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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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상대라 여겼던 사람이나 매력적인 이들을 발견했을 때 종종 생각했다.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참 다행이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행복한 공기처럼 스며들 때면 마음은 풍선인 양 두둥실 부풀어 올랐다. 그들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았던 걸까. 의외의 책에서 답을 찾았다.

 

포르투갈 작가의 문체는 생소했다. 재미는 둘째치고 481개의 텍스트를 지나오는 동안 몇 번씩 뒷걸음질을 치며 되돌아갔다. 당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다가 양손으로 덩어리를 쭉 늘렸는데 탄력이 없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긴 문장을 꾸역꾸역 따라가다 주어가 뭐였더라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영어의 관계대명사를 배울 때가 생각났다. 어디까지가 주어인가를 끊어내는 게 문장 해석의 열쇠였지. 중간에 훅 들어온 그노무 문장 덩어리가 핵심 내용을 파악하려는 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군데군데 찍혀 있는 쉼표는 오히려 문맥을 파악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불안의 책.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불안 불안했다. 중간에 집어 던져버리지 않을까 심히 불안했으니 제목은 참 적절하다 싶었다. 뭐 어쨌든 읽기는 다 읽었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니. 하하하. 가려진 커텐 틈 사이로 인간 내면의 심오한 성찰이 숨어있는 책이던가. 늪에서 건져 올린 양 음습하고 칙칙한 포스를 뿜어내는 문장들이 불안한 냄새를 풍기며 펼쳐졌다. 무기력, 공허, 불안, 무능, 절망, 권태. 온통 마이너적인 색채의 문장들을 접하며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듯 했다. 방황하는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 속에서 어느 순간 텅 비는 허허로움을 보았다. 음지에 자리한 인간의 감성을 생각했다. 영혼에도 깊이가 있다면 햇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서 건져 올리는 인간의 본성이 이와 닮았을까.

 

609페이지를 건너 작가의 연보까지 읽고 잠시 멍해졌다. 묘한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꿈을 꾸는 것이다.(p294)’ 페소아에 끌려 꿈을 꾸다 온 걸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p26)’ 나의 무의식에도 그가 느낀 감성이 담겨있는 걸까. 그렇다면 익숙해야 할 텐데 생경한 느낌도 있다. 작가만이 느낀 감성이라면 이해하기 불가능할 텐데 또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익숙한 맛, 생소한 맛이 섞여 있는 반반 치킨 같다. 익숙함과 생소함의 적절한 배합이 독자를 이끄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마주한 감성을 표현하느냐, 표현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까. 내용의 절반이나 제대로 이해했나 싶다. . 몰이해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압도하는 묵직함과 인상 깊은 정서는 선명하게 새겨진다. 그의 책을 읽은 후로 나와 타인과 시와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도 바라보게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페소아는 그 중 으뜸인가. 47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십 명의 다른 이름을 통해 복수의 존재를 추구했다는 사람이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네.(p64)’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본 것들을 떠올려본다. 작가가 본 것은 얼마나 컸을까. 보는 것이 많아 글을 통해 그렇게 다양한 인격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킬미힐미>에서 배우 지성이 연기했던 다중인격이 과연 특이한 사례일까. 온종일 같은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으리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쁘고, 슬프고, 설레는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256색상환 같은 감정들은 무수한 조합으로 나의 일상을 채운다. 페르소나 속에 나를 숨기기도 한다. 제어 가능한 탄력성으로 언제든 디폴트값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다중적인 인격들을 조금씩은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독특했다. ‘타인이란 우리에게는 그저 풍경일 뿐인데, 대체로 너무 익숙한 거리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다.(p397)’ 스스로가 가구처럼 느껴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저 방 한구석에 물끄러미 놓여있어 새삼 찾기 전까지는 시선이 가지 않는 대상. 정서적인 교류 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처럼 말이다. 그저 풍경,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은 이런 느낌 비슷할까.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할까. 한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접촉과 대화를 통해 나를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p51)’이란 문장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는 사람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감각이 강아지풀의 솜털처럼 민감해졌다. 흑백 사진 같은 정서가 느리게 흐르는 그의 글을 따라가며 의 본질을 감각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서서 온 감각을 동원하여 빛깔, 소리, 냄새, 감촉, 맛을 구현한다. 순간의 느낌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마음이 찰칵! 셔터를 누른다. 나름대로 정의해본다. 시란, 글로 찍는 스냅 사진이라고.

 

세상은 여러 가지 사물을 품는다.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교차하여 한 사물을 이루는데 이는 물질의 양,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 사물이 놓인 환경이다.(p81)’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변수가 되는 요소는 해석하는 방식일 터이다.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경이로운 것이 되거나 방해물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길이 되거나 문제가 될 수도 있다.(p124)’,‘삶이란 본질적으로 정신 상태이기에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길 때 가치 있는 것이고, 가치 평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p126)’ 엘리베이터 안이 설렘의 공간이 될 수도,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사물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다면 온통 다른 의미로 채워진 세상을 같은 세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비눗방울로 그려졌다. 한 통 안에 있는 비눗물이지만 후~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순간, 그들은 각기 다른 공간을 유영하며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p333, 2번째 단락 2째 줄 : 내 조국은 포르투갈어다. ~ 포르투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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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 우아하고 지혜롭게 세월의 강을 항해하는 법
메리 파이퍼 지음, 서유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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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격변이라 할 만한 일들이 몰아쳤다. 막내가 다른 지역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3월부터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근무처로 발령이 났다. 남편은 6개월 무급 휴직을 냈다. 새로운 학교에서 5년 만에 담임을 맡게 되었다. 맡아본 적 없던 생소한 업무도 하게 될 예정이다. 여러 가지 준비와 정리들로 마음이 덩달아 복잡했다.

눈길 닿는 곳에 두었건만 책 한 장 들여다볼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사 후 일주일가량 집 정리를 하다 문득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집안 곳곳 자리를 잡지 못해 쌓여있는 짐들을 뒤로하고 무작정 낯선 커피숍을 향했다. 중요한 시기에 이 책을 펼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을 몸으로 감지하며 업무능력도 덩달아 떨어지는 것만 같아 자신감이 조금씩 낮아지는 중이었다. 신학년 준비를 위해 새로운 학교로 가서 교과협의회를 하면서 4명 중 가장 연장자임을 깨닫고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이들도 동료들도 나이 든 교사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겠지. 젊었을 때는 쉽게 할 수 있던 일도 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기억력도 점점 예전 같지 않다. 하아! .

메리 파이퍼가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라고 말한 이유가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50대 초반에도 나이의 무게감이 부담스러운데 70대 작가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제목으로 드러낼 만큼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원제는 <Women Rowing North>로 북쪽으로 노를 젓는 여자들이란 뜻이다. 북두칠성이 죽음을 상징하듯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는 방향이다. 태양이 지나지 않는 방향이라 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나. 노를 젓는 행위는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죽음을 향해 주도적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표명한다. 일러두기에는 이 제목이 긍정적인 태도와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적혀있다.

나는 ‘Getting Older Getting Better’라는 부제도 좋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좋아진다니. 얼마나 희망적인 메시지인가. 숙성될수록 깊어진다는 와인의 맛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인디언 추장처럼. 낡아가는 게 아니라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시각이 좋았다.

임상심리학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낸 이 책은 420장으로 구성된다. 본인과 주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다. 한데 속도감은 묵직하고 느리다. 여러 사람의 모습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나를 짚어보고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시간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은 나이 듦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민과 갈등을 넘어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준다. 각 부의 제목 옆에 있는 4개의 문구를 차례로 연결하면 저자가 말하는 핵심에 닿는다. ‘비록 이 여행이 쉽진 않을지라도,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함께 노를 저을 사람이 있다면, 우린 언제든 좋은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지

 

사람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한다. 이때 자극은 외부에서 주어지므로 선택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은 선택 가능한 영역이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극-반응의 세트로 삶의 무늬가 그려진다면, 반응 양상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 반응을 태도로 해석한다. 똑같은 사건이 발생해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 태도가 누적되면서 삶이 고유성을 띠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태도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은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와 계획이다.(p34)’,‘올바른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낯선 상황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p39)’,‘태도는 상황을 이긴다.(p166)’,‘태도는 의식을 바꾼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신경 써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p200)’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았다. ‘한 사람의 철학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선택을 보는 것이다.(p164, 엘리너 루스벨트)’ 가까운 친구들이 했던 선택들이 떠올랐다. ! 이 친구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새삼스러웠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지금까지 했던 선택을 돌아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참 멋진 선택이었어! 우쭐하다가도 이건 좀 비겁했어! 소심해지기도 했다.

요즘 나의 최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도 생각났다. 드라마의 선택 상황을 복기해보니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문장이다 싶었다. 그 멋진 남자의 철학은 매번 소신 있는 선택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가락을 살짝 벤 적이 있다. 물에 닿을 때마다 쓰라려서 밴드를 감고 다녔다. 겨우 손가락 끝인데 그 이물감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멀쩡한 손가락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 며칠이었다.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 못했던 몇 달 동안은 무심코 외치던 만세 액션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더랬다. 아플 때마다 당연한 몸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음을 반성하게 된다.

고통을 말하는 작가의 문장은 삶으로의 확장 버전이다. ‘고통이 없다면 인생의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p40)’,‘많은 것을 빼앗아갈수록, 공감과 감사를 담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은 더욱 넓어진다.(p41)’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마음의 고통까지도 기꺼이 깊은 의미로 수용해야 함을 시사한다.

 

삶을 단순하게, 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팁까지 장착한 나는 행복한 기억 하나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매일 행복한 기억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p81~82)’

글자 하나가 키보드 버튼 하나 만한 동화책과 큰아이가 남기고 간 인터넷 소설을 처분하기로 했다. 어둠의 장소 구석에서 먼지로 연명하던 책들이다. 알라딘 중고에서도 매입 불가로 뜨는 녀석들을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했다. 대략 15kg였다. 캐리어를 펼치고 꾸역꾸역 넣었다. 오다가다 발견한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이렇게 묵직한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나?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며 기대에 부풀었다. 음하하! 버리면서 돈도 생기니 일석이조로군!

빈 캐리어를 통통 끌고 오며 또 웃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한 대가는 천 원이었다! 처음에는 아저씨가 계산을 잘못하셨나 했다. 다시 보니 조그만 화이트보드에 종이의 가격이 50, 70원 등으로 적혀있다. 집에 와서야 인터넷 검색으로 폐지 대란을 알았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눈물 등 관련 기사들을 읽다 보니 천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참,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알려주는구나. 세상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엿보면서 내가 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나비인 듯 가볍게 흩날리는 보랏빛 꽃잎. 표지에 코끝을 들이대면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날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것은 나에게 날아든 라벤더와 같은 행운이었다. 책을 읽을수록 무엇이 내게 중요한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과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제쳐 두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p185)’ 오늘만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까지 들고 있으려니 삶이 그리 무거웠던 거다. 공감했던 문장이 가장 많았던 10장의 제목처럼 좋은 하루 만들기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환경이 한꺼번에 바뀌어서 멘붕이 올 만했건만 따뜻한 손길 같은 문장들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해 그저 하루 치의 용기만 내면 되는 거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환경을 마주할 담담한 용기가 생겼다.

 

 

p101, 마지막 단락 : 나를 그에게 나는 ~

p178, 3번째 단락 : 무엇인 필요한지 무엇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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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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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모자, 애꾸 안경, 쾌감까지 투척했던 괴상한 도둑이 마음을 훔치는가 하면 담배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베레모를 쓴 탐정이 맞불을 놓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옛날의 나보다 훨씬 더 자란 아이와 시리즈물로 극장판까지 등장한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았던 기억까지. 추리 소설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모리스 르블랑,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아오야마 고쇼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은 어린 나에게 동화책처럼 친숙한 장르였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추리 소설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는 표현이 적합하리라. 길이 아니면 가지도 않는 인간처럼 나는 의지를 갖고 그 방면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청난 다작이 놀랍기만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사람이 죽지 않는 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 했던가. 대가리보다 큰 다이아몬드나 미술 작품을 순삭하는 사건도 있지만, 대부분의 추리 소설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피 질질 흘리며 엎어져 널브러진 장면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음산한 BGM이 귓가에 윙윙 울리는 듯하다. 추리물은 껍데기부터 무서웠다. 책을 들고 다니면 표지에 그려진 거무스름한 데다 얼굴도 없는 인간이 슬금슬금 깨어나 질척질척 들러붙을 것 같았다.

 

살아온 날들보다 귀신 될 날까지가 더 짧을 나이이건만. 으헉! 시뻘건 표지가 불안하다 싶더니 <모래 그릇1>에는 머리, 모가지, 어깨에 총구멍 뻥뻥 뚫린 인간이, <모래 그릇2>에는 열 손가락 다 벌려 유리창에 갖다 대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액션 인간이 있는 거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인간에 빙의하여 시뻘건 표지를 피하고 싶었다. 읽다가 덮어둘 때면 회색 바탕의 뒷면이 보이도록 책을 뒤집어놓았다.

이런 노력이 뻘짓이었음은 두 권을 다 클리어하고 나서야 드러난다. 올레! 드디어!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껍데기. 꼬랑내 나는 양말을 최소한의 손가락으로 집다가 스르륵 껍데기의 봉인이 풀린다. 온통 시.... 미적으로 세련되기까지 했다. 한 꺼풀만 벗겨보았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걸. 추리 소설을 읽는 마당에 사소한 디테일을 놓쳐버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세이초뿐 아니라 마지막으로 추리 소설을 접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은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라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한 줄 요약을 하면, 증거가 사막의 물처럼 감질나는 살인 사건을 중년의 형사가 열 받지 않고 놀라운 인내심과 집요한 추적으로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재미는 없다. 속도감은 걸어가다 다리 아플 때쯤 자전거를 타는 정도이다. 맛으로 치면 오래 씹는 밥맛 같다. 느려터지고 헛다리 짚는 전개에 밋밋한 맛이 나다가 2권부터는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면서 살짝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진다. 통쾌한 사이다 결말이나 조마조마한 긴장감은 없지만 생각할 거리는 있다.

 

모든 살인의 동기는 결국 욕망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도 욕망이고, 우발적인 범죄도 중심에는 욕망이 자리한다. 그런 범행의 동기를 어떤 요소와 접목하느냐에 따라 다른 작가와의 차별성이 결정된다. 세이초는 사회적인 테두리에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집합적 무의식에 비판적이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두 군데에서 드러난다.

첫째,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범인의 배경이다. 최초의 살인 사건 이후, 추가로 발생하는 살인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약간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뮈지크 콩크레트의 도입이다. 뮈지크 콩크레트는 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전위 음악이다. 구체음악이라 불리며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를 녹음한 다음 기계를 통해 변형하여 구성하는 작품으로 음향의 배열에 가까워 대중에게는 생소한 장르이다. ‘대중은 언제나 선구적인 난제에 난처해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에 익숙해지지. 그 순응이 이해로 이끌어주는 거야.(1, p326)’

 

주인공 형사가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경외심을 갖게 한다. 희미한 증거, 증거인 듯 증거 아닌 증거 같은 증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고 답답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경찰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 뒤가 아니면 수사권을 발동할 수 없다. 경찰은 범죄예방 차원에서는 완벽히 무력하다. 피해가 생겨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예감만으로는 수사할 수 없다.(2, p84~p85)’ 우연이 겹치는 단서들의 나열이 다소 억지스러워 살짝 거북했지만, 추가로 발생한 살인 사건에 무력함을 느끼는 마음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추리 소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았다. 피 질질을 피하고 육하원칙으로 정리되는 기사문과 같은 사실에 집중했던 어릴 때와는 달리 범행 동기와 사건 해결 과정에 눈길이 갔다. 삶을 지나온 시간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걸까.

 

내가 해석해본 이 책의 주제는 상처와 욕망이다. 표지를 다시 보니 이토록 적절한 그림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고 싶었던 인간이 유리창 너머에 있다. 유리는 차별이라는 총알을 막아내지 못하고 쉽게 깨진다. 그를 적나라하게 비춰 감추고 싶은 이에게는 상처로 작용하는 벽이다.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인간이 도시의 고층 건물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도시를 품고 싶다는 욕망을 연상케 한다.

제목이 품고 있는 의미에 놀란다. 와르르 무너지기 쉬운 모래 그릇. 대략적인 의미는 감이 온다. 하지만 모래의 속성을 생각하니 깊은 의미가 더해진다. 모래는 0.02mm~2mm의 크기의 입자를 말한다. 이보다 크면 자갈, 작으면 실트나 점토라 불린다. 자갈로 그릇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릇은 고령토를 이용해 도자기를 굽듯 미세한 흙으로 형상을 만든 후에 불가마에 구워야 한다. 모래 만든 그릇을 상상해본다. 모래성처럼 형상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불에 구워낼 수는 없다. 단단하지도 못한 것이 단단하게 보이고는 싶고, 불에 구워지는 순응도 하기 싫다. 모래의 입장이라면 상당히 불안한 상황에 처한 욕망덩어리인 거다.

 

대부분의 시작은 사소하다. 마침표가 찍힌 후에 과정을 돌아보면 이토록 사소할 수 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소함은 말의 뉘앙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인생이란 사소한 일을 계기로 운명이 바뀐다는 말을 알 것 같아요.(1, p57)’ 추리 소설에서의 사소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소한 증거들을 차곡차곡 적립했기에 전체적으로 구슬을 꿰어낼 수 있었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에서는 주인공 박새로이의 운명은 사소한 일을 계기로 확 뒤집힌다. 사소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아 퇴학을 당하고 감옥을 간다. 이쯤 되면 사소함이라는 말을 들이대기가 민망해진다.

멀리 있는 어떤 이에게 사소한 어떤 것은 작은 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가까이 있다고 의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점이 화룡점정의 선명한 의미가 되려면 가까이에서 오래 자세히 보아야 한다. 사소함은 거리에 인내심의 농도가 합쳐져야 하는 섬세한 개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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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2-1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줄 요약이 굉장히 제 스타일입니다. 나비종님은 상처와 욕망에 집중하셨네요. 상처를 치유하려는게 아니라 감추기 급급하고, 그릇되다 하더라도 원하는걸 얻기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욕망... 겉과 속이 다르면서 내내 고귀한 척하는 누보그룹이 꼴불견이었지만, 과연 이들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수 있을지는 모르겠더라구요. 인간은 누구나 기회가 오면 잡으려 할테니까요. 그것이 까만 속내를 감춰주기까지 한다면 누구라도 흔들리겠죠. 나비종님의 글을 보니 그들을 보던 저의 시선이 살짝 달라지네요!

모래그릇의 뜻도 신선하군요. 작중에서는 이렇다할 언급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거든요 ㅎㅎ 불에 구워낼수 없어 형상을 유지할수 없는 모래의 성질은, 결코 완성품이 될수 없는 그릇된 욕망의 소유자들을 잘 말해주는 것 같네요. 근데 참 책보다 리뷰가 더 재미있는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ㅋ

그건 그렇고 경찰 주인공이 너무 매력없던 작품이었어요. 2권이나 되는데 독자에게 힘을 주지는 못할망정 김만 새게 하는 캐릭터여서 아쉽더라구요. 날카롭고 예리한 감각수사는 소설속에나 존재할뿐, 현실은 전혀 다르다 라는걸 말하고 싶은가 했더랬죠 ㅋㅋㅋ 저와는 달리 주인공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셨다고 하니, 나비종님 또한 인간승리인듯 합니다. 그리고 매번 힘든 고비를 넘기는 나물모임도 그러하네요^^

이제 분권 작품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겠습니다. 역시 매월 모임을 해야 좋은거 같아요ㅎㅎ그래야 나비종님의 글을 하나라도 더 읽을수 있으니깐요~! 다음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비종 2020-02-11 22:12   좋아요 1 | URL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는군요, 굉장히~ㅎㅎ 저 역시 누보그룹의 페르소나가 가증스러웠지만 그게 과연 개인만의 문제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적인 편견에 스스로를 끼워맞추려다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구요.

며칠동안 제목만 생각하며 보내다 에잇! 그냥 제 식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나만 재미없나 싶었는데 참 재미없었다는 느낌을 공유하니 든든하네요. 책보다 댓글이 더 쏙쏙 들어오며 재미있는 건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이런 이유일겁니다.ㅋㅋ

경찰 아저씨, 너무 MSG가 없어서.. 하이쿠 얘기도 나오다 만 응가처럼 어정쩡하고, 쩝. 맞아요. 매력을 못 찾겠더라구요. 담백한 두부류도 아니고 당최 난감한 캐릭터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두보 그룹의 두 분에게서 제대로 뿜어져 나오더라구요.ㅋㅋ
이렇게 힘든 고비를 넘어주어야 파동처럼 리드미컬한 재미가 있겠죠? 재미있는 다른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도 있구요.^^

^^매월 모임이 좋은 거 같긴 하네요~ 물감님의 유쾌한 리뷰도 만나고, 나비종서재의 유일한 댓글러의 친숙한 댓글도 만나고~
다음 달부터는 새학기 시작이라 겁나 바빠질 것 같지만, 그래도 책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려구요. 31일 11시 59분에 간신히 리뷰를 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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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사람들이 무심코 흘리는 문장이다. 끄트머리에 물음표를 붙여본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귀신과 맞서는 보건교사 안은영.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죽음 이후의 세상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출처도 희미해 어디서 읽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대략적인 얼개는 이렇다. 우주 어딘가에는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하는데 생명체가 죽으면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나. 윤회와 차원적 개념이 결합 되어 이를테면 계단처럼 점차 높아지는 차원들이 존재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가장 높은 차원의 계로 올라가게 된 존재는 육체조차 필요 없이 영적인 에너지의 뭉치로만 모여있다고. 꿈을 꾸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꿈꿀 때 그 공간으로의 순간이동이 가능해 잠시 거기에서 가져온 결과물이란다. 삼라만상의 해답이 거기에 있다나. 물리학 관련 도서였건만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풍겨 황당하다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난다. 한데 과연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을까. 그 책에 등장하는 세계가 존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마차 바퀴를 굴리던 사람들이 막연히 그려보았을 미래의 모습은 어땠을까. 기록된 소수의 자료 말고 물속에 잠긴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꺼내어지지 못했던 상상들이 궁금해진다. 날개 달린 물체가 하늘을 넘치게 날다 못해 우주를 향하고, 걸어 다니면서 통화하는 미래 사람들의 모습을 과거의 그들이 본다면? 같은 맥락으로 우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모습을 단언할 수 없다.

작가 정세랑의 기발한 상상력과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사건들을 따라가며 생각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조차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가능성 제로인 일이 존재하기는 할까.

 

보통의 인간은 20~20,000Hz의 가청 진동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범위를 넘어서는 초음파나 초저파는 일부 생물들만이 감지할 수 있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인 가시광선의 범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조금만 확장해서 빛을 정의한다면 자외선, 적외선처럼 보이지 않는 빛도 있다. 들을 수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모르지만 다른 세상은 이런 식으로 분명 존재하므로.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멈춤의 의미를 지닌 현상인 걸까. 위로 던져진 공이 아래로 내려올 때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주인공 안은영은 죽었거나 살아있는 존재들이 뿜어낸다는 액토플라즘이라는 입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립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기운들을 없애는 정의의 퇴마사로 등극한다. 귀신과 얽힌 이야기인데도 섬찟하거나 음산하지 않다. 경쾌한 그녀의 성격처럼 살짝 유머러스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감돈다.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갖춘 에피소드들이 시트콤을 연상시킨다. 학생, 교사, 평범한 이, 다른 계통의 능력을 지닌 존재, 귀신 등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핀 조명을 받는 대상들이 매번 달라진다. 이들과 얽힌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을 따라 몇 개의 동산을 넘어가면 어느새 <작가의 말>을 만나는 순간이 온다.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 쉴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 통쾌해지는 결말, 상상을 뛰어넘는 결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결말, 마음이 짠해지는 결말 등 각양각색의 버전이 있다.

소설에서는 그녀의 조력자이자 남주인공 한문 교사 홍인표가 등장하는데 첫 에피소드는 그들의 만남에서 시작하며,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러브러브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느낌이 있다. 요즘 핫하다는 <낭만닥터 김사부2>처럼 2, 3탄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교사 또는 학생이라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학생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교사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가던 중이었다.(p45)’,‘자주 스스로를 누군가 버리는 걸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김살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p104)’, ‘어떤 나이에는 정말로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p125)’ 세 문장에서 아이들의 시린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아팠다.

바깥은 죽어 있고 안은 살아 있는 걸로는 다 할 수 있어.(p118)’ 씨앗을 의미하는 이 문장에서 아이들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아이들, 반항하는 아이들, 비뚤어질 테다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이들. 겉에서는 굳어지고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보이지만, 안에 있는 마음은 몰랑몰랑 살아있어 정성껏 물을 주고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씨앗처럼 싹을 틔우지 않을까.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 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p38)’,‘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p233)’ 이 문장들은 느슨해져 가는 마음을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그래, 아이들에게서 빛을 보고 싶은 마음이, 민감한 빛을 감지하고 싶은 센서가 아직은 내 심장에서 꺼지지 않았구나.

 

어둠 속에서는 빛이 더 잘 보인다. BGM처럼 귀신이 깔린 이야기라 죽음이 주제일 것 같지만 귀신 이야기는 코팅지에 불과하다. ‘살아간다는 동사가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곳곳에 삶이 보인다. 죽음의 충격파를 통과한 이야기들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본능적인 이 아닌 살아가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건네어 준다.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p185)’,‘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p189)’,‘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p216)’,‘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p238)’ 나열한 문장들을 되짚어보니 삶만큼 위태위태하고 불안정한 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p272)’ 이런 친절한 작가님 같으니라고! 그녀는 마지막 부분에서 회심의 한 방을 날림으로써 축 처져 가라앉은 문장들을 깔끔하게 갈무리한다. 막강 파워를 장착한 주인공들이 아니라 어딘지 불완전한 캐릭터를 설정한 깊은 뜻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하건 보이지 않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 존재하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빛이 있는 곳에 머문다면 어둠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며, 어둠 속에 머문다면 빛을 바라보며, 기쁘다면 슬픈 이를 다독이며, 슬프다면 기쁨의 순간을 생각하며, 삶에 머무는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어디에 있든 나 있는 장소에는 의지할 무언가 존재할 것이므로 그렇게 살아가면 충분하리라. ‘살아가는 일앞에는 더불어라는 세 글자가 곳곳에 숨어있으므로.

 

 

p57, 2째줄 : 박민우(본명보다~)박민우( )

p58, 마지막 줄 : 낡을 고무장화를 낡은~

p5, 차례, p89, 제목 : 원어민 교사 메켄지 ~ 매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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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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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어. 외로움이 한기처럼 스며들 때마다 종종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한데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빠뜨리고 있었다. 다른 데서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해주면 되지 않은가. 나를 위로해줄 가장 적절한 적임자는 바로 나인걸 왜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일에 치이느라, 사람에 치이느라 제대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던 건 나를 향하는 말인 듯했기 때문이다. 작가 정여울이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막연히 나를 사랑하라는 번드르르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보듬는 방법을 제시한다. 요리 레시피인 양 스스로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과 구체적인 순서까지 알려준다. 책을 펼쳐놓고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싶어진다.

 

엊그제는 얼떨결에 인터넷 무료간이 MBTI검사를 했다. 엄마는 분명 I타입일 거야.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 10분도 안 걸리는 검사 결과는 ENFJ형이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형이라나. ... 내가 모르는 내가 어딘가에 숨어있다 갑툭튀했나. 스스로 들여다본 내 성향은 내향성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더니만. %로도 나오는 요소별 결과를 보니 외향성과 내향성이 거의 반반이다. 5149로 외향성이 간소한 차이로 많다. 사람의 성향이 사과 가르듯 딱 쪼개져서 분리되는 건 아닐 텐데 예측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가 새삼스럽다.

작가는 내향성에 대하여 섬세하게 다룬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침묵은 수많은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p20)’라는 문장에 잠시 머문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표현하지 않을 뿐 침묵 안에 많은 말들을 담고 있을 거다.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면 온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담긴 차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맛과 향기가 날 터이다. 글쓰기와 성향과의 관계를 말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내향성의 집중력과 외향성의 표현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다.(p21)’ MBTI 검사의 결과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라 할지라도 내향성과 외향성이 반반이라는 나의 결과가 글쓰기에 적합하다는 말로 들려 기분이 좋아진다.

돋보기로부터 물체까지의 거리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상을 볼 수 없다. 크게 보려고 렌즈를 내밀었다가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하면 엉뚱한 상이 눈으로 들어오게 된다. 작게 보이는 상의 크기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느 순간 상이 거꾸로 보이니 다소 난감하다. 거리에 대한 문장을 보며 돋보기의 속성을 떠올렸다.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가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다.(p32)’ 사람 사이의 거리도 볼록렌즈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조차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리라.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수업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나치는 머릿속에서 4개의 낱말이 번갈아 굴러다녔다. ‘페르소나는 가면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에고는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셀프는 내면에 자리하는 나의 모습을,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내면의 희열을 뜻한다. 어떤 날은 페르소나를, 다른 날은 에고와 셀프를, 또 다른 날은 블리스를 생각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진짜 나를 만날 시간이라는 부제로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다섯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방어 기제페르소나에 대한 문장을 읽다보니 <인사이드 아웃>슬픔이가 생각났다. 우울을 덮는 페르소나를 쓰고 흘려보낸 하루를 돌아보았다. 푸른 빛깔의 감정도 필요하다던 애니메이션의 메시지를 상기했다.

나의 에고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셀프가 원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는 에고를 따라가고 있을까, 셀프를 따라가고 있을까. 혹여 에고를 좇느라 셀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가 제시해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메모했다. 첫째, 자신이 싫은 점, 후회되는 점, 고치고 싶은 점을 적어볼 것. 둘째, 그래도 기특한 점을 적어볼 것. 셋째,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볼 것.

태도와 자유에 대한 문장들에 위안을 받았다. ‘상처를 삭제할 수는 없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다.(p110)’, ‘그리하여 내가 점점 더 나다워지기를, 내가 다만 꾸밈없는 나임으로써 최고의 자유를 얻기를 꿈꾼다.(p113)’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였다.

 

치유적인 글쓰기에 대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글이나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때마다 내 인생을 걸고 있다.(p132~133)’ 작가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쓸 때마다 심장을 꺼내어 마주 보다 다시 집어넣는 행위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심장을 꺼내기까지의 시간은 매번 고통이다.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넘어 온기가 담긴 글로 심장을 어루만지면 행복이 스며든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행위는 이러한 과정들의 로테이션이다. 이런 이유로 내게 있어 글쓰기는 행복한 일이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중성을 띤 뜨거운 블리스랄까.

 

번아웃에서 회복되기 위한 세 가지 길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 같다. 첫째, 쏟아지는 일감이나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 둘째, 삶의 속도를 구체적으로 줄이는 것. 셋째, 주변의 모든 자극을 일의 방해물로 여기는 대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각 훈련이다.

예전의 나는 예스맨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주어져도 거절 한 번 못하고 끈질긴 인내심으로 부담감을 견디어왔다. 태양을 보고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날들로부터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러다 내가 못살겠다 싶은 거다. 하나 둘씩 거절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거절하다보면 할만 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치유된 이들의 공통점은 거절하는 용기라고 한다. 거절은 비인간적이나 냉정과는 다르다. 내가 그동안 섣불리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에고를 위한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작가는 상처를 표현하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상처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는 문장을 스스로 찾아보라고도 한다. 그리하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정여울이 제시하는 자기치유법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올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나 일들을 시도해본 해였다. 독립서점의 몇몇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이제껏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버렸다. 망설이며 정리하지 못한 관계의 끈들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주요 관심사와 다소 동떨어진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스스로 흡족해하는 중이다. 작가의 글을 보니 나의 삶에 응원군이 생긴 것만 같아 든든하다.

 

책 표지를 바라보며 그림의 제목을 음미한다. 그림의 제목은 <Pause Series 002>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인다. 지고 다니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늘진 의자에 앉아 세상을 응시하며 한 발을 주무르는 장면. ‘pause’는 잠시 멈춤을 뜻한다. 아예 여기에서 멈추는 ‘stop’과는 완연히 다르다.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한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은 이렇게 잠시 쉬다 또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가리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읽으며 심리학적인 시각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책에 실린 문장 위에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위로가 되는 따스한 레시피를 따라 다시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작가는 이런 의미로 채워진 시간들을 독자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던 걸까.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시간. 에필로그의 제목이 나에게 스며든다. 마지막 문장이 따스한 옷인 듯 심장을 감싼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p245)’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이 벅차오른다. 눈이 뜨거워진다.

 

 

p221, 밑에서 4째줄 : 안심시키기고 안심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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