이 미소와 함께 아름답다. 배경보다 인물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배우다. 풍부한 표정 자체로 많은 말을 건네기에 한 페이지의 글을 읽고 난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작가 조세현의 사진은 편안하고, 홍장현의 그것은 고혹적이다. 조세현이 담은 표정이 더 끌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표정은 영화 <마더>의 촬영 장면이다. 허허벌판에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어머니. 환하게 웃는 표정보다 허무가 뿜어져 나오는 표정이 강렬하다. 허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시각화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순간 가슴이 턱 막힌다.

종종 나를 따라다니던 허무의 시간을 기억한다. ‘죽고 싶다는 문장을 떠올리던 순간이 조용히 부유한다. <마더>에서의 그녀의 표정을 보며 당시의 마음을 스스로 오역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음을. 질식할 것 같은 잿빛이 버겁다고 간절하게 외치고 싶었음을. 짙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심장을 폭 감싼다. 어떤 감정은 사람의 심장을 몰랑해지게 만든다. 결이 고운 흙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와 심장을 어루만진다.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나서 연기하는 게 전혀 모르고 연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문장에서 글쓰기를 떠올린다. 모든 글이 다큐는 아니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글은 없다고 본다. 경험의 정도에 따라 감정의 깊이 역시 달라지며 어느 순간 살아있는 글이 태어난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에서 작가를 떠올린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몸으로 하는 것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배우의 관점에서 하는 말을 작가의 관점으로 겹쳐 읽는다. 문장을 따라가는 길이 뜨끔하면서 설레고 뜨거워진다.

힘을 뺄 때 의외로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수영이라든지 이 책에서 언급된 연기라든지.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힘을 빼고 감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울림이 큰 문장이 꽃처럼 피어나리라.

좋은 문장은 읽는 사람을 악기로 만든다. 독자의 눈으로 들어온 문장이 손가락이 되어 연주하듯 마음을 울린다. 삶을 노래로 만든다.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싶다. 어정쩡한 일렁임 말고 뭉클에 어울리는 감정의 일렁임을 듬뿍 선사하는 나비종스러운 문장을 꽃인 듯 피우고 싶다.

 

 

p247, 밑에서 5째줄: 것이었습다. ~습니다.

p301, 밑에서 7째줄: 아이였습니 ~.

p301, 밑에서 2째줄: 홀리해성 ~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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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jinjin 2023-04-1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이 책을 읽고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비종 2023-04-16 19:00   좋아요 0 | URL
잔잔한 문장만큼 중간에 수록된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