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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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서 책 읽고 있어.”

혼자?”

.”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서 읽지, 왜 혼자서 그러고 있어.”

집은 노동의 공간이라 집중이 잘 되지 않아. 3 둘째가 밤 10시 반 넘어서 집에 오니까 겸사겸사 기다리는 거야.” 가뿐한 듯 말을 보탰다.

집에서 나는 밥통이다 세탁기였다 가전제품이 되는 기분이 들어. 정서적인 교류 없이 왔다갔다 기능을 하는 인공지능이랄까. 그래서 집에서 나오는 거야. 여기서는 커피 값만 지불하면 존중받는 느낌을 받으니까.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공간이지. 억지로 마음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가라앉다 방바닥이 되어버릴 것 같거든. 나는 지금 안간힘을 쓰는 중이야.’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말은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 모습을 감추었다.

얼른 읽고 집에 들어가.”

그래.”

마음 따뜻한 친구지만 내 마음을 공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버티는 중이었다. 맨발로 얼음 바닥을 걷는 마음은 종종 휘청휘청 시렸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야. 스스로 다독일 때면 감각이 마비된 듯했지만 탄성력을 지닌 채 되돌아오는 냉기를 안아야 했다.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글쓰기 대회에 참여하며 나의 존재를 활자로 확인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고요하고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휘돌고 지나갔다. 글을 쓰며 마음에 박힌 가시를 하나 둘 빼내었다. 하지만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낮 동안 웃고 말하는 가면을 쓰던 나는 퇴근 후 말간 민낯으로 가라앉은 마음을 마주했다. 역류성 식도염이라도 걸린 듯 가슴 깊숙이 고여 있던 물컹함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커피숍으로 가는 길은 따끔한 자유였다. 껄끄러움이 먼지처럼 눈가에 고여 물기가 어렸다.

 

5교시에 들어가 보니 여학생들 대부분이 자리에 없다. 하나 둘 들어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어둡다.

무슨 일 있었니?”

점심시간에 배드민턴 반 대항을 했는데 졌어요.” 남학생들이 답을 해준다.

훌쩍거리며 다시 울먹이는 몇몇 여학생들. 맨 마지막에 자리로 돌아온 A의 눈이 뻘겋다. 본인 생각에 억울한 상황이 있었던 거다. 수업을 진행하는 내 눈치를 보며 뒷자리 친구에게 억울함을 토로한다.

‘CPR의 핵심은 타이밍이다.(p304)’ 수업보다 더 중요한 긴급 상황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잠시 수업을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 많이 속상한가보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속상했을까?”

제가 한 시합은 이겼는데요, 친구에게 체육복 바지를 빌려주고 저는 친구 치마를 입고했는데 그게 짧아서 움직이기가 불편했는데 선생님이 자꾸친구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는 A.

아이의 대답에 집중하고 궁금해 하는 태도가 어떤 좋은 질문보다 더 좋다.(p275)’ 가만히 옆에 서서 A의 말을 들어주었다. 본인의 옷까지 빌려주고 불편을 감수했는데도 그 노력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진행 과정에서 서운한 일이 있었나보다. 다시 생각해도 속상한지 A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예전의 나라면 아마도 진행하는 선생님 입장에서 말하고, 시합을 하다보면 질 때도 있는 거지 승부에 연연하지 마라 정도의 말을 하고 수업을 진행했을 터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이들의 섬세한 뜨거움이 필요하다.(p12)’ ‘공감 과녁의 마지막 동그라미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이다.(p145)’ 이 문장이 떠오른 나는 A의 마음을 공감하는 말을 건넨다.

저런! **샘이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가 많이 속상하고 억울했겠구나.”

어깨를 감싸고 토닥이며 A가 친구들에게 디테일한 상황을 다시 설명하는 시간을 지켜보았다.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않고 단지 아이의 울컥함을 다독이기만 했다.

!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잠시 후 A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한다.

그래! 세수도 좀 하고. 어유! **가 많이 속상해서.”

결과적으로 아이의 마음이 낸 문제를 맞힌 셈이 되었다. 이전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들어간 느낌이었다.

 

6교시에는 한창 수업을 하는데 B가 벌떡 일어나서 아무 말 없이 뒷문을 열고 나가려한다.

갑자기 어디 가니?”

그제야 물을 뜨러 간다며 500mL 빈 페트병을 흔든다.

아니, 허락을 받고 나가야지 갑자기 그렇게 나가려하면 어떻게 해? 이따 쉬는 시간에 가!” 예전의 나라면 아마도 살짝 황당해하며 조금 높아진 톤으로 이랬을 거다.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p50)’ 순간 이 문장이 떠오른다.

잠깐 복도로 나와 볼래?” 부드럽게 말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쟤 또 시작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종류의 행동을 자주 하며 수업의 흐름을 깨뜨리는 아이였다.

물을 뜨러 가고 싶다면 선생님한테 허락을 먼저 받았어야 하지 않을까?” B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했다.

샘 말씀하시는 도중 끊길까봐 말씀이 다 끝난 다음에 허락을 받으려했어요.”

그랬구나. 샘이 잠깐 오해를 한 거네. 미안하다. 얼른 다녀오렴.”

B를 보내고 교실로 들어와서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들어온 나를 조금은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위기를 모면하려 둘러댄 말이었는지, 말한 대로의 마음이었는지 진실은 B만이 알 것이다. 이 작은 경험에서 나는 세 가지를 얻었다. B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내가 B에게 입혔을 지도 모를 상처를 주지 않게 된 것이다. 관성대로 B는 원래 저렇게 버릇없는 아이라 규정짓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거다. B의 말이 거짓이었더라도 목이 말랐을 아이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니까 귀여운 거짓말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나의 감정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점이 내가 얻은 가장 큰 이득이었다.

 

제목이 따뜻해서 집어 들었다. 영감자 이명수가 표현했듯 읽는 책이 아니라 행하는 책(p7)’이다. 번드르르하고 거만한 전문가의 냄새 없이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실전지침서라서 좋았다. 두 명의 학생에게 적용해본 결과, 생각보다 효과가 커서 놀랐다. 막연하게 가정했던 효과 이상이었다. 소박한 집 밥 같은 치유라는 적정심리학은 맞춤형 옷인 듯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이들을 상담하는 노하우를 제대로 전수받은 느낌이다. 그동안 교사로서의 나는 상처 입은 아이들의 마음에 심리적 CPR은 하지도 않고 시술부터 하려고 달려든 셈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공감하는 행동을 제일 처음 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요즘 왜 지치는지 알았다. ‘누군가를 공감하기 위해 누가 재가 돼버리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p264)’ 나는 감정노동을 하고 있던 거다.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듣고 위로해주고 답을 제시해주는 축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의 얘기를 하느라 나의 마음이 어떠한지 관심이 없다. 대화를 끝낸 상대방은 뭔가를 잔뜩 얻은 듯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떠난 후 혼자 남은 나는 종종 공허함을 느꼈다. 그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거다.

누구에게도 나의 무거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혼자서 견디다 결국 연락을 하게 되는 두 사람이 떠오른다. 평소 연락을 자주 하는 대상은 아니지만 가만히 분석해보니 공통점이 보인다. A는 매번 대화의 끝에 “**은요?”라며 나의 마음이 어떤가 묻는 이다. B는 나의 존재가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 지 표현해주는 사람이다. 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주는 B와 대화하다보면 내가 썩 괜찮은 인간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모두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듣고 싶어 했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가 적절히 섞여 들어가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주고받는 상황이 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p68)’ ‘요즘 마음이 어떠냐는 질문은 바로 그곳, 그녀 존재의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한 말이다.(p103)’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거였나. 요즘 넌 어때? 네 마음은 어때? 라는.

 

어젠 좀 울적했어. 글짓기 대회 결과가 나왔는데 떨어져서 좌절했어.”

뭐 그런 걸 가지고 좌절씩이나 하냐?” 안부전화를 건 그 친구는 웃으며 가볍게 넘겼다.

사실 내 마음은 내가 한 말보다 더 의기소침한 상태였는데.

글짓기대회에 도전하는 내 심리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다보니 답이 보였다. ‘자기 존재가 집중 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p45)’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각보다 강해졌던가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적인 곳에 기대고 싶었나.

총량 불변의 법칙은 여러 모로 적용되는 규칙으로 보인다. 어느 한 쪽이 많아지면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백혈병에 걸려 암세포인 백혈구 수치가 증가하면 정상 백혈구나 적혈구나 혈소판의 자리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서 면역기능이 떨어지고 빈혈 등이 생기는 거라 들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인정 욕구로 채우고 싶었던 마음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리고 황량한 적막함이 출렁거리는 마음을. 매일 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잠들곤 했던 시간들을. 먹고 살기도 버거운 세상에 멀쩡한 직업 있고 그럭저럭 사는데 이런 감정은 사치이지 않나. 사람들이 했을 법한 말을 스스로 내안으로 던져 넣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p162)’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p218)’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p274)’ 누구보다 나의 마음을 잘 아는 내가 나의 마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거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세 여자 주인공 중 한 명은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연인의 환영과 계속 대화를 하면서 지낸다. 주변 친구들은 자살까지 시도했던 그녀의 모습을 그저 마음 아프게 지켜보기만 한다.

어제는 그녀가 본인의 상황을 인지하고 친구들에게 손을 뻗는 장면이 등장했다. “나 힘들어!” 그녀의 투명한 연인에게 건네는 말인 줄 알고 친구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그녀가 말한다. “너희들에게 하는 말이야. 나 힘들어!” 그제야 그녀에게 울컥하며 다가선 친구들과 그녀의 남동생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말한다. “고마워, 힘들다고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카카오 톡의 프로필 뮤직을 이하이의 <누구 없소>로 바꿨다. ‘누구 없소/ 나를 붙잡아줄 님은 없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는데/ 어디 있소~’ 매력적인 목소리와 가사 내용이 와 닿아서. 표현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책속에서는 당신이 옳다란 문장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p48)’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 아픈 배를 문지르는 엄마의 손길을 느낀 아이처럼 내 마음은 그녀의 문장들에 반응했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가 몰랐었구나.(p9)’ 책속에서 저자가 슬며시 걸어 나와 나를 향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로구나.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책속의 그림이 적절하게 어울렸다. 두 사람이 안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한붓그리기다. 소제목 옆에 간단한 테두리로 있는 그림은 차라리 장식에 가까웠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울컥했다.

안는다는 것은 참으로 뭉클한 스킨십이다. 저마다의 정체성으로 따로 뛰던 하나의 심장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안는 순간 심장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이의 가슴을 데워준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경계에서 심장은 두 개로 뛴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지 당신의 심장이 펄떡이는 건지. 공명하는 울림은 구분하기 어렵다. 구분할 필요도 없는 순간이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그림들과 정혜신의 문장들이 뜨끈한 차 한 잔이 되어 나의 숨결을 데워주었다. 마음을 정면으로 들여다본 내 눈엔 계속 눈물이 스몄지만 내내 따뜻한 다독거림을 느끼며 위안을 받았다. 두 개의 심장을 느껴본 시간이었다.

 

 

p109, 1째줄 : 숨길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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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7 0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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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7 2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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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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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람, 웃음, 농담. 아름답고 무용한 그런 것들을 좋아하던 희성도 죽고, 화초 같은 계집의 치마 끝을 그토록 섹시하게 잡고 그윽한 눈총 뿜뿜 쏘아대던 동매도 죽고, 그거면 됐다는 유진도 죽고, 애기 씨만 불꽃으로 살아났던 작품. 주인공들 대부분이 시간차 몰살을 당했어도 여운이 길게 남았더랬다. 오다가다 스냅 사진 같은 장면만 보았으면서도 충분히 임팩트 있는 뭉클함을 주던 드라마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니 뜬금없이 떠오르는 드라마. 교집합이 전혀 없는데 대체 어느 부분이? 한참 생각하다 이유를 깨닫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허무였다.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등장한 무용한 것이란 말이 겹쳐진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초반에는 파티 작렬하며 남주인공의 정체에 대한 진실게임이 느릿하게 진행되다 등장인물들이 우루루 한군데로 모이더니 그때부터는 폭풍 전개가 이어진다. A가 여주인공이 운전하던 차에 치여 죽고, A의 남편은 남주인공이 그런 줄 알고 권총으로 쏴죽이고 자살한다. 이틀 만에 책을 읽고 나흘을 고민했다. 도대체 책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좋아, 이토록 허망하고 재미없었음을 써봐야겠어. 소설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소설의 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분석해보기로 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깔 수 있으니.

 

첫째, 인물을 살펴보았다.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를 보면, 개츠비의 첫사랑은 여주인공 데이지, 머틀의 첫사랑은 톰이다. 데이지와 톰, 머틀과 윌슨은 각각 부부이다. 톰과 머틀은 몰래 만나는 사이이고, 개츠비와 데이지는 5년 만에 재회한 후 대놓고 만난다. 조던은 소설 내내 등장하지만 존재감 제로에 허세 쩌는 인물이다. 그녀와 살짝 썸을 타다 마는 닉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며 개츠비의 위대함을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잠시 등장하는 머틀의 여동생은 언니의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서로 안 맞는 사람끼리 왜 같이 사냐는 거예요. 내가 저들이라면, 이혼하고 당장 재혼할 거예요.(p48)’ 처음에는 공감했지만 조금 더 생각하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안 맞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같이 살지 않을 경우보다 다만 1%라도 유리한 점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사람만큼 이기적인 존재는 없으니까. 데이지가 톰의 외도를 알면서도 같이 사는 이유는 톰이 자신의 허영을 만족시켜주는 인물이기 때문일 터이다. 머틀 역시 윌슨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이런 시각으로 판단하면 오로지 맹목적인 인물은 개츠비이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데이지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려고 했고 자신의 성장 배경에 대한 거짓말 역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향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니까.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에서 대부분 여주인공만은 꽤나 그럴 듯하다. 악녀 캐릭터는 서브 여주의 몫이다. 주인공이라면 무릇 비련의 캐릭터이거나 유쾌함을 장착했거나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아름답거나 공감을 끌어내는 인물이다. 한데 이 작품은 핀트가 어긋난다. 이토록 돈 냄새를 좋아하는 존재가 있을까. 개츠비가 보유한 수많은 셔츠들을 보며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라며 흐느끼지를 않나, 개츠비조차 그녀를 가리켜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p151)’라 표현했으리만큼 세속적인 밉상이다. 여타 로맨스 소설과의 차별점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것처럼, 데이지의 허영은 개츠비의 순수함을 드높이는 장치를 한다. 부를 끌어 모은 개츠비와 지향점이 다르다.

데이지의 남편 톰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그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을 전부 다 제 입장에서 정당화해버렸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p222)’ 개츠비의 죽음을 도발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머틀의 남편 윌슨이 총을 들고 개츠비를 향해 뛰쳐나가게 만들었으니까.

또한 톰의 말을 그대로 믿고 불끈한 윌슨은 바보다.

관찰자 닉을 작가의 아바타라고 가정한다면 유일하게 밉상이 아닌 인간은 위대한 개츠비이다. 이토록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지질할 수 있을까. 각각의 속성이 지질하다 못해 일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섯 행성들의 등장인물이 연상된다. 권위적인 왕, 자기 칭찬 외에는 듣지 않는 허영쟁이,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마시는 술꾼, 5억 개의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상인, 1분마다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자기별도 탐사 못한 지리학자. 독자 입장에서는 한심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각종 캐릭터들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심오한 메시지들을 건네준다. 우리가 한심해하는 요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복잡다단한 인간의 속성을 분별 증류한 극단적인 캐릭터이기는 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를 따로 따로 심도 있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작가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둘째, 사건이다.

윌슨과 다툼 끝에 갑툭튀한 머틀이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고, 톰의 발고로 개츠비를 오해해 불끈한 윌슨이 개츠비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어쨌든 주요 인물 셋이 죽고 화자를 제외하면 데이지와 톰, 밉상 부부 둘만 남는다. 허무도 이런 허무가 없다. 허망하기 그지없으나 인생 다 그렇지 뭐라는 흔한 말처럼 삶의 속성을 가장 흡사하게 스케치한 모습이다. 공식에 대입하여 완벽한 X값을 얻어낼 수 있는 수학이 아니라 무한소수로 애매하게 흐드러지는, 갑자기 등장한 Z로 인해 일차방정식에서 순식간에 삼차방정식으로 변모하는, 분모에 0이 등장하여 불능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토록 허무해 보이는 사건들을 대하는 자세와 해석하는 관점,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심미안일지도 모르겠다.

개츠비의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들도 숙고할 여지가 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은 개츠비의 죽음 이후에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하며 인간의 비정함을 그려낸다. 개츠비의 파티에 그렇게나 모여들던 이들이건만 개츠비의 죽음을 알리자 각자 핑계를 대며 장례식을 외면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정한 단면은 개츠비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셋째, 배경이다.

작가는 대조되는 배경을 마주 보게 함으로써 서로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기득권 세력, 올드머니, 톰과 데이지 부부를 이스트 에그에 배치하고 신흥 부자, 뉴머니, 개츠비를 웨스트 에그에 배치한 다. 서로 다른 세력의 모습은 당시 독자들의 피부에 직접 와 닿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주법의 시대인 1925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술이 금지되던 시기에 주인공 개츠비는 밀주업으로 돈을 번다. 그가 일주일마다 열었던 파티에서는 술이 질펀하게 등장한다. 나는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파티 장면에서 지루함과 이질감을 많이 느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민감한 이슈였을 터이다. 소설 출간 당시 29세였던 작가로서는 현재를 생생한 배경으로 시대상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검은 마스크 쓰고 두 손 공손히 모으며 TV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과 관련된 배경 정도 되었을까. 그렇다면 영향력의 강도가 상당했으리라.

 

소름이 돋았다. 허술한 것이 아니라 삶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완벽한 구현이었다. 이토록 지질하고 적나라한 욕망과 허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것을 드러내고 싶었구나. 주제가 선명하다. ! 소설의 3요소가 주제, 구성, 문체인데 주제와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하다면 문체는? 문체의 입장에서 소설을 훑어본다. ‘은빛 후춧가루가 뿌려진 별밭(p34)’이라는 비유도 뛰어나고 닉이 말하는 다음의 문장에서는 유머 감각도 보인다. ‘모든 사람은 여러 주요한 미덕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 경우에는 이것이다 :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정직한 사람들 중 하나다.(p78)’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니었구나, .

내 취향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p170)’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가 비판의 대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p11)’ 무엇이든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로 해석되는 이 문장 앞에서 슬그머니 반성을 한다.

작가는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아름답고 무용하지만 맑은 사랑을 위대한이라는 단어로 코팅하고 싶었던 걸까. 개츠비가 동경하며 바라보던 저 멀리 데이지의 집에서 반짝이던 불빛을 그린라이트로 설정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으리라. 레드의 열정도 아니고 옐로우의 질투도 아니고 블루의 우울함도 아닌 나무의 자연 빛을 닮은 그린의 순수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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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9-07-1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아직 밀린게 있어서 차후에 토론 댓글을 달겠습니다ㅎㅎ

나비종 2019-07-15 23:53   좋아요 1 | URL
네~ 저는 다른 거 읽을 것이 있어서 조금 빨리 읽고 독후감 마무리를 했어요. 어떤 리뷰를 쓰실지 기대하겠습니다.ㅎㅎ

물감 2019-07-30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드디어 다읽었습니다. 휴가랑 겹쳐서 독서가 게을러지네요^^; 안그래도 읽는속도 느린데...ㅎㅎ

개츠비는 보는 사람에 따라 확 갈릴 인물이겠더라구요.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남의 가정 파탄내는 쓰레기가 되거나.
개츠비 인생이 작가인생과도 닮았던데 그러면 피츠제럴드도 자기가 쫓았던게 뭐였는지 알고 있었다는 거겠죠? 어느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꽃을 피웠지만 그것역시 한 때이고 시들면 다 똑같아지는 허무함을 보았습니다.

맨처음에 아버지가 닉에게 한말도 다양한 해석이 되네요. 저는 중립이 되어 사람을 볼 줄아는 시각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책속에 많은 이들이 뚜렷한 개성과 성향을 갖다보니 한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는데 닉은 그렇지않아서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나 합니다.
여하튼 이번 리뷰는 분석력이 엄청나시네요ㅎㅎㅎ공부가 많이 되었어요.
8월은 잠깐 쉬었다 가면 어떨까요? 책도 다시 선정해야겠네요^^

나비종 2019-07-30 11:07   좋아요 1 | URL
7월 안에 해내셨군요.^^

저도 개츠비가 썩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보이지는 않더라구요. 쓰레기...까지는 아니고 음, 약간 집착 쩌는 분리수거용 정도쯤 되겠습니다.^^;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로부터 나오는 글은 작가의 삶과 완벽하게 별개일 수는 없나봅니다. 하다못해 SF판타지라도 등장인물의 대사 안에 작가의 삶이 어느 부분은 묻어나는 것 같으니까요.
허무...맞아요. 허무하다못해 허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구요. 쓰읍~

닉이나 그 아버지나 중립의 위치에 서 있다는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얘기죠. 제가 보기에 완벽한 중립에 서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거든요. 조금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된다고 봅니다. 중립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볼 때 정도일까요.

쥐어짜내서 리뷰를 썼지만 재미 드럽게 없었어요. 고전의 길이 참, 험난하구나 싶었습니다.ㅎㅎ
동의합니다. 8월은 좀 쉬어요. 다른 책으로 에너지 충전해서 9월에 나물모임 재개장해요. 책은 물감님께서 선정하시면 따라가겠습니다~^^

물감 2019-07-30 11:47   좋아요 0 | URL
중립의 위치를 서는건 지난 과거를 돌이켜볼때란 말, 명언 탄생입니다ㅎㅎㅎ
8월중에 책 선정하겠습니다.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나비종 2019-07-30 12:20   좋아요 1 | URL
중립에 대한 저의 견해에 공감하신다니 기분 좋은 친구를 얻은 기분입니다.ㅎㅎ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어떤 책이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하게 정해주세요~^^
 
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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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다 읽으면서 느낌이 전해지는 책이 있는가하면 읽고 나서 돌아보면 마음에 파스를 붙인 듯 후끈거리는 책이 있다. 정혜윤의 책은 후자이다. , 자아, 사랑과 우정 등을 주제로 다른 책들을 통해 다양한 작가들이 했던 말들을 정혜윤의 생각과 함께 엮어놓은 책이다. 각각의 짧은 글들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로 귀결된다. 사랑에 대해서 A는 이런 말을 했고, B는 이런 말을, C는 이런 말도 했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식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했던 말들을 나열해놓은 점이 처음에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책을 덮고 나서도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변화는 그 후에 일어났다. 메모해놓은 문장들을 정독해보니 문장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 언저리를 맴돌아 자꾸 걸리는 말들이 버블 넷이 되었다. 흑고래들이 청어 무리를 사냥할 때 만들어낸다는 원기둥 모양의 거품 벽, ‘버블 넷말이다. 내게 버블 넷이 된 것들과 뜻밖의 좋은 일이 되어준 일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끔 내가 스스로 기특한 게 고독을 글을 승화해낸 점이다. 외롭거나 마음이 아플 때면 나의 머릿속에는 종종 문장들이 떠다녔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버블 넷을 뚫고 나온 청어 새끼라도 된 듯 글을 쓰는 순간 외로움은 물거품처럼 툭 터지곤 했다. 나의 글은 나의 고통을 나누어 들어주었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따뜻함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따뜻함뿐이다.(p116)’ 내가 만들어낸 따뜻함은 나의 글이었다. 글로 인해 마음의 고통이 조금은 녹아내렸으니까.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p250)’ 요즘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 나의 글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아서이다. , 돌려 까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팩트일 뿐이다. 그는 단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맞지 않음이 좋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이 미묘한 차이점을 구분할 만큼 이제는 성숙해졌다. 책과 글의 힘 덕분이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무슨 책이든 읽을 때마다 스스로 던지게 되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미래가 알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지향점이다.(p325)’ 곰곰 생각해보면 내 글의 소재는 어머니가 많다. 당신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릿하다. 생기는 마음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안으로 들어가 흠뻑 젖어 쓸 수 있는 소재이다. 함께 살아온 27년을 생각해도, 함께 살아오지 못한 24년을 생각해보아도 매번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당신의 모습을 길어 올린다. ‘나는 단 하루, 딱 한 단어를 정복해본 일이 있다. ‘일몰이다.(p314)’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인 듯하다. 가족, 이팝꽃, 선물, 향기, 아침, 겨울에 대한 글들도 모두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으니 나의 글에 있어 어머니란 우주와 같은 맥락이다. 어머니, 세 글자 안에 이토록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으니.

 

다들 그렇게 살아. 아마 몇 십 년 전의 당신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며칠 후의 한 끼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에 네 명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당신에게 그냥 실업계 고등학교로 보내라고 종용했을 거다. 그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고. 얼른 여상 졸업시켜서 돈 벌게 하라고. ‘다들은 누구인가? (중략) 왜 자기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성을 끌어오는가?(p126)’ 작가의 문장을 보고 나를 돌아본다. 주변 사람들을 어쭙잖게 위로한답시고 다들이란 말을 남발한 적은 없던가. 누구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개입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한다. 당신은 결국 자식들 모두를 대학에 보내셨다. 경제적인 상황의 버블 넷을 뚫고 나오신 당신. 과감한 결단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지금, 커피숍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다.

뭔가를 하고 있다면 다른 것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p184)’ 당신이 안간힘을 써서 해주신 일. 새삼 당신이 하지 못한 다른 것을 상상한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40대의 나이에 놓아버렸을 것들을 생각한다. 다시 가슴이 아릿해진다.

 

어제 친정집 주방. 배달시킨 생선가스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참외 하나를 깎았다. 지난번에 청주 갔을 때 외삼촌께서 사주신 단팥빵을 꺼내셔서 얼마나 속이 알찬 지 열변을 토하시는 아버지. 싸줄 테니까 너도 한 번 먹어봐라. 어머니가 내리신 커피 잔을 쟁반에 놓으신다. 이 빨간 게 네 꺼야. 커피 잔을 살펴보니 두 개는 땡땡이 무늬가 있고, 하나만 민무늬다. ~ 커플이야?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마셔. 환하게 웃는 어머니. 작은 행동으로 우린 서로 사랑해 라는 말을 하신다. 행동만큼 확실한 말은 없다는 듯이. ‘언제나 말에 깊이를 주는 것은 행동이다.(p299)’

쟁반에 놓인 참외 접시, 커피 세 잔. 이게 행복이구나 싶은 느낌이 바닷가 파도처럼 심장 언저리에 찰랑찰랑 밀려왔다. ‘우리에게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그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p27)’ 행복의 가치는 그전에 일어났던 많은 고통과 버블 넷을 넘어선 용기만큼 저울 반대편에 놓이면서 매겨지는 것일까. 어려웠던 시절의 무게가 심장을 훑고 지나는 순간 마음이 부력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p88, 밑에서 6째줄 : 메피스토텔레스 ~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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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밍 업 - 문장과 소설과 인생에 대하여
서머싯 몸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편견이 있었다. 무려 ‘1938의 작품인데다 ‘64외국작가가 쓴 책이라니! 유행지난 옷처럼 식상하지 않을까. 고루하지 않을까. 외국인과 정서가 어긋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403페이지의 두께감도 부담을 더했다.

일단 겉표지를 넘겼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소설도 아닌 글이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든다. 작가의 문장과 생각들이 날렵하게 스며들었다. 미사여구 없이 문장이라는 주제를 향하는 직진성이 마음에 든다. 80여 년 전을 살던 작가의 생각에 이리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내 문장은 분명함, 단순함, 좋은 소리를 지향해야 한다(p45)’ 그의 문장은 작가의 의도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원문을 읽지 못해 좋은 소리를 지향 했는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하고 단순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은 번역된 내용으로도 충분히 감지되었다.

 

서밍 업은 문장과 연극과 소설과 인생에 대한 서머싯 몸의 문학적 자서전이다. 요즘 문장에 대한 고민이 점점 커지기에 문장론이 담긴 첫 번째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좋은 문장은 노력의 흔적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종이에 써 놓은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써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p60)’ 어미를 바꾸어보아도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좋은 문장은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써진 것처럼 보인다.’하고. 뛰어난 시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사실은 한붓그리기를 한 듯 술술 써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막상 시를 써보면 절감한다. 그리 만만치 않은 과정이라는 것을. 그건 생밤을 깎는 과정과 흡사하다. 갈색의 두꺼운 겉껍질과 까슬까슬한 속껍질을 지나면 섬세한 칼질과의 싸움이다. 깎아지른 밤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디테일한 각도의 보정이 필요한지 깎아본 사람은 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쉽게 써졌다. 2006년부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14년째다. 어떤 내용으로 쓸지 구상만 떠오르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데 어찌 된 게 그만큼 써댔으면 걸리는 시간이 짧아져야 하는데 점점 늦어지고 있다. 뼈대를 구성하는 시간은 비슷한데 퇴고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의 문장들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메뚜기가 된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긋난다 싶으면 문단 전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일부분이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고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전체의 3분의 2정도는 되는 듯하다.

걸어온 시간만큼 더 가면 나아질까. 지금으로서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낱말 하나, 조사 하나도 떼었다 붙였다 바꾸며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껄끄러워지는 중이니까. 됐어! 이 정도면 음하하! 뿌듯하게 부르짖으며 서재블로그에 떠억 올리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쩜쩜쩜. 뭔가 조금은 더 나올 것 같은데 어정쩡한 상태로 끊게 되는 응가처럼 매번 찜찜하다. 단 한 번도 깔끔하게 쾌변한 기억이 없다, .

 

나의 글을 돌아보게 된다. ‘내 영혼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표류하여 불편하게 여겨온 생각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p22)’ 서머싯 몸의 생각에 동의한다. 써야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품고 있기 어려워지면 생각이 밖으로 빠져나온다. 생각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므로 고통스럽지만 글로 마주한 생각은 묘한 희열을 가져온다. 그래, ‘해방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다만 나의 글이 혼자만을 위한 감정의 배설이나 넋두리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서재블로그에 처음으로 올렸던 글을 찾아 읽어본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읽고 쓴 내 삶의 주인으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내 리뷰의 시작이 담겨있다. 7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나아진 듯하다. 시간과 경험은 내적 성숙을 가져다주고 글은 써본 만큼 느니까. 첫 글을 냉철하게 분석하니 좀 장황하다. 떡집 가래떡 나오듯 주저리주저리 뽑아지는 문장들이 지루하다. 혼자 말하고 혼자만 웃는 인간처럼 갇혀있는 느낌이다.

 

장황한 글은 매력이 없다. 이건 길이의 문제가 아니다. 길어도 속도감이 있는 글은 독자를 마지막으로 순간 이동시켜주니까.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어디서 들은 내용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면 하품이 나온다. 내가 아니어도 쓸 수 있는 글은 재미가 없다.

과감한 버리기와 팔딱거리는 표현이 절실했다. 그래서 시를 썼다. 시는 배추 겉잎 다 떼어내고 고갱이만 남기는 과정이니까. 문학적인 기초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초라한 시들이 적립금처럼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였다. 버릴 것이냐 남길 것이냐 매번 그것이 문제였다. 힘들게 길어 올린 문구들이 아까웠지만 내버려두면 지루했다. 현명한 버리기가 필요했다.

시 쓰기는 청소하기와 비슷했다. 청소의 시작은 비우기이다. 새 물건이어도 쓰지 않으면 내게는 쓰레기나 마찬가지이다. 주제와 상관없는 문장은 화려한 모양새를 갖춘 쓰레기와 같다. 이런 생각을 갖자 버리기가 수월해졌다. 시의 각 연에 비슷한 무게감을 주듯 독후감의 문단들도 균형 잡힌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문장의 소리 팟캐스트>에서 이강산 소설가의 나비의 방편을 들었다. 작가가 설명하는 작품 속 인물은 실존 인물이면서도 가공인물이었다. 소설이 현실 같고 현실이 소설 같은 세상이다. 소설가는 주제에 맞게 등장인물들을 변형시켰던 것이다. 서머싯 몸의 말이 떠올랐다. ‘소설은 예술가이고, 예술가는 삶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자기 목적에 맞게 수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p279)’ 많은 소설이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수정된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가공인물들은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듯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아바타가 된다.

정상에 대한 서머싯 몸의 생각도 소설에 적용된다. ‘정상은 당신이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별로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정상은 이상(理想)이다.(p91)’ 의대에 다녔던 사촌 언니가 시체 해부에 대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해부학 책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장기가 그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제대로 있는 경우가 없어. 심장이 왼쪽에만 있는 줄 알았지?” 정형화된 틀은 없는 걸까. 우리 몸 뿐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도, 어쩌면 정상적인 삶도.

 

얼마 전, 기도의 목적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것인지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와 연관된 문장이 있어 화들짝 놀랐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쾌락만을 추구하는데, 그가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는 그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이런 희생을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이다.(p320)’ 누군가 말했다. 이타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다고. 남을 위하는 행위가 결국 자신의 기쁨을 위한 것이니. 다소 극단적인 뾰족함이 담긴 생각이지만 한 때 내가 했던 생각을 과거의 누군가 했다고 생각하니 묘했다.

위안을 얻기도 했다. ‘노년에는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 비록 종류가 다르지만 청춘의 즐거움 못지않다.(중략) 노인은 시간이 더 많다.(p366)’시간이 더 많다는 문장에 웃었다. 너무 공감이 가서. 큰 아이는 타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둘째 아이는 고3이라 밤 1030분 넘어서 집에 오니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할 수가 있다. 다만 이에 상응하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해 날아갈 듯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시간이 많아졌다. 그 나름의 즐거움이라. 희망적이다. 인디언 추장의 현명한 말처럼 64세의 노작가가 했던 말이니 어느 정도 믿어보고 싶어진다.

 

초고에 썼던 첫 문장이 최종판의 첫 문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독후감의 첫 문장은 책을 읽을 때마다 독후감을 썼다.’였다. 제목 없이 글을 쓰다 일단 저장하면 첫 문장이 저장된다. 그래서 이토록 민망한 첫 문장을 알아버렸다. 짐작하셨겠지만 버려졌다. 처음에 생각했던 이 독후감의 제목은 뭐였더라.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제목은 글을 쓰면서 수시로 바뀐다. 내용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써야겠다며 구상하지 않는다. 필이 꽂히는 내용이 떠오르면 무조건 노트북을 연다. 한데 쓸수록 글이 나를 당겨 손가락을 끌고 간다. 계속 생각이 흘러나온다. 받아쓰기를 하듯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글과 문장을 통해 인생을 말하는 작가를 따라갔다. 77장으로 요약된 작가의 글을 따라 나의 문장과 삶을 더듬었다. 분명 작가 자신에 대하여 쓴 글인데도 나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글의 매력이다. 작가가 쓴 글은 나의 생각을 끌어내어 글을 쓰게 하고,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생각을 끌어냈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미노처럼 바로 그 순간 글의 매력은 마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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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0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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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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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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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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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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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만 하면 몸은 피곤에 흠뻑 젖은 빨랫감이 되었다. 간헐적인 두통과 함께 걸핏 하면 체한 듯 명치가 답답해 액체소화제를 음료수인양 마셔댔다. 격하게 일하기가 싫었다. 평소에도 딱히 좋았던 건 아니지만 심한 거부반응이 일었다. 가끔 식은땀도 났다. TV에서 드라마 오빠를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농담으로 넘어갔을 말들이 뾰족한 침이 되어 고막을 쿡쿡 찔렀다. 혹인 줄 알고 찾아갔던 산부인과에서 새끼손톱만한 고름을 짜냈다. 다음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무릎 때문에 관절 병원에 가서 X-레이 사진을 찍었다. 아프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틀이요. 너무 예민하신 것 같네요. 약은 안 드릴 게요. 물리치료만 받고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 한 번에 찌릿하던 증상은 금세 날아갔다. 무릎은 여전히 말끔하지 않지만 지난 한 달간 몸에서 일어났던 변화의 데이터들은 한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에는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두 번은 오는 듯하다. 그 시기는 성호르몬의 분비와 관계가 깊어 보인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몸에서 남과 여로 구분되는 시기. 신체와 함께 마음 역시 커다란 폭으로 달라지는 사춘기이다. 삶의 전 과정을 색채로 표현한다면 이 시기가 첫 번째 이유기로서 도약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시기일 거다. 이제 나는 두 번째 이유기를 맞는 중이다. 만 오십의 가파른 비탈은 높은 과속방지턱으로 다가왔다.

 

오십을 건너는 삶의 이사를 위해 평온하게 안착해있던 세포들이 짐을 꾸리는 과정이었나. 몸이 힘드니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드니 몸이 또 힘들고. 나중에는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헷갈렸다. ~ 나는 나이가 들어버렸어. 이러다 땅속으로 푸욱 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무기력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몸이 낡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웠다.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마음도 덩달아 들썩이며 머물 곳을 잃었다.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p189)’ 줌파 라히리의 소설내가 있는 곳은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시간을, 추억을, 사람을, 관계를 의미한다. 46개의 장소를 천천히 지나는 주인공을 좇아가며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다.

내 몸과 글이 찾아가는 장소를 떠올린다. ‘내 집에서는 빈둥거릴 수가 없어. 늘 할 일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잠깐 앉지도 못해. (중략) 내게 작은 구석자리면 충분하다는 거 아니?(p55)’ 나에게 충분한 구석자리는 커피숍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 글에는 왜 자주 친정어머니가 담기는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마음이 향하는 장소였다.

 

어두운 바탕의 책 표지에 찍힌 별들을 바라보며 북쪽 하늘의 일주 운동을 떠올린다. 지구의 자전으로 별들은 천구 상에서 1시간에 15도씩 움직인다. 천체망원경에 사진기를 부착한 후 조리개를 열어두면 별빛이 계속 흘러들어 빛이 그려내는 선이 찍힌다고 한다. 사진은 하늘의 방향에 따라 다르다. 나는 북쪽하늘이 가장 좋다. 나머지 방향들은 뭔가 잘린 듯 날카롭지만, 북쪽 하늘 별빛의 선은 둥글고 부드러운 원 모양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심이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북극성이다.

일주운동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관계의 본질을 찾는다. 몸과 마음의 관계, 나와 주변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머물러야 할 곳까지. 나를 중심으로 멀고 가까운 관계가 지속되는 시간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 비슷할까. 사실 얼핏 동심원처럼 보이는 그 어떤 선도 완벽히 닫히지 않는다.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은 길어봤자 밤의 길이만큼의 시간인 180도 가량을 넘을 수 없다. 실제 일주운동 사진과의 차이점은 각각의 지속시간이 다르다는 점일 뿐 이들은 모두 언젠가는 떠난다. 이런 이유로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리라.

 

영원히 머물게 되는 곳은 없다. 삶의 길 중간 중간에 다만, 우선멈춤의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추억도, 사람도, 관계도. 그리고 또 다시 걸어갈 때 존재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리라. 나를 담은 많은에서의 멈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유기의 문턱에서 우선멈춤을 한 것은 마음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함께 오십의 과속방지턱을 씩씩하게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인정하자 하니 몸도 차츰 안정되어 갔다. 아름다운 오십대를 걸어가며 깊어지는 나를 꿈꾼다. 삶의 일주운동 사진을 멋지게 만들고 싶다. 내가 있을 곳은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의 자리. 몸과 마음을 함께 놓고 주변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거다. 조리개를 오래 열어두면 선이 길게 연장되듯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둘 것. 어두울수록 사진이 선명하게 찍힌다는 마음으로 너무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말 것. 이제 마음이 머무는 곳을 따라 나의 몸을 움직이면 되겠다.

 

*p49, 3째줄 : 것일지 도 → 것일지도

p189, 7째줄 : 쌓다가 푸는 → 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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