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질>

 

오늘 아파트 화요장인데 귤 살까요?”

위 문장의 직역은 오늘 귤 살까이고, 의역은 난 당신에게 뭐든 말을 걸려고 용을 쓰는 거야. 귤은 다만 거들뿐. 귤인들 수박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이다.

남편이 답한다.

미니 저번에 귤 보니까 잘 안 먹더라. 딸기만 사면 될 것 같은데?”

위 문장의 직역은 미니 저번에 귤 보니까 잘 안 먹더라. 딸기만 사면 될 것 같은데.’이고, 의역은 없다.

 

진공에서 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매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귤을 매개로 내 마음의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닿기를. 언젠가는 어떻게 좀 해보자는 의역이 담긴 말이 내게도 닿기를.

 

<뒤집히는 목소리>

 

진성과 가성의 경계, 그 살짝 뒤집어지는 목소리가 나는 너무 좋다. 으어? 라고 꺾이는 부분 말이다. 은근히 매력적으로 들리는 포인트가 있다. 냉철과 섹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이성과 감성의 테두리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함이 느껴진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듣던 노래. 제목도 가사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1초 정도 뒤집힐 때 꽂히던 두근거림이 기억난다.

 

<무시일까 배려일까>

 

일찍 퇴근하는 날, 남편은 종종 라면을 끓여먹는다. 반찬이 주로 김과 김치, 김가네이지만, 냉장고에 멸치나 다른 반찬 몇 개가 장착된 날에도 여전히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멀쩡한 밥과 멀쩡한 아내를 두고도 혼자서 라면을 끓여먹는 멀쩡한 남편을 관찰해오던 나는 이쯤에서 두 가지 추론을 한다.

 

첫째, 나에 대한 도전 혹은 내 존재를 무시하는 액션일까?

둘째, 직장 일에 푹 절여진 아내를 생각하는 인간다운 배려일까?

 

두 가지 해석 사이에서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간혹 아침에 남은 국이 있어 데워줄까요?” 물으면 .”이라고 답하긴 하는데. 바라는 정답을 우기기에는 다소 근거가 비루하다. , 좀 더 관찰이 필요하다.

 

<몹시 궁금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나는 주변의 물건을 정리한다.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고, 옷이 담긴 서랍을 정리하고, 수건의 줄을 맞추고, 싱크대 수납장에 쌓인 라면 봉지의 무늬를 맞춘다. 정리를 다 하고 나면 정돈된 물건들 사이로 상큼한 기가 흐르는 듯해서 기분도 덩달아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매듭이 꽉 묶인 채 헝클어진 관계도 술술 풀어질 것만 같아서. 아마도 무의식 속에는 그런 바람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남편과 나는 성향이 다르다. 나는 주방 싱크대 수도꼭지를 샤워기처럼 분무되게 만드는데, 그는 매번 물줄기를 가래떡으로 바꿔놓는다. 나는 무질서를 참지 못하고, 그는 먼지를 견디지 못한다. 나는 물건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집어넣고, 그는 마당에 깨 널 듯 물건들을 쫘라락 펼쳐놓는다. 신발을 정리할 때 나는 나가기 쉽게 문밖으로 향하게 놓고, 그가 정리한 신발은 집안을 향한다.

 

이랬던 남편이 요즘 조금씩 정리를 하고 있다. 냉장고 위 칸에 있던 본죽에 딸려온 동치미 통 3개가 사라졌다. 식탁 위 쟁반에 놓인 귤들을 주황색 계란 판으로 탈바꿈시켰다. 냉장고 식자재를 정리하는 건 쓰레기를 버리는 개념이니 이전부터 있어왔던 거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수상한 건 줄지어 놓인 귤이다.

 

그래서 궁금한 거다. 정리를 하는 당신의 무의식에 담긴 이유가 몹시도.

 

<생각 고정>

 

이를테면 질소고정같은 거다. 떠다니는 생각들을, 반복되는 생각들을 글로 가두어 내 눈 앞에 새겨버리는 것. 지우가 포켓몬에 몬스터를 가두 듯, 마법사가 호리병 안에 작은 악마를 가두 듯, 내게서 나오는 온갖 의심과 번뇌와 지질하고 못난 마음들을 이 공간에 묶어두고 싶다.

 

똑같은 얘기를 매번 쓸 수 없으니 그런 생각들은 여기에 새겨놓고 예쁜 생각, 즐거운 생각, 환한 생각들을 잔뜩 하려고. 내 안에 머물던 묵은 더께 같은 생각들을 이제는 쓱쓱 밀어서 없애버리려고. 그래서 보송보송하게 말간 마음으로 당신 앞으로 다가가려고. 수시로 드나드는 생각들을 수시로 붙잡아 이 공간에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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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액션 2019-09-08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시와 배려도 아닌 그냥 라면을 좋아하시는 것 그이상 그이하도 아닌것 같아요...남자들은 단순하답니다...때론 머릿속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남편분을 보세요..정답이 보일수도 있어요^^

나비종 2019-09-08 09:20   좋아요 0 | URL
헉! 제가 이제껏 제3의 선택지를 생각지 못했군요. 완전액션님의 댓글을 보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 감사합니다. 시야가 확 넓어졌어요. 사실 현상을 그대로 관찰하고 인지하는 게 가장 기본이 되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말이죠.^^;