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펼쳐진 생명
흔들흔들 가녀린 몸으로
가만가만 숨을 쉰다

저기, 마냥 서 있는 존재가
나는 가끔 뭉클하다

내게서 달아나지도
다가오지도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서서
원점이 되는 자존감

잎 떨굴 때 미련없고
꽃 피울 때 주저없고
안간힘 쓰며 품은 물도
금세 날려보내는 무소유

눈 덮인 앙상함 너머로
새순 돋는 희망을 품게 해
밖으로 미끄러지려는 영혼을
세상 안으로 자꾸만 끌어당겨

문득 시큰한 어루만짐이
종종 뭉클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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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다 밀려와 낮은 별빛 출렁일 때
초록 빛깔 조각배 비로소 잠드는데
커피숍 투명한 창가 깨어있는 내 시간

노란 별 다가왔다 붉은 별 달아났다
풍경으로 내 얼굴로 번갈아 깜박이다
촉촉한 시선 끝으로 마음까지 텅비어

소리로 채워지다 침묵으로 메워지다
그대 아닌 풍경이다 곳곳이 그대이다
흐릿한 물기에 가려 꺼내놓지 못한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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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거나 말거나 - 쉼보르스카 서평집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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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세수를 하고 부드러운 수분 크림을 한 겹으로 바른 듯 깔끔한 글.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본 느낌이다. 전후맥락 하나 몰라도 그 자체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말끔하다. , 내가 이런 느낌과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구나! 새삼 나의 취향을 깨닫는다. 노벨문학상을 탔던 작가라고는 하지만 처음 접하는 폴란드 시인의 글에 이토록 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인터넷 알라딘 서점의 서재친구 syo님의 페이퍼를 통해서였다. 춘향전을 언급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을 읽고 어찌나 후련하던지! 먼 나라 시인의 정서와 유머 코드에 공감이 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나머지 서평들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다.

평소 책을 소개하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번역은 반역이다와 같은 맥락의 이유에서이다. 책을 읽은 사람의 관점을 통해 원저는 한 번의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읽은 책이거나 대략이라도 내용을 알고 있다면 그나마 덜하겠지만 생소한 책에 대한 서평을 먼저 접하면 편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책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서평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주었다. 서평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록된 책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은 문이랄까. “궁금해?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당신도 그럴까? 궁금하면 읽어보시던가.”라는 도발과 함께.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작가가 썼던 562편의 독서칼럼 중 137편을 추린 서평집이다. 본문을 읽기도 전에 두 번 놀랐다. 예상보다 두꺼워서. 두께가 주는 은근한 압박감에 살짝 주춤했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님은 결코 나를 절망하게 만들지는 않으실 거야. 춘향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호기롭게 책표지를 넘긴 나는 후루룩 차례를 훑어보며 다시 놀란다. 차례에는 서평의 대상이 된 책과 작가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이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몇 권 정도일라나? 이것도 읽은 거, 이것도 읽은 거하며 짚고 싶었지만. 쩜쩜쩜. 나의 검지는 네버 엔딩 질주였다. 하아~ 이 많은 책들 중에 어찌? 다시 한 번 훑어보고 유일하게 찾은 책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다. 한데 이마저도 까마득한 과거에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다 집어던진 것 같기도 한 거다. 읽어본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아무리 비필독도서 칼럼이기로서니 이토록 도화지 같은 배경지식이라니! 과연 저자의 서평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해져서 서둘러 첫 장을 펼쳤다.

 

내가 본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 줄 요약이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서평을 하는 책의 주제를 명확하게 포착한다. 그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읽어도 별반 소용없으리라는 이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점 별 다섯 개짜리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책은 저자가 찾은 매력을 덩달아 찾고 싶어지고, 별 한 개로 예상되는 책은 서평대로인가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어지니 이래저래 궁금증을 일깨워준다.

예전에는 긴 글쓰기가 어려운 줄 알았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짧은 글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는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 짧은 글에 담긴 메시지가 가벼운 것은 아니므로. 몇 줄의 문장 안에 핵심만을 담아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보면 글이 장황해진다. 시를 쓰면서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의 독후감은 길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매번 하는 고민이다. 좀 더 짧게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을 바꾸고 문단을 나누고 적당한 분량으로 토막을 내지만 맘에 차는 리뷰는 거의 없다. 작가의 서평을 보며 나의 글을 돌아본다. 너 댓개의 문단으로 끝나는 글들을 보며 부러웠다. 쌓는 것보다 잘라내기가 힘든 법인데. 그녀의 과감한 버리기에서 날카로운 결단력이 느껴졌다.

 

창작의 비밀이 실제로는 훨씬 단순하고 덜 감상적이라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노인과 바다>의 겉표지에서 본 문장들이 떠오른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헤밍웨이는 한 줄로 주 내용을 요약했다. 이 작은 발상에서 시작된 이야기에 차곡차곡 작가의 인생관이 담기는 것이다.

시를 쓸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섬광처럼 스치는 단순한 문장 하나, 순간적으로 심장을 흔드는 느낌표 하나가 시로 이어질 때가 많다. 얄팍한 화장지로 시작한 발상이 주변의 물기를 빨아들여 흠뻑 묵직해질 때도 종종 있다. 엄청난 이야기로 화려한 변신을 할 때 최초의 소박한 모습을 아는 창작자만이 의미심장하고 멋쩍은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감정은 공식이나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것일까.

검은 눈물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소개된 일화가 마음에 남는다. “처음으로 아내를 배신한 건 어떤 상황에서였습니까?” 완벽한 아내를 두고 위태위태한 여인에게 끌리던 남편의 답변을 읽다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완벽함과 불완전함에 대하여. 모든 이의 심장이 완벽을 향해 뛰지는 않음을. 결핍으로 향하는 시선에 대하여. 나와 내 주변의 심장에 대한 생각이 뒤엉킨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에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생각한다. 위대한 사랑이란 본래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쉼보르스카의 생각에 동의한다. 모든 관계는 각기 유일한 연결선으로 존재하는 걸까. 두 영혼과의 공식으로만 흘러가기에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감정의 울림은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 건가.

 

간혹 이름을 들어보았으나 잘 몰랐던 인물, 처음 들어보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정치가, 예술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평에 등장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파블로 카잘스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빛이 나는 사람에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당하다는 것. 그저 그 자신일 뿐이라는 노년의 음악가에 대한 글을 보며 나의 미래를 그려본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지면서 간혹 위축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들에 기대어 위안을 받았다.

쇼팽에 대한 새로운 일화를 접하면서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네가 뭘 하든, 그건 전부 옳고 좋은 일일 거야.’ 쇼팽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편지로 했다는 말이다. 내게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이 참 따뜻할 텐데.

쉼보르스카가 인간을 사랑하는 작가라고 평한 찰스 디킨스는 또 어떤 인물이었을까. 서평에 등장한 예술가들의 새로운 면을 접하면서 궁금해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하나의 의미 있는 문장이나 내용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그 문장이 행동으로 이어져 읽는 이를 들썩이게 한다면 더욱 중요한 의미가 되리라. <쉼보르스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과 위트와 함께 하며 따뜻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456쪽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세 단어가 떠올랐다. 유쾌! 상쾌! 통쾌! 전체적인 느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 생각해보니 쾌변 CF로구나! 하지만 이보다 더 싱크로율이 일치하는 단어는 찾지 못하겠다. 심오한 내용의 끄트머리에 툭 내뱉는 문장에 유쾌했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상쾌했고, 이건 아니지 않냐 며 대놓고 까는 내용에 짜릿할 정도로 통쾌했으니. 자유로운 정서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용은 촌철살인의 문장 주변으로 날개를 펼쳤다. 이런 게 제대로 까는 거지. 오만함이나 무조건 깎아내리는 치졸함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감으로 근거를 대며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동시에 방대한 분야에 대한 깊은 사유가 풍겨 나와 참으로 묘한 스릴감을 주는 책이었다.

어찌나 애매모호한 언어를 구사하는지, 그 어떤 실수를 해도 대중들 앞에서 절대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 어떤 꼬투리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그들의 평론은 빈틈없이 불분명하다.(p216)’ 이 통쾌한 문장은 작가의 팬을 추가하는 데 쐐기를 박았다.

 

 

p414, 밑에서 4째줄 : 자체가 당키나 → 자체가 가당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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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바다인양 품지 못한 마음아

기어이 강물인양 흐르지도 못하나

묵묵히 고인 호수로 그대인양 머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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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햇살처럼 뿌려지던 웃음들
마주보던 풍경이 봄빛으로 다가와
지나온 걸음에 묻어 아직도 향긋한데

아귀가 맞지않는 뻑뻑한 뚜껑처럼
서늘한 뒷모습만 자꾸만 시큰거려
모서리 돌아가보니 그늘진 물기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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