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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떼어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라도 겹겹이 중첩되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결정짓지 못한 일과 망설임으로 채워진 갈등과 의기소침과 스스로 들여다보는 가식과 자책과 실망감과 불안함이 뒤섞였다. 소소한 일상들이 조금씩 심장을 할퀴었다. 영혼이 난시라도 된 듯 부정확한 초점으로 흔들렸다.
삶이 어떤 풍경으로 펼쳐지느냐, 마음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마주치는 책은 다른 의미로 남는다. 이를테면 마실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다. 씁쓸한 듯싶다가도 시원함을 아작아작 부숴 넘기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간질간질 향이 코끝을 어루만지는가 하면 손바닥이 시릴 정도로 냉철함이 스며든다. 차분한 갈색이 목구멍을 보듬다가도 헛헛한 낙엽이 미적지근하게 굴러들어온다.
책장에 줄지어 선 세상을 하릴없이 왕복했다. 36.5도가 너무 뜨거웠다. 사계절을 지나온 나무가 품은 담담한 말들에 기대고 싶었다. 아무 책이라도 좋았지만 아무 책이어서는 안 되었다. 사둔 지 몇 년이나 지난 이 책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을 시작으로 우연히 끌려 온 여덟 개의 별똥별은 내 삶의 대기권으로 날아들었다. 섬광처럼 빛을 내다 심장에 선명한 느낌표를 찍었다. 갈증 날 때 발견한 물처럼 필요로 하는 절묘한 타이밍에 마주친 책이었다.
『여덟 단어』는 20, 30대를 대상으로 2012년에 두 달여 간 이루어진 강의를 엮은 책이다. 작가 박웅현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주제로 여덟 개의 키워드를 정한다.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로 일하는 광고인이다. 광고는 축약된 메시지를 15초에 담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일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작가의 글에 묻어난다. 문장은 간결하고 시선은 청중의 눈높이와 나란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겉표지부터 내 스타일이다.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의 이미지를 표현한 점이 광고를 연상케 한다. 각각의 강연을 여는 페이지에는 제목 밑에 광고의 카피를 연상케 하는 한 줄의 보조문장이 적혀있다. 키워드를 관통하는 문장들이다.
뒷장을 넘기면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작가의 글씨로 기록된 듯한 강의 메모 수첩이다. 살짝 훑어본다.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되돌아가 다시 읽는다. 콘티 역할을 한 스케치일까. 강연 내용과 대조해본다. 처음의 의도가 반영된 내용도 있지만 빠지거나 추가된 부분도 보인다. 순간순간의 순발력으로 강의가 업그레이드된다는 거다. 투박한 메모에 보이는 고민의 흔적들과 정갈한 강연으로 다듬어진 내용을 함께 보니 괜스레 뭉클하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즐겨 듣는다. 소설책을 펼칠 때 배경음악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등장인물의 감정에 더욱 잘 이입된다.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되는 OST가 감동을 짙게 만드는 경우와 비슷하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공감각은 느낌의 깊이를 더한다. 문장의 맛이 풍부해진다. 애끓는 이별 장면에 드럼의 신들린 연주가 곁들여지면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글을 쓸 때도 음악을 들으면 헝클어져 있던 생각이 정돈된다. 쓰고자 하는 글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노동요를 선정하여 OST로 깔아준다. 방앗간 가래떡처럼 정갈하고 꼬들꼬들한 문장들이 방언인 듯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글과 음악에도 궁합이 존재한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의 커플이리라.
이 책의 BGM으로는 <캐논 변주곡>이 적당하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주변의 공간이 3차원의 거대한 TV로 변한다. 그 속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드라마 주인공이 된다. 다양한 버전의 선율이 흐른다. 가야금, 피아노, 첼로, 드럼, 바이올린, 일렉 기타, 어쿠스틱 기타, 하프, 테크노. 여덟 단어를 주제로 하는 에피소드가 하나씩 펼쳐지면 내가 겪은 일이 다양한 음색으로 울린다. 조화로운 음으로 편안하게 가끔은 불협화음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가 마법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버튼이 된다. 친구가 되었다가 토닥토닥 다정한 손길이 되었다가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가 예리한 얼음으로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책 속의 문장과 내 삶의 문장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힌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버릴 게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리처드 파인먼의 말은 선분으로 존재하던 나의 문제에 화살표의 머리를 만들어준다. 더하기보다 어려운 건 빼기이다. 수학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는 원리이다. 정리할 때도 버릴 물건을 정하는 과정이 훨씬 어려우니까. 미련 내지는 욕심 때문이다. 2강의 <본질>의 입구에 놓인 이 문장을 시작으로 지금 풀어내야 할 문제의 해결책이 담긴 정답의 노다지를 만난다. 불쑥 떠오르는 문제에 대하여 본질을 묻는다.
첫째, 내 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은 종이에 기록되는 목소리이다. 한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이 떠오른다. 얼굴을 가려도 ‘그’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건 ‘그’를 ‘그’이게 만드는 목소리의 본질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의 글을 나의 글이게 하는 본질은 뭘까.
둘째,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얼마 전 과학실 뒷정리를 하다 실험대 위의 아크릴 칸막이를 보고 분노한다. 볼펜이나 연필 낙서는 애교다. 알콜 성분이 들어간 소독제를 한 번 뿌리면 클리어되니까. 한데 칼로 조각된 저 거대한 물음표 형상은 어쩌란 말이냐! 심장을 칼로 긁힌 듯 부르르 떨었다. 후~ 후~ 커터칼을 들었을 저 어린 장수를 어찌 처단할까. 그날 저녁에 만난 <본질>은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를 알려준다. 아이의 인성 때문이 아니었다. 내 수업을 지루해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이유가 가장 컸던 거다.
평범한 문장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특별한 전율로 살아난다.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에 나오는 문장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뭉클한 서사를 안겨주는 시인의 시선에 경외감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가. 직접 찾아 시의 전문을 보기를 권한다. 시에 담긴 소재를 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되리라.
수업 태도로 매번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이와 갈등이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으나 결말은 다소 창대해졌다. 나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이와 몇 번의 강한 말이 오갔다. 평소보다 높은 진폭으로 감정이 일렁였다. 해프닝 정도의 일이었지만 찜찜한 기분이 며칠을 갔다. 그즈음 <견(見)>을 만나 아이를 보는 시각을 곰곰 생각했다. 난 그 아이를 제대로 본 것일까.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도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대화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본질을 놓친 채 그저 껍데기의 까칠함만 본 건 아닐까. 습관처럼 아이들을 불변하는 가구인 듯 보아왔던 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다음 주 헤헤거리며 나를 대하는 아이를 보니 머쓱한 앙금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미 마신 커피를 떠올리느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얼음을 바라보느냐, 컵을 보느냐, 빨대를 보느냐. 고동색 커피, 투명한 얼음, 하얀 머그잔, 붉은 빨대 등 다양한 요소가 나의 선택을 기다린다. 안팎으로 기다리는 소재 중 무엇을 볼 것인가.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매너리즘 없이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의 맑은 시선을 가져야 하리라. 사물이든 사람이든 스스로 내면을 바라볼 때조차.
몸이 움찔하게 되는 건 사소하게 베인 상처 때문일 때가 많다. 일상의 지질한 일들이 의외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그럴 때마다 본질을 응시하고 제대로 바라본다면 조금 덜 아프게 다시 걸어 나갈 힘을 얻게 되리라.
2013년에 출간된 후로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이 생기는 건 그가 언급한 문장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처럼 책 안에 담긴 본질이 나무처럼 곧게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리뷰를 쓸 때면 무의식적으로 그때 일어난 일들, 그때 보았던 드라마, 그때 읽었던 책, 그때 나누었던 대화, 그때 맡았던 향기가 소재가 되어 녹아들었다. 슬픔에 관한 책이라면 이 모든 환경에서 슬픔을, 행복이 주제라면 같은 환경에서 행복을 뽑아내어 그 실로 뜨개질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공통적인 맥락을 발견한다. 고민하는 선택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되는 거였다. 신중하게 선택할 것, 선택한 나의 답이 정답이니 다만 그 길을 향해 노력할 것. 작가의 문장들이 응원의 에너지를 전해준다.
마지막 책 장을 덮고 음악을 멈춘다. 박웅현 작가가 쓴 드라마 1부가 끝이 났다. 이제 배경음악부터 모든 걸 디자인하는 2부는 나의 몫이다. 다큐멘터리로 뛰어드는 대본 없는 실전이다. 내 안에서 빛나고 있을 나만의 별을 찾아 지금부터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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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5 인용문 6째줄: 1년의 달수 → ~ 날수
p85 인용문 6째줄: 대양 →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