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고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심스럽다. 개미 한마리라도 밟을까 살펴 걷는 수행자가 된 기분이다. 도시가 들썩이며 숨을 쉬는 것 같다. 요가라도 하듯 덩달아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꽃심 전주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이다.

204페이지밖에 안 되는 책을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왠지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글자 한 자, 사진 한 장까지 꼼꼼히 훑으며 전주라는 도시를 알아갔다.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낯설고도 강한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전주는 양파 같은 도시였다.

 

전주시 홈페이지에서 e-book을 다운받아 출력했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읽고 싶어서였다. 책 제목의 꽃심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을 의미한다. 처음에 보기에는 단지 멋진 신조어에 불과했지만 진정한 의미는 책장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피어났다. 전주정신은 이 책을 매개로 깊은 맛을 냈다. 꽃차에 띄운 꽃인 듯 사르르 살아나다 설렁탕 국물처럼 점점 진하게 우러나더니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를 압도했다.

 

전라북도 행정.교육.문화의 중심지. 수학여행 가서 비빔밥 한 번 먹어보고, 한옥 마을 휘리릭 다녀온 게 전부이던 내게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던 모습은 바다 위로 드러난 빙산의 꼭대기보다도 적었다. 담백한 두부처럼 전주의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한 글을 따라갔다. 마음은 덩달아 '전주'라는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더불어 함께 사는 대동’, 문화예술을 아끼고 즐기는 풍류’, 의로움과 바름을 지키는 올곧음’,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만드는 창신’. 꽃심이 담고 있는 네 가지 특질은 전주의 구석구석에서 구현된다.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은 같은 마음으로 화합하는 대동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동학농민혁명, 민주화 열사들, 천주교 순교자들, 촛불의 꿈은 대동 세상을 향한다. 판소리, 전주대사습놀이, 태극선, 합죽선, 한지, 완판본은 멋과 여유를 지닌 책 풍류의 정신으로 춤을 춘다. 조선왕조실록을 끝까지 지켜낸 전주사고, 임란과 호란의 영웅들, 일제강점기에서 자존심을 지킨 한옥과 항일 투쟁은 올바른 뜻을 가지고 의로움을 향하는 올곧음이다. 후백제와 조선 왕조가 이어지는 왕도의 역사, 음식과 풍류와 영화에 불어넣은 새로운 숨결이 창신이다.

우리의 것이 많이 담긴 도시라는 점이 정겹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옛 것과 새 것이 어우러지는 적절한 조화로움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온전한 고을을 뜻하는 지명대로 전주는 완전히 균형 잡힌 도시이다.

 

내용면에서 인상적이던 부분은 관련 인물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섬세한 서술이었다. 사상가, 목회자, 교육자, 성자, 명창, 서예가, 유학자, 춤꾼, 문학인, 영웅, 투사, 선비, 법조인, 영화인, 화가, 명장 등 수많은 인물들이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터전을 잡으면서 전주의 역사를 만들었다. 구석구석 이들의 존재를 찾아낸 노력은 감동적인 또 하나의 역사로 펼쳐진다.

여행 관련 TV프로그램에서 유럽의 궁전이나 예전 모습이 남아있는 건물을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을 생각할 때면 용인 민속촌을 떠올렸다. 책을 읽고 놀랐다. 전주는 우리 고유의 건물과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장소들을 생각 이상으로 많이 품고 있었다. 이제는 전주한옥마을을 제일 먼저 꼽으려한다. 다른 나라와 견주어보아도 결코 초라하지 않다. 오히려 멋스럽기까지 하다.

장독집, 우물 깊은 집, 문이 많은 집 등 집의 이름에도 정감이 듬뿍 묻어난다. 과학계에서는 흔히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단위를 정한다. 전압의 단위인 V(볼트)나 힘의 단위인 N(뉴턴)은 모두 과학자의 이름을 뜻하는 맨 앞 글자이다. 단위의 형태로 자주 부르며 이들의 업적을 기리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견훤로, 태조로, 최명희길 등 길에 붙은 이름을 보면서 전주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조만간 한옥마을을 가보려 한다. 한복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겉에서 본 한국적인 건축물, 길거리에 늘어선 먹거리, 이번에는 이것만 보고 오지는 않으리라. 전주를 거쳐 간 인물들의 발자취와 우리의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며칠간을 머물게 될 지도 모르겠다.

 

담고 있는 내용만큼이나 구성 방식도 감동적이다. 전체적으로는 시의 운율처럼 느껴지는 형식이다. ‘꽃심이 의미하는 네 가지 특질을 대등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적절하다. 맛깔난 전주비빔밥을 먹은 듯하다. 나물 본연의 맛이 독특하게 살아나면서도 잘 어우러지듯이 대동, 풍류, 올곧음, 창신은 책 안에서 고유한 빛을 발한다. ‘꽃심을 중심으로 정성스럽게 입혀진 옷에는 전주만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중간 중간에 시처럼 삽입된 문구들은 소금처럼 녹아들어 문학적인 맛을 낸다.

특히 시선을 끈 부분은 소주제의 첫 페이지이다. 두 가지가 마음에 든다. 첫째, 단어 연상 퀴즈처럼 관련된 낱말들로 그려진 그림이다. ‘꽃심에는 꽃 한 송이가, ‘대동에는 촛불 두 개가, ‘풍류에는 부채를 들고 판소리 하는 명창이, ‘올곧음에는 선비의 모습이, ‘창신에는 호남제일문이 형상화되었다. 이로 인해 그 안에 담긴 단어들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둘째, ‘전주 중학생들이 떠올린 낱말을 적었다는 점이다. 10대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과도기를 지나는 중학생들. 아이들의 꿈틀대는 마음은 전주의 정신과 만나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다음 페이지도 좋았다. 다양한 세대와 각계 각 층의 전주 사람들이 연상한 단어들이 마인드맵처럼 나열되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민들레를 연상시켰다. 꽃의 마음에서 출발해서일까. 연약해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하나의 중심을 향해 힘을 합치는, 바람을 따라 날아가며 온 공간을 가볍게 메우는 홀씨가 생각났다. 나열된 단어들을 하나하나 실로 꿰면서 전주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글을 쓴 사람이 궁금했다. 맨 뒤에 적힌 저자 이름 최기우를 검색했다. 극작가이면서 전주대 겸임 교수이다. 올해 831일 자 전북일보 기사 한 자락에도 작가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2017 대한민국 독서대전 기획 전시의 일환이던 한 권의 책, 마음에 담다의 총괄기획자였다. 전주한옥마을에는 볼거리가 많은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한 권의 책으로만 감히 짐작해보건대, 작가는 전주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전주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문장마다 전주를 아끼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었으니까.

 

묘하다. 소설도, 시도 아닌 책이 이런 뭉클함을 주게 될 줄이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수제 퀼트 가방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도시가 아닌 전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한편을 읽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문 공기는 거대한 기단을 형성하면서 그 지역의 온도와 습도를 닮는다. 전주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는 모르는 사이 전주가 뿜어내는 숨결과 향기가 배어있을 것이다. 책 속의 전주는 전주사람들을 푸근하게 감싸는 꽃이었다. 사람들 역시 꽃심자체였다. 문득 거시기란 말이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책을 읽은 내게도 참 거시기하게 꽃심이 흘러들어왔을까.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자신을 딛고 서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길은 다 안다. 엉거주춤 인지 제자리걸음인지 뒷걸음인지도 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주위 환경이 바뀌어도 길은 아득하게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 옛 정신이 스며든다. 우리가 걸음걸음을 더 똑바로 해야 하는 이유다.(p178)’사진을 설명하는 작은 글씨로 된 이 문장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다. 읽는 순간 뭉클했다. 소중히 옮겨 적어 사무실 책꽂이 앞에 붙여놓았다. 두고두고 바라보며 음미하고 싶었다.

 

전주의 구석구석을 알고 나니,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도시명의 유래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얼과 정신이 무언지, 어떤 이들이 이 땅을 밟으면서 살아왔는지, 이곳을 거쳐 간 피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기에 귀 기울이며 제대로 걷고 싶어졌다. 천천히 숨을 쉬며 걷는다. 한 걸음, , 두 걸음, . 길이 내 발바닥을 툭툭 치며 말을 건다. 이봐! 내가 궁금하지 않나? 함께 걸어가려는 내게 도시의 숨결이 조금씩 스며든다.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 2017. 9. K 독후감 경진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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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뜨거워지는 일인가. 직지. 어학사전에서 의미를 찾아볼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관련 자료를 하나 둘 펼쳐볼수록 다가오는 의미가 이토록 묵직해질 줄은. 감동적인 소설이라도 읽은 양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북극 빙하에서 치즈 스틱 닮은 미생물을 발견하고, 우리 은하 너머에서 지구 닮은 행성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과학계가 왜 그리 들썩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무심코 흘려듣던 용어였다. 시험 문제의 단골 메뉴였다. 정식 명칭인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직지심체요절은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 시대에 등장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구나 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지금까지 나는 앞부분이 의미하는 중요한 가치를 놓치고 있었다. 방점은 금속 활자로 간행한에 찍혀 있었다. 금속 활자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을 때라면 금속이든 나무든 무슨 상관이냐 했을 거다. 바다 위로 드러난 빙산의 꼭대기만을 본 듯, 물 밑에 잠긴 방대한 의미를 모르고 지났을 거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소중한 가치 하나를 마음에 한껏 품게 되었으므로.

 

기록에 대한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도달한다. 물론 그 이전에 동굴 벽에 그려진 요상한 그림들도 존재하지만, 읽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파피루스나 페르가몬의 양피지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록된 지식은 일부 특권층만이 보유할 수 있었다. 손으로 일일이 베끼는 방식과 종이의 기능을 하는 재료들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곤충의 탈피처럼 획기적인 도약이었다. 그런데 갈라지고 휘어지는 나무는 보관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한가지 밖에 인쇄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드디어 등장한 금속활자. 단단한 금속은 오래 보관할 수도 있고 정보의 대량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 더 이상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손쉽게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금속 활자에는 나눔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담겨있다.

 

1455,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를 발명했다. 미국의 시사 잡지 라이프1998년에 발표한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를 바꾼 100대 사건1위를 차지한 사건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내용을 본 순간, 답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200년 이상 앞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생각나서이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직지의 존재이다. 활용 면에서는 구텐베르크가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지만, 나는 최초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최초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나는 과학 교사이다. 수업 시간에 과학 관련 시사 뉴스를 소개해주고 학생들의 의견을 발표시킬 때가 있다. 순간적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학생들이 갑자기 집단으로 겸손해진다. 혹시라도 선생님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발표 내용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 후로 발표자의 수가 갑자기 불어난다. 심지어 뒤로 갈수록 발표 내용은 더욱 업그레이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초로 발표한 학생을 주목한다. 최초가 갖는 무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이겨낸 용기는 발표 내용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가열된 물은 100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100는 액체와 기체가 공존하는 온도이다. 지니고 있는 에너지의 양으로 볼 때, 100보다는 200의 물에 더 많은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100에 큰 의미를 둔다. 자유로운 수증기로 출발하는 최초의 온도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흔한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책이 도착하면 코끝을 바싹 들이대며 킁킁 냄새를 맡을 때가 있다. 종이 이전의 나무를 상상하면 책의 내용을 떠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든 어디서든 틈날 때마다 펼쳐서 그 안에 담긴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책은 경이로운 기록물이다.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누는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들마다 느낌은 제각기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다. 독서 모임을 하고 나면 생각의 나이테가 한 줄씩 늘어난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이유를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직지를 만난다.

 

지구 최저 온도인 영하 88가 측정된 남극 대륙의 보스토크 기지’ 4km의 두터운 빙하 아래에 있다는 호수. 빙하의 하부가 지열에 의해 녹아 형성된,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대한 호수라 한다. 이런 곳에 생명체가 존재할까? 과학자들의 관심 대상은 그 생명체가 곰팡이냐 바이러스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이다. 1960년대에 호수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 생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문득 존재만으로 의미를 갖는 직지가 떠오른다.

 

백운화상이 직지를 만든 1372, 그로부터 600년이 흘러 박병선 박사에 의해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던 직지하권이 세상에 알려진 1972, 발굴조사팀에 의해 직지의 발상지인 청주 흥덕사지가 발견된 1985, 흥덕사지 남쪽에 자리 잡은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직지찾기 전담반에 의해 직지상권 찾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8.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최초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에는 찡함이 있다.

조금 조금씩 직지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모습들을 상상한다. 가슴이 뛴다. 점점 뜨거워진다. 의미 있는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뭉클한 일이다. 그것이 최초의 무엇이라면 더더욱.

 

 

* 2017. 8. J백일장 공모,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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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서늘하지도

뜨겁지도 않겠지

생명을 품고 있는

따뜻한 물은

엄마로 둘러싸인

사랑의 물은

 

어야 둥둥

자장가가 울리면

킁킁 킁킁

엄마 냄새 맡으며

포근한 물이 묻은

손가락을 빨겠지

 

갓 태어난 아가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온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촉감

엄마의 물이

그리워져서일거야

 

토닥토닥 우리 아가

금세 방긋 웃는 건

구석구석 흠뻑 배인

엄마의 물이

토옥토옥 한 방울씩

터뜨려져서일거야

 

 

* 2017. 7. 15. I백일장(시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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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주로 일하던

어미의 소원은

이팝꽃처럼 솔솔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내 새끼 뱃속에 담아

배불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공양하고

남은 밥 찐 도시락

어느 날 삭아버려

축 늘어진 이팝꽃

자식은 밥을 버리며

철없이 투덜댔다

 

30년 뒤 절 마당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이팝꽃처럼 솔솔

지어주고 싶었지

버려진 이팝꽃은

노모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

 

 

* 2017. 5. 20. H백일장(글제: 이팝꽃이 피면),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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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4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4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방향으로만 가던 삶이었다. 고지식하고 소심하고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아까 오다가 봤던 떡볶이 집, 학교 끝나고 가볼래? ? 그런 게 있었어? 등하굣길을 같이 오가던 친구가 본 것을 못 볼 정도로 걸을 때조차 앞만 보던 아이였다. 그런 삶을 걸어 중학교 과학 교사가 되었다.

직진만 하는 빛이었던 나는 수업은 그런대로 잘했다. 하지만 간혹 아이들과 면담을 하거나 생활지도를 할 때면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껴야 했다. 모범생들에게는 더없이 바람직한 교사였으나 소위 날라리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교사였다.

몰려드는 학교 일에 육아와 가사를 더한 삶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30대 후반까지 회색빛 시간은 강한 탄성력으로 나를 찾아왔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넘쳐나던 일들은 무거운 자석이 된 몸에 철가루처럼 들러붙었다. 밤이 되면 몸은 쭉 가라앉았고 마음은 텅 비어 황량한 바람으로 그득했다.

 

샘은 되게 자유롭게 보여요.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반의 방과후 수업을 하고 난 후였다. 앞자리에 앉은 녀석이 킥킥 대며 말을 건넨다. 뿌듯해진 나는 훗~ 썩소를 날리며 상큼한 바람이 되어 쉬는 시간 속으로 정신없이 빠진 복도를 휘리릭 날아갔다.

그랬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녀석들의 ** 샘은 달라져있었다. 수업 시간에 자유롭게 웃는 자연인이었고, 가끔은 썰렁한 농담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어설픈 개그맨이었으며, 아픔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담자였다. 더 이상 한 방향만 바라보지 않는,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는 교사가 된 나는, 큰 딸이 가장 존경하는 친구 같은 엄마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전과 달라진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아 시간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시 한 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먹먹한 일이지만, 2005, 근무하던 학교의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 전날까지 그 반 수업을 했기에 한동안 나는 심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 끝에 마음의 색맹이라는 시를 썼다. 내 옆 자리는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우연히 시를 본 선생님께서는 문장을 조금 수정해주셨다. 어순만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이 확 달라졌다. 소질이 있으신데요? 글을 써보세요. 제가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배경지식이 워낙 습자지처럼 얄팍해서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책을 좀 읽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얼마 뒤 선생님은 교육에 관한 책을 소개해주셨고 가끔씩 다양한 장르의 책을 권해주셨다.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마음에 남는 문장을 적어보고 독후감을 써보라고도 하셨다. 내 삶의 길에 책들이 한 권 두 권 레드카펫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12여년을 책과 함께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 되어 꾸역꾸역 책을 읽었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멘트처럼 책과 함께 한 모든 날들이 좋았다.’라 외치지는 못하겠다. 700쪽이 넘는 기세춘의 장자를 읽을 때에는 토할 뻔했다. 책을 펼친 날보다 베고 잔 날이 더 많았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한 제자가 전화할 때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 뭐하세요? , 책 읽어. 곧 주무시겠네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던 나에게 독서는 차라리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었다.

 

마을에 독서 모임을 같이 만들어볼래요? 2008, 마침 사는 동네가 같았던 선생님께서는 지역의 청소년문화의집을 거점으로 하여 청소년 독서모임을 제안하셨다. 제가요? 전공도 아닌데 어찌. 책 읽는 데 전공 구분이 있나요? 뭐든 3명만 되면 시작할 수 있어요. 선생님의 수업과 책을 좋아하는 제자 두 명을 포섭하여 4명으로 출발했다. 2009년에는 어린이 독서모임을, 2010년에는 성인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 자발적인 모임이기에 구성원들은 수시로 변동되었다. 매월 같은 책을 한두 권 읽고 토론을 했는데,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15명이 넘어설 때도 있었다. 꾸준히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 하셨다. 모임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업그레이드되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내공을 키운 나는 어린이 독서모임의 진행자가 되었다.

 

2012, 인터넷 서점에 리뷰를 써보는 건 어때요? 독서모임 3종 세트에 매달 두 권 정도씩, 최소 5~6권의 책을 읽고 토론 자료를 제작하는 데 슬그머니 지쳐갔던 내게 선생님은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의 리뷰를 시작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서재에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책이 자꾸 자신을 만나게 한다.’던 작가의 말처럼 지금까지 100편의 리뷰를 올리며 100번 이상의 나를 만났다. 걸어오는 중간에 시에 매료되어 오늘까지 349편의 시를 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품게 되었다.

 

빛은 매질을 경계로 굴절한다. 내 삶은 선생님을 만나고, 450여 권의 책을 매질로 만나면서 서서히 바뀌어가며 빛이 났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은 멀고, 그보다 더 먼 길은 발바닥까지 가는 길이라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돌아보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어둡고 소외되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다가갔다. 둘째 아이와 촛불을 들며 구호를 외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당당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아직은 발바닥만 가끔 들썩일 정도로 많이 부족하지만, 머지않아 마음 가는 곳으로 용기 있게 뛰어갈 날이 올 것이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고 한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나는 나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2017. 5. D수기 공모전(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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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1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1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