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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무엇이 공포인가. 다리 한 짝쯤은 질질 끄며 미역 줄기인 양 늘어진 머리털에서 케첩 방울 뚝뚝 떨어뜨려 주거나 나사못 서너 개 머리에 박고 튀어나올 것 같은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미니 식빵 두상을 보유한 괴물이 비, 바람, 번개 3종 풀세트로 장착한 오밤중에 펄럭이는 커튼에서 갑툭튀 정도는 해줘야 으헉! 등골이 오싹하리라.
풍문으로 수없이 들어 읽기도 전에 벌써 읽어버린 느낌을 주는 <프랑켄슈타인>. 공포영화는 아예 보지 않고 TV에서 비스무레한 장면이라도 등장할라치면 배경음악의 인트로 단계에서부터 어김없이 두 손으로 덮이던 얼굴. 뒤표지를 보니 작가의 의도가 적혀있다. ‘우리 본성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일깨워 소름 돋게 만드는 이야기, 읽는 이가 겁에 질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피가 얼어붙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책장을 펼치기 전에 나란 인간은 마음의 준비부터 해야 했다.
후아~ 후아~ 심호흡 몇 번, 먼 산 몇 번 바라보다 겉장을 넘겼다. 자! 이제 드루와~! 다행히 배경 그림은 없어. 꿈에 나올만한 선명함은 없다는 거지. 어여 드루와~ 라며 껄껄거리고 싶.었.다. 호루라기를 불기도 전에 심장이 부정 출발을 해 버렸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갯벌의 맛 조개 구멍처럼 쏙 들어가 저 혼자 펄떡거리는 마음이라니!
하도 널리고 널려서 오히려 구미호보다 이미지가 친숙한 괴물. 섬뜩함을 스멀스멀 풍기며 책 속을 낱장 낱장을 휘젓고 싸돌아다니는 내용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편견이란 얼마나 두터운 안대인가. ‘같은 사건이라도 경험의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라서 모든 이야기에는 이면이 있음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p310, 해설)’ 무서우니즘을 체험하는 줄 잔뜩 쫄며 들어갔다가 깊이 있는 뭉클함을 안고 나오다니. 허를 찔린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멍했다.
소름이 돋기는 했다. 이 모든 걸 열아홉 살에 생각했다는 작가의 천재성이 확 다가와서. 그 나이에 나는 뭐했다냐. 쩜쩜쩜. 하다못해 지금의 나이에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올려다보며 비루한 나의 글을 내려다보며 점점 쪼그라드는 자신을 붙들었다.
또 소름이 돋았다. 이제껏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이름인 줄 알았던 나의 무식함에. 프랑켄슈타인이 멀쩡한 인간으로 나와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다. 뭐 과학실에서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 멀쩡하다 볼 수는 없지만. 소설의 내용을 전혀 몰랐으므로 이 인간이 나중에 윗옷 좀 가닥가닥 나풀거리면서 근육질 오빠로 변하는 줄 알았던 거다. 짐작하신 대로다. 잠시 헐크랑 헷갈렸다. 가만있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였나. 흐아! 더 이상의 무식은 이제 그만!
내가 꼽는 이 책의 매력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놀라운 흡인력이다. 시소처럼 번갈아 솟아오르며 감정과 행위의 당위성을 어필했던 두 캐릭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이 둘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 끝까지 가늠할 수 없어 빨려들 듯 이야기에 집중했다. 감탄할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둘째, 섬세한 심리묘사이다. 이야기의 힘도 대단했지만 내내 뭉클했던 건 이름조차 없어 괴물 혹은 악마로 지칭된 캐릭터의 감정선 이었다. 그러데이션 되는 노을빛처럼 이토록 섬세한 심리 변화를 영상으로 구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래, 글의 힘이란 이런 거지. 문장을 통해 서서히 전달되는 마음에 동화된 나는 점점 설득되고 있었다. 점진적인 괴물의 변화에 마음이 아팠다.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될 테다.(p194)’ 이런 말을 꺼내기까지의 과정이 점층적으로 묘사되었기에 무모한 살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정당방위가 아니고서야 수긍이 가는 살인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셋째, 공간적 배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이다. 작가는 따뜻한 가족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족은 크게 두 그룹이다. 그들로부터 말과 글과 인간세계를 배우며 괴물이 속하고 싶어 했던 가족과 프랑켄슈타인이 속해있던 가족이다. 구성원들은 모두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해주며 온기를 나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질시했던 계모로 인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17세에 유부남과의 도피를 감행한 작가. 생후 11일 만에 사망한 첫 딸, 동복언니와 남편의 전처의 자살. 19세의 감성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들이었으리라.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준 대상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의 풍광이 아니었을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고 품위로 가득한 자연의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삶의 덧없는 근심들을 잊게 하는 힘이 있었다.(p128)’ 알프스와 북극의 빙하와 주변 풍경들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녀가 묘사하는 풍경들은 BGM처럼 작품에 깔리면서 설원의 냉기가 흐르도록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한 장소들을 성지순례 하듯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된다. 이에 대비되는 소설 속 캐릭터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넷째, 작가의 관점이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학자를 말하면서 작가는 농부의 삶을 언급한다.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땅을 일구는 일이 인간의 죄악을 목도하고 가끔은 공범자가 되는 일보다는 훨씬 훌륭한 일이잖아. 그래서 부농의 삶이 명예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계속 상대해야 하는 판사보다 행복한 직업이라고(p82)’ 농부라는 직업은 ‘직업’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숭고한 영역의 일이라 생각한다. 없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니. 농사를 짓는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부는 이를 무엇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햇살과 바람과 대지와 비와 나비와 벌과 미생물 등의 힘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해서 무엇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마주하는 존재, 바로 농부이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사람의 영혼이 겉모습처럼 형상화된다면 어떨까. 거리에서 마주 다가오는 낯선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영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스케치해볼 때가 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보이는 모습만큼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실제로 나의 미모를 드러낼 일은 없으니 마음껏 멘트를 투척한다. 쉿! 우리 가족이나 내 얼굴을 아는 인간들만 이 글을 안 보면 된다. 보안 유지는 문제없다. 내 주변인들은 나의 공간에 별관심이 없으니. 나는 잠시 미모의 인간으로 거듭난다. 후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말은 번드르르 하다. 걸어가다 훈훈한 인간이 말이라도 걸어올라치면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입 꼬리가 올라가는 세속적인 인간이 당당하게 꺼낼 말은 아니지만. 쩝. 몰랑해지는 마음은 재채기처럼 당최 감출 길이 없다. 취향을 저격하는 남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지 같이 후진 드라마를 얼마나 숱하게 섭렵했던가. 이 책을 보며 반성한다. 겉모습만으로 괴물을 판단하고 그의 선의를 팽개치는 인간들을 보며 시각적인 요소가 대상을 성급하게 재단하는 잣대임을 새삼 깨닫는다. 괴물로 하여금 고민 끝에 한 걸음 다가가도록 용기를 준 최초의 존재가 눈이 먼 아버지라는 점은 이런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껍데기는 가라!
과학자로서의 책무와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새로운 종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p66)’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학문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희열이 느껴지는 일일 터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절대 신의 위치에 선 듯 우쭐했을 것이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떠오른다. 알에서 깨어난 공룡이 맨 처음 인간을 보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해를 끼질 수 없도록 한다. 또한 한 가지 성만 지닌 공룡을 탄생시키면서 생명체의 본성을 관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과학은 본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멸종으로 치 닫을 만한 극한 상황에서 일부 공룡이 성전환을 한다. 자체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낸 것이다. 두 작품 속 모두 인간의 오만이 겹쳐진다.
복제인간에 대하여 수업 시간에 언급한 적이 있다. “과학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거다. 하지만 생명에 관한한 이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나사나 타이어 같은 부속품을 교체하는 개념이라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병에 걸린 이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대환영할 일 일거다. 하지만 쌤은 완전체로서의 정체성이 존재하는 영역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해야한다고.”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고백하듯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열정적인 광기로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나는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으니, 내 능력이 닿는 한 행복과 복지를 보장했어야 합니다.(p294)’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의 잔상이 남아서일까. 이어서 읽은 이 책 곳곳에서 동양의 연기설과 무소유의 개념을 발견하며 새삼 놀란다.
‘훗날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그 격정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마치 산을 따라 흐르는 냇물처럼 미미하고 거의 잊힌 원천에서 솟아나는 걸 알게 된다.(p46)’ 이 문장을 본 순간 연기설이 떠올랐다. 단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반드시 원인이 있고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가 변하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개념 말이다.
작가의 남편이 쓴 시 안에는 <반야심경>의 무(無)의 개념도 등장한다.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p129, 퍼시 비시 셸리)’
‘싸늘할 때 몸을 따뜻하게 덥혀줄 불도 있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서로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날마다 애정과 친절로 가득한 표정을 서로 나누지 않는가. 그들의 눈물은 무슨 뜻일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p147)’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무소유’의 개념이다. 이런 관점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았던 괴물의 순수를 어떻게 생김새만으로 괴물로 바라본단 말인가.
선과 악이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다.(p300)’ 괴물의 존재로 공포를 유발하려는 의도였다면 작가의 화살은 적어도 내게는 빗나갔다. 괴물과 인간의 심리전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이란 존재의 실체는 백지 상태의 괴물과 대비되며 도드라졌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어떠한 존재를 괴물로 지칭해야 할까 기준이 모호해진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중략)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p129)’ 무엇이 공포인가. 누가 괴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