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햇살은 입자성을 띠고 있을 거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잘한 비눗방울처럼 통통 튀는 햇살이 방울방울 흩날릴 것 같은 날이었다. 빛은 이중적이라던데. 어떨 때 파동성을 띠고 어떨 때 입자성을 띠는지 과학적으로 복잡한 원리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봄 같은 햇살이었다. 봄 같은 공기가 출렁거리며 간간이 봄을 닮은 바람을 만들어냈다. 해동된 듯 흐물거리는 가로수 사이로 손가락으로 찌르면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푹 들어갈 것 같은 자동차들이 느린 화면으로 지나갔다.

 

~ 날씨 앱을 한 번 보고 나올걸. 옷을 갈아입고 나올까. 오리털 패딩에 머플러를 칭칭 동여매고 길을 나선 그녀는 아파트 경비실 옆에서 주춤했다. 잠시 망설이다 머플러만 느슨하게 풀고 계속 걸었다.

느슨해진 옷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한 시간 뒤의 그녀는 와르르 풀어진 감정의 끈을 거슬러 올라와 처음 길을 나설 때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시작은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뺨에 흘러내렸던 빛의 감촉이 너무 따스해서였는지도.

 

부드러운 바람을 뺨으로 느끼며 천천히 걷던 그녀의 마음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심장에 동결건조된 건더기 수프처럼 쪼그라들어있던 생각이 물속에라도 들어간 듯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봄 같아서 좋아. 여름을 닮은 뜨거운 열정은 부담스럽고 가을은 쓸쓸하고 겨울은 추워서 싫은데 그 사람은 꼭 봄 같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해서 좋아.

봄이라는 욕조에 마음을 푹 담갔다 빠져나온 사람처럼 약간 상기된 얼굴의 그녀는 과거의 그를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봄에 빠져있는 동안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관계는 계절처럼 변화한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계속될 줄 알았던 봄은 낭떠러지 같은 겨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변화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둔감했던 그녀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조금씩 변해가는 온도를, 조금씩 증발해버리는 빛의 입자들을. 계절이 바뀌는 임계점을 놓쳐버린 걸지도 몰랐다. 변화의 원인조차 희미해진 관계의 끈을 붙들고 있는 그녀의 눈에 결과가 또렷이 보였다. 선명한 현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오히려 봄에는 이런 상념에 젖어 들지 않았다. 겨울의 한복판에 갑자기 봄이 머무르는 날,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것 같은 날이면 그녀는 불 꺼진 성냥을 들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가 되곤 했다. 처량함과 서러움이 조금씩 섞인 마음을 품고 어정쩡한 공간을 서성였다. 빛의 파동에 실려 그럭저럭 견디다가도 입자의 감촉이 끼어들면 이글루의 에스키모인처럼 한기에 무감각했다가도 고요하게 잠재웠던 마음이 다시 들썩였다. 빛의 이중성처럼 과거와 현재의 그를 한꺼번에 불러와 온도 차를 감지하며 목적지 없이 마냥 먼 곳을 응시한 채 걷고 또 걸었다.

 

관계를 계절로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을지 모르지. 법칙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씨앗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언젠가는 다시 싹을 틔울 거라고?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 봄 같던 그가 다시 올 거라고? 뭘 기대하는 거지? 뭘 기다리는 거야? 애초에 계절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억지를 부리는 거잖아.

봄이었던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녀의 마음이 쟁반 위에 놓인 과일 껍질처럼 조금씩 말라갔다. 여전히 봄빛을 닮은 공간 속으로 으슬으슬한 기운이 스미는 것 같아 그녀는 머플러를 다시 동여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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