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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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모자, 애꾸 안경, 쾌감까지 투척했던 괴상한 도둑이 마음을 훔치는가 하면 담배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베레모를 쓴 탐정이 맞불을 놓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옛날의 나보다 훨씬 더 자란 아이와 시리즈물로 극장판까지 등장한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았던 기억까지. 추리 소설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모리스 르블랑,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아오야마 고쇼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은 어린 나에게 동화책처럼 친숙한 장르였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추리 소설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는 표현이 적합하리라.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는 인간처럼 나는 의지를 갖고 그 방면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청난 다작이 놀랍기만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사람이 죽지 않는 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 했던가. 대가리보다 큰 다이아몬드나 미술 작품을 순삭하는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의 추리 소설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피 질질 흘리며 엎어져 널브러진 장면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음산한 BGM이 귓가에 윙윙 울리는 듯하다. 추리물은 껍데기부터 무서웠다. 책을 들고 다니면 표지에 그려진 거무스름한 데다 얼굴도 없는 인간이 슬금슬금 깨어나 질척질척 들러붙을 것 같았다.

 

살아온 날들보다 귀신 될 날까지가 더 짧을 나이이건만. 으헉! 시뻘건 표지가 불안하다 싶더니 <모래 그릇1>에는 머리, 모가지, 어깨에 총구멍 뻥뻥 뚫린 인간이, <모래 그릇2>에는 열 손가락 다 벌려 유리창에 갖다 대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액션 인간이 있는 거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인간에 빙의하여 시뻘건 표지를 피하고 싶었다. 읽다가 덮어둘 때면 회색 바탕의 뒷면이 보이도록 책을 뒤집어놓았다.

이런 노력이 뻘짓이었음은 두 권을 다 클리어하고 나서야 드러난다. 올레! 드디어!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껍데기. 꼬랑내 나는 양말을 최소한의 손가락으로 집다가 스르륵 껍데기의 봉인이 풀린다. 온통 시.... 미적으로 세련되기까지 했다. 한 꺼풀만 벗겨보았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걸. 추리 소설을 읽는 마당에 사소한 디테일을 놓쳐버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세이초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을 접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은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라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한 줄 요약을 하면, 증거가 사막의 물처럼 감질나는 살인 사건을 중년의 형사가 열 받지 않고 놀라운 인내심과 집요한 추적으로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재미는 없다. 속도감은 걸어가다 다리 아플 때쯤 자전거를 타는 정도이다. 맛으로 치면 오래 씹는 밥맛 같다. 느려터지고 헛다리 짚는 전개에 밋밋한 맛이 나다가 2권부터는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면서 살짝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진다. 통쾌한 사이다 결말이나 조마조마한 긴장감은 없지만 생각할 거리는 있다.

 

모든 살인의 동기는 결국 욕망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도 욕망이고, 우발적인 범죄도 중심에는 욕망이 자리한다. 그런 범행의 동기를 어떤 요소와 접목하느냐에 따라 다른 작가와의 차별성이 결정된다. 세이초는 사회적인 테두리에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집합적 무의식에 비판적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두 군데에서 드러난다.

첫째,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범인의 배경이다. 최초의 살인 사건 이후, 추가로 발생하는 살인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약간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뮈지크 콩크레트의 도입이다. 뮈지크 콩크레트는 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전위 음악이다. 구체음악이라 불리며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를 녹음한 다음 기계를 통해 변형하여 구성하는 작품으로 음향의 배열에 가까워 대중에게는 생소한 장르이다. ‘대중은 언제나 선구적인 난제에 난처해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에 익숙해지지. 그 순응이 이해로 이끌어주는 거야.(1, p326)’

 

주인공 형사가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경외심을 갖게 한다. 희미한 증거, 증거인 듯 증거 아닌 증거 같은 증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고 답답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경찰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 뒤가 아니면 수사권을 발동할 수 없다. 경찰은 범죄예방 차원에서는 완벽히 무력하다. 피해가 생겨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예감만으로는 수사할 수 없다.(2, p84~p85)’ 우연이 겹치는 단서들의 나열이 다소 억지스러워 살짝 거북했지만, 추가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무력함을 느끼는 마음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추리 소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았다. 피 질질을 피하고 육하원칙으로 정리되는 기사문과 같은 사실에 집중했던 어릴 때와는 달리 범행 동기와 사건 해결 과정에 눈길이 갔다. 삶을 지나온 시간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걸까.

 

내가 해석해본 이 책의 주제는 상처와 욕망이다. 표지를 다시 보니 이토록 적절한 그림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고 싶었던 인간이 유리창 너머에 있다. 유리는 차별이라는 총알을 막아내지 못하고 쉽게 깨진다. 그를 적나라하게 비춰 감추고 싶은 이에게는 상처로 작용하는 벽이다.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인간이 도시의 고층 건물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도시를 품고 싶다는 욕망을 연상케 한다.

제목이 품고 있는 의미에 놀란다. 와르르 무너지기 쉬운 모래 그릇. 대략적인 의미는 감이 온다. 하지만 모래의 속성을 생각하니 깊은 의미가 더해진다. 모래는 0.02mm~2mm의 크기의 입자를 말한다. 이보다 크면 자갈, 작으면 실트나 점토라 불린다. 자갈로 그릇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릇은 고령토를 이용해 도자기를 굽듯 미세한 흙으로 형상을 만든 후에 불가마에 구워야 한다. 모래 만든 그릇을 상상해본다. 모래성처럼 형상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불에 구워낼 수는 없다. 단단하지도 못한 것이 단단하게 보이고는 싶고, 불에 구워지는 순응도 하기 싫다. 모래의 입장이라면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처한 욕망덩어리인 거다.

 

대부분의 시작은 사소하다. 마침표가 찍힌 후에 과정을 돌아보면 이토록 사소할 수 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소함은 말의 뉘앙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인생이란 사소한 일을 계기로 운명이 바뀐다는 말을 알 것 같아요.(1, p57)’ 추리 소설에서의 사소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소한 증거들을 차곡차곡 적립했기에 전체적으로 구슬을 꿰어낼 수 있었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에서는 주인공 박새로이의 운명은 사소한 일을 계기로 확 뒤집힌다. 사소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아 퇴학을 당하고 감옥을 간다. 이쯤 되면 사소함이라는 말을 들이대기가 민망해진다.

멀리 있는 어떤 이에게 사소한 어떤 것은 작은 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가까이 있다고 의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점이 화룡점정의 선명한 의미가 되려면 가까이에서 오래 자세히 보아야 한다. 사소함은 거리에 인내심의 농도가 합쳐져야 하는 섬세한 개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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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2-1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줄 요약이 굉장히 제 스타일입니다. 나비종님은 상처와 욕망에 집중하셨네요. 상처를 치유하려는게 아니라 감추기 급급하고, 그릇되다 하더라도 원하는걸 얻기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욕망... 겉과 속이 다르면서 내내 고귀한 척하는 누보그룹이 꼴불견이었지만, 과연 이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수 있을지는 모르겠더라구요. 인간은 누구나 기회가 오면 잡으려 할테니까요. 그것이 까만 속내를 감춰주기까지 한다면 누구라도 흔들리겠죠.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그들을 보던 저의 시선이 살짝 달라지네요!

모래그릇의 뜻도 신선하군요. 작중에서는 이렇다할 언급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거든요 ㅎㅎ 불에 구워낼수 없어 형상을 유지할수 없는 모래의 성질은, 결코 완성품이 될수 없는 그릇된 욕망의 소유자들을 잘 말해주는 것 같네요. 근데 참 책보다 리뷰가 더 재미있는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ㅋ

그건 그렇고 경찰 주인공이 너무 매력없던 작품이었어요. 2권이나 되는데 독자에게 힘을 주지는 못할망정 김만 새게 하는 캐릭터여서 아쉽더라구요. 날카롭고 예리한 감각수사는 소설속에나 존재할뿐, 현실은 전혀 다르다 라는걸 말하고 싶은가 했더랬죠 ㅋㅋㅋ 저와는 달리 주인공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셨다고 하니, 나비종님 또한 인간승리인듯 합니다. 그리고 매번 힘든 고비를 넘기는 나물모임도 그러하네요^^

이제 분권 작품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겠습니다. 역시 매월 모임을 해야 좋은거 같아요ㅎㅎ그래야 나비종님의 글을 하나라도 더 읽을수 있으니깐요~! 다음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비종 2020-02-11 22:12   좋아요 1 | URL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는군요, 굉장히~ㅎㅎ 저 역시 누보그룹의 페르소나가 가증스러웠지만 그게 과연 개인만의 문제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인 편견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려다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구요.

며칠동안 제목만 생각하며 보내다 에잇! 그냥 제 식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나만 재미없나 싶었는데 참 재미없었다는 느낌을 공유하니 든든하네요. 책보다 댓글이 더 쏙쏙 들어오며 재미있는 건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이런 이유일겁니다.ㅋㅋ

경찰 아저씨, 너무 MSG가 없어서.. 하이쿠 얘기도 나오다 만 응가처럼 어정쩡하고, 쩝. 맞아요. 매력을 못 찾겠더라구요. 담백한 두부류도 아니고 당최 난감한 캐릭터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두보 그룹의 두 분에게서 제대로 뿜어져 나오더라구요.ㅋㅋ
이렇게 힘든 고비를 넘어주어야 파동처럼 리드미컬한 재미가 있겠죠? 재미있는 다른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도 있구요.^^

^^매월 모임이 좋은 거 같긴 하네요~ 물감님의 유쾌한 리뷰도 만나고, 나비종서재의 유일한 댓글러의 친숙한 댓글도 만나고~
다음 달부터는 새학기 시작이라 겁나 바빠질 것 같지만, 그래도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려구요. 31일 11시 59분에 간신히 리뷰를 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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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사람들이 무심코 흘리는 문장이다. 끄트머리에 물음표를 붙여본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귀신과 맞서는 보건교사 안은영.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죽음 이후의 세상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출처도 희미해 어디서 읽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대략적인 얼개는 이렇다. 우주 어딘가에는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하는데 생명체가 죽으면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나. 윤회와 차원적 개념이 결합 되어 이를테면 계단처럼 점차 높아지는 차원들이 존재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가장 높은 차원의 계로 올라가게 된 존재는 육체조차 필요 없이 영적인 에너지의 뭉치로만 모여있다고. 꿈을 꾸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꿈꿀 때 그 공간으로의 순간이동이 가능해 잠시 거기에서 가져온 결과물이란다. 삼라만상의 해답이 거기에 있다나. 물리학 관련 도서였건만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풍겨 황당하다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난다. 한데 과연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을까. 그 책에 등장하는 세계가 존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마차 바퀴를 굴리던 사람들이 막연히 그려보았을 미래의 모습은 어땠을까. 기록된 소수의 자료 말고 물속에 잠긴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꺼내어지지 못했던 상상들이 궁금해진다. 날개 달린 물체가 하늘을 넘치게 날다 못해 우주를 향하고, 걸어 다니면서 통화하는 미래 사람들의 모습을 과거의 그들이 본다면? 같은 맥락으로 우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모습을 단언할 수 없다.

작가 정세랑의 기발한 상상력과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사건들을 따라가며 생각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조차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가능성 제로인 일이 존재하기는 할까.

 

보통의 인간은 20~20,000Hz의 가청 진동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범위를 넘어서는 초음파나 초저파는 일부 생물들만이 감지할 수 있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인 가시광선의 범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조금만 확장해서 빛을 정의한다면 자외선, 적외선처럼 보이지 않는 빛도 있다. 들을 수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모르지만 다른 세상은 이런 식으로 분명 존재하므로.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멈춤의 의미를 지닌 현상인 걸까. 위로 던져진 공이 아래로 내려올 때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주인공 안은영은 죽었거나 살아있는 존재들이 뿜어낸다는 액토플라즘이라는 입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립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기운들을 없애는 정의의 퇴마사로 등극한다. 귀신과 얽힌 이야기인데도 섬찟하거나 음산하지 않다. 경쾌한 그녀의 성격처럼 살짝 유머러스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감돈다.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갖춘 에피소드들이 시트콤을 연상시킨다. 학생, 교사, 평범한 이, 다른 계통의 능력을 지닌 존재, 귀신 등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핀 조명을 받는 대상들이 매번 달라진다. 이들과 얽힌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을 따라 몇 개의 동산을 넘어가면 어느새 <작가의 말>을 만나는 순간이 온다.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 쉴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 통쾌해지는 결말, 상상을 뛰어넘는 결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결말, 마음이 짠해지는 결말 등 각양각색의 버전이 있다.

소설에서는 그녀의 조력자이자 남주인공 한문 교사 홍인표가 등장하는데 첫 에피소드는 그들의 만남에서 시작하며,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러브러브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느낌이 있다. 요즘 핫하다는 <낭만닥터 김사부2>처럼 2, 3탄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교사 또는 학생이라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학생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교사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가던 중이었다.(p45)’,‘자주 스스로를 누군가 버리는 걸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김살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p104)’, ‘어떤 나이에는 정말로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p125)’ 세 문장에서 아이들의 시린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아팠다.

바깥은 죽어 있고 안은 살아 있는 걸로는 다 할 수 있어.(p118)’ 씨앗을 의미하는 이 문장에서 아이들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아이들, 반항하는 아이들, 비뚤어질 테다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이들. 겉에서는 굳어지고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보이지만, 안에 있는 마음은 몰랑몰랑 살아있어 정성껏 물을 주고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씨앗처럼 싹을 틔우지 않을까.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 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p38)’,‘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p233)’ 이 문장들은 느슨해져 가는 마음을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그래, 아이들에게서 빛을 보고 싶은 마음이, 민감한 빛을 감지하고 싶은 센서가 아직은 내 심장에서 꺼지지 않았구나.

 

어둠 속에서는 빛이 더 잘 보인다. BGM처럼 귀신이 깔린 이야기라 죽음이 주제일 것 같지만 귀신 이야기는 코팅지에 불과하다. ‘살아간다는 동사가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곳곳에 삶이 보인다. 죽음의 충격파를 통과한 이야기들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본능적인 이 아닌 살아가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건네어 준다.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p185)’,‘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p189)’,‘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p216)’,‘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p238)’ 나열한 문장들을 되짚어보니 삶만큼 위태위태하고 불안정한 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p272)’ 이런 친절한 작가님 같으니라고! 그녀는 마지막 부분에서 회심의 한 방을 날림으로써 축 처져 가라앉은 문장들을 깔끔하게 갈무리한다. 막강 파워를 장착한 주인공들이 아니라 어딘지 불완전한 캐릭터를 설정한 깊은 뜻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하건 보이지 않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 존재하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빛이 있는 곳에 머문다면 어둠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며, 어둠 속에 머문다면 빛을 바라보며, 기쁘다면 슬픈 이를 다독이며, 슬프다면 기쁨의 순간을 생각하며, 삶에 머무는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어디에 있든 나 있는 장소에는 의지할 무언가 존재할 것이므로 그렇게 살아가면 충분하리라. ‘살아가는 일앞에는 더불어라는 세 글자가 곳곳에 숨어있으므로.

 

 

p57, 2째줄 : 박민우(본명보다~)박민우( )

p58, 마지막 줄 : 낡을 고무장화를 낡은~

p5, 차례, p89, 제목 : 원어민 교사 메켄지 ~ 매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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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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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어. 외로움이 한기처럼 스며들 때마다 종종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한데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빠뜨리고 있었다. 다른 데서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해주면 되지 않은가. 나를 위로해줄 가장 적절한 적임자는 바로 나인걸 왜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일에 치이느라, 사람에 치이느라 제대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던 건 나를 향하는 말인 듯했기 때문이다. 작가 정여울이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막연히 나를 사랑하라는 번드르르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보듬는 방법을 제시한다. 요리 레시피인 양 스스로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과 구체적인 순서까지 알려준다. 책을 펼쳐놓고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싶어진다.

 

엊그제는 얼떨결에 인터넷 무료간이 MBTI검사를 했다. 엄마는 분명 I타입일 거야.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 10분도 안 걸리는 검사 결과는 ENFJ형이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형이라나. ... 내가 모르는 내가 어딘가에 숨어있다 갑툭튀했나. 스스로 들여다본 내 성향은 내향성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더니만. %로도 나오는 요소별 결과를 보니 외향성과 내향성이 거의 반반이다. 5149로 외향성이 간소한 차이로 많다. 사람의 성향이 사과 가르듯 딱 쪼개져서 분리되는 건 아닐 텐데 예측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가 새삼스럽다.

작가는 내향성에 대하여 섬세하게 다룬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침묵은 수많은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p20)’라는 문장에 잠시 머문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표현하지 않을 뿐 침묵 안에 많은 말들을 담고 있을 거다.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면 온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담긴 차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맛과 향기가 날 터이다. 글쓰기와 성향과의 관계를 말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내향성의 집중력과 외향성의 표현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다.(p21)’ MBTI 검사의 결과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라 할지라도 내향성과 외향성이 반반이라는 나의 결과가 글쓰기에 적합하다는 말로 들려 기분이 좋아진다.

돋보기로부터 물체까지의 거리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상을 볼 수 없다. 크게 보려고 렌즈를 내밀었다가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하면 엉뚱한 상이 눈으로 들어오게 된다. 작게 보이는 상의 크기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느 순간 상이 거꾸로 보이니 다소 난감하다. 거리에 대한 문장을 보며 돋보기의 속성을 떠올렸다.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가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다.(p32)’ 사람 사이의 거리도 볼록렌즈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조차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리라.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수업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나치는 머릿속에서 4개의 낱말이 번갈아 굴러다녔다. ‘페르소나는 가면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에고는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셀프는 내면에 자리하는 나의 모습을,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내면의 희열을 뜻한다. 어떤 날은 페르소나를, 다른 날은 에고와 셀프를, 또 다른 날은 블리스를 생각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진짜 나를 만날 시간이라는 부제로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다섯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방어 기제페르소나에 대한 문장을 읽다보니 <인사이드 아웃>슬픔이가 생각났다. 우울을 덮는 페르소나를 쓰고 흘려보낸 하루를 돌아보았다. 푸른 빛깔의 감정도 필요하다던 애니메이션의 메시지를 상기했다.

나의 에고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셀프가 원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는 에고를 따라가고 있을까, 셀프를 따라가고 있을까. 혹여 에고를 좇느라 셀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가 제시해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메모했다. 첫째, 자신이 싫은 점, 후회되는 점, 고치고 싶은 점을 적어볼 것. 둘째, 그래도 기특한 점을 적어볼 것. 셋째,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볼 것.

태도와 자유에 대한 문장들에 위안을 받았다. ‘상처를 삭제할 수는 없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다.(p110)’, ‘그리하여 내가 점점 더 나다워지기를, 내가 다만 꾸밈없는 나임으로써 최고의 자유를 얻기를 꿈꾼다.(p113)’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였다.

 

치유적인 글쓰기에 대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글이나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때마다 내 인생을 걸고 있다.(p132~133)’ 작가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쓸 때마다 심장을 꺼내어 마주 보다 다시 집어넣는 행위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심장을 꺼내기까지의 시간은 매번 고통이다.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넘어 온기가 담긴 글로 심장을 어루만지면 행복이 스며든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행위는 이러한 과정들의 로테이션이다. 이런 이유로 내게 있어 글쓰기는 행복한 일이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중성을 띤 뜨거운 블리스랄까.

 

번아웃에서 회복되기 위한 세 가지 길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 같다. 첫째, 쏟아지는 일감이나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 둘째, 삶의 속도를 구체적으로 줄이는 것. 셋째, 주변의 모든 자극을 일의 방해물로 여기는 대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각 훈련이다.

예전의 나는 예스맨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주어져도 거절 한 번 못하고 끈질긴 인내심으로 부담감을 견디어왔다. 태양을 보고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날들로부터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러다 내가 못살겠다 싶은 거다. 하나 둘씩 거절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거절하다보면 할만 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치유된 이들의 공통점은 거절하는 용기라고 한다. 거절은 비인간적이나 냉정과는 다르다. 내가 그동안 섣불리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에고를 위한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작가는 상처를 표현하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상처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는 문장을 스스로 찾아보라고도 한다. 그리하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정여울이 제시하는 자기치유법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올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나 일들을 시도해본 해였다. 독립서점의 몇몇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이제껏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버렸다. 망설이며 정리하지 못한 관계의 끈들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주요 관심사와 다소 동떨어진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스스로 흡족해하는 중이다. 작가의 글을 보니 나의 삶에 응원군이 생긴 것만 같아 든든하다.

 

책 표지를 바라보며 그림의 제목을 음미한다. 그림의 제목은 <Pause Series 002>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인다. 지고 다니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늘진 의자에 앉아 세상을 응시하며 한 발을 주무르는 장면. ‘pause’는 잠시 멈춤을 뜻한다. 아예 여기에서 멈추는 ‘stop’과는 완연히 다르다.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한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은 이렇게 잠시 쉬다 또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가리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읽으며 심리학적인 시각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책에 실린 문장 위에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위로가 되는 따스한 레시피를 따라 다시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작가는 이런 의미로 채워진 시간들을 독자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던 걸까.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시간. 에필로그의 제목이 나에게 스며든다. 마지막 문장이 따스한 옷인 듯 심장을 감싼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p245)’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이 벅차오른다. 눈이 뜨거워진다.

 

 

p221, 밑에서 4째줄 : 안심시키기고 안심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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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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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이 더 밝을까요, 태양이 더 밝을까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에이, ! 당연히 태양이 밝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나. “! 북극성이 더 밝습니다.” “? 왜요?” “단지 멀리 있기 때문에 어둡게 보일 뿐이죠. 태양은 지구로부터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밝게 보일 뿐 그닥 밝은 별은 아니에요. 북극성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하겠죠? 실제로는 찬란히 빛나는 별인데 지구인들은 알아주지도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별의 밝기는 두 가지로 말을 합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밝기인 겉보기 등급과 제각기 다른 거리에 있는 별들을 밀당해서 같은 거리에 놓았다고 가정해서 표현하는 절대 등급으로

과학적인 내용들을 가르칠 때마다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철학적인 사유와 접목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종종 감탄한다. 별과 우주에 대해 가르치는 시기에 빛의 과거를 읽어서일까. 소설의 내용을 음미하는데 뜬금없이 별의 밝기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보이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단어는 간극이었다.

 

한손에는 낮을, 다른 손에는 밤을 부여잡고 있는 대상. 노을이다. 노을을 의인화한다면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이랄까. 작가는 다름과 다름이 만나 섞이는 과정을 온도차로 느끼는 사람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인공은 여대 기숙사에 살게 된 20세의 나, 김유경과 또 다른 방에 사는 김희진이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성격, 외모, 생각, 출신지역 등이 제각기 다른 주변 인물들이 어우러진다. 20대였던 1977년과 60대가 된 2017년을 오가며 고립, 차별, 취향, 욕망, 정당화, 회피, 수긍, 방관, 적응, 왜곡, 부조리, 깨어있음, 행동, 비관, 기억, 망각, 진실이라는 단어에 담긴 인간의 본성이 날카롭게 펼쳐진다. 더불어 1970년대의 20대 청춘들이 피부로 느꼈을 캠퍼스의 풍경과 사회상이 세밀하게 덧대어진다.

작가의 나이로 추정해 보건데 상당부분 자전적 경험에서 소설의 소스를 얻었으리라. 은희경 작가는 소설이란 자기 인생이라는 집을 부수어 그 벽돌로 다른 새로운 집을 짓는 일(p10)’이라며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논픽션과 픽션을 적절하게 버무리는 안전장치를 한다.

1977년의 이야기에는 3, 4월 등 구체적인 시기가 제목으로 등장하는데 8월의 한여름과 12, 1, 2월의 겨울은 빠져있다. 공간적 배경이 주로 기숙사 이다보니 방학과 맞물려 그 시기의 에피소드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리라. 하지만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미적지근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쩐지 시간적 배경과 닮아있다.

 

주인공 는 노을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선명함과 또 다른 선명함의 경계에 애매하게 서 있다. ‘나는 중간 지대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간혹 무언가에 떠밀리게 되면 아무것도 결정 못 한 표정으로 거기 휩쓸리곤 했다.(p49)’, ‘나는 누군가 부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문을 잠가놓은 채 버림받고 잊힌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p178)’,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p245)’,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p281)’ 주인공의 담담한 독백을 좇다보면 심장의 민낯을 들킨 듯 얼굴이 화끈해진다.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며 과거 기숙사 친구들과의 시간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로 집필한 김희진. 그녀의 입장에서 우주의 중심은 자신이며 세상은 스스로 주인공이 된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밉상 서브 주인공으로 그려지지만 적나라하리만큼 떳떳한 그녀의 서사를 따라가면 나 역시 한 구석이나마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놓고 드러내느냐 공주인양 내밀하게 감추느냐 혹은 많고 적음의 차이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내내 동물원의 <혜화동>을 듣고 있다. 성시경 버전이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삽입된 박보람 버전도 좋지만, 이 소설에는 복고풍 냄새가 나는 동물원의 최초 버전이 어울려 보인다. 가사 두 군데가 고막의 과속방지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 덜컹거린다.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라는 문장이다. 소설 속 문장이 겹쳐진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랑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p277~278)’

두 사람에게 공유된 사건도 서술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한다. 주인공 4명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삶과 사랑을 이야기했던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p334)’빛의 과거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같은 시공간에 있었더라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제각기 비춰질 수 있다는 맥락의 개인 버전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러리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서브 남자 주인공과 나눴던 대화는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내가 동화 속의 유리성 같다고 하자 그는 쓰러져가는 낡은 서민아파트의 허름한 저녁 밥상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뿐이라고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렸을 때 천변의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 개천 건너편에 밤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지는 환상적인 건물이 알고 보니 도살장이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p152)’ 학보사 기자로서 세상을 취재하면서 그녀가 느꼈던 감정도 비슷하다. 혼란스러운 현실과는 달리 학보 속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이쯤 되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이라 해야 할 지 경계가 애매해진다. 나름 서있는 위치에서는 진실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입장은 오현수라는 중립적인 캐릭터를 통해 또렷하게 제시된다.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p264)’ 모르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별을 볼 때마다 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금 내가 보는 별은 과거로부터 달려온 빛의 부스러기일터이다. 워낙 멀기 때문에 1초에 30km를 간다는 빛으로도 한참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 존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를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아이러니라니. 200만 광년 떨어진 별이 빛을 내보낸 후 사라졌다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분명 눈앞에서 별이 반짝이는데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거다. 갑자기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실제로 밝은데 어둡게 보이는 별과 실제로 어두운데 단지 가까이 있어 밝게 보이는 별. 둘 중 어느 쪽을 밝다고 해야 하는가. 내 눈에는 어둡게만 보이는데 망설이지 않고 밝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코앞에 있는 촛불을 참으로 밝다며 감탄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둘 다 맞다 할 수도, 둘 다 틀리다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비단 별빛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에 이 글을 쓰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문장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은 과연 나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울까. 실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답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답은 없다. 나조차 나의 모습을 확실하게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별빛의 과거를 좇는 우리가 별빛의 현재를 결코 볼 수 없듯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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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하는 시간 -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김혜련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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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대신 먹는 알약이 있었으면 좋겠어. 한 알만 먹으면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책속에 언급된 내용을 보며 웃었다. !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구나.

나만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지은 적이 있던가. ‘한 끼의 밥이란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스스로를 위해 정성 들여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p9)’이란 문구를 보며 곰곰 생각한다. ‘오예~ 부양가족 없는 보기 드문 기회일세! 내일 아침밥은 안 해도 되겠군! 크크!’ 좋아라했는데 이 문장이 나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갑자기 혼자가 된 그날 밤, 다음 날 아침을 고민하게 되었다.

밥을 먹는 것은 과정이었다. 오롯이 밥이 목적이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 밥 먹기는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어쩔 수 없이 플러그를 꽂는 과정이었으니까. 책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밥 하는 시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서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한동안 내팽개치다 겨우 첫 장을 펼쳤다.

 

이 책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집과 몸과 밥에 대한 작가의 경험담이다. ‘평생 밥을 먹었지만 이 없었고, 평생 몸을 지니고 살았지만 이 없었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이 없었다.(p313)’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공감을 일으키며 영혼을 울린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그게 나의 이야기로 들어앉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처음에는 삐딱한 시선으로 출발한 책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집에 관해 서술된 1장과 2장의 앞부분을 읽을 때까지는 문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가지가 많았다. 비유와 묘사로 둘러싸인 뛰어난 표현력은 인정할만했지만 내 취향은 역시 헤밍웨이였다.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이질감은 2장의 중반을 지나 3장에 들어서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몸을 돌보고 읽는 시간에 관한 3장의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술술 쏟아졌다. 실컷 운동하고 난 몸에서 땀과 더운 기운이 절로 훅훅 끼얹어지는 것처럼. 체험한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이후의 내용들은 <저자의 말>에 이르기까지 내내 좋았다. 참 괜찮은 책을 읽었다는 개운한 느낌으로 마무리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장과 2장을 읽어보았다. 전체적인 맥락을 알고 접하니 거부감이 사라졌다.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온통 헝클어지고 겹겹이 쌓여있는 물건들. 내내 우울해하던 친구의 마음속에 들어온 듯 씁쓸했다. 그녀를 담고 있는 공간은 그녀를 닮아있었다. ‘집을 청소하는 일이 나를 맑게 하는 일이고, 집의 고요가 나의 고요이며, 집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나를 아름답게 하는 일임을 경험으로 체득한다.(p19)’ 집을 정리하거나 청소를 하는 날이면 속이 후련해진다. 이 문장을 보니 그때의 공간이 떠오른다.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집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생각한다. ‘시간은 금이다.’ 란 말도 있지만, 집을 소유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생각한다면 공간은 돈이다.’ 란 말도 할 수 있겠다. 세상 속에서 한 두 겹씩 썼던 가면을 훌훌 벗고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집 같은 사람 한 명쯤 내 가까이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어도 존재 자체로 나를 따뜻하게 지켜볼 수 있는 존재. 상상만 해도 뭉클한 느낌이 스민다.

스스로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p72)’이라는 문장에 꽂힌다. 전후맥락 무시하고 자체의 의미로 다가오는 문장이다.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난다. 하루 가운데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나만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시간을 마련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함을 깨닫는다.

 

늘 특별한 순간을 꿈꾸어왔던 것 같다. 드라마틱한 사람과의 만남을 꿈꾸고 삶의 어느 순간에 굉장한 사건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십여 년을 돌아보면 그런 순간은 없었다. 간혹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대상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시작은 평범했다. 평범함이 점점 특별하게 변화하는 거지 처음부터 반짝이는 특별함은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평범한 나날들은 앞으로도 죽 이어지리라. ‘밋밋한 행위에서 빛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에 빛이 어렵다. 삶의 90퍼센트는 그런 밋밋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p118)’

악기는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음색을 지닌다. 악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점점 깊어지는 삶의 울림으로 살아가고 싶다. ‘스스로 깊어지는 악기 같은 몸이 되고 싶다.(p121)’는 작가처럼. ‘몸으로 살아낸 만큼 시간은 내 안에 쌓인다.(p267)’라는 문장을 보며 쌓이는 시간을 상상한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시간 말고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을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이란 빛나는 일상을 의미하겠지. 백년도 더 된 집을 가꾸어 정성껏 밥을 하며 살아가게 된 사람의 일상을 엿보다보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결국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잡곡밥을 해서 먹었다. 책을 읽고 나니 자꾸만 정성껏 밥을 하고 싶어졌다. 밥을 오래 씹고도 싶어졌다. 요즘은 밥과 반찬 하나하나를 정성껏 음미하며 먹는다. ‘쌀 알갱이가 톡 터지며 씹힐 때 입 안 가득 빛이 도는 듯 환한 느낌(p10)’을 느끼고 싶어서 정성껏 씹어 먹는다. 먹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소중해지는 듯 울컥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다음에 뭐를 할까 막연한 생각이 찾아올 때가 잦아졌다. 눈도 침침해지고 점점 기력이 쇠해질 텐데 언제까지 글을 쓰며 살 수 있을까 하고.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 ‘몸을 돌보는 과정 자체가 삶의 오롯한 의미가 될 때 삶은 깊은 차원에서 존재에 가까워지겠구나.(p113)’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 편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를 지닌다면 얼마나 든든하면서 따뜻한 삶이 될까.

밀가루 반죽이 된 마음을 끌어안은 기분이다. ‘나는 비로소 일상을 즐기고 일상을 통해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유쾌한 몸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내가 전환한 삶의 핵심에 이 있다.(p116)’ 푸석거리는 가루 같던 마음이 질척이며 겉도는 시간을 지나 몰랑한 느낌의 부드러운 반죽이 된 듯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익반죽의 덩어리처럼. 가벼워졌다, 그 반죽에서 만들어진 크루아상처럼. 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빵을 한 입 베어 문 듯 유쾌해졌다.

 

 

p226, 마지막 줄 : 마침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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