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싫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하고 두렵다

모르는 업무라서일까
나이듦에서일까
핑계에 불과할 이유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열정을 녹여버린다

후두둑 떨어지는 의욕들이
스르륵 바닥으로 스민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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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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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상대라 여겼던 사람이나 매력적인 이들을 발견했을 때 종종 생각했다.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참 다행이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행복한 공기처럼 스며들 때면 마음은 풍선인 양 두둥실 부풀어 올랐다. 그들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았던 걸까. 의외의 책에서 답을 찾았다.

 

포르투갈 작가의 문체는 생소했다. 재미는 둘째치고 481개의 텍스트를 지나오는 동안 몇 번씩 뒷걸음질을 치며 되돌아갔다. 당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다가 양손으로 덩어리를 쭉 늘렸는데 탄력이 없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긴 문장을 꾸역꾸역 따라가다 주어가 뭐였더라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영어의 관계대명사를 배울 때가 생각났다. 어디까지가 주어인가를 끊어내는 게 문장 해석의 열쇠였지. 중간에 훅 들어온 그노무 문장 덩어리가 핵심 내용을 파악하려는 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군데군데 찍혀 있는 쉼표는 오히려 문맥을 파악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불안의 책.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불안 불안했다. 중간에 집어 던져버리지 않을까 심히 불안했으니 제목은 참 적절하다 싶었다. 뭐 어쨌든 읽기는 다 읽었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니. 하하하. 가려진 커텐 틈 사이로 인간 내면의 심오한 성찰이 숨어있는 책이던가. 늪에서 건져 올린 양 음습하고 칙칙한 포스를 뿜어내는 문장들이 불안한 냄새를 풍기며 펼쳐졌다. 무기력, 공허, 불안, 무능, 절망, 권태. 온통 마이너적인 색채의 문장들을 접하며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듯 했다. 방황하는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 속에서 어느 순간 텅 비는 허허로움을 보았다. 음지에 자리한 인간의 감성을 생각했다. 영혼에도 깊이가 있다면 햇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서 건져 올리는 인간의 본성이 이와 닮았을까.

 

609페이지를 건너 작가의 연보까지 읽고 잠시 멍해졌다. 묘한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꿈을 꾸는 것이다.(p294)’ 페소아에 끌려 꿈을 꾸다 온 걸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p26)’ 나의 무의식에도 그가 느낀 감성이 담겨있는 걸까. 그렇다면 익숙해야 할 텐데 생경한 느낌도 있다. 작가만이 느낀 감성이라면 이해하기 불가능할 텐데 또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익숙한 맛, 생소한 맛이 섞여 있는 반반 치킨 같다. 익숙함과 생소함의 적절한 배합이 독자를 이끄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마주한 감성을 표현하느냐, 표현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까. 내용의 절반이나 제대로 이해했나 싶다. . 몰이해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압도하는 묵직함과 인상 깊은 정서는 선명하게 새겨진다. 그의 책을 읽은 후로 나와 타인과 시와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도 바라보게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페소아는 그 중 으뜸인가. 47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십 명의 다른 이름을 통해 복수의 존재를 추구했다는 사람이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네.(p64)’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본 것들을 떠올려본다. 작가가 본 것은 얼마나 컸을까. 보는 것이 많아 글을 통해 그렇게 다양한 인격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킬미힐미>에서 배우 지성이 연기했던 다중인격이 과연 특이한 사례일까. 온종일 같은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으리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쁘고, 슬프고, 설레는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256색상환 같은 감정들은 무수한 조합으로 나의 일상을 채운다. 페르소나 속에 나를 숨기기도 한다. 제어 가능한 탄력성으로 언제든 디폴트값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다중적인 인격들을 조금씩은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독특했다. ‘타인이란 우리에게는 그저 풍경일 뿐인데, 대체로 너무 익숙한 거리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다.(p397)’ 스스로가 가구처럼 느껴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저 방 한구석에 물끄러미 놓여있어 새삼 찾기 전까지는 시선이 가지 않는 대상. 정서적인 교류 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처럼 말이다. 그저 풍경,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은 이런 느낌 비슷할까.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할까. 한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접촉과 대화를 통해 나를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p51)’이란 문장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는 사람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감각이 강아지풀의 솜털처럼 민감해졌다. 흑백 사진 같은 정서가 느리게 흐르는 그의 글을 따라가며 의 본질을 감각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서서 온 감각을 동원하여 빛깔, 소리, 냄새, 감촉, 맛을 구현한다. 순간의 느낌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마음이 찰칵! 셔터를 누른다. 나름대로 정의해본다. 시란, 글로 찍는 스냅 사진이라고.

 

세상은 여러 가지 사물을 품는다.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교차하여 한 사물을 이루는데 이는 물질의 양,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 사물이 놓인 환경이다.(p81)’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변수가 되는 요소는 해석하는 방식일 터이다.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경이로운 것이 되거나 방해물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길이 되거나 문제가 될 수도 있다.(p124)’,‘삶이란 본질적으로 정신 상태이기에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길 때 가치 있는 것이고, 가치 평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p126)’ 엘리베이터 안이 설렘의 공간이 될 수도,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사물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다면 온통 다른 의미로 채워진 세상을 같은 세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비눗방울로 그려졌다. 한 통 안에 있는 비눗물이지만 후~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순간, 그들은 각기 다른 공간을 유영하며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p333, 2번째 단락 2째 줄 : 내 조국은 포르투갈어다. ~ 포르투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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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는 사이일까요, 아닐까요? ! 여기에서 우리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부르짖는 특별한 '우리'가 아니라, 나 너 우리의 1인칭 복수대명사입니다.ㅎㅎ

마스크 몇 번 벗었다 했다 하다가 한 달이 휙 지나갔어요. 2020의 나비종 미션 중에 여행하며 싸돌아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월 1회 편지쓰기는 지키고 싶어서요. 2월의 마지막 날, 누구에게 쓸까 생각하다 물감님을 떠올렸습니다.

방금 물감님의 공간에 들어 갔다 왔는데요, 여전히 바쁘신가 봅니다. 책과 관련된 공간에서는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맞지만, 어찌 보면 인간도 연재 중인 한 권의 책이므로 짧은 기간 동안 제가 읽은 물감이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우선 물감님의 공간에 대하여 제가 평소에 받았던 느낌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배경화면. 깔끔해서 마음에 듭니다. 이것저것 잡다한 장면없이 찍힌 흑백의 설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북플로만 들어갔다가 언젠가 노트북으로 접속해서 보았는데요, 보는 순간 아!! 했었죠.

둘째, 블로그 주소명.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loveoctave. 처음에는 이런 단어가 있나 싶어서 무슨 뜻일까 검색해보았어요. ‘단어의 철자가 정확한지 확인해 보세요.’라 뜨더군요. 철자를 잘못 입력했나 알파벳 하나하나 다시 보았습니다. 혹시 띄어쓰는 걸까? 다시 해보아도 *이버 어학사전에는 없는 걸 보니 만드신 거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어요. 무슨 의미일까. 옥타브란 8도의 완전한 음정이죠. 화학에서 나오는 oct8개의 전자가 둘러싼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하니 사랑에 대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의 모든 스펙트럼을 의미하는 걸까.

셋째, 사진 아래에 있는 Deep than love 란 문구. 사랑보다 깊은... 이라. ! 이분은 사랑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신 분이구나 했습니다.

넷째,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배경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휭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바람이란 게 원래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속성을 지녔는데 그게 머무는 곳은 찰나의 의미를 갖는 장소라는 것이겠죠. 순간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이기에 아쉬운 마음도 덩달아 공존하리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삶도 이런 속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공간의 정체성이 이렇다면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시겠구나 했어요.

다섯째, 카테고리. 물감님의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닮았습니다. 리뷰와 페이퍼를 묶어서 온리원! 군더더기없이 깔끔해요.

여섯째, 사진. 혹시 배우 공유인가요? 한쪽 눈과 코만으로 판단하기에 몹시 헷갈리는군요.ㅎㅎ

 

작년 4, 농담처럼 지나가듯 고전독서모임에 대한 언급을 댓글로 달았지만 실은 지나가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같이 하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이분이라면 어느 정도 코드가 맞는 부분이 있으니 즐겁게 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던져본 멘트였다는 ㅋㅋ 다음 날, 바로 댓글을 달아주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작년에 제가 제일 잘한 일 중 하나입니다. 덕분에 혼자라면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들을 읽게 되었구요. 또 덕분에 제 감성과 영혼이 풍성해졌답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이어져 온다는 게 신기하고 많은 의지가 되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뜬금없이 물감님께 편지를 쓰면서 생각했어요. 물감님과 나비종은 아는 사이일까, 아닐까? 파고 들어가면 매우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무엇을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최소한의 임계점은 무엇인가.

저는 오감을 중심으로 하나 하나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이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청각은 아니고, 냄새를 맡은 적도 없으니 후각도 아니고, 먹는 게 아니니ㅋㅋ 미각도 아니고, 만져본 적이 없으니^^; 피부감각도 아니고. 얼굴을 본 적도 없으니 시각도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생판 남도 아니란 말이죠.

멋진 목소리, 좋은 향기, 부드러운 감촉, 흐뭇한 비주얼은 마음을 설레게 하죠. ! 둘째 아이는 배우에 열광하는 저를 보고 엄마 자식보다 어린데 뭔 오빠냐며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지만, 뭐 제가 어찌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관상용인 거죠.^^;

오롯이 글자만으로 이어진 관계는 어떤 걸까요. 글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니 굳이 끼워 맞추자면 짝퉁 시각이랄까요. 생각해보니 너무 신기한 거예요. 서로의 글을 읽고 그것만으로 생각을 나누며 이어진 관계인 거잖아요. 앞에서 언급한 감각들은 1초도 안되는 순간에 훅 마음에 들어오는 데 반해서 글로 이어지는 관계는 오래 보아야, 자세히 보아야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천천히 한 땀 한 땀 수공업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장인 정신이 스며든달까요.ㅎㅎ

오래 이어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30대이실 물감님과 50대인 저와의 나이 차의 갭이 있지만, octave를 아우를 수 있는 매개체가 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종종 버거워질 때 가끔씩 들러서 쉬어갈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공통분모로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로요.^^

 

언제 저의 공간에 들르실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지친 어느 날 이 편지를 읽게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어느 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시간에 여유가 생기셨거나 위로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참 다행이구요, 후자라면 물감님은 충분히 멋진 분이시니 지금부터 다시 잘 해내실 수 있을 거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근거가 뭐냐구요? 나비종 근처에는 후진 찌질이가 몰려들지 않거든요. 은근 취향이 있어서 개나 소에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인간이라서요.ㅋㅋ 3월에 토끼로 달려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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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3-0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나비종님. 오랜만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신없는 요즘이라 독서는커녕 알라딘에도 자주 들어오지 못하고 있어서 편지를 이제 보았네요ㅠㅠ 이런 정성담긴 편지를 받아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랜만이라 기분이 새롭네요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매월 진행하는 독서모임은 잊지 않고 있어요 다행히도...ㅎㅎ

누군가가 저를 디테일하게 분석해준 일은 처음이네요. 타인의 눈에 제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게 되어 신기하고도 재미있었습니다^^ 배경사진과 짧은 문구들로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글의 힘이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 힘을 가진 글로써 유대관계를 맺은 사이는 얼마나 더 위대할까요. 흔히 음악은 만국의 공통언어라고 하죠. 국적과 인종이란 벽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매개체. 근데 저는 글도 비슷하다고 봐요. 진심이 담긴 글은 생판 모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마음도 훔쳐오는걸 보면요. 그래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기막히게 잘쓴 편지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고 연애하는 케이스가 흔했었죠 ㅋㅋㅋ

아, 사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제 스스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대충은 맞아요. 늘 시니컬한 문체로 리뷰를 써서 안그래보이겠지만 사실은 되게 감성적이고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요. 제 삶의 중요도 1순위는 ‘사람‘이에요. 세월이 가고나면 정말 친한 사람들만 곁에 남게 되는데요.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아낌없이 마음 퍼주는 성격입니다. 사랑이 별 거 없더라구요. 내가 가진거 안에서 나눠주면 그게 사랑이고, 주는 만큼 언젠가 돌아오더라구요. 아닌 케이스는 저절로 멀어지구요. 그래서 내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는 편입니다. 그것은 온라인에서 맺어진 사이라도 마찬가지구요^^

많은 분석을 해주셨는데, 그중에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만 코멘트를 달아볼게요. 지금은 나비종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가깝지만, 저 문구는 싸이월드를 하던 학창시절부터 사용해왔었어요. 그때는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받고 배신도 당하고 그랬어요.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나를 떠나갈까,하며 자책하곤 했었죠. 말씀대로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는 기분속에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남들이 인맥쌓기에 투자할때 저는 인연을 유지하는데에 정성을 다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과거의 아픔들은 많이 치유가 되고,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갖게 되었네요. 주신 편지글로 저를 돌아보게 되어 기쁩니다 ㅎㅎ

우리는 아는 사이가 맞습니다! 여러번 만나도 어색한 사람이 있고, 1년에 한번 봐도 편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한달에 한번 글로 만나는 사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걸 보면 답이 나오는거 같은데요? ㅋㅋㅋ여하튼 힘들고 지쳐있는건 아니기에 걱정안하셔도 됩니다. 3월은 여유좀 내어서 독서도 하고 리뷰도 올리고 해야겠어요. 그러면 달려라 토끼 리뷰로 또 만나요 ㅎㅎㅎ

나비종 2020-03-08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순전히 제 취향인데요, 제가 비밀 댓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비밀‘트라우마 비스므리한 것이 있어서요. 비밀 댓글이 달리면 그닥 반갑지 않거든요. 물감님의 댓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예요. 거리낄 것 없이 드러내는 댓글의 당당함이랄까요.ㅋㅋ 아! 물론 나물 모임의 영업상 비밀이 생긴다면 그건 당연히 비공개인거구요. 흠!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요.
언젠가 제가 비밀 댓글을 싫어하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았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그런 댓글을 주고 받을만한 관계는 맺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아닐까 하구요~ㅎ

편지 프로젝트에 답글을 받고 감격 중입니다. 1월에는 법륜 스님께 썼거든요.ㅋㅋㅋㅋ

생활하면서 직업의 특성이 반영되나봐요. 과학의 기본은 ‘관찰‘과 ˝왜?‘이거든요. 가끔 어떤 대상을 이런 식으로 요리조리 살펴보게 되다보니...^^;
음악이나 글의 속성에 대한 말씀에 공감해요. 확장하면 그게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울림으로 인한 연결이요.^^
가끔 스마트폰 이전의 세상을 떠올려요. 손편지도 꽤 매력적인 연결의 매개체였는데 말이죠. 손편지 한 번 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해요.

리뷰에서도 감성과 낭만이 보이긴 해요. 음, 주요 문장들은 아니고, 이를테면 꽃등심의 마블링처럼?ㅎ
제 삶의 중요한 목적은 한때 ‘사랑‘이었어요. ㅁ이 아니고 ㅇ받침이요. 지금은 잠시 표류 중이구요.^^; 아! 내 사람에게 다줄거야는 저와 비슷하십니다!ㅋㅋ 음, 내 사람이 아니라도 그냥 지 혼자 신나서 필 꽂혀서 퍼주면 나중에는 돌아오더라구요. 그래서 소름이 돋았던 경험이 몇 번 있었어요.

인연을 유지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직도 정의내리기 어려운 변수들이 속속들이 있어서 방정식의 해를 구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도 많은 만남들을 통해 남는 건 있더라구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한 사람의 우주를 품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게 되더라구요.

이렇게 명쾌하게 ‘아는 사이‘로 정의내려주시다니!ㅋㅋ 하긴 고딩 짝꿍 때부터 이어져온 절친과는 1년에 딱 2번 연락하거든요. 서로의 생일 때요. 근데 정말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ㅎㅎ
음! 맞아요. 물감님과 댓글로 마음을 나누다보면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아는 사이가 맞네요.ㅎㅎ 어색하지 않으니 자꾸 댓글이 길어지나봐요. 수다 떨듯이~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원래 과묵한 캐릭터이거든요.
힘들고 지쳐있으신 게 아니라니 기분이 좋습니다. 요즘 저는 마음이 살짝 복잡해지고 긴장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독서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 중이예요. 언제 출발 신호가 떨어질지 몰라 출발선에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분이거든요. 다른 독서모임 책 먼저 읽고, 토끼 따라 잡을게요~ 잘 지내세요.^^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 우아하고 지혜롭게 세월의 강을 항해하는 법
메리 파이퍼 지음, 서유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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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격변이라 할 만한 일들이 몰아쳤다. 막내가 다른 지역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3월부터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근무처로 발령이 났다. 남편은 6개월 무급 휴직을 냈다. 새로운 학교에서 5년 만에 담임을 맡게 되었다. 맡아본 적 없던 생소한 업무도 하게 될 예정이다. 여러 가지 준비와 정리들로 마음이 덩달아 복잡했다.

눈길 닿는 곳에 두었건만 책 한 장 들여다볼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사 후 일주일가량 집 정리를 하다 문득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집안 곳곳 자리를 잡지 못해 쌓여있는 짐들을 뒤로하고 무작정 낯선 커피숍을 향했다. 중요한 시기에 이 책을 펼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을 몸으로 감지하며 업무능력도 덩달아 떨어지는 것만 같아 자신감이 조금씩 낮아지는 중이었다. 신학년 준비를 위해 새로운 학교로 가서 교과협의회를 하면서 4명 중 가장 연장자임을 깨닫고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이들도 동료들도 나이 든 교사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겠지. 젊었을 때는 쉽게 할 수 있던 일도 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기억력도 점점 예전 같지 않다. 하아! .

메리 파이퍼가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라고 말한 이유가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50대 초반에도 나이의 무게감이 부담스러운데 70대 작가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제목으로 드러낼 만큼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원제는 <Women Rowing North>로 북쪽으로 노를 젓는 여자들이란 뜻이다. 북두칠성이 죽음을 상징하듯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는 방향이다. 태양이 지나지 않는 방향이라 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나. 노를 젓는 행위는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죽음을 향해 주도적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표명한다. 일러두기에는 이 제목이 긍정적인 태도와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적혀있다.

나는 ‘Getting Older Getting Better’라는 부제도 좋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좋아진다니. 얼마나 희망적인 메시지인가. 숙성될수록 깊어진다는 와인의 맛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인디언 추장처럼. 낡아가는 게 아니라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시각이 좋았다.

임상심리학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낸 이 책은 420장으로 구성된다. 본인과 주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다. 한데 속도감은 묵직하고 느리다. 여러 사람의 모습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나를 짚어보고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시간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은 나이 듦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민과 갈등을 넘어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준다. 각 부의 제목 옆에 있는 4개의 문구를 차례로 연결하면 저자가 말하는 핵심에 닿는다. ‘비록 이 여행이 쉽진 않을지라도,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함께 노를 저을 사람이 있다면, 우린 언제든 좋은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지

 

사람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한다. 이때 자극은 외부에서 주어지므로 선택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은 선택 가능한 영역이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극-반응의 세트로 삶의 무늬가 그려진다면, 반응 양상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 반응을 태도로 해석한다. 똑같은 사건이 발생해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 태도가 누적되면서 삶이 고유성을 띠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태도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은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와 계획이다.(p34)’,‘올바른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낯선 상황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p39)’,‘태도는 상황을 이긴다.(p166)’,‘태도는 의식을 바꾼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신경 써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p200)’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았다. ‘한 사람의 철학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선택을 보는 것이다.(p164, 엘리너 루스벨트)’ 가까운 친구들이 했던 선택들이 떠올랐다. ! 이 친구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새삼스러웠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지금까지 했던 선택을 돌아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참 멋진 선택이었어! 우쭐하다가도 이건 좀 비겁했어! 소심해지기도 했다.

요즘 나의 최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도 생각났다. 드라마의 선택 상황을 복기해보니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문장이다 싶었다. 그 멋진 남자의 철학은 매번 소신 있는 선택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가락을 살짝 벤 적이 있다. 물에 닿을 때마다 쓰라려서 밴드를 감고 다녔다. 겨우 손가락 끝인데 그 이물감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멀쩡한 손가락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 며칠이었다.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 못했던 몇 달 동안은 무심코 외치던 만세 액션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더랬다. 아플 때마다 당연한 몸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음을 반성하게 된다.

고통을 말하는 작가의 문장은 삶으로의 확장 버전이다. ‘고통이 없다면 인생의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p40)’,‘많은 것을 빼앗아갈수록, 공감과 감사를 담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은 더욱 넓어진다.(p41)’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마음의 고통까지도 기꺼이 깊은 의미로 수용해야 함을 시사한다.

 

삶을 단순하게, 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팁까지 장착한 나는 행복한 기억 하나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매일 행복한 기억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p81~82)’

글자 하나가 키보드 버튼 하나 만한 동화책과 큰아이가 남기고 간 인터넷 소설을 처분하기로 했다. 어둠의 장소 구석에서 먼지로 연명하던 책들이다. 알라딘 중고에서도 매입 불가로 뜨는 녀석들을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했다. 대략 15kg였다. 캐리어를 펼치고 꾸역꾸역 넣었다. 오다가다 발견한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이렇게 묵직한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나?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며 기대에 부풀었다. 음하하! 버리면서 돈도 생기니 일석이조로군!

빈 캐리어를 통통 끌고 오며 또 웃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한 대가는 천 원이었다! 처음에는 아저씨가 계산을 잘못하셨나 했다. 다시 보니 조그만 화이트보드에 종이의 가격이 50, 70원 등으로 적혀있다. 집에 와서야 인터넷 검색으로 폐지 대란을 알았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눈물 등 관련 기사들을 읽다 보니 천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참,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알려주는구나. 세상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엿보면서 내가 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나비인 듯 가볍게 흩날리는 보랏빛 꽃잎. 표지에 코끝을 들이대면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날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것은 나에게 날아든 라벤더와 같은 행운이었다. 책을 읽을수록 무엇이 내게 중요한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과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제쳐 두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p185)’ 오늘만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까지 들고 있으려니 삶이 그리 무거웠던 거다. 공감했던 문장이 가장 많았던 10장의 제목처럼 좋은 하루 만들기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환경이 한꺼번에 바뀌어서 멘붕이 올 만했건만 따뜻한 손길 같은 문장들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해 그저 하루 치의 용기만 내면 되는 거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환경을 마주할 담담한 용기가 생겼다.

 

 

p101, 마지막 단락 : 나를 그에게 나는 ~

p178, 3번째 단락 : 무엇인 필요한지 무엇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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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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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모자, 애꾸 안경, 쾌감까지 투척했던 괴상한 도둑이 마음을 훔치는가 하면 담배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베레모를 쓴 탐정이 맞불을 놓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옛날의 나보다 훨씬 더 자란 아이와 시리즈물로 극장판까지 등장한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았던 기억까지. 추리 소설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모리스 르블랑,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아오야마 고쇼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은 어린 나에게 동화책처럼 친숙한 장르였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추리 소설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는 표현이 적합하리라.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는 인간처럼 나는 의지를 갖고 그 방면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청난 다작이 놀랍기만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사람이 죽지 않는 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 했던가. 대가리보다 큰 다이아몬드나 미술 작품을 순삭하는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의 추리 소설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피 질질 흘리며 엎어져 널브러진 장면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음산한 BGM이 귓가에 윙윙 울리는 듯하다. 추리물은 껍데기부터 무서웠다. 책을 들고 다니면 표지에 그려진 거무스름한 데다 얼굴도 없는 인간이 슬금슬금 깨어나 질척질척 들러붙을 것 같았다.

 

살아온 날들보다 귀신 될 날까지가 더 짧을 나이이건만. 으헉! 시뻘건 표지가 불안하다 싶더니 <모래 그릇1>에는 머리, 모가지, 어깨에 총구멍 뻥뻥 뚫린 인간이, <모래 그릇2>에는 열 손가락 다 벌려 유리창에 갖다 대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액션 인간이 있는 거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인간에 빙의하여 시뻘건 표지를 피하고 싶었다. 읽다가 덮어둘 때면 회색 바탕의 뒷면이 보이도록 책을 뒤집어놓았다.

이런 노력이 뻘짓이었음은 두 권을 다 클리어하고 나서야 드러난다. 올레! 드디어!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껍데기. 꼬랑내 나는 양말을 최소한의 손가락으로 집다가 스르륵 껍데기의 봉인이 풀린다. 온통 시.... 미적으로 세련되기까지 했다. 한 꺼풀만 벗겨보았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걸. 추리 소설을 읽는 마당에 사소한 디테일을 놓쳐버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세이초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을 접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은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라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한 줄 요약을 하면, 증거가 사막의 물처럼 감질나는 살인 사건을 중년의 형사가 열 받지 않고 놀라운 인내심과 집요한 추적으로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재미는 없다. 속도감은 걸어가다 다리 아플 때쯤 자전거를 타는 정도이다. 맛으로 치면 오래 씹는 밥맛 같다. 느려터지고 헛다리 짚는 전개에 밋밋한 맛이 나다가 2권부터는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면서 살짝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진다. 통쾌한 사이다 결말이나 조마조마한 긴장감은 없지만 생각할 거리는 있다.

 

모든 살인의 동기는 결국 욕망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도 욕망이고, 우발적인 범죄도 중심에는 욕망이 자리한다. 그런 범행의 동기를 어떤 요소와 접목하느냐에 따라 다른 작가와의 차별성이 결정된다. 세이초는 사회적인 테두리에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집합적 무의식에 비판적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두 군데에서 드러난다.

첫째,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범인의 배경이다. 최초의 살인 사건 이후, 추가로 발생하는 살인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약간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뮈지크 콩크레트의 도입이다. 뮈지크 콩크레트는 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전위 음악이다. 구체음악이라 불리며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를 녹음한 다음 기계를 통해 변형하여 구성하는 작품으로 음향의 배열에 가까워 대중에게는 생소한 장르이다. ‘대중은 언제나 선구적인 난제에 난처해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에 익숙해지지. 그 순응이 이해로 이끌어주는 거야.(1, p326)’

 

주인공 형사가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경외심을 갖게 한다. 희미한 증거, 증거인 듯 증거 아닌 증거 같은 증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고 답답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경찰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 뒤가 아니면 수사권을 발동할 수 없다. 경찰은 범죄예방 차원에서는 완벽히 무력하다. 피해가 생겨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예감만으로는 수사할 수 없다.(2, p84~p85)’ 우연이 겹치는 단서들의 나열이 다소 억지스러워 살짝 거북했지만, 추가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무력함을 느끼는 마음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추리 소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았다. 피 질질을 피하고 육하원칙으로 정리되는 기사문과 같은 사실에 집중했던 어릴 때와는 달리 범행 동기와 사건 해결 과정에 눈길이 갔다. 삶을 지나온 시간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걸까.

 

내가 해석해본 이 책의 주제는 상처와 욕망이다. 표지를 다시 보니 이토록 적절한 그림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고 싶었던 인간이 유리창 너머에 있다. 유리는 차별이라는 총알을 막아내지 못하고 쉽게 깨진다. 그를 적나라하게 비춰 감추고 싶은 이에게는 상처로 작용하는 벽이다.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인간이 도시의 고층 건물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도시를 품고 싶다는 욕망을 연상케 한다.

제목이 품고 있는 의미에 놀란다. 와르르 무너지기 쉬운 모래 그릇. 대략적인 의미는 감이 온다. 하지만 모래의 속성을 생각하니 깊은 의미가 더해진다. 모래는 0.02mm~2mm의 크기의 입자를 말한다. 이보다 크면 자갈, 작으면 실트나 점토라 불린다. 자갈로 그릇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릇은 고령토를 이용해 도자기를 굽듯 미세한 흙으로 형상을 만든 후에 불가마에 구워야 한다. 모래 만든 그릇을 상상해본다. 모래성처럼 형상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불에 구워낼 수는 없다. 단단하지도 못한 것이 단단하게 보이고는 싶고, 불에 구워지는 순응도 하기 싫다. 모래의 입장이라면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처한 욕망덩어리인 거다.

 

대부분의 시작은 사소하다. 마침표가 찍힌 후에 과정을 돌아보면 이토록 사소할 수 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소함은 말의 뉘앙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인생이란 사소한 일을 계기로 운명이 바뀐다는 말을 알 것 같아요.(1, p57)’ 추리 소설에서의 사소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소한 증거들을 차곡차곡 적립했기에 전체적으로 구슬을 꿰어낼 수 있었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에서는 주인공 박새로이의 운명은 사소한 일을 계기로 확 뒤집힌다. 사소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아 퇴학을 당하고 감옥을 간다. 이쯤 되면 사소함이라는 말을 들이대기가 민망해진다.

멀리 있는 어떤 이에게 사소한 어떤 것은 작은 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가까이 있다고 의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점이 화룡점정의 선명한 의미가 되려면 가까이에서 오래 자세히 보아야 한다. 사소함은 거리에 인내심의 농도가 합쳐져야 하는 섬세한 개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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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2-1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줄 요약이 굉장히 제 스타일입니다. 나비종님은 상처와 욕망에 집중하셨네요. 상처를 치유하려는게 아니라 감추기 급급하고, 그릇되다 하더라도 원하는걸 얻기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욕망... 겉과 속이 다르면서 내내 고귀한 척하는 누보그룹이 꼴불견이었지만, 과연 이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수 있을지는 모르겠더라구요. 인간은 누구나 기회가 오면 잡으려 할테니까요. 그것이 까만 속내를 감춰주기까지 한다면 누구라도 흔들리겠죠.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그들을 보던 저의 시선이 살짝 달라지네요!

모래그릇의 뜻도 신선하군요. 작중에서는 이렇다할 언급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거든요 ㅎㅎ 불에 구워낼수 없어 형상을 유지할수 없는 모래의 성질은, 결코 완성품이 될수 없는 그릇된 욕망의 소유자들을 잘 말해주는 것 같네요. 근데 참 책보다 리뷰가 더 재미있는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ㅋ

그건 그렇고 경찰 주인공이 너무 매력없던 작품이었어요. 2권이나 되는데 독자에게 힘을 주지는 못할망정 김만 새게 하는 캐릭터여서 아쉽더라구요. 날카롭고 예리한 감각수사는 소설속에나 존재할뿐, 현실은 전혀 다르다 라는걸 말하고 싶은가 했더랬죠 ㅋㅋㅋ 저와는 달리 주인공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셨다고 하니, 나비종님 또한 인간승리인듯 합니다. 그리고 매번 힘든 고비를 넘기는 나물모임도 그러하네요^^

이제 분권 작품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겠습니다. 역시 매월 모임을 해야 좋은거 같아요ㅎㅎ그래야 나비종님의 글을 하나라도 더 읽을수 있으니깐요~! 다음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비종 2020-02-11 22:12   좋아요 1 | URL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는군요, 굉장히~ㅎㅎ 저 역시 누보그룹의 페르소나가 가증스러웠지만 그게 과연 개인만의 문제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인 편견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려다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구요.

며칠동안 제목만 생각하며 보내다 에잇! 그냥 제 식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나만 재미없나 싶었는데 참 재미없었다는 느낌을 공유하니 든든하네요. 책보다 댓글이 더 쏙쏙 들어오며 재미있는 건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이런 이유일겁니다.ㅋㅋ

경찰 아저씨, 너무 MSG가 없어서.. 하이쿠 얘기도 나오다 만 응가처럼 어정쩡하고, 쩝. 맞아요. 매력을 못 찾겠더라구요. 담백한 두부류도 아니고 당최 난감한 캐릭터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두보 그룹의 두 분에게서 제대로 뿜어져 나오더라구요.ㅋㅋ
이렇게 힘든 고비를 넘어주어야 파동처럼 리드미컬한 재미가 있겠죠? 재미있는 다른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도 있구요.^^

^^매월 모임이 좋은 거 같긴 하네요~ 물감님의 유쾌한 리뷰도 만나고, 나비종서재의 유일한 댓글러의 친숙한 댓글도 만나고~
다음 달부터는 새학기 시작이라 겁나 바빠질 것 같지만, 그래도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려구요. 31일 11시 59분에 간신히 리뷰를 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