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두 번째 산이었어! 간이 밥상 위에 낙엽처럼 수북하게 쌓인 캐러멜 봉지들이 반짝인다. 희열에 찬 눈을 번득이는 남자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으로 찌릿한 손끝을 문지른다.

 

끔벅끔벅 눈뜰 때쯤 창문 너머로 간간이 들리는 철벅 철벅 발소리. 젠장! 오늘도 공쳤군! 짐작은 했다. 사흘째 이어지는 장맛비다. 일을 못 나간 지가 사흘째라는 말이다. 일하지 않으면 배가 덜 고파야 하는데 어찌 된 게 일하지 못하는 날은 텅 빈 뱃속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니 환장할 노릇이다. 일찍 일어나면 하루 두 끼만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애매한 끼니를 때워야겠어. 그는 다시 잠을 청한다.

서너 시간은 지났을 법했지만 사위는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얼마간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던 그는 이불을 발치로 밀어낸다. 빗소리에 섞여 들어온 흙냄새로 코끝이 간질거린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싱크대 위 수납장을 연다. 덩그러니 놓인 라면 두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좁은 반지하 공간에 놓인 자신의 처지가 라면 봉지와 겹쳐지며 입안이 껄끄러워진다. 오늘은 한 개로 버텨 보아야겠어. 내일도 끼니가 될 라면 사리 한 개를 꺼내어 반으로 두둑 뽀갠다. 봉지를 부욱 뜯어낸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싱크대 아래쪽을 뒤적거려 유통기한이 작년이던 후첨 양념 수프 봉지 하나를 북 뜯다가 그는 후두둑 가루를 흘리고 만다. 이런! 절반은 이따 써야 하는데. 낭패한 얼굴로 물 끓는 냄비의 불을 얼른 꺼버린다. 가루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물기 없는 부위에 떨어진 가루를 집게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눌러 수프 봉지에 도로 담는다. 그러다 뾰족한 산처럼 물결치는 끄트머리에 표시된 작은 삼각형 화살표와 뜯는 곳이란 세 글자를 발견하게 된 거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가장자리로부터 두 번째 산이 있는 위치이다. 그곳에서 두 개의 산이나 지나친 곳이 뜯겨있다.

아까 뜯은 라면 봉지를 살펴본다. 뜯는 곳, 글자는 없지만 무심코 뜯었던 흔적을 살펴보니 역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산이다.

주변을 휘 둘러본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가 줬던 미니 파이 봉지가 베갯머리에서 뒹군다. 얼른 집어서 봉지를 앞뒤로 살펴본다. 뜯는 곳, 글자가 있다. 삼각형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가장자리에서 두 번째 산이다. 조금 망설이다 봉지를 뜯는다. 제조회사에서 지정해준 장소이니 짐작대로 깔끔하게 뜯긴다.

 

입에 들러붙은 미니 파이의 파편을 혀로 핥은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눈에 띄는 곳에 뜯을만한 봉지는 없다. 세 번이나 반복된 두 번째 산은 허기짐을 호기심으로 바꾸어놓는다. 아하! 불현듯 뜯을 만한 봉지가 떠오른다. 라면이 동났을 때 아껴서 빨아먹으려고 두었던 땅콩 캐러멜 무더기를 싱크대 위 수납장에서 주섬주섬 꺼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다란 봉지를 버리지 않는 건데. 확인할 대상 하나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 낱개로 싸인 땅콩 캐러멜의 작은 봉지를 앞뒤로 샅샅이 살펴본다. ‘뜯는 곳이란 글자가 없다. 위치를 지정해주지 않은 땅콩 캐러멜. 짐작이 가는 뜯는 곳이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캐러멜 한 개를 집었다 놓았다 서너 번 반복한 그는 이윽고 결심한다. 엄지와 검지, 양 손톱 끝으로 봉지를 잡고 두 번째 산을 지난 골짜기 부근을 조심스럽게 뜯는다. 맞았어! 땅콩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껍질을 반 바퀴 돌려 다른 귀퉁이를 뜯어본다. 깔끔하게 뜯긴다. 더 확인하고 싶다. 다른 봉지를 뜯어본다. 역시! 캐러멜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그는 다음 봉지를 집어 든다.

 

내용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적절한 시작점을 발견한 그는 진득하게 둘러싼 삶의 봉지에서 탈출한 캐러멜인 듯 희열마저 느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는 자전거처럼 봉지를 뜯는 그의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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