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평점 :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키보드 위에 놓인 양손은 1시간째 멈춰있다. 텅 빈 모니터. 쓰나미 직전, 바닷물이 빠진 해안가처럼 고요하다. 커서만 깜빡이는 모니터와 책 표지에 있는 한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다. 따스한 눈길로 바깥을 응시하는 주름이 깊다.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것 같아서 목에 걸린 건 아무것도 없는데 숨을 편하게 쉴 수가 없다.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역사나 정치 분야의 뉴스는 당연한 듯 삶에서 걸러졌다. 학창 시절에 근현대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교과서가 유일했다. 그마저 시험이 끝나면 대부분 증발되는 지식에 불과했다. 선택의 영역이라 여겼다.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이념이나 사상 따위는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태극기를 자신 있게 펄럭이는 어버이도, 피켓을 들고 마주 서는 효녀도 아니지만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상은 자유이니. 다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마찰음이 문제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움찔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엉거주춤하게 서성인다. 시간이 지나면 들썩이던 마음은 용수철인양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념에 있어 중간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안다. 침묵은 강자에 편승한다는 암묵적인 동의임도 잘 안다. 모르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에 더욱 쪼그라든다.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이다. 읽어가는 책이 늘어갈수록 팔이 조금씩 반대방향으로 꺾이는 듯하다. 언제쯤이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 소심함을 넘어서는 용기의 임계점은 얼마만큼 일까.
이런 나라서 노혁명가의 삶을 마주하고 함부로 뭐라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물컹거리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무슨 말이든 써보려 한다. 심장언저리를 쿡쿡 쑤시는 껄끄러움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역사와 정치에 관한한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관심과 지식을 지녔던 내게 이 책이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를. 390페이지에 담긴 한 인간의 역사가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흔들어놓았는지에 관하여. 더듬더듬 움직이는 손가락이 여전히 무겁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비전향 장기수로 36년이나 투옥되었던, 1920년에 태어나 2010년에 생을 마감한 혁명가 허영철. 그가 2006년까지 구술한 자서전과 인터뷰가 담긴 책이다.
평상시의 속도라면 완독하는 데 몇 주 이상은 걸릴 터였다. 휘리릭 훑어보니 생소한 현대사적 사건들도 만만찮게 등장한다. 재미있는 소설도 아니고 각주도 많은 이 책을 한 달 내로는 읽을 수 있을까. 첫 장을 펼치고 아득했다. 일러두기를 읽는 순간 괜한 우려였음을 알았지만. 자그마한 글씨에서 편집자의 정성이 묻어나왔다. 윤구병 선생님의 솔직한 추천사에 마음이 조금 더 당겨졌다. 그리 번잡스럽지 않게 현대사와 저자의 삶을 바라볼 수 있던 것은 세심한 편집의 역할이 컸다. 나흘 만에 책의 뒷날개를 덮었다.
소위 공산주의자가 쓴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좌파라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책은 간혹 접했지만, 작가의 이름 앞에 붙은 비전향 장기수라는 수식어는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벽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야 한다며 과격하게 주장하는 내용들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한동안 책꽂이에만 꽂아놓았다. 가볍게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막연하게 무섭기도 했다.
오랜 망설임을 지나 선입견을 안고 펼쳐든 책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던 걸까. 인민, 동무, 공산주의, 노동자, 북한, 빨치산, 전쟁, 당과 같은 낱말에서 이물감을 느꼈지만 내용은 의외로 술술 읽혔다.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낯설었다. 곳곳에서 배어나오던 따뜻함에 혼란스러웠다. 책에도 온도가 존재한다면 이 책은 36.5도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이념과 역사의 의미와 자신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공산당에 대하여 최초로 썼던 글은 이승복 어린이와 관련된 산문이다. 다니던 국민 학교에서는 매년 반공 글짓기 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시작하는 문장을 썼던 기억이 있다. 상을 받고 뿌듯했던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체제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반공방첩을 당연한 이념으로 여겼던 시절이었다.
1976년, 국민 학교를 입학했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어린이였던 나에게 공산당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은 절대적이었다. 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채 거리를 배회하고, 당을 배신하는 사람들은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 줄 알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빨갱이, 공산당은 기다란 총을 들고 군복을 입고 도끼로 사람을 내리치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6월 즈음 며칠 동안 최루탄 냄새를 맡으면서 시내를 통과하는 통학 버스를 타고 다녔다. 1987년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그날들의 의미를 알았다. 기록된 역사로 내 삶 가까이 다가왔던 유일한 경험이었다.
교과서 밖에서 근현대사를 접한 기억은 영화 몇 편이 대부분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북한군과도 끈끈한 정이 오갈 수 있음이 낯설었다. 10.26의 역사적 의미도 모른 채 <그 때 그 사람들>을 보았다. 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줄로만 알았다. 칙칙한 내용은 섬뜩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5.18을 사태로만 알고 있던 내게 <화려한 휴가>는 충격 자체였다. <작은 연못>에서 적나라하게 구현된 전쟁의 참혹함은 한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동주>에서는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았다.
조금씩 의구심이 일었다. 옳다고 믿어왔던 사회에 이면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뉴스로 보도되는 카메라 밖 세계에 다른 풍경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안다고 생각하는 체제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허영철의 기나긴 여정을 통해 한국의 역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사상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올곧게 걸어온 이의 일생은 얼마나 묵직하고 깊은가. 역사와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모습이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양치기 할아버지와 겹쳐진다. 스스로 특별하지 않다 말하는 겸손한 걸음이 존경스럽다.
그의 말처럼 6.25가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구술 역시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이니 100% 옳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지배자가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상에도, 진정한 혁명이란 민중에게서 시작된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바탕에는 사람이 있어왔다는 것을. 말로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한 영혼의 결이다.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민주주의냐는 상관이 없었다. 이념의 바탕에 무엇이 자리하느냐로 판단할 문제였다.
각주와 표에 나온 각종 포고문도 꼼꼼히 읽었다. 본문만큼이나 시선이 갔다.
동일한 역사를 바라보는 남과 북의 시각 차이를 비교하는 각주가 흥미로웠다. 같은 입장을 취할 때에는 반가웠다. 무조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해석에서는 남측의 서술에 마음이 기울 때도 있었고, 북측의 서술이 와 닿을 때도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서와 각 측 대표의 포고문에는 교과서로 접하지 못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균형이 맞춰지는 듯 했다.
난 이제껏 뭐했나 싶어. 갑자기 한숨 섞인 메시지가 온다. 나이 오십인데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어. 우울해하는 친구를 애써 위로하지만 흐물흐물한 화살처럼 설득력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허영철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연표를 보니 화산대와 지진대와 판 경계가 떠올랐다. 3가지가 표시된 세계 지도를 투명한 OHP필름에 복사하여 겹치면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1919년부터 2005년까지의 남북의 한국사와 개인의 연보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 역사와 겹쳐져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역사는 한 번도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역사를 향해 용기 있게 뛰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릴 때 이산가족상봉 인터뷰가 TV로 중계된 적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산당의 탄압을 받아왔다면 그때까지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없어야할 것 같아서였다. 북녘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북한보다 남한의 GNP가 높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마주이야기에서 했던 그의 답에 여운이 남는다. 잘 산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부탄을 떠올린다. 경제력이 삶의 모든 면을 대체할 수 없음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사는 걸까.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겠다.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뉴스로 정치면이 북적인다. 그가 살아있다면 역사적인 이 장면을 무어라 표현했을까. 감격에 겨운 가족들이 50년만이다 70년만이라며 울먹인다. 그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몇 십 년 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남과 북을 떠나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이다. 인터넷 뉴스를 꼼꼼히 정독하는 내 모습이 멋쩍으면서도 묘하다.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바라볼 때 사람들에게는 저울이 하나씩 주어진다. 지금 나는 저울의 어느 지점을 붙들고 있나.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점점 균형이 맞추어지는 느낌이다.
작가가 언급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력들을 보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생각한다.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는 기분이다. 역사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그냥 흘러가는 역사는 한순간도 없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며 관점을 지닌다고 하워드 진은 말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기록되는 역사는 다만 펜을 쥔 자의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역사도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삶의 총체라 생각하니 역사의 영역이 확 넓어진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념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맞고 사회주의가 틀리다 말하지 못한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이념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절대적으로 옳은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를 뿐이다. 다가올 미래의 역사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이념이 정립될지 모를 일이다.
나침반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자침은 다른 각도로 움직일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나침반을 동시에 들고 있는 장면을 상상한다. 자침은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역사나 이념도 이런 것이 아닐까. 제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듯 보여도 결국은 한 곳을 향하게 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한결 가볍다.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한 방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심에 사람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겠다.
* 2018. 8. H독후감 공모,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