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

 

 

* 2017. 5. 20. H백일장(글제: 이팝꽃이 피면),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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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4 0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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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4 0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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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향으로만 가던 삶이었다. 고지식하고 소심하고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아까 오다가 봤던 떡볶이 집, 학교 끝나고 가볼래? ? 그런 게 있었어? 등하굣길을 같이 오가던 친구가 본 것을 못 볼 정도로 걸을 때조차 앞만 보던 아이였다. 그런 삶을 걸어 중학교 과학 교사가 되었다.

직진만 하는 빛이었던 나는 수업은 그런대로 잘했다. 하지만 간혹 아이들과 면담을 하거나 생활지도를 할 때면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껴야 했다. 모범생들에게는 더없이 바람직한 교사였으나 소위 날라리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교사였다.

몰려드는 학교 일에 육아와 가사를 더한 삶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30대 후반까지 회색빛 시간은 강한 탄성력으로 나를 찾아왔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넘쳐나던 일들은 무거운 자석이 된 몸에 철가루처럼 들러붙었다. 밤이 되면 몸은 쭉 가라앉았고 마음은 텅 비어 황량한 바람으로 그득했다.

 

샘은 되게 자유롭게 보여요.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반의 방과후 수업을 하고 난 후였다. 앞자리에 앉은 녀석이 킥킥 대며 말을 건넨다. 뿌듯해진 나는 훗~ 썩소를 날리며 상큼한 바람이 되어 쉬는 시간 속으로 정신없이 빠진 복도를 휘리릭 날아갔다.

그랬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녀석들의 ** 샘은 달라져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유롭게 웃는 자연인이었고, 가끔은 썰렁한 농담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어설픈 개그맨이었으며, 아픔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담자였다. 더 이상 한 방향만 바라보지 않는,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는 교사가 된 나는, 큰 딸이 가장 존경하는 친구 같은 엄마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전과 달라진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아 시간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시 한 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먹먹한 일이지만, 2005, 근무하던 학교의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 전날까지 그 반 수업을 했기에 한동안 나는 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 끝에 마음의 색맹이라는 시를 썼다. 내 옆 자리는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우연히 시를 본 선생님께서는 문장을 조금 수정해주셨다. 어순만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이 확 달라졌다. 소질이 있으신데요? 글을 써보세요. 제가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배경지식이 워낙 습자지처럼 얄팍해서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책을 좀 읽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얼마 뒤 선생님은 교육에 관한 책을 소개해주셨고 가끔씩 다양한 장르의 책을 권해주셨다.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마음에 남는 문장을 적어보고 독후감을 써보라고도 하셨다. 내 삶의 길에 책들이 한 권 두 권 레드카펫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12여년을 책과 함께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 되어 꾸역꾸역 책을 읽었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멘트처럼 책과 함께 한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 외치지는 못하겠다. 700쪽이 넘는 기세춘의 장자를 읽을 때에는 토할 뻔했다. 책을 펼친 날보다 베고 잔 날이 더 많았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한 제자가 전화할 때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 뭐하세요? , 책 읽어. 곧 주무시겠네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던 나에게 독서는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었다.

 

마을에 독서 모임을 같이 만들어볼래요? 2008, 마침 사는 동네가 같았던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청소년문화의집을 거점으로 하여 청소년 독서모임을 제안하셨다. 제가요? 전공도 아닌데 어찌. 책 읽는 데 전공 구분이 있나요? 뭐든 3명만 되면 시작할 수 있어요. 선생님의 수업과 책을 좋아하는 제자 두 명을 포섭하여 4명으로 출발했다. 2009년에는 어린이 독서모임을, 2010년에는 성인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 자발적인 모임이기에 구성원들은 수시로 변동되었다. 매월 같은 책을 한두 권 읽고 토론을 했는데,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15명이 넘어설 때도 있었다.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 하셨다. 모임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업그레이드되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내공을 키운 나는 어린이 독서모임의 진행자가 되었다.

 

2012, 인터넷 서점에 리뷰를 써보는 건 어때요? 독서모임 3종 세트에 매달 두 권 정도씩, 최소 5~6권의 책을 읽고 토론 자료를 제작하는 데 슬그머니 지쳐갔던 내게 선생님은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의 리뷰를 시작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서재에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책이 자꾸 자신을 만나게 한다.’던 작가의 말처럼 지금까지 100편의 리뷰를 올리며 100번 이상의 나를 만났다. 걸어오는 중간에 시에 매료되어 오늘까지 349편의 시를 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품게 되었다.

 

빛은 매질을 경계로 굴절한다. 내 삶은 선생님을 만나고, 450여 권의 책을 매질로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어가며 빛이 났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은 멀고, 그보다 더 먼 길은 발바닥까지 가는 길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어둡고 소외되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다가갔다. 둘째 아이와 촛불을 들며 구호를 외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아직은 발바닥만 가끔 들썩일 정도로 많이 부족하지만, 머지않아 마음 가는 곳으로 용기 있게 뛰어갈 날이 올 것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고 한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나는 나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2017. 5. D수기 공모전(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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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1 15: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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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1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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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속 화석인 양

굳어버린 몇 글자

덤덤하게 박힌 채

스쳐가던 이름인데

당신이 걸어온 자취

숨죽이며 따라가 보니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욱신욱신 꿈틀댑니다

 

눈가엔 붉은 꽃잎

코끝엔 맑은 이슬

두 손은 축축해지고

두 볼은 달아올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바닥으로

어느 순간 내 시간이

덜컹덜컹 흔들립니다

 

사십구 년 나의 삶은

나만 보며 평범했는데

사십구 년 당신 삶은

조국을 보며 치열했군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행동으로 살기 위해

죽음까지 당당했던

마지막까지 한결같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하는가

죽어도 죽지 않은

당신의 쟁쟁한 외침

내 삶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백십 년을 건너온

당신의 굳은 의지

내내 숭고한 숨결로

내 숨결로 이어져

여전히

생생합니다

아직도

뜨겁습니다

 

스키드 마크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이여!

서서히 뜨거워지는

나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해갈까요

지금

살기 위해

나는

 

 

* 2017. 6. I추모글쓰기대회, 장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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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1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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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1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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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만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빵 냄새는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게 빵은 후각보다 온각을 자극하는 따스함이다. 간혹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오랜 기억 속 한 사람이 빵 위로 겹쳐지기에.

살아가다보면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를 깨달을 때가 있다. 그렇게 알게 되는 마음은 흘러온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이제야 알겠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10년 후에라도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에 얼마나 큰 고마움을 담아야 하는지 알았어야 했던 것을. 30여년의 시간을 건너와서야 겨우 깨달은 어리석은 제자는 빵을 바라볼 때마다 종종 당신을 생각한다.

 

빵만 보면 가끔 울컥한 제자의 이야기는 1983년에 시작된다.

영세민. 지금의 기초생활수급자 정도를 가리키던 용어였다. 교실 뒤에 말없이 걸려있는 게시판 같던 15세의 아이. 타고난 품성 탓이기도 했지만, 아이를 늘 주눅 들게 했던 건 날마다 이불처럼 덮고 자던 가난이었다.

가지 말라는 길은 절대로 안 가고, 누가 보지 않아도 맡은 구역을 청소했으며 수업태도가 매우 바른, 소위 모범생이었다. 80년대에는 정부반장을 선출하는 데 성적의 제한이 있었고 나는 학급의 부반장이 되었다.

우리 집 환경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기 초, 반장을 부르셨다. 다음 날부터 반장에게는 매일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부반장에게 날마다 빵과 우유를 사주는 일. 다니던 학교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근 1년 동안 2교시가 끝나면 내 손에는 빵과 우유가 들려졌다.

 

처음에는 고마웠다. 친구 따라 매점을 들락거릴 경제적 여유가 없던 나는 도시락이 아닌 다른 것을 학교에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2교시 째에는 이번 시간만 지나면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자주 설레곤 했다.

하지만 고마움도 반복되면 슬금슬금 내성이 생기는 걸까. 선생님은 쪽지 시험 채점이나 자료 정리 같은 일을 자주 시키셨는데, 어느 순간 내가 하는 자잘한 일들이 빵에 상응하는 수고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매일 감동적으로 울리던 고마움은 한두 달이 지나면서 점차 쪼그라들었다. 나중에는 고마워하는 마음조차 희미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3학년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는 시간이 흘렀고 선생님의 존재는 희미해져가던 마음처럼 서서히 잊혀졌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9년 뒤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나는 중학교 과학교사가 되었고, 담임을 맡았다. 학급 아이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자연스레 그들과 나이가 같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직장을 잡고 돈을 벌게 되었어도 경제적으로 여유를 느낄 만큼 넉넉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 일이라곤 고작 한 달에 한 번씩 그 달에 생일인 아이들에게 직접 고른 천 원짜리 작은 인형을 선물해준 것이었다. 인형을 건네주는 내 마음을 환한 미소로 받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불현듯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도 이런 마음으로 내게 빵을 주셨던 걸까.

 

다시 10여년이 지났다. 엄마가 된 나는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임 때보다는 다소 여유가 생긴 편이었다. 한창 일할 시기라 담임을 맡는 것은 당연했고,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여전히 있기 마련이었다. 가끔 문제집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더 해주지는 못했다. 아니, 더 해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다시 선생님이 떠올랐다. 한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건 돈이 많고 적음의 차원이 아니었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 교단에 선 지 어느덧 25년이 넘어간다. 간혹 교무실로 자주 오는 아이들이 있다.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상을 받은 듯이 뿌듯해하는 아이들이다. 심부름을 하고 참 잘했구나!” 칭찬받을 때 의기양양해 하며 웃는 아이를 보며 다시 선생님을 떠올렸다. 소심했던 나는 자신감이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시키신 일을 해내고 당신의 칭찬을 들으며 점점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다. 일부러 일을 시키신 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문제집도 변변하게 없던 나의 영어 실력이 늘은 것도 매일 영어로 일기쓰기를 시키셨던 선생님 덕분이었던 것을.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스승 찾기 코너에 검색도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후에 중학교 동창들로부터 서울 쪽으로 옮겨가셨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만 두셨다는 불확실한 소문을 흘러듣기도 했다.

 

선생님이 계시던 그 자리에서 서서, 당신을 마주보던 어린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늦어버린 깨달음에 베풀어주신 사랑을 되돌려드리지는 못했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마음은 또 다른 나에게 이 마음을 건네야함을 알려준다.

커다란 베풂이 무엇인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신, 한 아이의 빵에 온기를 심어주신 J 선생님! 잊지 못할 나의 선생님이시다. 손에 들린 빵 봉지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함이 유난히 향긋하다. 코끝이 찡해지는 퇴근길이다.

 

 

* 2017. 4. D수기공모전(잊지 못할 나의 선생님),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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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번째 봄을 맞는 아가에게

  

진아! 나무에서 내리던 연분홍빛 눈송이도 사르르 물러나고, 이제 진한 분홍으로 펼쳐진 봄이구나. 상해의 봄은 어떤 느낌일까?

팔목 치료차 귀국했던 작년 11, 6년 만에 한국의 가을을 보게 되었다며 들뜬 표정으로 말했던 너를 기억한다. 새삼 깨달았다. 열다섯 살 이후, 네 기억 속 한국의 계절은 뜨거움과 차가움뿐이었구나 하고.

꽃무늬 모자 쓰고 아장아장 걷던 너의 봄이 아직도 선하다. 함께 할 때에는 오래오래 계속 될 줄 알았는데, 같은 공간에서 온 계절을 보낼 시간은 이제 오지 않을 거더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면 지금처럼 다른 공간에서 봄을 맞이하겠지. 벚꽃 흩날리는 길을 좀 더 함께 걷고, 향기로운 대화도 많이 나눌 걸. 엄마의 봄에는 늘 한 사람이 비어있구나.

22번째 봄을 맞는 나의 아가! 너의 봄이 언제나 따뜻하기를, 향기로운 누군가 곁에 있어 삶과 사랑과 꿈에 대하여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엄마는 이제 너와의 소중한 여름을 꿈꾸려 한다. 아프지 말고, 늘 봄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2017. 4. 30.

 

엄마

 

 

* 2017. 5. D편지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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